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주영" - <씨네핀하우스>

2021년 11월 13일의 대화


새로운 것을 만드는 작업은 없다. 만들어지는 모든 것은 어딘가에 빚을 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많은 작업자가 이 분명한 사실을 자주 잊고, 때론 모른 척 한다. 특히나 빚진 대상이 무형의 것일 땐 더욱더 자주. '어주영'을 만나러 부산으로 가보자는 마음은, 그가 하는 거의 모든 작업이 가늠할 길 없는 타인의 기억에 빚지고 있음을 스스로가 너무 잘 알고 있는 것 같다는 이유 단 하나에서 시작됐다. 영화를 기억하고 곱씹는 것이 어디 영화에만 한정된 일이겠는가. 그 기억엔 스크린 속 영화와 영화를 본 각각의 관객을 둘러싼 현실, 그리고 그 관객의 현실에 결부된 수많은 관계와 감정이 응집돼 있다. 따라서 이 형체 없이 거대한 덩어리에 빚지고 있는 작업자는 기필코 사려 깊어야만 한다. 끊임없이 망설이고, 내달리고 싶은 욕망을 점검하고, 매끄러운 것을 경계할 때에만 비로소 빚진 타인의 기억과 웃으며 마주할 수 있는 것이다. '어주영'과 그가 앞장서 걷는 <씨네핀하우스>는 기억을 담은 아주 작은 물건으로, 그 기억의 주인과 천천히 인사 나눈다      



고향인 부산에 와 부산사람과 대화를 나누게 돼 지금 아주 기쁘다. 지난밤 대화를 준비하며 역시나 부산사람인 ‘김일두’의 ‘머무르는 별빛’을 들었다. 기분이 묘했다. 고향에 와, 고향 사람을 만나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랬던 것 같다. 요즘 잘 지내나

 

굿즈는 보통 영화 개봉 전에 미리 준비한다. 개봉 날짜가 정해진 후에야 관객에게 어떻게 풀지 기획하고. 그런데 작년 말부터 만들어둔 굿즈가 세상으로 나가지 못했다. 영화가 극장이 아닌 OTT로 가게 되면서 판권 보유자가 달라지게 됐고, 그전에 만들었던 굿즈를 폐기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거다. 그런 일이 작년부터 많아지더니 올해 들어서 작업 의뢰가 확 줄어들었다. 우리에게도 코로나의 직격탄이 뒤늦게 온 거다. 그래서 한참을 비교적 여유 있게 작업하면서 주변에 재밌는 일이 있으면 놀러 다녔다. 그러다 올해 중후반부터 다시 활기를 조금 되찾고 있다. 연말이 되니 일이 또 엄청 많아졌고. 최신 근황은 두 가지 작업을 하고 있다. 하나는 일러스트 작업이고, 하나는 개봉 예정인 영화의 캠페인을 맡았다. 새로운 시도다. 12월 초에 개봉할 <리슨>이란 영화인데, 그전까지는 굿즈를 만들어서 납품하기만 하면 우리 일은 끝이었다. 배포는 영화사에서 자체적으로 했고. 그런데 이번엔 굿즈를 통해 영화를 알리는 작업을 한번 해보게 된 거다. 우리가 만든 굿즈엔 다 애정이 큰데 늘 납품하고 나면 우리 손을 떠나야 한다는 게 아쉬운 부분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영화사 대표님이 같이 한번 해보자고 제안 주셔서 그 아쉬움을 해소해보려 한다. GV도 할 계획이다

 

일러스트는 어떤 작업인가

 

달력을 만들고 있고, 달력에 들어갈 일러스트를 그리고 있다. 의뢰처에서 구체적인 소재를 다 정해주셨는데, 이렇게 구체적인 요청에 맞춰서 작업하는 건 또 처음이라 조금 고전하고 있다. 항상 우리가 먼저 제안하는 쪽이었으니까

 

 

그래도 분명 잘 해낼 걸 알고 있다. 일이 많아지는 건 좋기도 하지만, 그만큼 자잘한 일도 많아진다는 얘기다. <씨네핀하우스>의 일은 현재 세 명에서 다 하고 있으니, 버거울 때도 있을 것 같다. 실제 일은 디자인한 시안 보내고, 그 시안으로 제작하고, 제작하면 포장해서 납품하는 깔끔하고 멋진 과정만 있는 게 아니지 않나. 자질구레한 갖가지 일이 껴 있으니까. 컨디션 관리는 어떻게 하나

 

일을 시작한 초반에는 일과 쉬는 시간이 구분되지 않는 게 힘들었다. 체력관리를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기도 했고,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는 친구들과 나를 비교하면서 그 경계가 없는 것에 관한 고민도 있었다. 억지로라도 만들어야 하나? 생각하기도 했고. 근데 지금은 체력이나 시간 안배에 관한 고민을 전혀 안 한다. 왜냐하면 그 고민을 할 시간조차 없다. 지금 당장 눈앞에 해야 할 일이 쌓여있으니까 오히려 여유에 관한 생각을 안 하게 된다

 

느끼지 못하더라도 몸 한 편엔 피로가 계속 쌓이고 있지 않을까. 어느 순간 확 덮쳐들까 걱정이다

 

쌓이고 있다는 걸 완벽히 느낀다. 근데 올해 많이 쉬어봤지 않나. 그게 더 힘들더라. 항상 연초에는 일이 좀 없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쉬는 시간이 생길 거라 예상하며.. 일이 많이 있을 때 열심히 하자 생각하고 있다

 

쉴 때는 뭐하고 쉬나

 

밀린 취미를 한다. 취미가 많은 편이다. 아무 생각 없이 계속 자전거만 타고 싶다. 캠핑도 가고 싶고, 못 본 영화나 애니메이션, 드라마도 몰아서 보고 싶다. 디자인 공부도 더 하고

 

다른 일로 우리가 통화한 일이 몇 번 있지 않나. 그 통화들을 나눌 때, 당신은 내 말에 대한 답으로 ‘재밌을 거 같은데요.’라 종종 말했고, 그 말을 세 번 정도 들었을 때 나는 당신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은 재밌을 것 같으면 하는구나, 다르게 말하면 본인이 정말 재밌다고 느껴야만 움직일 수 있구나’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보통 뻔뻔할 순 있어도 음흉하진 않다

 

최근에 비슷한 말을 들었다. 나 보고 순수해 보인다고 하더라. 나는 정말 약삭빠른데.. 어쨌거나 내가 저 말을 했다는 걸 의식하진 못한다. 근데 확실한 건 나에게 같이 해보자 했던 것들이 재밌게 들렸기 때문에 저 말이 나갔을 거다. 보통 일 관련 연락이 오면 한 발 떨어져 들어보려고 한다. 그럼에도 솔깃할 때, 바로 반응한다. 그렇지 않을 땐 주춤하기도 한다. 내가 생각했을 때 나는 계산적인 편이다. 어떻게 보일지도 많이 고려하고... 주변 사람이 보는 내 모습과 나는 좀 다르다

 

부산으로 내려오는 기차 안에서, 재밌어 보이는 걸 선택해 온 시간이 쌓여 지금의 ‘어주영’과 <씨네핀하우스>를 만든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자 재밌을 것 같았던 것들의 역사를 정리해보고 싶어졌는데, 기억나는 처음은 언젠가

 

<씨네핀하우스>의 창업 계기이기도 한데, 대학교 때 보게 된 한 영화가 있었다. 영화관을 나와서도 계속 생각났고, 그 영화에 관한 생각이 몇 주간 이어졌다. 그래서 관련 자료도 찾고, 영화의 이미지도 뽑아서 꾸미고 그랬다. 그런 과정에서 굿즈 역시 사려고 찾아봤는데 없더라. 대신 굿즈를 찾는 과정에서 공식적으로 발매된 굿즈가 없을 땐, 팬이 직접 제작하는 경우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걸 보며 나도 해보고 싶다 생각했고, 디자인이라도 해봐야지 하다가, 뱃지를 만들었다. 상품으로 판매한 건 아니지만, 기획하고 디자인하는 과정이 너무 재밌었고, 나와 너무 잘 맞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26살 정도의 일이다. 아, 그 영화는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영화가 처음 좋아졌을 때를 말하지 않을까 짐작했는데, 내가 틀렸다. 그래도 궁금하긴 하니까 굳이 물어보겠다. 영화에 매료된 건 언젠가

 

의식을 못 하고 살았는데, 크고 나서 되돌아보니 아빠가 영화광이었더라. 저녁이 되면 거실 TV에는 항상 영화가 흘러나왔다. 아빠는 비디오 가게나 DVD 가게에 가서 영화를 빌려왔다. 난 모든 집이 그렇게 하는 줄 알았다. 여가시간에 가족들과 빌려온 영화를 보는 게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일인 줄 알았던 거다. 그게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란 걸 깨달은 건 대학교 때. 영화를 전공하며 봐야 했던 영화들이 이미 집에 다 있다는 걸 확인하면서다. 아빠는 영화 비평이 뭔지도 모른다. 그냥 재밌다 재미없다, 이 영화 비슷한 건 이런 거 있다 하는 정도다. 아빠는 영화를 있는 그대로 즐긴다. 나도 모르게 그런 아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아버지와 같이 비디오 가게에 간 기억도 있나. 나는 비디오 가게 하면 비디오가 꽂혀 있는 진열장 위로 붙어있던 ‘구프로’, ‘신프로’, ‘최신프로’와 같은 명찰. 주인 자리 뒤로 반납된 비디오가 꽂혀 있던 장면. 구석 저 끝에 숨어 있던 성인 비디오 같은 게 기억난다. 또 우리 동네는 특이하게 건전지 충전을 해줬다. 미니카가 한창 유행했는데, 동네 애들이 다 비디오 가게에 가서 건전지를 충전하고 그랬다. 지금 생각하면 왜 거기서 건전지 충전을 해줬는지 이해가 안 가지만

 

정말 추억이다.. ‘쾌청’도 기억나나? 그 파란색 테이프.. 생각나는 기억이 많다. 비디오 가게에 가면 일단 도서관처럼 진열장이 쭉 있었고, 아빠는 어딘가 구석에 가서 아빠가 볼 영화를 골랐다. 그럼 나는 동생이랑 애니메이션, 디즈니 코너에 가서 장난감 고르듯 재미난 영화를 찾았다. 그러다가 어린 나에게 정말 큰 영감을 준 영화를 발견하게 된다. <천재 소년 지미 뉴트론> 천재 주인공이 나오는 애니메이션인데, 걔가 온갖 도구를 개발해 학교에 가고, 외계인과 싸우는 그런 내용이다. 그 영화를 보고 완전히 매료돼서 지금도 가끔 다시 볼 정도다. 또 다 본 비디오를 검은 비닐봉지에 넣고, 비닐을 묶어서 비디오 가게 문고리 앞에 걸어 놓은 기억도 있다


그렇게 자연스레 영화를 좋아하게 됐으니, 대학에 진학할 때도 큰 고민 없이 영화 관련 학과를 선택한 건가. 전공 선택을 앞두고는 보통 고민이 많은데, 영화 쪽은 아무래도 반대하는 사람이 많으니 더 고민됐을 거 같다

 

이론보다 실기 위주의 커리큘럼이 있는 학과가 더 잘 맞을 거 같다는 생각으로 찾다가 내가 선택한 전공을 알게 됐다. 그래서 학교 홈페이지나 관련 카페를 들어가 보니, 그곳에 올려진 사진 속 학생들이 너무 재밌어 보더라. 여기 들어가서 공부하면 뭔가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생겼고. 주변에서도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울린다거나 어떻게든 될 테니 해보란 얘기가 많았다. 그렇게 들어갔는데 나와 잘 맞았다

 

그렇게 진학한 대학에서 영화도 몇 편 만든 걸로 알고 있다. 절대 안 보여주겠지..?(정답) 지금 당장 볼 수는 없으니 어떤 영화였는지 소개라도 해달라

 

연출로 단편 영화 세 편을 만들었다. 두 편은 말도 안 되는 스릴러 영화였고, 한 편은 시상을 장면으로 만드는 작업이었다. 사랑이란 감정을 시어로 표현한 뒤, 장면으로 만들고, 나래이션을 넣어서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때는 뭔가 해냈다 하는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다시 보면 ‘나는 왜 이렇게 돈과 시간과 사람들의 인력을 낭비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너무 미안하다. 작품 볼 때마다, 그 크레딧이 올라 갈 때마다

 

그렇게 영화 현장을 겪었고, 또 영화제 스태프로도 일했다. 그렇게 일한 경험의 결론은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영화를 만드는 것, 현장에서 스태프로 일하는 것, 영화제에서 일하는 건 또 다 다르기도 한데,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맞지 않는다고 느껴졌나

 

현장 같은 경우엔, 큰 상업 영화 현장에서 일한 적은 없고, 독립영화 현장만 가봤다. 그것조차 깊게 관여한 건 아니어서 이 일이 나에게 맞다 안 맞다 느낄 새도 없었고. 영화제 스태프 역시 단기로 한정된 기간만 일한 거라 안 맞다고 하기엔 경솔한 부분이 있다. 근데 짧게 일하면서 매료된 적이 없는 건 분명하다. 그에 비해 굿즈 제작은 짜릿하다. 성취감도 엄청나게 크고. 굿즈가 잘 돼서 그 영화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줄 땐 진짜 뿌듯하다. 과거 짧게 경험한 일들이 지금 하는 일에 비해 나에게 있어선 덜 짜릿했다는 얘기 정도로 이해해주면 좋겠다. 나에게 한정된 얘기다

 


영화 산업에서 일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그 산업의 중심이라고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건 영화를 만드는 쪽이다. 그러다 보니 영화를 만드는 쪽을 제외한 다른 영역의 사람을 주변부 취급하는 경향도 있다. 물론 실제론 전혀 그렇지 않지만, 이런 보편적 인식이 개인의 선택에 끼치는 영향력도 무시할 순 없다. 게다가 당신은 영화를 만들어보기도 했으니까. 영화가 아닌 영화 굿즈를 만들기로 결정했을 때의 마음을 묻고 싶다

 

단편 영화를 만들어보면서 내 능력의 한계를 깨닫긴 했다. 영화를 잘 만들고 싶어도, 감독으로써의 역량이 없더라. 작품이 완성됐을 때 그걸 보면 영화적인 가치도 없고, 나에게 발전 가능성이 보이지도 않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만족스럽지 않았고. 그래서 난 영화 작업을 하면 안 되는 사람이란 판단도 빨리했다. 대신 난 영화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과 함께 즐거움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란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잘하는 거에 집중하자고 결정했다. 그런데 요즘 그런 건 있다. 굿즈를 만들면서 아무래도 많은 영화를 보게 되니까, 좋은 영화를 보면 ‘아 저 작품을 내가 만들었다면 좋을 텐데’ 하는 욕구가 생기긴 하더라. 그래서 항상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소재나, 재밌고, 사람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시나리오를 준비해서 내가 확신이 생겼을 때 도전해볼 수 있게. 그게 몇 살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정확히 해두어야 할 것 같아 다시 물어보겠다. 예를 들어 밴드에서 기타리스트를 했던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 사람은 밴드를 하던 와중에 자신의 기타 연주는 한계가 있다고 느끼게 된다. 그래도 음악과 완전히 무관한 일은 하고 싶지 않으니까, 고민 끝에 기타 가게를 연다. 그렇게 연 기타 가게에선 기타도 팔고, 수리도 하며 여전히 음악하고 있는 사람들을 마주하게 되지 않겠나? 그러자 그는 스멀스멀 ‘나도 다시 한번 해보고 싶다’ 생각한다. 이런 경우엔 거칠게 말해 포기했던 것에 다시 욕심이 나는 경우라고 말할 수 있지 않나. 내가 궁금한 건 당신도 이런 경우인 건지, 아니면 영화를 만드는 것에서 영화 굿즈를 만들기로 선택했던 마음이 포기가 아니라, 그냥 말 그대로 ‘지금은 이게 하고 싶어’ 였고, 이 일을 하다 보니 ‘어? 다시 한번 영화도 만들어봐?’ 하는 마음이 새롭게 생겨난 경우인 건지 하는 거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난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영화는 보편적으로 시나리오를 직접 쓰지 않나. 자기 시나리오로 연출하고. 근데 그 당시의 나는 시나리오를 쓸 수 있는 바탕이 없었다. 어떤 얘기를 하고, 어떤 마음을 전달하고 싶은지가 있어야 글도 나오고, 완성도도 생길 텐데, 난 그런 깊이나 통찰력이 없어서인지 재미없는 시나리오만 나왔다. 그래서 ‘지금은 아니야’라고 생각했다. 작가적인 역량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요즘 다시 영화를 찍어보고 싶단 생각이 든 건, 나 스스로 조금은 준비가 되어가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인 것 같다. 영화를 많이 보기도 했고, 다른 사람이 쓴 글을 많이 보면서 했던 생각이 많이 쌓였다. 그래서 곧 시나리오를 쓸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시나리오를 영상으로 연출하는 건 학생 때 이미 해봤으니까, 시나리오만 나오면 잘 할 수 있을 거란 막연한 자신이 있다. 그러니까 질문에 답하자면 자연스러운 생각의 변화에 가깝다

 

그런 맥락에서 <씨네핀하우스>의 첫 의뢰 작업이 영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더라. 너무 비장한 제목이긴 하지만, 아무튼 뭐 끝나지 않았다는 거다. 사실 달라진 거 없이, 어제는 어제 재밌을 거 같은 일을 했다면 오늘은 또 오늘 재밌을 거 같은 일을 하는 거니까. 이제 굿즈 얘기도 좀 해보자. <씨네핀하우스>는 ‘영화를 기억하는 또 다른 방법을 제시합니다’란 문장을 간판에 내걸고 있고, 실제 디자인 과정에서도 영화 굿즈가 영화의 키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도록 만드는 게 가장 핵심이라고 말해왔다. 우선 말해온 ‘영화의 키 이미지’란 것에 대해 정의를 해달라

 

영화가 다 끝나고 났을 때, 기억에 남아 있는 이미지. 그 장면이 영화의 전체적인 내용과 크게 상관없다 하더라도. 물론 키 이미지는 하나가 아닌 경우도 많다

 


영화 굿즈를 만드는 사람이라 상상했을 때, 거기서 고민할 지점이 생길 것 같다. 예를 들어 <그녀>라는 영화의 핵심이 뭐냐 하고 물으면, 누군가는 사람인 ‘테오도르’와 ai인 ‘사만다’ 사이의 사랑이라 말할 것이고, 누군가는 <그녀> 특유의 색감과 분위기를, 누군가는 또 ‘사만다’를 연기한 ‘스칼렛 요한슨’의 목소리 자체가 이 영화의 핵심이라 주장할 거다. 그러니까 내가 궁금한 건, 같은 영화를 본 한명 한명의 키 이미지는 다를 수밖에 없을 텐데, <씨네핀하우스>의 키 이미지 결정엔, 그 영화에 관한 ‘어주영’의 시선과 취향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더 많은 관객이 그 영화의 키 이미지라고 선택할 만한 장면을 예상하고 고르는 것인지에 관한 질문이다

 

그건 작업 순서와 연관이 많다. 우리에게 작업을 의뢰할 때, 대부분의 영화사는 우선 영화를 보여준 뒤, 우리의 시안을 폭넓게 제안받는다. 그때 전달하는 1차 시안은 내 시선이다. 보내준 1차 시안 중 하나를 정해 결정하는 영화사도 있고, 영화사의 생각과 벗어날 경우엔 다시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아예 엎어지는 일도 있고. 정리하자면 나의 시선으로 시작해 영화사가 생각하는 대중적인 시선에 맞춰나간다. 물론 서로의 입장이 너무 다를 때도 있고, 그래서 아쉬운 결과물이 나올 때도 있지만, 최선의 굿즈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기억은 무형의 것이다. 어떤 영화를 기억할 때, 우린 그걸 무형으로 기억한다. 근데 굿즈를 가지고 기억하게 만드는 방법은 이 기억을 유형으로 제시하는 거다. 이 과정에서 기억은, 물론 선명해질 수도 있지만, 왜곡될 수도 있다. 그런 두려움은 없나

 

고민이 정말 많은 부분이다. 좋아하는 포인트나 취향은 다 다를 텐데, 내가 정의 내려버리는 거니까. 내가 만든 굿즈 중에 간혹 아쉬운 게 보이면 죄책감이 많이 든다. 그래서 시안을 최대한 다양하게 만든다. 어찌 됐든 내가 먼저 시안을 제안해야 작업이 시작되니까, 내가 세 개의 시안을 준비하면 세 개 안에서 고르게 되고, 다섯 개를 준비하면 다섯 개 안에서 고를 수 있게 된다. 나중에 봤을 때 아쉬운 게 안 생기려면 처음부터 많은 선택지를 제시하고, 그만큼 의견도 많이 받아서 완성하는 게 결과적으로도 좋고, 나도 가장 만족스럽다

 


이런 고민을 조금 덜어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영화 속 소품을 실제로 구현하는 것이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나도 몰랐는데 이번에 대화를 준비하며 살펴보니 3년 전 받았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성냥을 통해 <씨네핀하우스>와 나의 인연이 시작됐더라. 조금 다른 얘기를 해보자면 내 욕심으론 굿즈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영화의 장면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소품은 아니지만, 봤을 때 그 영화를 떠올릴 수 있는 굿즈. 영화에 대한 <씨네핀하우스>의 보다 사적인 견해를 굿즈로 풀어내는 거랄까. 이렇게 하면 영화사에서 주문하는 굿즈를 비교적 수동적인 입장에서 제작해야만 하는 현 구조에서, 좀 더 주도적인 입장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생기고

 

영화 굿즈를 만드는 이상 완전히 새로운 건 할 수 없다는 게 현실이다. 현재는, 영화 굿즈의 존재 이유가 영화에 관한 관심을 한 명이라도 더 가질 수 있도록 하는 홍보 수단이니까. 그 수단으로써 만드는 굿즈를 제3의 것으로 할 수는 없다. 영화 굿즈라는 작업 내에서는 쉽지 않을 거 같다. 이런 건 가능하다. 끝난 영화에 내가 새롭게 만들어 본 이야기를 붙인 뒤, 그걸 굿즈로 만들어 본다던가, 그 영화에 관해 사람들이 나눈 얘기들을 굿즈로 만드는 거. 물론 난 그렇다 해도 이 굿즈의 저작권은 나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 한 줄이라도 영화에서 영감을 받아 가져왔다면 그 영화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또 다른 즐거움은 줄 수 있을 거 같다. 일종의 팬픽처럼 끝나 버린 영화의 새로운 세계관을 굿즈로 풀어보는 거다

 

<씨네핀하우스>를 좋아하는 마음에서 이런 고민을 하게 되는데. 굿즈라는 게 지금이야 영화나 출판 마케팅 시장이 워낙 기본적으로 시도하는 부분이니까 괜찮지만, 결국은 매니아 시장이다. 그렇다면 <씨네판하우스>의 실력이나 만들어 놓은 역사와는 무관하게, 콘텐츠 마케팅 시장의 전략 흐름에 따라 <씨네핀하우스>의 운명이 좌지우지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예 새로운 지점을 <씨네핀하우스>가 먼저 열어 볼 순 없을까 하는 생각도 했고

 

이미 그런 시기에 조금 들어왔다. 관객들도 그저 굿즈를 준다 해서, 그걸 받기 위해 영화를 꼭 보러 가는 경우는 점점 줄어드는 추세다. 영화사에서도 유행하는 아이템만 원하지 부가적인 굿즈에 관한 의뢰는 줄이고 있고.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영화로 어떤 걸 만들어 판매할 수는 없다. 그게 아무리 3차 창작물이라 할지라도, 그 배경에 원저작물이 깔려 있다면 난 그걸로 돈을 벌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대신 영화사에 새로운 방법을 제안할 순 있고, 아까 말했던 <리슨>의 경우처럼 조금 다른 시도를 해볼 순 있다. 그것과 별개로 새로운 걸 만들고 싶은 우리의 욕구는 다른 방법으로 채우려 한다. ‘월간 씨네핀’ 시리즈도 그중 하나였고. ‘월간 씨네핀’을 하면서 느낀 건, 우리가 이걸 왜 하게 됐고, 왜 이렇게 디자인했는지 하는 스토리텔링이 너무 중요했고, 스토리텔링을 쓰다 보니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것과 비슷하더라. 캐릭터를 만들고, 그 캐릭터들이 속한 세계관도 만드는 식으로, 곧 우리만의 콘텐츠가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저작권 관련해서 하나만 더 물어보겠다. 이를테면 비평 같은 경우엔 결국 영화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분야이지만, 평론가들은 비평을 모아 비평집도 내고, 판매도 한다. 그리고 나는 이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 정도는 허용돼야 전체적으로 더욱 발전할 수 있다고도 생각하고. 같은 맥락에서 굿즈를 만든다면 문제가 없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계속 남는다. 어떤 마음인지 짐작은 되지만, 너무 엄격한 것 같아 내가 괜히 아쉽나 보다

 

굿즈를 만들 땐, 물론 그 영화를 좋아하는 마음이 우선이지만, 내 마음 안엔 수익을 내야 한다는 마음도 존재한다. 그리고 또 다른 한 편엔 영화의 팬으로써 원저작자에 대한 존중이 크게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고 했을 때, 상업적인 의도에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이용하는 게, 그 영화와 그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훼손하는 일이란 생각이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먼저 제안하는 거다. 이렇게 해보자, 저렇게 해보자 하고 영화사에 제안하는 거. 또는 그 영화의 원저작자에게 제안하는 거

 

괜히 내가 아쉽고, 욕심이나 재차 물었지만, 해준 얘기는 굉장히 멋지고, 감동적인 얘기다. 그런 부분에서 무례한 사람이 훨씬 많으니까. 다음 얘기를 하자. 온갖 종류의 굿즈를 다 만들어왔는데, 아직 만들지 못한 형태의 굿즈도 있나. 꼭 만들고 싶은 것 중에

 

있다. 레진으로 만든 피규어. 조립식도 좋고, 완성품도 좋다. 근데 제작할 수 있는 공장을 찾지 못했다. 단가를 맞추려면 거의 다 중국에 있는 공장과 해야 하더라. 아니면 수작업으로, 한정판으로만 해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건 현실적으로 힘들다. 언젠가 꼭 해보고 싶다. 또 우리가 작업 하다 보면 환경을 오염시키는 쓰레기가 꽤 많이 나온다. 그런 걸 활용해서 만들 수 있는 게 없을까 늘 고민한다. 영화 현장에서 나오는 폐기물도 한번 활용해보고 싶고. 그런 게 진정한 의미의 현장 굿즈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좋아하는 영화 세 개만 말해달라. 그리고 그 영화와 굿즈를 만들어보고 싶은 영화가 같다면 어떤 굿즈를 만들고 싶은지, 다르다면 굿즈를 만들어 보고 싶은 영화는 뭐가 있는지

 

‘굿즈로 만들어 보고 싶은 영화’하면 어릴 때 재밌게 봤던 영화들이 생각난다. 이미 많이 나왔지만 <해리포터> 그리고 <천재 소년 지미 뉴트론>, <리치리치> 이렇게 세 개. 어린 시절을 떠올릴 수 있도록 판타지 요소를 넣어서 재밌게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좋아하는 영화는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그을린 사랑>, <패왕별희>

 

영화뿐만 아니라 문화예술 전반의 99%가 서울-경기에 몰려 있으니까. 이럴 땐 서울에서 한번 해보고 싶다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나. 그게 아니라면 부산에서 일하며 아쉬운 게 있다거나

 

서울에 있으면 보다 빨리 해결될 수 있고, 좋았겠다 하는 경우는 엄청 많았다. 같이 일하는 분의 대부분이 서울에 있다. 의뢰처의 70~80%가 서울에 있고, 제작하는 공장도 서울에 있다. 그러다 보니 많으면 매주 갈 정도로 서울에 자주 간다. 20일 가까이 서울에서 보낸 적도 있고. 그럼에도 부산에 있는 건, 이미 자리를 잡아버린 거 같다. 생활도 일도. 뿌리를 아예 내려버렸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제 떠나기가 쉽지 않아졌다

 

나는 <씨네핀하우스>가 디자인이나 제작도 잘하지만, 사업적으로도 정말 잘한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큰 영화, 작은 영화의 비율도 좋고, 기관이나 기업과의 협업도 영화 굿즈와의 균형을 잘 유지하며 해나간다. 사업적인 면에선 어떤 걸 많이 신경 쓰나

 

하고 싶은 작업이 있고, 하고 싶지 않아도 경영적인 측면에서 해야 하는 작업이 있다. 어쨌든 사무실 운영도 해야하고, 직원도 있으니까. 그러다 보니 결과적으로 균형 잡혀 보이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영화 같은 경우엔 내 가치관과 너무 안 맞으면 작업을 거절하기도 한다

 

사업적인 목표도 있나

 

<씨네핀하우스> 라는 회사가 좋은 브랜드이자 좋은 회사가 될 수 있도록 기반을 다지자는 게 현재의 우선적인 목표다. 회사가 작고 월급도 많진 않지만, 이런 점들 때문에 <씨네핀하우스>에서 일하고 싶다 하고 느낄 수 있도록. 복지나, 좋은 업무환경을 갖추는 것. 지금은 많이 부족하다

 

마지막 질문이다. 부산으로 내려오면서 생각했다. 날씨 좋은 날, 영화의 전당에서 하루 종일 같이 영화를 보면 좋겠다고.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때 우리가 볼 영화가 무엇이면 좋겠나. 토요일 정도다 생각하고, 3회차의 상영으로. 어떤 영화로 그날 하루가 채워지길 바라는지 프로그램을 짜 달라

 

좀 고민해봐도 될까. 저녁 시간은 확실하다. <미드나잇 인 파리>,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보면서 마무리하고 싶다. (한참을 고민한 뒤) 그리고 음... <마르셀의 여름>을 처음에 보고, 점심땐 <코쿠리코 언덕에서>

 


제품사진 씨네핀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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