MTV 세대는 아닌 내가 뮤직비디오를 가장 많이 본 곳은 노래방이었다. 노래를 선곡하면 그 당시 최신 알고리즘을 통해 뮤직비디오가 재생됐는데, 그 영상들의 대부분엔 조폭이 등장하거나, 조폭이 아니라면 행복밖에 몰라 보이는 젊은이들이, 그조차 아니라면 맥락 없는 자연이 펼쳐지곤 했다. 그것을 보며 '플라이 투 더 스카이' 흉내를 내고, '아웃사이더'에 근접한 속도까지 도달하기 위해 차력을 하고, 가끔은 화면 속 조폭에 빙의해 이 세상 최고의 마초가 되곤 했는데, 어느 순간 그런 질문이 떠올랐다. '뮤직비디오'가 뭐지? 뮤직? 비디오? 말부터 이상한 이 단어는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더 황당했는데, 그 황당함은 'Kanye West'의 값비싼 뮤직비디오를 봐도 마찬가지여서, 그냥 뮤직비디오란 게 그런 건가 보다 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후, 20대 중반부터, 일주일에 서너 번 씩 극장에 갔다. 영화가 좋았던 날엔, 극장 밖으로 나오자마자 방금 본 영화의 O.S.T를 찾아 재생했고, O.S.T를 들으면 조금이라도 더 영화 속에 머무를 수 있었다. 음악이 영화를 다시 불러냈고, 음악과 영화가 잘 어우러져 공존하고 있음을 체감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날들이 반복되자, 오랜 시간 그냥 받아들이고 말았던 황당함이 다시 떠올랐다. 뮤직비디오.. 영화와 O.S.T는 좋은데.. 그건 대놓고 뮤직과 비디오를 함께 두었는데.. 왜 황당했을까.. 하면서 말이다. 영화와 O.S.T가 황당하지 않은 건, 서로에게 가닿기 위해 노력한 흔적을 발견했기 때문일 텐데, 그렇다면 그런 노력을 하는 뮤직비디오는 없을까 궁금해졌고, 이 생각을 나만 했을 리가 없으니, 누군가는 그런 근사한 뮤직비디오를 이미 만들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 와중에 '유성원'의 <We are the same>을 만났다. 그의 뮤직비디오를 통해 'Salamanda'의 음악이, 완전히 새롭게 다가왔을 때, 내가 고대했던 뮤직비디오가 바로 이것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전화기를 집어 들었고, '유성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1월이다. 연말이 바빠 우리가 만나는 것도 조금 미뤄졌는데, 연말 연초를 어떻게 보냈나
정신없는 연말이었다. 지금 일하고 있는 회사가 감독님이랑 같이 일하는 회사인데, 새로운 프로젝트들을 하게 되면서 정신없었다. 해가 바뀔 때 카운트다운 같은 거 하지 않나. 옛날에는 했었던 거 같은데, 올해는 세수하고 나왔더니 이미 00시 03분이더라. 올해를 세수하며 맞이했다
세수하며 깨끗한 마음으로 올해를 시작했다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작년은 30대로 보내는 첫해였다. 20대 때와 달라진 게 있었나
스물아홉에서 서른 되는 게 별 타격은 없었다. 9에서 0으로 넘어가는 게 좋더라고. 30대 중에 제일 막내? 그런 느낌이었다. 20대말에는 내가 20대 때 뭘 했나 하는 부담감도 있고, 대학 졸업 후 사회초년생을 지나며 약간 그런 건 있었는데, 스물아홉은 그냥 내가 그렇게 보냈나 보다 했다. 스물아홉 때가 회사 생활을 3년째 한 시기라 리프레쉬가 필요하긴 했다. 마케팅 일을 할 때 내 업무의 비중이 기획에 많이 가 있었는데, 기획은 페이퍼-워크가 많은 부분이라, 제작팀에서 하는 일들을 항상 하고 싶어 했다. 서른으로 넘어오면서 예전부터 함께 하고 싶었던 감독님과 작업하게 됐는데,, 설렜다.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일을 하게 되는구나’, ‘내 인생이 좀 바뀔 것 같다’ 그런 생각들을 했다. 그전까지는 일하면서도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게 아닌 거 같은데?’ ‘뭔가 바뀌어야 맞는 거 같은데?’ 등등의 생각을 많이 했었다. 그런데 30대가 되고, 지금 하는 일로 넘어오면서, 저런 고민을 덜 하게 됐다
추워지나 추워지나 하다가도 포근한 겨울이 계속되고 있다. 겨울을 좋아하나? 난 추운 날씨를 좋아하진 않지만, 또 막상 겨울인데 쨍한 추위를 아직 느끼진 못 한 점은 괜히 아쉽기도 하더라
원래 겨울을 좋아하는 편이다. 옷도 레이어드 할 수 있고, 찬 공기가 맴도는 것도 좋다
당신 작업의 대부분이 뮤직비디오니까, 겨울에 생각나는 노래가 있는지도 얘기해 보고 싶다. 난 ‘조동진’의 <겨울비>, ‘김현식’의 <눈내리던 겨울밤>, ‘들국화’의 <하나둘씩 떨어져> 같은 노래들이 생각난다. 말하고 보니 세월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잠재된 쓸쓸함과 나아감의 공존이 겨울에 대한 나의 인상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워낙 다양한 걸 듣는 편이라 겨울에 집중해 듣는 노래가 있거나 그렇진 않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미지를 만드는 사람이니까, 겨울에 시선이 많이 가는 것엔 무엇이 있나
영상엔 많은 종류가 있지만, 난 영화적인 걸 추구하는 편이다. 풍경이나 자연에 눈이 많이 가고, 원경에서 찍은 이미지를 좋아한다. 마른 나무, 앙상한 가지, 잎이 다 떨어진 나무들로 이루어진 숲, 그런 이미지들이 떠오른다. 보는 것도 좋아하고, 담는 것도 좋다
그런 이미지를 만나면 어떤 마음이 생기나
사진 수업을 잠깐 들은 적이 있다. 일주일에 한 번 모여 각자 찍은 사진을 발표하고, 의견을 공유하는 수업이었다. 그때 같이 했던 작가님이 ‘성원 씨 사진은 냉한 사진이 많은 것 같다. 차가워 보이는 이미지가 많은 것 같다.’고 하시더라. 처음엔 이해를 못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깨져있거나, 버려져 있는 물건, 앙상한 가지, 그런 것들을 좋아해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게 아닌가 싶다. 굳이 따뜻한 걸 피하진 않지만, 내가 끌리는 건 그런 쪽이 맞다
관련해서 떠오르는 영화도 있나
고전이지만, <장화, 홍련>을 좋아한다. 그런 이미지들을 좋아한다. 날카롭거나 차가운 느낌. 그 영화는 음악도 너무 좋고. 집의 벽지 디자인이나, 최신식이 아닌 드레스, 원피스가 등장하는 의상도 좋다. 그 영화는 집 안에서 인물들이 계속 대립하고, 긴장하는 느낌인데, 그런 것들이 좋았다
‘임수정’이 연기한 ‘수미’가 걸어가는 갈대밭을 생각하면 당신의 <We are the same> 속 갈대밭이 떠오르기도 한다. 작품 얘기는 조금 있다 하기로 하고, 우리는 지금 퇴근하고 만났다. 각자 작업하는 것 외에도 다니는 직장이 있다는 건데, 나에게 회사는 맡은바 성실히 임해 돈을 버는 수단이고, <대화록>은 본능적인 진심과 마음이 훨씬 많이 담긴 공간이다. 당신에게 직장과 작업은 어떻게 구분되나
광고대행사에서 인턴으로 일했던 적이 있다. 매일 야근하고 그런 게 너무 힘들더라. 그리고 나선 나의 관심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칼퇴할 수 있고, 그렇게 버겁지도 않은 회사를 6개월 정도 다녔다. 거길 다니면 회사에서 번 돈으로 내가 하고 싶은 것에 시간을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내가 나를 잘 몰랐던 거지. 돈만 벌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막상 그렇게 해보니, 하루 중 아홉 시간을 보내는 곳이란 건 변하지 않는데, 내가 전혀 흥미를 못 느끼는 일을 하고 있으니, 더 힘들더라. 그래서 힘들긴 했지만, 재미는 있었던, 대행사로 다시 돌아갔다. 나 역시 돈을 벌기 위해 다니는 회사이지만, 대충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으니 그랬을 거다. 하지만 또 회사에서 나의 욕구를 실현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 역시 분명하게 느껴서, 그건 개인적인 작업이나, 다른 아티스트와의 협업을 통해 풀어낸다. 그런 작업들이 나에게 활기를 주고
대화를 나누기 전 당신에게 미리 어떤 얘기를 나누면 좋을지 물었었고, 그때 당신은 일과 작업을 병행하는 게 어렵다고 말했다. 그 어려움은 어떤 것에서 발생하나. 어렵다는 당신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난 그 병행이 어렵지 않고, 오히려 내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얘기해보고 싶었다. 어렵지 않고, 도움이 된다는 건, 일함으로써 작업을 통해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때문에 내 작업에 더욱 집중할 수 있다는 얘기다
내가 회사에서 돈을 벌기 위해 일하고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작업을 본업으로 삼고, 내가 회사에서 일하는 시간만큼을 현장에서 보내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나에게 불안감으로 다가왔다. 나는 프로젝트를 해도 그들만큼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으니 조바심이 나기도 했고
그 불안과 조바심에는 당신 역시도 작업을 본업으로 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 걸까
맞다. 그걸로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이 있지. 옛날에는 그랬다. 이걸로 돈을 벌기 시작하면 내가 하고 싶은 영상뿐만 아니라, 내가 하기 싫은 영상도 해야 하는데, 그럼 내가 지칠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물론 지치는 순간이 올 순 있겠지. 그럼에도 그 과정에서 또 배우는 게 있을 테니까, 그렇게 배운 걸 개인 작업으로 끌고 올 수 있는 거고. 그렇게 하루하루의 루틴을 쌓다가, 언젠가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 되는 거니까. 지금 이렇게 생각하다 보니, 물론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돈도 버는 게 베스트이긴 하겠지만, ‘일단은 작업을 업으로 삼아야 하는데..’ 하는 불안이 있다
병행의 어려움과 더불어 또 하나 당신이 나누고 싶다 했던 얘기는 스트레스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 스트레스의 예시를 좀 들어볼 수 있을까. 역시나 병행에 대한 것인가? 아니면 작업자로서 당신이 작업 과정에서 느끼는 스트레스인가
병행에 대한 얘기도 물론 맞지만, 그 얘기는 앞서 다 한 것 같다. 작업 과정에선.. 하나를 할 때 내가 너무 많은 가지치기를 한다. 걱정도 많아서 플랜 A, 플랜 B, 플랜 C 이렇게 계속 계획을 세워야만 마음이 편하다. 회사 일도 그렇고, 작업도 그렇고, 준비 과정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크다. 주변의 작업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렇게까진 하지 않는 거 같은데.. 나는 한편을 할 때 너무 다 쏟으려고 하니까, 작업물이 나오는 주기도 띄엄띄엄해진다. 이런 스트레스를 다른 사람 역시도 받는데 아닌 척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나만 그런 건지, 그런 스트레스를 어떻게 덜어낼 수 있을지 고민이다
물론 작업 스타일의 차이일 거고, 그게 아니라면, 비교적 여유가 있어 보이는 사람은, 이미 그 과정을 통과한 사람일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제대로 된 태도로 작업하는 사람이라면 그 과정을 필수적으로 지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 시기를 안 지나고서는 여유로 진입할 수가 없는 거지. 여유란 게 다 뭔가. 여유란 건 결국 신뢰와 관련된 것일 텐데, 그 신뢰는 실력과 경험에서 오는 거니까. 그렇다면 그 치열하고, 불안한 과정을 통해 실력과 경험을 쌓아야만, 자기 자신의 실력과 경험에 대한 신뢰와 그에 따른 여유를 획득할 수 있는 것 아니겠나. 허무하지만, 뭐 당연한 과정인 거지. 잘 하고 있는 과정인 거고. 계속 스트레스받았으면 좋겠다는 건 아니지만.. 넘어가자. 뮤직비디오 얘기를 해볼 건데, 뮤직비디오 만드는 사람이라고 ‘유성원’을 정의해도 괜찮을지 조금 망설여지긴 한다. 그 까닭엔 아마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뮤직비디오에 관한 정의 때문이 아닐까 싶고. 내 생각을 말하기 전에 당신의 정의를 먼저 들어보고 싶다. 뮤직비디오가 뭔가
뮤직비디오는 그 음악을 듣고 느낀 걸 영상으로 풀어낸 거겠지. 물론 음악을 만든 사람의 의도도 중요하긴 한데, 내 영상엔 나의 해석이 좀 더 많이 들어간다. 그 음악을 듣고 다른 사람이 A를, B를, C를 느꼈을 때 나만 느낀 D를 영상으로 꺼내놓고 싶은 욕심도 있다. 남들이 아무도 하지 못한 특이한 걸 하고 싶다는 얘기가 아니다. 비슷한 감정에 있지만, 나만의 것을 집어넣어 뒤틀고 싶다는 거다. 나를 설명하는 것에 대해선.. 나도 나를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이 되긴 하는데.. 그냥 이미지로 말을 하고 싶은 사람? 그렇게 나를 정의하고 싶다
어떤 영화를 보고 100명이 슬프다고 느꼈다면 그건 100개의 슬픔이 발생한 것일 테니까, 당신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다. 나에게 정리돼 있던 뮤직비디오는 뭐랄까.. 좀 심하게 말하자면 일종의 굿즈랄까. 음악의 2차 창작물로 늘 바라봤었고, 마지 못 해 만든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적도 많았다. 물론 간혹 정말 멋진 뮤직비디오를 발견하면 몇 번씩 돌려보곤 했지만, 그런 경우엔 또 음악이 영상의 배경음처럼 쓰였다고 느낄 때가 많아서, ‘그럼 이게 뮤직비디오라고 할 수 있나?’ 하고 생각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뮤직비디오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가 늘 어려웠다고 정리하는 게 맞는 거 같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이긴 하다. 음악을 만든 사람의 입장에선 음악에서 파생해 만들어진 것이 뮤직비디오 일 텐데, 영상을 만드는 사람 입장에선 뮤직비디오를 통해 음악이 발견되게 만들기도 하는 거니까
뮤직비디오를 보는 건 어릴 때부터 좋아했나
영화를 더 좋아하긴 했지만, 꾸준히 좋아했다
초등학교 때 본 것 중에, 중고등학교 때 본 것 중에, 20대에 본 것 중에, 그리고 최근 본 것 중에, 그렇게 시기별로 인상 깊게 봤던 뮤직비디오가 뭔지 궁금하다. 지금은 좋아하지 않는 거라도 괜찮고. 나부터 말해보자면.. 물론 지금 보면 말도 안 되지만, 초등학교 때 본 ‘조성모’의 <아시나요> 뮤직비디오가 생각나고, 중고등학교 땐 힙합에 미쳐있던 시기라 음.. 노래는 언더그라운드 MC들의 노래를 더 많이 들었는데, 그들의 뮤직비디오는 대부분 좀 구렸으니까.. ‘드렁큰타이거’의 <8:45 Heaven>이 생각난다. 20대 초반은 'E SENS'의 <Back In Time>, 그리고 최근에 본 것 중 가장 좋았던 건 ‘김일두’의 <뜨거운 불>이다. 그가 너무 즐거워 보여서 좋았다
어렸을 때는.. 그거? <벌써 일 년> 그 당시 내가 느끼기에 드라마 같고, 영화 같았다. 스토리가 녹여져 있는 걸 많이 기억하는 편이다. 물론 비주얼적으로 빵! 하는 것도 멋있긴 한데, 스토리가 좋으면 스토리 때문에 계속 뮤직비디오를 돌려보며 음악을 듣게 되니까. <벌써 일 년>은 그렇게 많이 각인됐다. 그다음은 ‘리쌍’의 <발레리노> 이게 스토리가 파격적이다. 스토리도 있지만, 비주얼적 요소까지 섞여 있어서 그때 많이 봤다. 20대 때는.. 'Oren Lavie'의 'Second hand lovers'의 뮤직비디오. 거쳐온 관계와 사랑이 어떤 흔적으로 남는지 비주얼로 잘 표현했더라. 회사 다닐 때는 ‘이래경’ 감독이 만든 ‘자우림’의 <있지>를 많이 봤다. 이래경 감독 뮤직비디오는 영화처럼 스토리가 딱딱딱딱 있는 건 아니고, 그냥 흐르듯이 지나가는데, 그 안에 스토리가 자연스럽게 녹여져 있다. 그리고 비현실적인 느낌이 딱 든다. 보고 있으면 그 속의 캐릭터가 너무 매력적으로 느껴지고, 보여주지 않는 앞뒤의 스토리가 궁금해진다. 나에게 만들고 싶은 뮤직비디오가 뭐냐고 묻는다면,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뮤직비디오라고 답할 거다. 하나의 스토리가 있을 때, 앞뒤 잘라버리고 요만큼만 보여줘서, 보는 사람들이 그럼 앞뒤는 어떻게 됐을까 하고 여지를 주는? 단순히 3분짜리의 뭔가를 만드는 게 아니라, 내가 전체적인 기획을 통해 스토리를 만든 다음, 그렇게 완성된 스토리를 집약 시켜 3분 안에 보여줬을 때, 그럼에도 한 편의 스토리를 느낄 수 있는, 그런 걸 하고 싶다. 그러다 보니 ‘이래경’ 감독의 뮤직비디오가 좋았고
최근엔 뭐가 있나. 아니면 올 타임 넘버 원도 좋고
‘이래경’ 감독 뮤직비디오가 비교적 최근 것이기 때문에.. 내가 ‘이와’ 감독님의 표현법을 좋아하는데, 감독님 작품 중에 ‘moi'의 <Feel Up>으로 작업한 뮤직비디오가 있다. 밤이고, 아무것도 없는 도로가 등장한다. 뻥 뚫린, 한국에 없을 것 같은 도로. 그 위에 어떤 여자가 서 있고, 여자의 뒷모습만 나오는데, 그 도로는 너무 깜깜하고, 양옆은 숲이어서, 여자 한 명이 거기 있는 게 안 어울리는? 뭐지? 왜 거기 있는 거지? 하게 된다. 그러다 그 여자가 천천히 걷기 시작하고, 카메라는 계속 쫓아간다. 계속 그렇게 쫓아만 간다. 잠시 후 여자는 뛰기 시작하고, 겉옷을 벗고, 뭔가를 피하려는 듯이, 뭔가를 가지려는 듯이.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계속 달린다. 그러다 중간 평온이 등장하기도 하고, 다시 도로가 나왔다가, 마지막엔 그 여자가 없는 도로가 다시 등장하는, 그런 뮤직비디오가 있는데, 단순한 플롯임에도 끌 수가 없다. 그걸 고르겠다
영상의 종류는 정말 다양하지 않나. 그중에서도 뮤직비디오를 찍어봐야겠다고 결정한 계기가 있나. 처음부터 뮤직비디오를 배우기 위해 관련 아카데미도 다닌 것으로 알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사진에 관심이 많았다. 물론 영화도 좋아했지만, 영화는 호흡이 너무 기니까. 내 성향이 끈기 있게, 지구력 있게, 무언가 하는 걸 힘들어하는 편이다. 심지어 영화를 볼 때도 나는 마음을 먹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이미지를 만들고 싶고, 이미지를 통해 말하고는 싶은데, 나의 성향이 있으니, 처음엔 사진을 선택했던 것 같다. 단 한 장으로 보여줄 수 있는. 그렇게 시작한 것이 확장된 게 뮤직비디오가 아닐까 생각되고. 짧은 구조이지만, 비주얼과 스토리를 다 담아낼 수 있고. 살면서 영화를 한 편쯤은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있지만, 영화만을 하고 싶어 했던 적은 아직 없다
뭐 영화와 뮤직비디오 사이 어떤 것이 더 위대하다 할 필요도 없는 거니까. 아무렴 어떤가. 멋진 작품을 만드는 게 중요하지. 그렇게 뮤직비디오를 배우기 위해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듣고, 수업 과제로 영상을 만들었던 과정 어디쯤에서, 어떤 뮤직비디오를 만들고 싶은지에 대한 정리가 좀 되지 않았을까 짐작해보게 된다. 아까 잠깐, 간단히 얘기해주긴 했지만, 조금 더 자세히 말해줄 수 있을까
만들면서 느꼈던 건, 내가 스토리에 집중하다 보니까 영상 자체가 설명적으로 되더라. 아카데미를 다니면서 설명을 좀 덜어내야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쉽진 않았다. 봤을 때는 쉽게 이해가 된다. 이 컷에서 이 컷으로, 저 컷에서 저 컷으로, 그게 다 이해가 되는데, 내가 막상 만들려고 했을 땐, 너무 많아서 설명적이거나, 너무 빼서 ‘이게 무슨 얘기야?’ 하게 됐다. 아카데미 과정은, 그 완급조절이, 다른 영상을 볼 때 느끼고, 알게 됐던 것만큼 간단하지 않다는 걸 깨닫는 과정이었다. 처음 만든 내 작품을 봤을 땐 내가 계속 이걸 해도 되나 생각하기도 했었다. 처음 만든 거니 당연히 그렇게까지 엄격할 필요는 없었는데, 내가 다른 작품을 보고 눈이 높아진 채로 내 걸 보다 보니.. ‘이딴 걸 만들었어?’ 하게 된 거다. 주변에서는 좋은 말을 많이 해줬는데, 나는 그 영상에 애정을 못 가졌다. 요즘 봐도 못 보겠다. 보긴 보는데.. 부끄럽다. 내가 너무 내 작품에 엄격하니까, 다른 사람은 어떤지 궁금하기도 하다. 자기 작품을 어떻게 사랑하는지
내가 그 다른 사람인데.. 내가 쓴 글을 나는 정말 좋아한다. 내가 쓴 글이 너무 재밌고. 이렇게 된 과정은 내가 글을 써온 과정에서 만들어진 게 아닐까 싶다. 난 글을 배운 적도 없고, 같이 쓰는 동료가 있었던 적도 없다 보니, 늘 스스로가 나의 글을 냉정하게 봐야 하는 독자였다. 물론 냉정하고 까다롭게 봐야하지만, 동시에 응원하며 아껴주는 독자이기도 해야 했고. 스스로에게 칭찬을 많이 해줬다. 그렇게 계속 칭찬해주다 보니, 그 칭찬에 부합하기 위해 더 고민하며 썼고, 그런 과정을 통해 지금의 내 글쓰기가 형성됐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그 칭찬에 어느 정도 부합했다고 스스로 느꼈는데, 그때쯤 여러 채널을 통해 내 글이 발행됐고, 좋은 피드백이 오는 걸 보면서 내 글을 좋아하게 됐다
자주 하고, 자주 보여주고, 그런 게 작업하는 데 있어 많은 도움이 된다. 누군가는 별로라고 하겠지만, 생각보다 사람들이 괜찮다는 말을 과감하게 해준다.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이 만든 영상 시사회를 가진 적이 있는데, 나는 시작 직전까지 수정하고 있었다. 망했고, 구리다면서. 근데 막상 보여줬더니 좋다는 반응이 많아서, ‘나 잘했나?’ 하고 생각하게 되더라. 어딘가에 보여줘 본 적이 없을 땐 스스로의 역량에 대해 계속 고민하게 된다. 하고 싶은 것과 잘하는 건 다르니까. 그리고 혼자 고민할 땐 부정적인 쪽으로 평가가 많이 이루어지고. 그런데 자주 보여주다 보면 좋은 반응을 받게 되고, 그게 또 힘이 된다. 자주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
당신의 뮤직비디오를 처음 본 건 ‘Salamanda'의 <We are the same> 비디오였다. 이것이 아카데미 졸업작품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처음 봤을 때 너무 좋아서 몇 번이고 돌려봤다. 좋다고 느낀 까닭은 내가 뮤직비디오를 정의하지 못 한 이유가 해결됐기 때문이었다. <We are the same>을 보면 음악이 비디오 같고, 비디오는 음악 같아서, 서로가 기분 좋게 흡착한 뒤, 하나가 된 것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뭐 당신에겐 아쉽기도 하겠지
이렇게까지 심화된 이야기를 들어본 게 처음이다. 물론 내가 만든 것에 대해 사람들이 말해주긴 하지만, 전반적인 감상을 들은 건 처음이라.. 뿌듯하네.. 갑자기 작업 하나 하고 싶어졌다. <We are the same>은, 곡을 만든 ‘Salamanda' 친구들의 의도는 분명 따로 있겠지만, 내가 만들면서 했던 생각은 헤매는 것에 대한 거였다. 모든 사람이 헤맨다. 주변을 보면서는 ’다 잘 해내고 있구나‘ 하게 되지만, 그들 역시 본인 스스로에 대해선 헤매고 있지 않나. 방향성, 선택, 하고 싶은 마음 등에 대해 찾고, 헤매고, 방황하는, 그런 이미지를 담고 싶었다. 그리고 모두가 그렇게 헤매고 있다면 우리는 결국 다 같은 거니까, 그걸 영상에 담으려 했다. 인물은 배회하거나 걷고, 소품으로 실이나 거울 등을 활용했다. 내가 옳게 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하고 싶어서였다. 옳고, 맞다는 생각으로 살지만, 우리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꼬이는 방향으로 자주 흘러가니까. 사람과의 관계 역시 결속력이 강하다 느꼈던 관계마저도 어느 순간 이질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으니까, 그런 것도 영상에 풀고 싶었고
영상과 음악의 흡착에 관해 내가 왜 그렇게 느꼈을까 생각해봤는데, 그건 아마 당신이, 만들려는 뮤직비디오의 음악을 깊게 좋아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더라. 좋아하니까 자주 들었을 거고, 그렇게 자주 들으면서 음악의 감수성, 리듬, 에너지 같은 것들이 이미 당신 몸에 배어 있다고 생각했다. 음악을 영상으로 풀어내기 위해 분석하고, 계산한 것이 아니라
나랑 ‘Salamanda'의 지민(sala)이는 고등학교 때 친구다. 같은 고등학교, 같은 대학교를 나왔다. 하지만 친해진 건 그 기관들을 벗어난 이후여서, 지민이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서로 음악 하고 싶다, 영상 하고 싶다 이런 얘기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지민이가 처음 DJ를 한다고 했을 때 ’뭘 한다고?‘ 그랬다. 사람들도 내가 영상하는 걸 보고 그랬을 거다. 둘 다 하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숨겨 놓고 혼자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자, 지민이가 더욱 궁금해졌다. 그래서 지민이가 인스타에 DJ 한다는 소식을 올렸을 때 말도 없이 찾아갔다. 음악을 다 틀고 내려온 지민이는 날 발견하고 당연히 놀랐는데, 그때 서로에게서, 하고 싶은 게 있었지만, 수면 위로 드러내지 않았던 혹은 못했던 마음을 발견하며 힘을 나눴다. 지민이도 음악을 시작하고, 꾸준히 해 온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음을 알게 됐고, 나 역시도 사진이나 영상을 하겠다고 말했을 때 집에서 반기는 분위기는 아니었기에, 그런 공통점을 통해 우리가 서로 닮아있다는 걸 느끼게 됐다. 그러면서 지민이가 하고 있던 ’Salamanda'의 음악을 소개받고, 듣게 됐는데, 너무 좋았다. 지민이가 분출해내는 걸 보며 나도 많이 자극받았고
'manda'에 대해서도 얘기할 게 있을까..? 혹시나 서운해할까봐..
예진(manda)이, 예진이는,, 하하하 예진이를 처음 봤던 건 'Salamanda'가 전시에 틀 영상이 필요해 나와 연결되면서다. 너무 쪼그맣고, 귀엽게 생긴 애가 ‘언니!’ 이러니까.. 얘 되게 밝구나.. 에너지가 넘치는구나.. 했다. 지민이랑 예진이랑 같이 있으면 느낌이 너무 다르지 않나. 지민이는 굉장히 차분한 느낌이고, 예진이는 통통 튀니까. ‘너네 둘이 만나서 그런 음악을 하는 거야?’ 했고, 예진이가 이런 장르의 음악을 한다는 것 자체가 새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자주 만나고, 친해지면서, 예진이가 얼마나 진지하게 임하고 있는지를 느끼게 됐다. 밝고, 장난기 많은 사람을 보면 본업에서도 그렇게 하지 않을까 할 수 있는데, 작업할 때의 예진이는, ‘Salamanda'에 대해 얘기하는 예진이는, 다른 위치에 있다. 멋있다. 그 둘의 태도를 너무 배우고 싶다. 둘이 의견 주고받고, 열심히 하는 걸 보면 가끔 부러울 정도다. ’나도 짝꿍 있었으면 좋겠는데..?‘ 하고. 서로의 협업자이며 동시에 감시자가 되는 게, 좋아 보인다. 나도 그렇게 일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그다음 본 비디오는 <赤咒(Crimson Trace)>였다. 그리고 이 비디오를 보면서 ‘유성원’의 세계가 더욱더 궁금해졌고. 어떤 과정을 통해 나온 비디오인지 나는 모르지만, 이걸 봤을 때 당신이 이제는 어떤 세계를 구축한 사람이라고 느꼈기 때문일 거다. 영상으로 만들어야 할 음악과 이야기가 있을 때, 그걸 당신의 세계에 한 번 빠트린 뒤, 건져 올렸을 때, 뚝뚝 떨어지는 음악이나 이야기가 당신의 영상으로 완성됐다고 느꼈다는 얘기다
이 영상의 음악은.. 허락받은 적은 없고.. 그냥 ‘류아치 사카모토’의 음악을 가져다 쓴 건데.. 아무튼, <赤咒(Crimson Trace)> 같은 경우엔 <We are the same>과 비교하자면 메시지가 훨씬 더 센 영상이다. 여성이 당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있지 않나. 여자들끼리 모여서 얘기해보면 그런 경험이 없는 친구가 없다. 그것에 대해 얘기해보고 싶었다. 그런 일을 당했을 때 모두 분하다고 느끼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일 때도 있고, 나선다 하더라도 정당한 방식으로 벌을 주기엔 안 돼 있는 시스템도 많다. 나 역시도 지나온 일을 생각해보면 큰일 날 뻔한 적도 많고. 애기 때인데도. 그런 감정들이 담긴 영상이다. 저주를 준비하는 사람의 과정을 담은 거지. 초반에 나오는 여자와 마지막에 잠깐 나오는 여자를 다른 사람으로 설정했다. 출연한 모델을 선택한 이유와도 연결되는데, 그분이 쌍둥이다. 그런데 언니와 동생의 느낌은 조금씩 다르고. 그 중 한 명이 어떤 의식을 통해, 도움을 청하며 누군가를 불렀을 때, 나타나 주는 존재가, 같으면서도 조금은 다른 여자로 보이기를 바랐다. 준비하면서 공부를 많이 했다. 우리나라의 저주, 의식에 대한 역사 등에 대해. 죽은 사람 입에 쌀을 넣어 준다던지, 재를 꼭 입에 물게 한다든지, 그런 것에 대한 스터디를 많이 했고, 내 영상에 넣고 싶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의식을 내가 만드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전통 방식에서 끌어온 의식을 보여주고 싶었다
한자로 제목을 쓴 것도 그런 맥락과 닿아 있겠다
맞다
그리고 <We are the same>과 <赤咒(Crimson Trace)>를 연관 지어 생각하다 보니, 당신이 스토리와 더불어 아름다운 것에 얼마나 예민한 사람인지에 대해 물어보고 싶어지더라. 미와 추가 있다 했을 때, 미의 미가 있고, 미의 추, 추의 미, 추의 추가 있을 텐데, 당신의 관심은 오로지 미의 미에 쏠려있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관점인 것 같다. 나는 내 작품에 대해 미나 추의 관점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런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그렇게 찍는 건 맞다. 미적인 걸 많이 신경 쓰면서 찍는 게 맞고. 하지만 또 작업을 하면서 느끼는 건, 예쁜 것만 예쁜 건 아니란 거다. ‘이와’ 감독님과 작업하며 많이 느낀 건데, 아름다운 걸 아름답게 보여주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거다. 정말 대단한 게 있다면 평이한 장면을 아름답게 보여주는 거란 거지. 근래 예전 영상을 보면 세상에 없는 것을 내가 보여주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있는 아름다움보다도 내가 만든 아름다움을 보여주려 했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그런데 지금은 조금 평이한 톤으로 레벨 다운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생각들이 당신이 말한 것과 맥이 닿는 걸지도 모르겠다
비판적인 입장에서 얘기했던 건 아니다. 오히려 미에만 그렇게 몰두할 수 있는 것이 한편으론 부럽기도 했고. 난 기본적으로 추한 것들에 먼저 시선이 가는 사람이니까. 관련해서 하나만 더 물어보자면 아름다운 것에 지극히 집중하는 건, 조금 외람된 말일 수도 있지만, 어떤 결핍에서 오는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는데, 내가 틀렸다면 틀렸다고 말해 달라
그렇게 연관 지어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내가 원래 사진을 하고 싶어 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 영상이 대부분 정적이라 생각하는데, 그러다 보니 한 장면 한 장면을 사진처럼 담고 싶어서 공을 많이 들인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미적인 것에 집착하게 되고. 이 정도 생각만 든다
그리고 오늘 마지막으로 얘기해볼 비디오, <Sound of X / Seoul: Salamanda> 이 영상이 결국 내가 당신에게 만나자고 말하게 만들었다. ‘Salamanda'에겐 좀 미안하지만, 그들의 음악이 사실 귀에 잘 안 들어와서, 활동 소식만 전해 들었지, 음악을 집중해 들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 비디오를 보고 나니 이들의 음악이 나에게 빨려들 듯 다가왔다. 음악을 통해 영상에 관심이 생긴 적은 있지만, 영상 때문에 음악에 관심이 생기고, 음악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고 느낀 건 처음 있는 일어라 즐거운 경험이었다
<Sound of X>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알겠지만, 이게 도시별로 음악과 영상을 만드는 프로젝트였는데, 다른 아티스트들은 다큐멘터리 형식을 많이 시도하셨더라. 난 조금 다르게 해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Salamanda'의 음악과 함께 서울을 담는 거니까, 보다 다양한 곳을 담아보자는 생각이 컸다. 친구들과 미팅하면서도 그런 얘기를 많이 했고. 소리를 채집한다는 개념도 있지만, 서울의 다양한 스팟들을 보여주고 싶다는 얘기를 나눴다. 'Salamanda'의 음악을 들을 때 몽환적인 느낌을 많이 받는데, 그 느낌을 서울에 덧입히고 싶었다. 날 것의 서울, 보여줄 수 있지. 하지만 이 친구들의 음악을 덧씌운 서울을 보여주고 싶었지, 그저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담아낸 그들의 작업 과정, 소리를 채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더라. 동시에 서울의 공간을 담을 땐, 아무도 모르는 숨겨진 공간을 찾아내 보여주기보단, 누구나 다 아는 공간이지만 이렇게 보면 조금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고 싶었고. 작업 과정은 많이 힘들었다. 하루 만에 다 찍었고,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로케이션이 엄청 많아서, 타임테이블 짜는 것도 장난이 아니었다. 새벽 1시쯤 끝내자고 세운 계획이 새벽 4시가 돼서야 끝났다. 다들 너무 고생 많이 했다
당신이 말했듯 다른 비디오들과는 달리 많은 로케이션이 등장하지 않나. 관련한 얘기를 조금 해주긴 했지만, 이 영상에 등장한 로케이션을 정한 기준이 무엇이었는지 조금 더 들어보고 싶다
방금 말한 누구나 아는 공간을 다르게 보여주는 것에 집중했는데, 생각은 했지만 찍지 못한 로케이션도 많다. 예를 들면 방산시장. 너무 찍고 싶었는데, 내가 자신이 없더라. 거기를 아름답게 찍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왔다. 그런데 만약 이 작업을 지금쯤 했다면, 조금 더 내려놓고, 굳이 아름다워야 하나? 생각하며 도전했을 것 같다. 많이 아쉽다. 예진이랑 지민이랑 같이 끝까지 고민했던 장소이기도 하고. 시장은 에너지고 넘치고, 다양한 소리가 존재하는 곳이니까. 들어갔다면 영상이 더욱 풍성해졌을 것 같다
확인되는 마지막 개인 작업은 <Sound of X / Seoul: Salamanda>이고, 최근엔 오늘 대화에 계속 언급되고 있는 ‘이와’ 감독의 작품에 조연출로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개인 작업은 조금 쉬고 있는 시기처럼 보이는데. 한차례 자신의 것들을 풀어놓은 뒤, 정리해야 할 시기가 필요하다고 느낀 건가
내가 아까 얘기하다 보니 개인 작업이 하고 싶어졌다고 하지 않았나. 굉장히 오랜만에 이 생각을 한 거다. 겁이 났었던 것 같다. 본격적으로 영상 제작 쪽의 회사에 다니면서, 현장도 자주 나가고, 현장의 사람들을 경험하다 보니, 눈도 높아지고, 내 작품이 작게 느껴지는 순간을 몇 번 경험하고 나니까, 자신감이 떨어졌었다. 그래서 우선 다양한 경험을 최대한 해보자 했다. 조명, 촬영, 편집 뭐 다 부딪히며 해보자는 생각으로 지금도 하고 있고. 그러다 보면 내 작업도 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에. 요즘 슬슬 내 작업을, 좀 더 다양하게 준비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얘기하면서 좀 더 용기가 생긴다
언제나 당신의 다음 비디오를 기다리고 있다. ‘Salamanda’ 외의 다른 아티스트와 작업할 땐 어떤 영상이 나올지 궁금하기도 하고. 얘기하며 느낀 당신은 조금씩 넓어지고 있는 과정에 있는 것 같은데, 그 순간순간이 영상으로 풀어 나오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욕심에 대해 얘기하며 정리해보자. 요즘 가장 욕심나는 건 뭔가
올해가 되면서 내 색을 입힌 작업을 더 많이 하고 싶다는 생각에 꽂혀있다. 내 색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튈 수도 있지만, 그런 변화무쌍한 것조차 좋으니까, 내 걸 계속 만들고 싶다
sophie2022-01-20 01:32
몰래 두분의 대화를 엿듣는듯한 오묘하고 생생한 기분이 들었네요 : ) 앞으로의 작업을 응원하고 싶어요
2022년 01월 06일의 대화
MTV 세대는 아닌 내가 뮤직비디오를 가장 많이 본 곳은 노래방이었다. 노래를 선곡하면 그 당시 최신 알고리즘을 통해 뮤직비디오가 재생됐는데, 그 영상들의 대부분엔 조폭이 등장하거나, 조폭이 아니라면 행복밖에 몰라 보이는 젊은이들이, 그조차 아니라면 맥락 없는 자연이 펼쳐지곤 했다. 그것을 보며 '플라이 투 더 스카이' 흉내를 내고, '아웃사이더'에 근접한 속도까지 도달하기 위해 차력을 하고, 가끔은 화면 속 조폭에 빙의해 이 세상 최고의 마초가 되곤 했는데, 어느 순간 그런 질문이 떠올랐다. '뮤직비디오'가 뭐지? 뮤직? 비디오? 말부터 이상한 이 단어는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더 황당했는데, 그 황당함은 'Kanye West'의 값비싼 뮤직비디오를 봐도 마찬가지여서, 그냥 뮤직비디오란 게 그런 건가 보다 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후, 20대 중반부터, 일주일에 서너 번 씩 극장에 갔다. 영화가 좋았던 날엔, 극장 밖으로 나오자마자 방금 본 영화의 O.S.T를 찾아 재생했고, O.S.T를 들으면 조금이라도 더 영화 속에 머무를 수 있었다. 음악이 영화를 다시 불러냈고, 음악과 영화가 잘 어우러져 공존하고 있음을 체감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날들이 반복되자, 오랜 시간 그냥 받아들이고 말았던 황당함이 다시 떠올랐다. 뮤직비디오.. 영화와 O.S.T는 좋은데.. 그건 대놓고 뮤직과 비디오를 함께 두었는데.. 왜 황당했을까.. 하면서 말이다. 영화와 O.S.T가 황당하지 않은 건, 서로에게 가닿기 위해 노력한 흔적을 발견했기 때문일 텐데, 그렇다면 그런 노력을 하는 뮤직비디오는 없을까 궁금해졌고, 이 생각을 나만 했을 리가 없으니, 누군가는 그런 근사한 뮤직비디오를 이미 만들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 와중에 '유성원'의 <We are the same>을 만났다. 그의 뮤직비디오를 통해 'Salamanda'의 음악이, 완전히 새롭게 다가왔을 때, 내가 고대했던 뮤직비디오가 바로 이것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전화기를 집어 들었고, '유성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1월이다. 연말이 바빠 우리가 만나는 것도 조금 미뤄졌는데, 연말 연초를 어떻게 보냈나
정신없는 연말이었다. 지금 일하고 있는 회사가 감독님이랑 같이 일하는 회사인데, 새로운 프로젝트들을 하게 되면서 정신없었다. 해가 바뀔 때 카운트다운 같은 거 하지 않나. 옛날에는 했었던 거 같은데, 올해는 세수하고 나왔더니 이미 00시 03분이더라. 올해를 세수하며 맞이했다
세수하며 깨끗한 마음으로 올해를 시작했다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작년은 30대로 보내는 첫해였다. 20대 때와 달라진 게 있었나
스물아홉에서 서른 되는 게 별 타격은 없었다. 9에서 0으로 넘어가는 게 좋더라고. 30대 중에 제일 막내? 그런 느낌이었다. 20대말에는 내가 20대 때 뭘 했나 하는 부담감도 있고, 대학 졸업 후 사회초년생을 지나며 약간 그런 건 있었는데, 스물아홉은 그냥 내가 그렇게 보냈나 보다 했다. 스물아홉 때가 회사 생활을 3년째 한 시기라 리프레쉬가 필요하긴 했다. 마케팅 일을 할 때 내 업무의 비중이 기획에 많이 가 있었는데, 기획은 페이퍼-워크가 많은 부분이라, 제작팀에서 하는 일들을 항상 하고 싶어 했다. 서른으로 넘어오면서 예전부터 함께 하고 싶었던 감독님과 작업하게 됐는데,, 설렜다.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일을 하게 되는구나’, ‘내 인생이 좀 바뀔 것 같다’ 그런 생각들을 했다. 그전까지는 일하면서도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게 아닌 거 같은데?’ ‘뭔가 바뀌어야 맞는 거 같은데?’ 등등의 생각을 많이 했었다. 그런데 30대가 되고, 지금 하는 일로 넘어오면서, 저런 고민을 덜 하게 됐다
추워지나 추워지나 하다가도 포근한 겨울이 계속되고 있다. 겨울을 좋아하나? 난 추운 날씨를 좋아하진 않지만, 또 막상 겨울인데 쨍한 추위를 아직 느끼진 못 한 점은 괜히 아쉽기도 하더라
원래 겨울을 좋아하는 편이다. 옷도 레이어드 할 수 있고, 찬 공기가 맴도는 것도 좋다
당신 작업의 대부분이 뮤직비디오니까, 겨울에 생각나는 노래가 있는지도 얘기해 보고 싶다. 난 ‘조동진’의 <겨울비>, ‘김현식’의 <눈내리던 겨울밤>, ‘들국화’의 <하나둘씩 떨어져> 같은 노래들이 생각난다. 말하고 보니 세월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잠재된 쓸쓸함과 나아감의 공존이 겨울에 대한 나의 인상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워낙 다양한 걸 듣는 편이라 겨울에 집중해 듣는 노래가 있거나 그렇진 않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미지를 만드는 사람이니까, 겨울에 시선이 많이 가는 것엔 무엇이 있나
영상엔 많은 종류가 있지만, 난 영화적인 걸 추구하는 편이다. 풍경이나 자연에 눈이 많이 가고, 원경에서 찍은 이미지를 좋아한다. 마른 나무, 앙상한 가지, 잎이 다 떨어진 나무들로 이루어진 숲, 그런 이미지들이 떠오른다. 보는 것도 좋아하고, 담는 것도 좋다
그런 이미지를 만나면 어떤 마음이 생기나
사진 수업을 잠깐 들은 적이 있다. 일주일에 한 번 모여 각자 찍은 사진을 발표하고, 의견을 공유하는 수업이었다. 그때 같이 했던 작가님이 ‘성원 씨 사진은 냉한 사진이 많은 것 같다. 차가워 보이는 이미지가 많은 것 같다.’고 하시더라. 처음엔 이해를 못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깨져있거나, 버려져 있는 물건, 앙상한 가지, 그런 것들을 좋아해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게 아닌가 싶다. 굳이 따뜻한 걸 피하진 않지만, 내가 끌리는 건 그런 쪽이 맞다
관련해서 떠오르는 영화도 있나
고전이지만, <장화, 홍련>을 좋아한다. 그런 이미지들을 좋아한다. 날카롭거나 차가운 느낌. 그 영화는 음악도 너무 좋고. 집의 벽지 디자인이나, 최신식이 아닌 드레스, 원피스가 등장하는 의상도 좋다. 그 영화는 집 안에서 인물들이 계속 대립하고, 긴장하는 느낌인데, 그런 것들이 좋았다
‘임수정’이 연기한 ‘수미’가 걸어가는 갈대밭을 생각하면 당신의 <We are the same> 속 갈대밭이 떠오르기도 한다. 작품 얘기는 조금 있다 하기로 하고, 우리는 지금 퇴근하고 만났다. 각자 작업하는 것 외에도 다니는 직장이 있다는 건데, 나에게 회사는 맡은바 성실히 임해 돈을 버는 수단이고, <대화록>은 본능적인 진심과 마음이 훨씬 많이 담긴 공간이다. 당신에게 직장과 작업은 어떻게 구분되나
광고대행사에서 인턴으로 일했던 적이 있다. 매일 야근하고 그런 게 너무 힘들더라. 그리고 나선 나의 관심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칼퇴할 수 있고, 그렇게 버겁지도 않은 회사를 6개월 정도 다녔다. 거길 다니면 회사에서 번 돈으로 내가 하고 싶은 것에 시간을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내가 나를 잘 몰랐던 거지. 돈만 벌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막상 그렇게 해보니, 하루 중 아홉 시간을 보내는 곳이란 건 변하지 않는데, 내가 전혀 흥미를 못 느끼는 일을 하고 있으니, 더 힘들더라. 그래서 힘들긴 했지만, 재미는 있었던, 대행사로 다시 돌아갔다. 나 역시 돈을 벌기 위해 다니는 회사이지만, 대충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으니 그랬을 거다. 하지만 또 회사에서 나의 욕구를 실현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 역시 분명하게 느껴서, 그건 개인적인 작업이나, 다른 아티스트와의 협업을 통해 풀어낸다. 그런 작업들이 나에게 활기를 주고
대화를 나누기 전 당신에게 미리 어떤 얘기를 나누면 좋을지 물었었고, 그때 당신은 일과 작업을 병행하는 게 어렵다고 말했다. 그 어려움은 어떤 것에서 발생하나. 어렵다는 당신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난 그 병행이 어렵지 않고, 오히려 내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얘기해보고 싶었다. 어렵지 않고, 도움이 된다는 건, 일함으로써 작업을 통해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때문에 내 작업에 더욱 집중할 수 있다는 얘기다
내가 회사에서 돈을 벌기 위해 일하고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작업을 본업으로 삼고, 내가 회사에서 일하는 시간만큼을 현장에서 보내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나에게 불안감으로 다가왔다. 나는 프로젝트를 해도 그들만큼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으니 조바심이 나기도 했고
그 불안과 조바심에는 당신 역시도 작업을 본업으로 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 걸까
맞다. 그걸로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이 있지. 옛날에는 그랬다. 이걸로 돈을 벌기 시작하면 내가 하고 싶은 영상뿐만 아니라, 내가 하기 싫은 영상도 해야 하는데, 그럼 내가 지칠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물론 지치는 순간이 올 순 있겠지. 그럼에도 그 과정에서 또 배우는 게 있을 테니까, 그렇게 배운 걸 개인 작업으로 끌고 올 수 있는 거고. 그렇게 하루하루의 루틴을 쌓다가, 언젠가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 되는 거니까. 지금 이렇게 생각하다 보니, 물론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돈도 버는 게 베스트이긴 하겠지만, ‘일단은 작업을 업으로 삼아야 하는데..’ 하는 불안이 있다
병행의 어려움과 더불어 또 하나 당신이 나누고 싶다 했던 얘기는 스트레스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 스트레스의 예시를 좀 들어볼 수 있을까. 역시나 병행에 대한 것인가? 아니면 작업자로서 당신이 작업 과정에서 느끼는 스트레스인가
병행에 대한 얘기도 물론 맞지만, 그 얘기는 앞서 다 한 것 같다. 작업 과정에선.. 하나를 할 때 내가 너무 많은 가지치기를 한다. 걱정도 많아서 플랜 A, 플랜 B, 플랜 C 이렇게 계속 계획을 세워야만 마음이 편하다. 회사 일도 그렇고, 작업도 그렇고, 준비 과정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크다. 주변의 작업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렇게까진 하지 않는 거 같은데.. 나는 한편을 할 때 너무 다 쏟으려고 하니까, 작업물이 나오는 주기도 띄엄띄엄해진다. 이런 스트레스를 다른 사람 역시도 받는데 아닌 척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나만 그런 건지, 그런 스트레스를 어떻게 덜어낼 수 있을지 고민이다
물론 작업 스타일의 차이일 거고, 그게 아니라면, 비교적 여유가 있어 보이는 사람은, 이미 그 과정을 통과한 사람일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제대로 된 태도로 작업하는 사람이라면 그 과정을 필수적으로 지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 시기를 안 지나고서는 여유로 진입할 수가 없는 거지. 여유란 게 다 뭔가. 여유란 건 결국 신뢰와 관련된 것일 텐데, 그 신뢰는 실력과 경험에서 오는 거니까. 그렇다면 그 치열하고, 불안한 과정을 통해 실력과 경험을 쌓아야만, 자기 자신의 실력과 경험에 대한 신뢰와 그에 따른 여유를 획득할 수 있는 것 아니겠나. 허무하지만, 뭐 당연한 과정인 거지. 잘 하고 있는 과정인 거고. 계속 스트레스받았으면 좋겠다는 건 아니지만.. 넘어가자. 뮤직비디오 얘기를 해볼 건데, 뮤직비디오 만드는 사람이라고 ‘유성원’을 정의해도 괜찮을지 조금 망설여지긴 한다. 그 까닭엔 아마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뮤직비디오에 관한 정의 때문이 아닐까 싶고. 내 생각을 말하기 전에 당신의 정의를 먼저 들어보고 싶다. 뮤직비디오가 뭔가
뮤직비디오는 그 음악을 듣고 느낀 걸 영상으로 풀어낸 거겠지. 물론 음악을 만든 사람의 의도도 중요하긴 한데, 내 영상엔 나의 해석이 좀 더 많이 들어간다. 그 음악을 듣고 다른 사람이 A를, B를, C를 느꼈을 때 나만 느낀 D를 영상으로 꺼내놓고 싶은 욕심도 있다. 남들이 아무도 하지 못한 특이한 걸 하고 싶다는 얘기가 아니다. 비슷한 감정에 있지만, 나만의 것을 집어넣어 뒤틀고 싶다는 거다. 나를 설명하는 것에 대해선.. 나도 나를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이 되긴 하는데.. 그냥 이미지로 말을 하고 싶은 사람? 그렇게 나를 정의하고 싶다
어떤 영화를 보고 100명이 슬프다고 느꼈다면 그건 100개의 슬픔이 발생한 것일 테니까, 당신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다. 나에게 정리돼 있던 뮤직비디오는 뭐랄까.. 좀 심하게 말하자면 일종의 굿즈랄까. 음악의 2차 창작물로 늘 바라봤었고, 마지 못 해 만든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적도 많았다. 물론 간혹 정말 멋진 뮤직비디오를 발견하면 몇 번씩 돌려보곤 했지만, 그런 경우엔 또 음악이 영상의 배경음처럼 쓰였다고 느낄 때가 많아서, ‘그럼 이게 뮤직비디오라고 할 수 있나?’ 하고 생각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뮤직비디오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가 늘 어려웠다고 정리하는 게 맞는 거 같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이긴 하다. 음악을 만든 사람의 입장에선 음악에서 파생해 만들어진 것이 뮤직비디오 일 텐데, 영상을 만드는 사람 입장에선 뮤직비디오를 통해 음악이 발견되게 만들기도 하는 거니까
뮤직비디오를 보는 건 어릴 때부터 좋아했나
영화를 더 좋아하긴 했지만, 꾸준히 좋아했다
초등학교 때 본 것 중에, 중고등학교 때 본 것 중에, 20대에 본 것 중에, 그리고 최근 본 것 중에, 그렇게 시기별로 인상 깊게 봤던 뮤직비디오가 뭔지 궁금하다. 지금은 좋아하지 않는 거라도 괜찮고. 나부터 말해보자면.. 물론 지금 보면 말도 안 되지만, 초등학교 때 본 ‘조성모’의 <아시나요> 뮤직비디오가 생각나고, 중고등학교 땐 힙합에 미쳐있던 시기라 음.. 노래는 언더그라운드 MC들의 노래를 더 많이 들었는데, 그들의 뮤직비디오는 대부분 좀 구렸으니까.. ‘드렁큰타이거’의 <8:45 Heaven>이 생각난다. 20대 초반은 'E SENS'의 <Back In Time>, 그리고 최근에 본 것 중 가장 좋았던 건 ‘김일두’의 <뜨거운 불>이다. 그가 너무 즐거워 보여서 좋았다
어렸을 때는.. 그거? <벌써 일 년> 그 당시 내가 느끼기에 드라마 같고, 영화 같았다. 스토리가 녹여져 있는 걸 많이 기억하는 편이다. 물론 비주얼적으로 빵! 하는 것도 멋있긴 한데, 스토리가 좋으면 스토리 때문에 계속 뮤직비디오를 돌려보며 음악을 듣게 되니까. <벌써 일 년>은 그렇게 많이 각인됐다. 그다음은 ‘리쌍’의 <발레리노> 이게 스토리가 파격적이다. 스토리도 있지만, 비주얼적 요소까지 섞여 있어서 그때 많이 봤다. 20대 때는.. 'Oren Lavie'의 'Second hand lovers'의 뮤직비디오. 거쳐온 관계와 사랑이 어떤 흔적으로 남는지 비주얼로 잘 표현했더라. 회사 다닐 때는 ‘이래경’ 감독이 만든 ‘자우림’의 <있지>를 많이 봤다. 이래경 감독 뮤직비디오는 영화처럼 스토리가 딱딱딱딱 있는 건 아니고, 그냥 흐르듯이 지나가는데, 그 안에 스토리가 자연스럽게 녹여져 있다. 그리고 비현실적인 느낌이 딱 든다. 보고 있으면 그 속의 캐릭터가 너무 매력적으로 느껴지고, 보여주지 않는 앞뒤의 스토리가 궁금해진다. 나에게 만들고 싶은 뮤직비디오가 뭐냐고 묻는다면,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뮤직비디오라고 답할 거다. 하나의 스토리가 있을 때, 앞뒤 잘라버리고 요만큼만 보여줘서, 보는 사람들이 그럼 앞뒤는 어떻게 됐을까 하고 여지를 주는? 단순히 3분짜리의 뭔가를 만드는 게 아니라, 내가 전체적인 기획을 통해 스토리를 만든 다음, 그렇게 완성된 스토리를 집약 시켜 3분 안에 보여줬을 때, 그럼에도 한 편의 스토리를 느낄 수 있는, 그런 걸 하고 싶다. 그러다 보니 ‘이래경’ 감독의 뮤직비디오가 좋았고
최근엔 뭐가 있나. 아니면 올 타임 넘버 원도 좋고
‘이래경’ 감독 뮤직비디오가 비교적 최근 것이기 때문에.. 내가 ‘이와’ 감독님의 표현법을 좋아하는데, 감독님 작품 중에 ‘moi'의 <Feel Up>으로 작업한 뮤직비디오가 있다. 밤이고, 아무것도 없는 도로가 등장한다. 뻥 뚫린, 한국에 없을 것 같은 도로. 그 위에 어떤 여자가 서 있고, 여자의 뒷모습만 나오는데, 그 도로는 너무 깜깜하고, 양옆은 숲이어서, 여자 한 명이 거기 있는 게 안 어울리는? 뭐지? 왜 거기 있는 거지? 하게 된다. 그러다 그 여자가 천천히 걷기 시작하고, 카메라는 계속 쫓아간다. 계속 그렇게 쫓아만 간다. 잠시 후 여자는 뛰기 시작하고, 겉옷을 벗고, 뭔가를 피하려는 듯이, 뭔가를 가지려는 듯이.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계속 달린다. 그러다 중간 평온이 등장하기도 하고, 다시 도로가 나왔다가, 마지막엔 그 여자가 없는 도로가 다시 등장하는, 그런 뮤직비디오가 있는데, 단순한 플롯임에도 끌 수가 없다. 그걸 고르겠다
영상의 종류는 정말 다양하지 않나. 그중에서도 뮤직비디오를 찍어봐야겠다고 결정한 계기가 있나. 처음부터 뮤직비디오를 배우기 위해 관련 아카데미도 다닌 것으로 알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사진에 관심이 많았다. 물론 영화도 좋아했지만, 영화는 호흡이 너무 기니까. 내 성향이 끈기 있게, 지구력 있게, 무언가 하는 걸 힘들어하는 편이다. 심지어 영화를 볼 때도 나는 마음을 먹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이미지를 만들고 싶고, 이미지를 통해 말하고는 싶은데, 나의 성향이 있으니, 처음엔 사진을 선택했던 것 같다. 단 한 장으로 보여줄 수 있는. 그렇게 시작한 것이 확장된 게 뮤직비디오가 아닐까 생각되고. 짧은 구조이지만, 비주얼과 스토리를 다 담아낼 수 있고. 살면서 영화를 한 편쯤은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있지만, 영화만을 하고 싶어 했던 적은 아직 없다
뭐 영화와 뮤직비디오 사이 어떤 것이 더 위대하다 할 필요도 없는 거니까. 아무렴 어떤가. 멋진 작품을 만드는 게 중요하지. 그렇게 뮤직비디오를 배우기 위해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듣고, 수업 과제로 영상을 만들었던 과정 어디쯤에서, 어떤 뮤직비디오를 만들고 싶은지에 대한 정리가 좀 되지 않았을까 짐작해보게 된다. 아까 잠깐, 간단히 얘기해주긴 했지만, 조금 더 자세히 말해줄 수 있을까
만들면서 느꼈던 건, 내가 스토리에 집중하다 보니까 영상 자체가 설명적으로 되더라. 아카데미를 다니면서 설명을 좀 덜어내야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쉽진 않았다. 봤을 때는 쉽게 이해가 된다. 이 컷에서 이 컷으로, 저 컷에서 저 컷으로, 그게 다 이해가 되는데, 내가 막상 만들려고 했을 땐, 너무 많아서 설명적이거나, 너무 빼서 ‘이게 무슨 얘기야?’ 하게 됐다. 아카데미 과정은, 그 완급조절이, 다른 영상을 볼 때 느끼고, 알게 됐던 것만큼 간단하지 않다는 걸 깨닫는 과정이었다. 처음 만든 내 작품을 봤을 땐 내가 계속 이걸 해도 되나 생각하기도 했었다. 처음 만든 거니 당연히 그렇게까지 엄격할 필요는 없었는데, 내가 다른 작품을 보고 눈이 높아진 채로 내 걸 보다 보니.. ‘이딴 걸 만들었어?’ 하게 된 거다. 주변에서는 좋은 말을 많이 해줬는데, 나는 그 영상에 애정을 못 가졌다. 요즘 봐도 못 보겠다. 보긴 보는데.. 부끄럽다. 내가 너무 내 작품에 엄격하니까, 다른 사람은 어떤지 궁금하기도 하다. 자기 작품을 어떻게 사랑하는지
내가 그 다른 사람인데.. 내가 쓴 글을 나는 정말 좋아한다. 내가 쓴 글이 너무 재밌고. 이렇게 된 과정은 내가 글을 써온 과정에서 만들어진 게 아닐까 싶다. 난 글을 배운 적도 없고, 같이 쓰는 동료가 있었던 적도 없다 보니, 늘 스스로가 나의 글을 냉정하게 봐야 하는 독자였다. 물론 냉정하고 까다롭게 봐야하지만, 동시에 응원하며 아껴주는 독자이기도 해야 했고. 스스로에게 칭찬을 많이 해줬다. 그렇게 계속 칭찬해주다 보니, 그 칭찬에 부합하기 위해 더 고민하며 썼고, 그런 과정을 통해 지금의 내 글쓰기가 형성됐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그 칭찬에 어느 정도 부합했다고 스스로 느꼈는데, 그때쯤 여러 채널을 통해 내 글이 발행됐고, 좋은 피드백이 오는 걸 보면서 내 글을 좋아하게 됐다
자주 하고, 자주 보여주고, 그런 게 작업하는 데 있어 많은 도움이 된다. 누군가는 별로라고 하겠지만, 생각보다 사람들이 괜찮다는 말을 과감하게 해준다.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이 만든 영상 시사회를 가진 적이 있는데, 나는 시작 직전까지 수정하고 있었다. 망했고, 구리다면서. 근데 막상 보여줬더니 좋다는 반응이 많아서, ‘나 잘했나?’ 하고 생각하게 되더라. 어딘가에 보여줘 본 적이 없을 땐 스스로의 역량에 대해 계속 고민하게 된다. 하고 싶은 것과 잘하는 건 다르니까. 그리고 혼자 고민할 땐 부정적인 쪽으로 평가가 많이 이루어지고. 그런데 자주 보여주다 보면 좋은 반응을 받게 되고, 그게 또 힘이 된다. 자주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
당신의 뮤직비디오를 처음 본 건 ‘Salamanda'의 <We are the same> 비디오였다. 이것이 아카데미 졸업작품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처음 봤을 때 너무 좋아서 몇 번이고 돌려봤다. 좋다고 느낀 까닭은 내가 뮤직비디오를 정의하지 못 한 이유가 해결됐기 때문이었다. <We are the same>을 보면 음악이 비디오 같고, 비디오는 음악 같아서, 서로가 기분 좋게 흡착한 뒤, 하나가 된 것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뭐 당신에겐 아쉽기도 하겠지
이렇게까지 심화된 이야기를 들어본 게 처음이다. 물론 내가 만든 것에 대해 사람들이 말해주긴 하지만, 전반적인 감상을 들은 건 처음이라.. 뿌듯하네.. 갑자기 작업 하나 하고 싶어졌다. <We are the same>은, 곡을 만든 ‘Salamanda' 친구들의 의도는 분명 따로 있겠지만, 내가 만들면서 했던 생각은 헤매는 것에 대한 거였다. 모든 사람이 헤맨다. 주변을 보면서는 ’다 잘 해내고 있구나‘ 하게 되지만, 그들 역시 본인 스스로에 대해선 헤매고 있지 않나. 방향성, 선택, 하고 싶은 마음 등에 대해 찾고, 헤매고, 방황하는, 그런 이미지를 담고 싶었다. 그리고 모두가 그렇게 헤매고 있다면 우리는 결국 다 같은 거니까, 그걸 영상에 담으려 했다. 인물은 배회하거나 걷고, 소품으로 실이나 거울 등을 활용했다. 내가 옳게 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하고 싶어서였다. 옳고, 맞다는 생각으로 살지만, 우리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꼬이는 방향으로 자주 흘러가니까. 사람과의 관계 역시 결속력이 강하다 느꼈던 관계마저도 어느 순간 이질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으니까, 그런 것도 영상에 풀고 싶었고
영상과 음악의 흡착에 관해 내가 왜 그렇게 느꼈을까 생각해봤는데, 그건 아마 당신이, 만들려는 뮤직비디오의 음악을 깊게 좋아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더라. 좋아하니까 자주 들었을 거고, 그렇게 자주 들으면서 음악의 감수성, 리듬, 에너지 같은 것들이 이미 당신 몸에 배어 있다고 생각했다. 음악을 영상으로 풀어내기 위해 분석하고, 계산한 것이 아니라
나랑 ‘Salamanda'의 지민(sala)이는 고등학교 때 친구다. 같은 고등학교, 같은 대학교를 나왔다. 하지만 친해진 건 그 기관들을 벗어난 이후여서, 지민이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서로 음악 하고 싶다, 영상 하고 싶다 이런 얘기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지민이가 처음 DJ를 한다고 했을 때 ’뭘 한다고?‘ 그랬다. 사람들도 내가 영상하는 걸 보고 그랬을 거다. 둘 다 하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숨겨 놓고 혼자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자, 지민이가 더욱 궁금해졌다. 그래서 지민이가 인스타에 DJ 한다는 소식을 올렸을 때 말도 없이 찾아갔다. 음악을 다 틀고 내려온 지민이는 날 발견하고 당연히 놀랐는데, 그때 서로에게서, 하고 싶은 게 있었지만, 수면 위로 드러내지 않았던 혹은 못했던 마음을 발견하며 힘을 나눴다. 지민이도 음악을 시작하고, 꾸준히 해 온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음을 알게 됐고, 나 역시도 사진이나 영상을 하겠다고 말했을 때 집에서 반기는 분위기는 아니었기에, 그런 공통점을 통해 우리가 서로 닮아있다는 걸 느끼게 됐다. 그러면서 지민이가 하고 있던 ’Salamanda'의 음악을 소개받고, 듣게 됐는데, 너무 좋았다. 지민이가 분출해내는 걸 보며 나도 많이 자극받았고
'manda'에 대해서도 얘기할 게 있을까..? 혹시나 서운해할까봐..
예진(manda)이, 예진이는,, 하하하 예진이를 처음 봤던 건 'Salamanda'가 전시에 틀 영상이 필요해 나와 연결되면서다. 너무 쪼그맣고, 귀엽게 생긴 애가 ‘언니!’ 이러니까.. 얘 되게 밝구나.. 에너지가 넘치는구나.. 했다. 지민이랑 예진이랑 같이 있으면 느낌이 너무 다르지 않나. 지민이는 굉장히 차분한 느낌이고, 예진이는 통통 튀니까. ‘너네 둘이 만나서 그런 음악을 하는 거야?’ 했고, 예진이가 이런 장르의 음악을 한다는 것 자체가 새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자주 만나고, 친해지면서, 예진이가 얼마나 진지하게 임하고 있는지를 느끼게 됐다. 밝고, 장난기 많은 사람을 보면 본업에서도 그렇게 하지 않을까 할 수 있는데, 작업할 때의 예진이는, ‘Salamanda'에 대해 얘기하는 예진이는, 다른 위치에 있다. 멋있다. 그 둘의 태도를 너무 배우고 싶다. 둘이 의견 주고받고, 열심히 하는 걸 보면 가끔 부러울 정도다. ’나도 짝꿍 있었으면 좋겠는데..?‘ 하고. 서로의 협업자이며 동시에 감시자가 되는 게, 좋아 보인다. 나도 그렇게 일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그다음 본 비디오는 <赤咒(Crimson Trace)>였다. 그리고 이 비디오를 보면서 ‘유성원’의 세계가 더욱더 궁금해졌고. 어떤 과정을 통해 나온 비디오인지 나는 모르지만, 이걸 봤을 때 당신이 이제는 어떤 세계를 구축한 사람이라고 느꼈기 때문일 거다. 영상으로 만들어야 할 음악과 이야기가 있을 때, 그걸 당신의 세계에 한 번 빠트린 뒤, 건져 올렸을 때, 뚝뚝 떨어지는 음악이나 이야기가 당신의 영상으로 완성됐다고 느꼈다는 얘기다
이 영상의 음악은.. 허락받은 적은 없고.. 그냥 ‘류아치 사카모토’의 음악을 가져다 쓴 건데.. 아무튼, <赤咒(Crimson Trace)> 같은 경우엔 <We are the same>과 비교하자면 메시지가 훨씬 더 센 영상이다. 여성이 당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있지 않나. 여자들끼리 모여서 얘기해보면 그런 경험이 없는 친구가 없다. 그것에 대해 얘기해보고 싶었다. 그런 일을 당했을 때 모두 분하다고 느끼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일 때도 있고, 나선다 하더라도 정당한 방식으로 벌을 주기엔 안 돼 있는 시스템도 많다. 나 역시도 지나온 일을 생각해보면 큰일 날 뻔한 적도 많고. 애기 때인데도. 그런 감정들이 담긴 영상이다. 저주를 준비하는 사람의 과정을 담은 거지. 초반에 나오는 여자와 마지막에 잠깐 나오는 여자를 다른 사람으로 설정했다. 출연한 모델을 선택한 이유와도 연결되는데, 그분이 쌍둥이다. 그런데 언니와 동생의 느낌은 조금씩 다르고. 그 중 한 명이 어떤 의식을 통해, 도움을 청하며 누군가를 불렀을 때, 나타나 주는 존재가, 같으면서도 조금은 다른 여자로 보이기를 바랐다. 준비하면서 공부를 많이 했다. 우리나라의 저주, 의식에 대한 역사 등에 대해. 죽은 사람 입에 쌀을 넣어 준다던지, 재를 꼭 입에 물게 한다든지, 그런 것에 대한 스터디를 많이 했고, 내 영상에 넣고 싶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의식을 내가 만드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전통 방식에서 끌어온 의식을 보여주고 싶었다
한자로 제목을 쓴 것도 그런 맥락과 닿아 있겠다
맞다
그리고 <We are the same>과 <赤咒(Crimson Trace)>를 연관 지어 생각하다 보니, 당신이 스토리와 더불어 아름다운 것에 얼마나 예민한 사람인지에 대해 물어보고 싶어지더라. 미와 추가 있다 했을 때, 미의 미가 있고, 미의 추, 추의 미, 추의 추가 있을 텐데, 당신의 관심은 오로지 미의 미에 쏠려있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관점인 것 같다. 나는 내 작품에 대해 미나 추의 관점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런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그렇게 찍는 건 맞다. 미적인 걸 많이 신경 쓰면서 찍는 게 맞고. 하지만 또 작업을 하면서 느끼는 건, 예쁜 것만 예쁜 건 아니란 거다. ‘이와’ 감독님과 작업하며 많이 느낀 건데, 아름다운 걸 아름답게 보여주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거다. 정말 대단한 게 있다면 평이한 장면을 아름답게 보여주는 거란 거지. 근래 예전 영상을 보면 세상에 없는 것을 내가 보여주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있는 아름다움보다도 내가 만든 아름다움을 보여주려 했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그런데 지금은 조금 평이한 톤으로 레벨 다운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생각들이 당신이 말한 것과 맥이 닿는 걸지도 모르겠다
비판적인 입장에서 얘기했던 건 아니다. 오히려 미에만 그렇게 몰두할 수 있는 것이 한편으론 부럽기도 했고. 난 기본적으로 추한 것들에 먼저 시선이 가는 사람이니까. 관련해서 하나만 더 물어보자면 아름다운 것에 지극히 집중하는 건, 조금 외람된 말일 수도 있지만, 어떤 결핍에서 오는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는데, 내가 틀렸다면 틀렸다고 말해 달라
그렇게 연관 지어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내가 원래 사진을 하고 싶어 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 영상이 대부분 정적이라 생각하는데, 그러다 보니 한 장면 한 장면을 사진처럼 담고 싶어서 공을 많이 들인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미적인 것에 집착하게 되고. 이 정도 생각만 든다
그리고 오늘 마지막으로 얘기해볼 비디오, <Sound of X / Seoul: Salamanda> 이 영상이 결국 내가 당신에게 만나자고 말하게 만들었다. ‘Salamanda'에겐 좀 미안하지만, 그들의 음악이 사실 귀에 잘 안 들어와서, 활동 소식만 전해 들었지, 음악을 집중해 들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 비디오를 보고 나니 이들의 음악이 나에게 빨려들 듯 다가왔다. 음악을 통해 영상에 관심이 생긴 적은 있지만, 영상 때문에 음악에 관심이 생기고, 음악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고 느낀 건 처음 있는 일어라 즐거운 경험이었다
<Sound of X>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알겠지만, 이게 도시별로 음악과 영상을 만드는 프로젝트였는데, 다른 아티스트들은 다큐멘터리 형식을 많이 시도하셨더라. 난 조금 다르게 해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Salamanda'의 음악과 함께 서울을 담는 거니까, 보다 다양한 곳을 담아보자는 생각이 컸다. 친구들과 미팅하면서도 그런 얘기를 많이 했고. 소리를 채집한다는 개념도 있지만, 서울의 다양한 스팟들을 보여주고 싶다는 얘기를 나눴다. 'Salamanda'의 음악을 들을 때 몽환적인 느낌을 많이 받는데, 그 느낌을 서울에 덧입히고 싶었다. 날 것의 서울, 보여줄 수 있지. 하지만 이 친구들의 음악을 덧씌운 서울을 보여주고 싶었지, 그저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담아낸 그들의 작업 과정, 소리를 채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더라. 동시에 서울의 공간을 담을 땐, 아무도 모르는 숨겨진 공간을 찾아내 보여주기보단, 누구나 다 아는 공간이지만 이렇게 보면 조금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고 싶었고. 작업 과정은 많이 힘들었다. 하루 만에 다 찍었고,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로케이션이 엄청 많아서, 타임테이블 짜는 것도 장난이 아니었다. 새벽 1시쯤 끝내자고 세운 계획이 새벽 4시가 돼서야 끝났다. 다들 너무 고생 많이 했다
당신이 말했듯 다른 비디오들과는 달리 많은 로케이션이 등장하지 않나. 관련한 얘기를 조금 해주긴 했지만, 이 영상에 등장한 로케이션을 정한 기준이 무엇이었는지 조금 더 들어보고 싶다
방금 말한 누구나 아는 공간을 다르게 보여주는 것에 집중했는데, 생각은 했지만 찍지 못한 로케이션도 많다. 예를 들면 방산시장. 너무 찍고 싶었는데, 내가 자신이 없더라. 거기를 아름답게 찍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왔다. 그런데 만약 이 작업을 지금쯤 했다면, 조금 더 내려놓고, 굳이 아름다워야 하나? 생각하며 도전했을 것 같다. 많이 아쉽다. 예진이랑 지민이랑 같이 끝까지 고민했던 장소이기도 하고. 시장은 에너지고 넘치고, 다양한 소리가 존재하는 곳이니까. 들어갔다면 영상이 더욱 풍성해졌을 것 같다
확인되는 마지막 개인 작업은 <Sound of X / Seoul: Salamanda>이고, 최근엔 오늘 대화에 계속 언급되고 있는 ‘이와’ 감독의 작품에 조연출로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개인 작업은 조금 쉬고 있는 시기처럼 보이는데. 한차례 자신의 것들을 풀어놓은 뒤, 정리해야 할 시기가 필요하다고 느낀 건가
내가 아까 얘기하다 보니 개인 작업이 하고 싶어졌다고 하지 않았나. 굉장히 오랜만에 이 생각을 한 거다. 겁이 났었던 것 같다. 본격적으로 영상 제작 쪽의 회사에 다니면서, 현장도 자주 나가고, 현장의 사람들을 경험하다 보니, 눈도 높아지고, 내 작품이 작게 느껴지는 순간을 몇 번 경험하고 나니까, 자신감이 떨어졌었다. 그래서 우선 다양한 경험을 최대한 해보자 했다. 조명, 촬영, 편집 뭐 다 부딪히며 해보자는 생각으로 지금도 하고 있고. 그러다 보면 내 작업도 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에. 요즘 슬슬 내 작업을, 좀 더 다양하게 준비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얘기하면서 좀 더 용기가 생긴다
언제나 당신의 다음 비디오를 기다리고 있다. ‘Salamanda’ 외의 다른 아티스트와 작업할 땐 어떤 영상이 나올지 궁금하기도 하고. 얘기하며 느낀 당신은 조금씩 넓어지고 있는 과정에 있는 것 같은데, 그 순간순간이 영상으로 풀어 나오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욕심에 대해 얘기하며 정리해보자. 요즘 가장 욕심나는 건 뭔가
올해가 되면서 내 색을 입힌 작업을 더 많이 하고 싶다는 생각에 꽂혀있다. 내 색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튈 수도 있지만, 그런 변화무쌍한 것조차 좋으니까, 내 걸 계속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