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를 나누는 내내 그는 답을 하기에 앞서 잠시 머뭇거렸다. 머뭇거릴 수밖에 없어 보였다. 지나간 시간에 대해 생각하는듯했고, 난 그것이 그가 지나간 시간을 함부로 말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노력이라 생각하며 입을 열 때까지 조심스레 기다렸다. '삼점오'의 음악을 들을 때도 그랬다. 일상적인 말들이 주를 이룬 노래를 들었을 때도, 통과한 시간에 대해 되새김질하는 노래를 들었을 때도, 꺼내기까지 그 어느것 하나 쉬워 보이지 않았던 탓에 조심스레 들어야만 했다. 그렇다 해서 그 조심스러움이 노래를 듣는 것에 방해가 됐던 건 아니다. 오히려 그 조심스러움 덕분에 노래에 더 편안히 안착할 수 있었다. 이 조심스러움을 예의라고 읽어도 좋을 것 같다. 돌이켜보면 이 대화는 기억과 예의에 관한 대화였겠다 생각하게 된다.
싱글이 나온 지 오늘로 정확히 두 달이 됐다. 그사이 어떻게 지냈나
<흑오야평>을 냈을 때와는 조금 달랐다. 그 당시엔 발매 직후 음원 사이트에 자주 들어가 보곤 했는데 이번엔 반응에 대해 딱히 그런 게 없었다. 예전보다 내고 난 이후 작품에 대해 곱씹어보지 않는 것 같다. 우선 일상이 그때에 비해 엄청 바쁘기도 하고, <숲속에서>를 낼 당시가 곡에 대해 구상한 지 이미 많이 지난 때라 <숲속에서>에 대한 나의 혼란스러움이나 내 나름의 정의가 다 끝난 상태였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대한 궁금증이 <혹오야평> 때와 비교하면 많이 적었다.
그동안 ‘삼점오’가 지나온 시간을 이번 대화를 통해 쭉 한번 훑어볼 생각이다. 그런 생각으로 대화를 준비하며 이름에 대한 뜻을 찾아보니 영화 평점(3.5점 정도의 평점을 받는, 5점을 못 받더라도 감독의 색이 분명히 담긴 영화 같은 음악)에 관한 의미였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요즘 본 영화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나.
최근에 본 영화 중엔 <밀양>이다. 최근에 종교적인 어떤 경험을 하기도 해서 그런 것도 있고, 원래 나는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다. 그래서 오히려 20대 때는 반기독교적인 생각이 강해서 혼란스럽기도 했고, 일부러 더 어두운 것들을 좋아했다. 근데 그 끝에 가서 종교적 체험을 경험하게 됐고, 그때부터 종교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지금도 고민을 계속하긴 하지만 그 경험 이후엔 종교에 대한 시각 자체가 달라지고 관심도 많아서 <밀양>을 보니 많은 생각도 들고 재밌게 보게 된 것 같다.
그 종교적인 경험이 어떤 것이었는지 물어봐도 될까
작년에 우울증이 좀 심했고, 그것 때문에 허무감에 깊이 빠져서 사람도 안 만났다. 다 자신이 없었다. <숲속으로>도 나에겐 그런 정서다. 내 프레임 안에 다 가둬놓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그런. 그런데 그런 쪽의 생각이 깊어지다 보니 왜 살아야 하며 죽으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이 계속 들었다. 그런 시기를 계속 보내던 와중에 마음속에서 강한 메시지를 듣게 됐다. 그 이후로 회개를 하게 됐는데, 그때 정말 많이 울고 반성했다. 그런 경험이 있고 나니 종교에 대한 시각이 바뀌었던 것 같다.
내가 생각할 때 <밀양>이란 영화는 종교에 대한 양가적인 면을 다 보여준다. 대표적으로 박도섭(조영진)이 자신을 찾아온 신애(전도연)에게 본인은 하느님이 다 용서를 해줘서 이미 용서를 받았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고, 종교시설을 열심히 출입하는 신애 주변의 사람들 모습도 쉽게 긍정하기엔 어렵게 그려진다. 하지만 또 사람이 어디에 기대야 하고, 무엇에 위로를 받아야 하나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종찬(송강호)을 통해 풀어냈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어떤 우월적이고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라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 서로를 위하는 마음속에 신이 있다는 것에 대한 은유다. 다르게 말하면 종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다고 정의 내리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의지할 수 있다는 믿음과 행동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영화로 봤다.
내가 고민하고, 계속 생각하게 되는 부분도 휴머니즘과 초월적 존재의 개입 사이 어딘가의 지점에 있다. 그런 관점에서 나는 송강호라는 사람을 옆에 있게 만든 초월적 존재를 믿는 사람이다. 결국은 하느님이 사람에게 있고, 관계의 사이에 있다는 말도 맞지만, 그것만으론 설명이 부족한 지점도 분명히 있다. 초월적인 개입(종교적 체험)이 삶 속에 있었기에 그런 걸 믿게 됐다.
<흑오야평>에 관한 얘기를 먼저 해보자. 이따 더 자세히 얘기 나눠보겠지만, 내 인상엔 <흑오야평>과 최근에 낸 <숲속으로>는 전혀 다른 음악이다. 대표적으로 곡의 스타일과 가사를 쓸 때 선택되는 단어 같은 것들이 그렇다. 자세한 얘기를 하기 전에 <흑오야평>을 작업하던 당시로 돌아가 보자. 이 앨범은 어떻게 시작됐나.
그 당시 허무함이나, 내면에 정리되지 않은 혼란스러움과 같은 당시 젊은 사람들의 보편적인 정서가 나에게도 역시 있었고, 그것에 관한 허세 섞인 도취도 있었던 것 같다. 허무함이나 혼란함에 대해 너무 진지하고 어둡게 말하기보단, 그냥 가볍게 말하고 싶은 그런 허세. ‘언니네이발관’ 음악을 들어봐도 말하는 정서 자체는 우울감이 있고, 그 층수가 되게 지하에 있는데 음악 자체는 익살스럽지 않나. 나도 그런 결과 톤을 가진 음악을 해보고 싶었던 시기다. ‘혁오’나 ‘언니네이발관’이 했던 그런 방식의 작업을 나도 내 얘기를 통해 해보고 싶었던 거다. 그런 마음엔 전 애인의 영향도 있었고, 그 당시에 그런 걸 좋아하는 친구들도 주변에 많아 더욱 그랬다.
그래서 그런지 <흑오야평>을 들으며 곡 보다 가사가 우선된 음악이라 느꼈다.
가사를 무조건 먼저 쓴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난 곡 자체엔 그렇게 비중을 안 두는 편이다. 좋은 음악을 만들고 싶으면 가사 없는 곡을 작곡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굳이 노래를 만들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더더욱 가사에 관한 얘기를 해봐야겠다. <흑오야평>을 들으며 귀에 걸리는 단어들을 쭉 써봤다. 소파, 전자레인지 팝콘, 프로젝터, 전철, 이어폰, 형광등, 수다, 냉장고, 일기 등 일상적인 단어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를 들으면서 서사로 이루어진 대다수의 노래와 달리 <흑오야평>에 실린 노래들은 어떤 일상의 장면을 사진으로 찍은 뒤, 그 사진 속에서 언급한 단어가 보이는 부분만 잘라낸 조각만을 노래로 옮겨 놓는 방식의 가사라 생각했다. 이런 가사가 나온 맥락엔 전체의 서사를 담기가 버거웠던 당시 <삼점오>의 상태가 있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감정에 대한 정확한 단어를 쓰는 게 아니라 이런 장면의 잘라냄을 통해 듣는 이들이 각자 짐작하고 상상할 수 있게 했다는 점이 좋았다.
그 당시에는 머릿속에 이미지나 장면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면 그걸 가사로 정리해내려고 애썼던 것 같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왜 그랬는지 정확히 이해되지 않지만 당시엔 그랬다. 그리고 감정에 대한 가사를 쓰는 것에 부담감이 있었다. 학생이어서 그랬을까, 감정에 대한 직접적인 단어를 내가 그 나이 때 정확히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는 부담감이었다.
그리고 그런 단어를 쓰는 가사가 너무 많기도 하다. 그런 가사의 대부분은 나에게 큰 감동을 준 적이 없었다. 그런 단어들이 상업적으로 너무 많이 변질돼서 함부로 사용되는 것에 대한 반항심도 있었다. 얘기하다 보니 정리가 된다. 사람들 사이에서 무게가 충분히 있어야 하는 단어는 훨씬 더 남발되고, 일상적인 단어들은 활용 가치가 없다고 생각되는 게 아닌가 싶다.
<흑오야평>을 낼 때는 ‘삼점오’가 3명의 밴드였지 않나. 가사를 쓸 때 의견을 주고받기도 했나?
혼자 다 썼다. 이미 노래가 다 만들어진 상태에서 밴드가 구성됐다.
가사 얘기를 했으니 곡 얘기를 해볼까 한다. 나는 ‘삼점오’가 악기를 사용하는 방식이 흥미로웠다. 밴드라 하면 기본적으론 악기들의 소리가 어우러지는 것이 중요하다. 각 소리들이 프로듀서의 기준에 따라 합쳐지고 시너지를 내는. 하지만 <흑오야평>을 들어보면 소리가 하나로 합쳐진다기보단, 거실에 세 명이 모여있다 가정했을 때 소파, 바닥, 책상 등 각자의 위치에 널브러져 따로 읊조리는 소리가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곡이 되어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흑오야평>의 노래들이 너무 무겁고, 진지하게 들리기보단 경량성을 바탕에 두고 들렸던 것 같다. 내가 말하는 경량성은 요즘 얘기되는 천박한 미니멀리즘과는 다른 얘기다. 편안함에 가까운 경량성이다.
이런 감상은 처음 들어보는데, 그렇게 느낀 건 우리가 의도한 건 아닌 것 같고 아마 나의 프로듀싱 능력이나 사운드에 대한 어레인지 능력이 조금 미숙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그 당시에 다 어렸고, 녹음실에서 녹음을 해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게다가 합이 잘 맞을 수가 없었던 게, 전체적인 톤이나 기타 리프에 관한 얘기는 내가 만든 데모와 비교해가며 지속적으로 얘기하고 조금씩 변화시켜가긴 했지만, 처음부터 멤버가 같이 시작한 게 아니라 이미 내가 곡을 다 만들어 놓은 후 프로젝트성으로 만든 밴드이자 앨범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처음 만들어 온 노래를 들었을 때 다른 멤버들의 반응은 어땠나.
그냥 좋다고.. 좋다고 했다. 노래는 참 못 부르는데 좋다고.
노래를 못 부른다는 것에 동의하나?
나는 내가 어릴 때는 노래를 잘 부른다 생각했는데 <흑오야평>을 들어보면 확실히 못 부르는 거 같다.
<흑오야평>이 나온 지도 이제 꽤 됐다. 대화를 준비하며 <흑오야평>에 대한 반응을 다시 찾아봤는데, 주된 반응은 ‘편안했다’ ‘평화로워진다’ ‘안정이 된다’ 등이다 이런 반응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흑오야평>을 듣고 편안하다는 것이 고맙긴 하지만 그렇게 편안한 노래인지는 잘 모르겠다. 쓸 때 편안한 감정으로 쓴 노래가 아니어서 내가 그렇게 느끼는 것 같다. 나는 조금 부끄럽기도 해서 <흑오야평>을 잘 안 들춰 본다. 그래도 여전히 <흑오야평>을 들어주는 사람들을 보면 감사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물론 나 역시도 <흑오야평>에 대한 이런 감상을 틀렸다고 말하고 싶진 않는다. 그리고 그런 감상이 많은 것에 대한 까닭 역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단어들이나 연주 스타일 등등일 거라 짐작한다. 하지만 같은 시기에 20대를 통과한 사람으로서의 내 감상은 <흑오야평>의 표면에 자리한 편안함에 공감하면서도, 그 당시의 20대라면 대부분이 품고 살았을 결코 부정할 수 없는 불안과 망설임 역시도 느껴졌다. 따라서 그저 편안하기보단, 한편으론 쓸쓸하고 처연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난 차라리 그런 감상이 더 좋다.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이 솔직히 뭐가 편안한가.
이제 <숲속으로> 이야기를 해보자. 우선 셋에서 혼자가 됐다. 사실 음악을 잘 모르는 나로선 <흑오야평>도 작사, 작곡, 편곡, 기타 연주, 보컬, 코러스까지 다 혼자 했었기에 혼자가 됐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게 있으려나 싶긴 하다. 그래도 달라진 게 있다면 뭐가 있을까
전혀 없다. 일단 당시에도 셋이 활동을 많이 못 했다. 프로젝트로 시작되기도 했고, 다들 학교 생활도 바빴다. 그래서 ‘삼점오’라는 이름 자체가 내가 주관을 하고 다른 사람들이 도움을 주는 프로젝트로 내겐 정리돼 있다. 공연을 하고 그러면 다시 연주자도 구해야 하기 때문에 차이를 좀 실감하겠지만, 지금의 상황으로썬 오히려 보다 다양한 사람들과 작업할 수 있어서 자유롭다고 느낀다.
대화 초기에 <숲속으로>를 들으며 가사에 선택되는 단어나 곡 스타일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느꼈다고 했었는데, 먼저 가사부터 얘기하자면 간단히 말해 훨씬 많이 생략됐다. <흑오야평>은 아까 말한 것처럼 잘린 이미지가 연상됐다면 <숲속으로>는 가상의 공간을 찍은 뒤 현실에서 돌이켜본다는 인상이었다. 보컬 같은 경우에도 비교적 단조로웠던 <흑오야평>에 비해 코러스가 겹겹이 쌓이며 풍성해졌다. 악기 역시 두 멤버가 빠졌기에 기타만 전면에 나선다. 이런 변화를 통틀어 얘기해 보자면 의도된 것인가, 또는 시간에 의해 자연스레 발생한 것인가.
의도한 건 아니다. <숲속으로>를 만들 게 된 것 자체가 내가 의도해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친구 중에 한 명이 먼저 <숲속으로>의 기타 리프를 들려주면서 시작한 거다. 물론 시작은 그렇게 이루어졌지만 결과적으론 <흑오야평> 이후 시간 동안의 변화가 자연스레 담겼다고 생각한다. <숲속으로>엔 좀 더 많이 읽고, 좀 더 세상을 많이 알게 된 내가 담겨있다.
<흑오야평>이 복잡하고, 복합적인 감정과 불안을 잠시 제쳐둔 것 같아 도리어 아슬아슬하게 느껴진다면 <숲속으로>는 같은 것들을 정면으로 떠안은 것 같아 오히려 단단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얘기를 들으니 맞는 것 같다. <흑오야평>은 이미 우울이나 혼란이 사실은 내면에 엄청 깊게 자리 잡고 있는데도 표면적으론 아닌 척하고, 쿨한 척하고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영향을 주는 사람들도 다 떠났고, 그런 시기도 지났다. 그러면서 돌아볼 시간이 생겼고, 이게 그냥 아닌 척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다. <숲속으로>가 그런 불안과 혼란의 마지막 지점에서 나온 노래가 아닐까 싶다.
일반적인 경로라는 생각도 든다. 불안을 느낄 때 처음엔 회피하고 싶고, 아닌 척하고 싶다. 하지만 거듭 불안을 직면하다 보면 그 안에 잠기고, 헤어 나올 수 없을 만큼 우울해지기도 한다. 또 이런 시기를 오래 보내면 더 이상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에 반등을 원하게 된다. 난 이때 사람의 선택이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고 보는데, 사는 게 그냥 이런 거구나 하고 포기해버리는 방향과 소화하는 능력이 생겨 보다 건강한 쪽으로 나아가기 위해 애쓰는 방향이다. <숲속으로>는 후자의 과정을 거쳐 나온 노래라고 느꼈다.
맞다. 내면의 불안과 우울을 스스로에 대한 분석과 공부를 통해 빠져나오려고 했다. 거기에 결정적으로 대화 초반에 말한 종교적 경험을 하며 더욱 감사한 힘을 얻었고.
<숲속으로>를 낼 때는 이미 우울과 불안에 관한 관점이 바뀐 상태였지만, 내는 과정에서 다시 한번 치유를 받았다. 노래를 낼 수 있는 힘이 생겼다는 걸 확인해서도 그렇고, 만들어진 노래를 내는 것과 그냥 혼자 묵히는 것은 또 전혀 다르기 때문에도 그렇다. 혼자 가지고 있으면 그 노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노래처럼 느껴진다. 노래를 내면 지금 나의 위치가 확인이 된다.
숲이라는 건 사실 조금은 낯선 공간이다. 산은 많지만, 숲이라고 했을 때 떠오르는 광활한 평지 위로 나무가 빽빽이 펼쳐진 공간을 한국에서 만나기란 쉽진 않다. 숲이라는 것에 대한 이미지가 본인에겐 어떻게 정리돼 있나.
서구의 동화에서 숲에 대해 그리는 걸 보면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른다거나, 도피를 하는 장소다. <헨젤과 그레텔>만 봐도 숲이 안락하고 사람들에게 안식을 가져다주는 장소는 아니지 않나. 숲은 항상 미스터리하고, 사회와 사람들로 부터 고립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의식과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한다. 공개적이지 않은 공간이니까. 그런 생각을 먼저 하고 숲이란 단어를 고른 것은 아니었지만, 숲속으로의 가사가 한 번에 쏟아져 나올 때 그런 생각들이 함께 따라붙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숲속으로>를 감상할 때 꼭 뮤직비디오를 보라고 권하고 싶다. 뮤직비디오 작업은 어떻게 진행됐나.
뮤직비디오를 만들어 준 친구는 제천국제영화제 아카데미에서 처음 만났다. 그 친구가 내 데모들을 듣고 도와줄 테니 얼른 내라는 식으로 힘을 많이 줬었다. 그 친구와 아침에 산책을 자주 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했는데 그때 자연스럽게 뮤직비디오 얘기가 나왔다.
뮤직비디오를 찍기 전, 노래에 대해 내가 생각하는 이미지를 그 친구에게 전달해 줬고, 그 친구가 시놉이랑 콘티를 보내오면 내가 다시 수정을 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완성된 뮤직비디오 말고도 여러 아이디어를 그 친구가 줬지만, 내가 생각하는 명확한 이미지가 있어 지금의 방향으로 진행됐다.
어려움은 없었나?
로케이션을 두고 제작비 등을 고려해 강원도로 갈 거냐, 제주도로 갈 거냐, 고민을 많이 했는데 결과적으로 제주도가 선택됐다. 처음엔 걱정했다. 머릿속에서 숲을 떠올렸을 때 제주도를 생각하면 아기자기한 이미지가 많이 떠오르니 아무래도 강원도 쪽이 더 낫지 않을까 했다. 근데 감독이 찾은 로케이션을 보고 훌륭하다.. 하고 감탄했다.
내가 출연하게 된 것도 나는 원래 생각이 없었지만 그 친구가 나와야 한다 주장한 끝에 결정됐다.
뮤직비디오는 숲으로 들어갔지만 결국 숲을 빠져나오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베개를 든 사람(주인공)이 숲을 지나갈 때,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을 만나지 않나. 난 주인공을 바라보는 이들의 표정이 슬픔 섞인 부러움으로 읽혔다. 슬픔은 미처 숲을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들로 보여서였고, 부러움은 당연히 통과해 나가는 사람에 대한 부러움이다. 하지만 이들 역시 마지막엔 나란히 서기에 다음을 기약해도 되겠단 생각을 하기도 했던 것 같다.
이들을 지나 숲을 빠져나온 주인공은 뒤돌아 숲을 바라보며 베개를 양팔로 안는다. 이런 장면의 연결은 노래가 하나의 작은 꿈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아이가 자다 깨 무서우면 베개를 양팔로 감싸 안고 부모님이 있는 방으로 가 칭얼거리는 장면이 연상되기도 해서 더욱 그랬다. 정리해 보자면 <숲속으로>는 불안한 감정 속에 사람을 남겨두고 끝나는 노래가 아니라, 그 시기를 통과한 뒤, 보다 나은 상황에서 그때를 되돌아보게 하는 노래라는 생각이다.
우선 베개는 그 친구가 촬영 전날 아이디어를 낸 거다. 수면이라는 게 죽음이나 마비와 연결이 되고, 그런 걸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오브제라 생각했다. 좀 아쉬운 건 베개가 너무 감상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는 여지였다. 아이 같은 걸 표현하고 싶은 건 아니었고 상징적으로 다가가길 바랐는데 베개가 조금 방해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난 뮤직비디오를 좀 더 차갑게 만들고 싶었다. 내 스스로가 그런 게 좀 있는 것 같다. 나란 사람은 그렇지 않은데, 따뜻한 마음을 나약함이라고, 치부라고 생각하는 게 좀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더욱 시크하고 차가운 것에 끌린다. (아직 <흑오야평>에서 못 벗어난 건가(웃음)) (웃음)사실 나는 따뜻한 사람이고, 냉랭해야 할 이유도 전혀 없는데 여전히 그런 것에 대한 동경이 있다. 하지만 비디오를 만든 친구 자체가 워낙 따뜻해서 그 친구의 색이 많이 묻어 나오다 보니 지금의 비디오가 나온 게 아닐까 싶다. 마지막에 뒤돌아 숲을 보는 장면은 사실 어떻게 끝내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그렇게 됐다. 어떤 의미를 담은 건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엔 <숲속으로>를 낸 것이 ‘삼점오’에게 불안과 우울의 시기를 통과한 것에 대한 세레모니나 정리라고 얘기한 것처럼, 당시에 의도하지 않았고, 논리적으로 계획된 장면은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도달한 장면이 아닐까
그럴 수도 있겠다.
이런 생각을 더욱 힘주어 하게 된 게, 내가 <숲속으로>의 소개글을 쓰지 않았나. 당시 나는 노래를 아주 면밀히 듣고 쓴 건 아니었다. 몇 번의 감상을 끝낸 뒤 남은 인상이 ‘무성한 숲이 푸르다는 건 상상의 착각’이란 첫 문장을 데려왔고, 그 뒤는 단숨에 풀렸다. 그래서 전달한 뒤, 아무래도 이게 노래를 소개하는 글이라 걱정도 했다. 지금 내가 노래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어떡할까 하는. 그런데 결과적으로 노래와 비디오 소개글 다 다른 사람이 만들었는데도 하나로 꿰어진다는 기분을 강하게 느끼게 됐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4년 만에 나온 노래에 많은 사람들이 반겨 주는 것 같다. 이런 반응은 또 다음 작업을 할 수 있는 힘이 된다. 앞으로의 발매 계획이 있나
내가 팬덤이 있거나 그런 게 아니니까 누군가에게 지지 받고 있다는 느낌을 체감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있으면 더욱 신기하고 감사하다. 이번에 뮤직비디오에 출연한 배우 중 한 분도 ‘삼점오’ 노래를 이미 알고 있어서 비디오를 찍겠다는 소식을 듣자 먼저 출연하겠다고 했다더라. 앞으로의 목표라면 올해가 가기 전에 싱글을 하나 더 내는 정도다.
마지막 질문이다. 나는 아직은 싱글이라는 게 익숙한 형태가 아닐 때부터 음악을 들어서 정규 앨범을 기다릴 때의 그 절절함이 아직 남아 있다. 그리고 한편으론 아티스트가 내놓는 결과물이 아주 거룩한 것이 아니라, 조금 가볍게 생각하자면 그냥 당대의 기록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내년에 30대가 되기도 하고, 많은 시간이 지나기도 했으니, 정규를 한번 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쯤 정규를 한번 내고 싶다는 생각을 나도 한다. 싱글로 하나하나 내는 건 작업자로서의 정체성을 확립시키기에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 역시 정규를 내고 싶다. 하지만 그게 언제가 될진 모르겠다. 해야겠다는 동기부여가 오면 사실 아주 빨리 훅 해치워 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은 굳이 내야 한다는 마음에 억지로 하고 싶지는 않다 생각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너무 많은 노래가 세상에 나온다는 생각도 있다. 돈을 벌기 위해 음악이 계속해서 발표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게 사실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난 음악으로 돈을 벌고 싶은 생각이 없기 때문에 정규앨범을 내게 된다면 경험이 좀 더 쌓이고, 내가 던지고 싶은 이야기가 좀 더 명확해졌을 때 내고 싶다.
2021년 9월 22일의 대화
대화를 나누는 내내 그는 답을 하기에 앞서 잠시 머뭇거렸다. 머뭇거릴 수밖에 없어 보였다. 지나간 시간에 대해 생각하는듯했고, 난 그것이 그가 지나간 시간을 함부로 말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노력이라 생각하며 입을 열 때까지 조심스레 기다렸다. '삼점오'의 음악을 들을 때도 그랬다. 일상적인 말들이 주를 이룬 노래를 들었을 때도, 통과한 시간에 대해 되새김질하는 노래를 들었을 때도, 꺼내기까지 그 어느것 하나 쉬워 보이지 않았던 탓에 조심스레 들어야만 했다. 그렇다 해서 그 조심스러움이 노래를 듣는 것에 방해가 됐던 건 아니다. 오히려 그 조심스러움 덕분에 노래에 더 편안히 안착할 수 있었다. 이 조심스러움을 예의라고 읽어도 좋을 것 같다. 돌이켜보면 이 대화는 기억과 예의에 관한 대화였겠다 생각하게 된다.
싱글이 나온 지 오늘로 정확히 두 달이 됐다. 그사이 어떻게 지냈나
<흑오야평>을 냈을 때와는 조금 달랐다. 그 당시엔 발매 직후 음원 사이트에 자주 들어가 보곤 했는데 이번엔 반응에 대해 딱히 그런 게 없었다. 예전보다 내고 난 이후 작품에 대해 곱씹어보지 않는 것 같다. 우선 일상이 그때에 비해 엄청 바쁘기도 하고, <숲속에서>를 낼 당시가 곡에 대해 구상한 지 이미 많이 지난 때라 <숲속에서>에 대한 나의 혼란스러움이나 내 나름의 정의가 다 끝난 상태였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대한 궁금증이 <혹오야평> 때와 비교하면 많이 적었다.
그동안 ‘삼점오’가 지나온 시간을 이번 대화를 통해 쭉 한번 훑어볼 생각이다. 그런 생각으로 대화를 준비하며 이름에 대한 뜻을 찾아보니 영화 평점(3.5점 정도의 평점을 받는, 5점을 못 받더라도 감독의 색이 분명히 담긴 영화 같은 음악)에 관한 의미였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요즘 본 영화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나.
최근에 본 영화 중엔 <밀양>이다. 최근에 종교적인 어떤 경험을 하기도 해서 그런 것도 있고, 원래 나는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다. 그래서 오히려 20대 때는 반기독교적인 생각이 강해서 혼란스럽기도 했고, 일부러 더 어두운 것들을 좋아했다. 근데 그 끝에 가서 종교적 체험을 경험하게 됐고, 그때부터 종교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지금도 고민을 계속하긴 하지만 그 경험 이후엔 종교에 대한 시각 자체가 달라지고 관심도 많아서 <밀양>을 보니 많은 생각도 들고 재밌게 보게 된 것 같다.
그 종교적인 경험이 어떤 것이었는지 물어봐도 될까
작년에 우울증이 좀 심했고, 그것 때문에 허무감에 깊이 빠져서 사람도 안 만났다. 다 자신이 없었다. <숲속으로>도 나에겐 그런 정서다. 내 프레임 안에 다 가둬놓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그런. 그런데 그런 쪽의 생각이 깊어지다 보니 왜 살아야 하며 죽으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이 계속 들었다. 그런 시기를 계속 보내던 와중에 마음속에서 강한 메시지를 듣게 됐다. 그 이후로 회개를 하게 됐는데, 그때 정말 많이 울고 반성했다. 그런 경험이 있고 나니 종교에 대한 시각이 바뀌었던 것 같다.
내가 생각할 때 <밀양>이란 영화는 종교에 대한 양가적인 면을 다 보여준다. 대표적으로 박도섭(조영진)이 자신을 찾아온 신애(전도연)에게 본인은 하느님이 다 용서를 해줘서 이미 용서를 받았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고, 종교시설을 열심히 출입하는 신애 주변의 사람들 모습도 쉽게 긍정하기엔 어렵게 그려진다. 하지만 또 사람이 어디에 기대야 하고, 무엇에 위로를 받아야 하나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종찬(송강호)을 통해 풀어냈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어떤 우월적이고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라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 서로를 위하는 마음속에 신이 있다는 것에 대한 은유다. 다르게 말하면 종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다고 정의 내리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의지할 수 있다는 믿음과 행동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영화로 봤다.
내가 고민하고, 계속 생각하게 되는 부분도 휴머니즘과 초월적 존재의 개입 사이 어딘가의 지점에 있다. 그런 관점에서 나는 송강호라는 사람을 옆에 있게 만든 초월적 존재를 믿는 사람이다. 결국은 하느님이 사람에게 있고, 관계의 사이에 있다는 말도 맞지만, 그것만으론 설명이 부족한 지점도 분명히 있다. 초월적인 개입(종교적 체험)이 삶 속에 있었기에 그런 걸 믿게 됐다.
<흑오야평>에 관한 얘기를 먼저 해보자. 이따 더 자세히 얘기 나눠보겠지만, 내 인상엔 <흑오야평>과 최근에 낸 <숲속으로>는 전혀 다른 음악이다. 대표적으로 곡의 스타일과 가사를 쓸 때 선택되는 단어 같은 것들이 그렇다. 자세한 얘기를 하기 전에 <흑오야평>을 작업하던 당시로 돌아가 보자. 이 앨범은 어떻게 시작됐나.
그 당시 허무함이나, 내면에 정리되지 않은 혼란스러움과 같은 당시 젊은 사람들의 보편적인 정서가 나에게도 역시 있었고, 그것에 관한 허세 섞인 도취도 있었던 것 같다. 허무함이나 혼란함에 대해 너무 진지하고 어둡게 말하기보단, 그냥 가볍게 말하고 싶은 그런 허세. ‘언니네이발관’ 음악을 들어봐도 말하는 정서 자체는 우울감이 있고, 그 층수가 되게 지하에 있는데 음악 자체는 익살스럽지 않나. 나도 그런 결과 톤을 가진 음악을 해보고 싶었던 시기다. ‘혁오’나 ‘언니네이발관’이 했던 그런 방식의 작업을 나도 내 얘기를 통해 해보고 싶었던 거다. 그런 마음엔 전 애인의 영향도 있었고, 그 당시에 그런 걸 좋아하는 친구들도 주변에 많아 더욱 그랬다.
그래서 그런지 <흑오야평>을 들으며 곡 보다 가사가 우선된 음악이라 느꼈다.
가사를 무조건 먼저 쓴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난 곡 자체엔 그렇게 비중을 안 두는 편이다. 좋은 음악을 만들고 싶으면 가사 없는 곡을 작곡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굳이 노래를 만들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더더욱 가사에 관한 얘기를 해봐야겠다. <흑오야평>을 들으며 귀에 걸리는 단어들을 쭉 써봤다. 소파, 전자레인지 팝콘, 프로젝터, 전철, 이어폰, 형광등, 수다, 냉장고, 일기 등 일상적인 단어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를 들으면서 서사로 이루어진 대다수의 노래와 달리 <흑오야평>에 실린 노래들은 어떤 일상의 장면을 사진으로 찍은 뒤, 그 사진 속에서 언급한 단어가 보이는 부분만 잘라낸 조각만을 노래로 옮겨 놓는 방식의 가사라 생각했다. 이런 가사가 나온 맥락엔 전체의 서사를 담기가 버거웠던 당시 <삼점오>의 상태가 있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감정에 대한 정확한 단어를 쓰는 게 아니라 이런 장면의 잘라냄을 통해 듣는 이들이 각자 짐작하고 상상할 수 있게 했다는 점이 좋았다.
그 당시에는 머릿속에 이미지나 장면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면 그걸 가사로 정리해내려고 애썼던 것 같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왜 그랬는지 정확히 이해되지 않지만 당시엔 그랬다. 그리고 감정에 대한 가사를 쓰는 것에 부담감이 있었다. 학생이어서 그랬을까, 감정에 대한 직접적인 단어를 내가 그 나이 때 정확히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는 부담감이었다.
그리고 그런 단어를 쓰는 가사가 너무 많기도 하다. 그런 가사의 대부분은 나에게 큰 감동을 준 적이 없었다. 그런 단어들이 상업적으로 너무 많이 변질돼서 함부로 사용되는 것에 대한 반항심도 있었다. 얘기하다 보니 정리가 된다. 사람들 사이에서 무게가 충분히 있어야 하는 단어는 훨씬 더 남발되고, 일상적인 단어들은 활용 가치가 없다고 생각되는 게 아닌가 싶다.
<흑오야평>을 낼 때는 ‘삼점오’가 3명의 밴드였지 않나. 가사를 쓸 때 의견을 주고받기도 했나?
혼자 다 썼다. 이미 노래가 다 만들어진 상태에서 밴드가 구성됐다.
가사 얘기를 했으니 곡 얘기를 해볼까 한다. 나는 ‘삼점오’가 악기를 사용하는 방식이 흥미로웠다. 밴드라 하면 기본적으론 악기들의 소리가 어우러지는 것이 중요하다. 각 소리들이 프로듀서의 기준에 따라 합쳐지고 시너지를 내는. 하지만 <흑오야평>을 들어보면 소리가 하나로 합쳐진다기보단, 거실에 세 명이 모여있다 가정했을 때 소파, 바닥, 책상 등 각자의 위치에 널브러져 따로 읊조리는 소리가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곡이 되어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흑오야평>의 노래들이 너무 무겁고, 진지하게 들리기보단 경량성을 바탕에 두고 들렸던 것 같다. 내가 말하는 경량성은 요즘 얘기되는 천박한 미니멀리즘과는 다른 얘기다. 편안함에 가까운 경량성이다.
이런 감상은 처음 들어보는데, 그렇게 느낀 건 우리가 의도한 건 아닌 것 같고 아마 나의 프로듀싱 능력이나 사운드에 대한 어레인지 능력이 조금 미숙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그 당시에 다 어렸고, 녹음실에서 녹음을 해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게다가 합이 잘 맞을 수가 없었던 게, 전체적인 톤이나 기타 리프에 관한 얘기는 내가 만든 데모와 비교해가며 지속적으로 얘기하고 조금씩 변화시켜가긴 했지만, 처음부터 멤버가 같이 시작한 게 아니라 이미 내가 곡을 다 만들어 놓은 후 프로젝트성으로 만든 밴드이자 앨범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처음 만들어 온 노래를 들었을 때 다른 멤버들의 반응은 어땠나.
그냥 좋다고.. 좋다고 했다. 노래는 참 못 부르는데 좋다고.
노래를 못 부른다는 것에 동의하나?
나는 내가 어릴 때는 노래를 잘 부른다 생각했는데 <흑오야평>을 들어보면 확실히 못 부르는 거 같다.
<흑오야평>이 나온 지도 이제 꽤 됐다. 대화를 준비하며 <흑오야평>에 대한 반응을 다시 찾아봤는데, 주된 반응은 ‘편안했다’ ‘평화로워진다’ ‘안정이 된다’ 등이다 이런 반응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흑오야평>을 듣고 편안하다는 것이 고맙긴 하지만 그렇게 편안한 노래인지는 잘 모르겠다. 쓸 때 편안한 감정으로 쓴 노래가 아니어서 내가 그렇게 느끼는 것 같다. 나는 조금 부끄럽기도 해서 <흑오야평>을 잘 안 들춰 본다. 그래도 여전히 <흑오야평>을 들어주는 사람들을 보면 감사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물론 나 역시도 <흑오야평>에 대한 이런 감상을 틀렸다고 말하고 싶진 않는다. 그리고 그런 감상이 많은 것에 대한 까닭 역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단어들이나 연주 스타일 등등일 거라 짐작한다. 하지만 같은 시기에 20대를 통과한 사람으로서의 내 감상은 <흑오야평>의 표면에 자리한 편안함에 공감하면서도, 그 당시의 20대라면 대부분이 품고 살았을 결코 부정할 수 없는 불안과 망설임 역시도 느껴졌다. 따라서 그저 편안하기보단, 한편으론 쓸쓸하고 처연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난 차라리 그런 감상이 더 좋다.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이 솔직히 뭐가 편안한가.
이제 <숲속으로> 이야기를 해보자. 우선 셋에서 혼자가 됐다. 사실 음악을 잘 모르는 나로선 <흑오야평>도 작사, 작곡, 편곡, 기타 연주, 보컬, 코러스까지 다 혼자 했었기에 혼자가 됐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게 있으려나 싶긴 하다. 그래도 달라진 게 있다면 뭐가 있을까
전혀 없다. 일단 당시에도 셋이 활동을 많이 못 했다. 프로젝트로 시작되기도 했고, 다들 학교 생활도 바빴다. 그래서 ‘삼점오’라는 이름 자체가 내가 주관을 하고 다른 사람들이 도움을 주는 프로젝트로 내겐 정리돼 있다. 공연을 하고 그러면 다시 연주자도 구해야 하기 때문에 차이를 좀 실감하겠지만, 지금의 상황으로썬 오히려 보다 다양한 사람들과 작업할 수 있어서 자유롭다고 느낀다.
대화 초기에 <숲속으로>를 들으며 가사에 선택되는 단어나 곡 스타일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느꼈다고 했었는데, 먼저 가사부터 얘기하자면 간단히 말해 훨씬 많이 생략됐다. <흑오야평>은 아까 말한 것처럼 잘린 이미지가 연상됐다면 <숲속으로>는 가상의 공간을 찍은 뒤 현실에서 돌이켜본다는 인상이었다. 보컬 같은 경우에도 비교적 단조로웠던 <흑오야평>에 비해 코러스가 겹겹이 쌓이며 풍성해졌다. 악기 역시 두 멤버가 빠졌기에 기타만 전면에 나선다. 이런 변화를 통틀어 얘기해 보자면 의도된 것인가, 또는 시간에 의해 자연스레 발생한 것인가.
의도한 건 아니다. <숲속으로>를 만들 게 된 것 자체가 내가 의도해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친구 중에 한 명이 먼저 <숲속으로>의 기타 리프를 들려주면서 시작한 거다. 물론 시작은 그렇게 이루어졌지만 결과적으론 <흑오야평> 이후 시간 동안의 변화가 자연스레 담겼다고 생각한다. <숲속으로>엔 좀 더 많이 읽고, 좀 더 세상을 많이 알게 된 내가 담겨있다.
<흑오야평>이 복잡하고, 복합적인 감정과 불안을 잠시 제쳐둔 것 같아 도리어 아슬아슬하게 느껴진다면 <숲속으로>는 같은 것들을 정면으로 떠안은 것 같아 오히려 단단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얘기를 들으니 맞는 것 같다. <흑오야평>은 이미 우울이나 혼란이 사실은 내면에 엄청 깊게 자리 잡고 있는데도 표면적으론 아닌 척하고, 쿨한 척하고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영향을 주는 사람들도 다 떠났고, 그런 시기도 지났다. 그러면서 돌아볼 시간이 생겼고, 이게 그냥 아닌 척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다. <숲속으로>가 그런 불안과 혼란의 마지막 지점에서 나온 노래가 아닐까 싶다.
일반적인 경로라는 생각도 든다. 불안을 느낄 때 처음엔 회피하고 싶고, 아닌 척하고 싶다. 하지만 거듭 불안을 직면하다 보면 그 안에 잠기고, 헤어 나올 수 없을 만큼 우울해지기도 한다. 또 이런 시기를 오래 보내면 더 이상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에 반등을 원하게 된다. 난 이때 사람의 선택이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고 보는데, 사는 게 그냥 이런 거구나 하고 포기해버리는 방향과 소화하는 능력이 생겨 보다 건강한 쪽으로 나아가기 위해 애쓰는 방향이다. <숲속으로>는 후자의 과정을 거쳐 나온 노래라고 느꼈다.
맞다. 내면의 불안과 우울을 스스로에 대한 분석과 공부를 통해 빠져나오려고 했다. 거기에 결정적으로 대화 초반에 말한 종교적 경험을 하며 더욱 감사한 힘을 얻었고.
<숲속으로>를 낼 때는 이미 우울과 불안에 관한 관점이 바뀐 상태였지만, 내는 과정에서 다시 한번 치유를 받았다. 노래를 낼 수 있는 힘이 생겼다는 걸 확인해서도 그렇고, 만들어진 노래를 내는 것과 그냥 혼자 묵히는 것은 또 전혀 다르기 때문에도 그렇다. 혼자 가지고 있으면 그 노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노래처럼 느껴진다. 노래를 내면 지금 나의 위치가 확인이 된다.
숲이라는 건 사실 조금은 낯선 공간이다. 산은 많지만, 숲이라고 했을 때 떠오르는 광활한 평지 위로 나무가 빽빽이 펼쳐진 공간을 한국에서 만나기란 쉽진 않다. 숲이라는 것에 대한 이미지가 본인에겐 어떻게 정리돼 있나.
서구의 동화에서 숲에 대해 그리는 걸 보면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른다거나, 도피를 하는 장소다. <헨젤과 그레텔>만 봐도 숲이 안락하고 사람들에게 안식을 가져다주는 장소는 아니지 않나. 숲은 항상 미스터리하고, 사회와 사람들로 부터 고립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의식과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한다. 공개적이지 않은 공간이니까. 그런 생각을 먼저 하고 숲이란 단어를 고른 것은 아니었지만, 숲속으로의 가사가 한 번에 쏟아져 나올 때 그런 생각들이 함께 따라붙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숲속으로>를 감상할 때 꼭 뮤직비디오를 보라고 권하고 싶다. 뮤직비디오 작업은 어떻게 진행됐나.
뮤직비디오를 만들어 준 친구는 제천국제영화제 아카데미에서 처음 만났다. 그 친구가 내 데모들을 듣고 도와줄 테니 얼른 내라는 식으로 힘을 많이 줬었다. 그 친구와 아침에 산책을 자주 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했는데 그때 자연스럽게 뮤직비디오 얘기가 나왔다.
뮤직비디오를 찍기 전, 노래에 대해 내가 생각하는 이미지를 그 친구에게 전달해 줬고, 그 친구가 시놉이랑 콘티를 보내오면 내가 다시 수정을 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완성된 뮤직비디오 말고도 여러 아이디어를 그 친구가 줬지만, 내가 생각하는 명확한 이미지가 있어 지금의 방향으로 진행됐다.
어려움은 없었나?
로케이션을 두고 제작비 등을 고려해 강원도로 갈 거냐, 제주도로 갈 거냐, 고민을 많이 했는데 결과적으로 제주도가 선택됐다. 처음엔 걱정했다. 머릿속에서 숲을 떠올렸을 때 제주도를 생각하면 아기자기한 이미지가 많이 떠오르니 아무래도 강원도 쪽이 더 낫지 않을까 했다. 근데 감독이 찾은 로케이션을 보고 훌륭하다.. 하고 감탄했다.
내가 출연하게 된 것도 나는 원래 생각이 없었지만 그 친구가 나와야 한다 주장한 끝에 결정됐다.
뮤직비디오는 숲으로 들어갔지만 결국 숲을 빠져나오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베개를 든 사람(주인공)이 숲을 지나갈 때,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을 만나지 않나. 난 주인공을 바라보는 이들의 표정이 슬픔 섞인 부러움으로 읽혔다. 슬픔은 미처 숲을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들로 보여서였고, 부러움은 당연히 통과해 나가는 사람에 대한 부러움이다. 하지만 이들 역시 마지막엔 나란히 서기에 다음을 기약해도 되겠단 생각을 하기도 했던 것 같다.
이들을 지나 숲을 빠져나온 주인공은 뒤돌아 숲을 바라보며 베개를 양팔로 안는다. 이런 장면의 연결은 노래가 하나의 작은 꿈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아이가 자다 깨 무서우면 베개를 양팔로 감싸 안고 부모님이 있는 방으로 가 칭얼거리는 장면이 연상되기도 해서 더욱 그랬다. 정리해 보자면 <숲속으로>는 불안한 감정 속에 사람을 남겨두고 끝나는 노래가 아니라, 그 시기를 통과한 뒤, 보다 나은 상황에서 그때를 되돌아보게 하는 노래라는 생각이다.
우선 베개는 그 친구가 촬영 전날 아이디어를 낸 거다. 수면이라는 게 죽음이나 마비와 연결이 되고, 그런 걸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오브제라 생각했다. 좀 아쉬운 건 베개가 너무 감상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는 여지였다. 아이 같은 걸 표현하고 싶은 건 아니었고 상징적으로 다가가길 바랐는데 베개가 조금 방해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난 뮤직비디오를 좀 더 차갑게 만들고 싶었다. 내 스스로가 그런 게 좀 있는 것 같다. 나란 사람은 그렇지 않은데, 따뜻한 마음을 나약함이라고, 치부라고 생각하는 게 좀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더욱 시크하고 차가운 것에 끌린다. (아직 <흑오야평>에서 못 벗어난 건가(웃음)) (웃음)사실 나는 따뜻한 사람이고, 냉랭해야 할 이유도 전혀 없는데 여전히 그런 것에 대한 동경이 있다. 하지만 비디오를 만든 친구 자체가 워낙 따뜻해서 그 친구의 색이 많이 묻어 나오다 보니 지금의 비디오가 나온 게 아닐까 싶다. 마지막에 뒤돌아 숲을 보는 장면은 사실 어떻게 끝내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그렇게 됐다. 어떤 의미를 담은 건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엔 <숲속으로>를 낸 것이 ‘삼점오’에게 불안과 우울의 시기를 통과한 것에 대한 세레모니나 정리라고 얘기한 것처럼, 당시에 의도하지 않았고, 논리적으로 계획된 장면은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도달한 장면이 아닐까
그럴 수도 있겠다.
이런 생각을 더욱 힘주어 하게 된 게, 내가 <숲속으로>의 소개글을 쓰지 않았나. 당시 나는 노래를 아주 면밀히 듣고 쓴 건 아니었다. 몇 번의 감상을 끝낸 뒤 남은 인상이 ‘무성한 숲이 푸르다는 건 상상의 착각’이란 첫 문장을 데려왔고, 그 뒤는 단숨에 풀렸다. 그래서 전달한 뒤, 아무래도 이게 노래를 소개하는 글이라 걱정도 했다. 지금 내가 노래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어떡할까 하는. 그런데 결과적으로 노래와 비디오 소개글 다 다른 사람이 만들었는데도 하나로 꿰어진다는 기분을 강하게 느끼게 됐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4년 만에 나온 노래에 많은 사람들이 반겨 주는 것 같다. 이런 반응은 또 다음 작업을 할 수 있는 힘이 된다. 앞으로의 발매 계획이 있나
내가 팬덤이 있거나 그런 게 아니니까 누군가에게 지지 받고 있다는 느낌을 체감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있으면 더욱 신기하고 감사하다. 이번에 뮤직비디오에 출연한 배우 중 한 분도 ‘삼점오’ 노래를 이미 알고 있어서 비디오를 찍겠다는 소식을 듣자 먼저 출연하겠다고 했다더라. 앞으로의 목표라면 올해가 가기 전에 싱글을 하나 더 내는 정도다.
마지막 질문이다. 나는 아직은 싱글이라는 게 익숙한 형태가 아닐 때부터 음악을 들어서 정규 앨범을 기다릴 때의 그 절절함이 아직 남아 있다. 그리고 한편으론 아티스트가 내놓는 결과물이 아주 거룩한 것이 아니라, 조금 가볍게 생각하자면 그냥 당대의 기록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내년에 30대가 되기도 하고, 많은 시간이 지나기도 했으니, 정규를 한번 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쯤 정규를 한번 내고 싶다는 생각을 나도 한다. 싱글로 하나하나 내는 건 작업자로서의 정체성을 확립시키기에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 역시 정규를 내고 싶다. 하지만 그게 언제가 될진 모르겠다. 해야겠다는 동기부여가 오면 사실 아주 빨리 훅 해치워 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은 굳이 내야 한다는 마음에 억지로 하고 싶지는 않다 생각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너무 많은 노래가 세상에 나온다는 생각도 있다. 돈을 벌기 위해 음악이 계속해서 발표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게 사실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난 음악으로 돈을 벌고 싶은 생각이 없기 때문에 정규앨범을 내게 된다면 경험이 좀 더 쌓이고, 내가 던지고 싶은 이야기가 좀 더 명확해졌을 때 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