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선 위 선을 이룬 나무들 아래 - 上

이제 땅이 되어버린 바다는 밝은색의 얇은 진흙을 덮고 있었다. 진흙 위로는 빛 잃은 갈대들이 무리 지어 조용히 흔들렸고, 바람이 낮게 깔려 불 때면 동쪽 산으로부터 날려 온 국화 향이 갈대들 사이를 휘감았다. 어둠은 저 멀리 떨어지고 있는 해를 집어삼키며 서서히 세상을 감쌌고, 나는 혼메 위에 앉아 스탕이 나타날 방향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시간을 견뎠다. 저 멀리 보이는 산 능선 위 선을 이룬 나무들의 형태가 아직은 낮의 여운 아래 선명했다. 스탕은 어둠이 완전히 자리 잡고 난 후에야 모습을 드러낼 것이었다. 혼메는 긴 목을 숙여 진흙맡에 코를 대고는 킁킁거릴 뿐이었다.


시간은 더 흘러야 했고, 나는 혼메의 허리에 매 놓은 보라색 보따리에서 칼을 꺼내 날을 점검했다. 오늘이면 그 쓰임을 다 할 칼이었다. 그래서 오늘 이 칼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날카로워야 했다. 조금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살갗을 뚫어 경동맥을 베어내는 찰나의 순간으로 10년의 세월을 끊어내야 하기에. 나는 칼날 위로 흘러내렸던 8명의 피를 떠올렸고, 칼에서 나는 것인지, 기억 속에서 나는 것인지 모를 쇳내를 맡으며 보따리에 칼을 다시 집어넣었다.


내가 살로메에게 칼을 들겠다고 선언한 건 열여덟이 됐을 때였다. 3년 동안 입고 있던 빨간 삼베옷을 태운 날이었다. 옷의 색과는 상관없이 회색에서 흑색으로 타오르는 연기를 보며, 3년을 견디는 동안 단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는 생각이라고 살로메에게 전했다. 살로메는 말 없이 듣고만 있다 옆에 서 있는 스탕의 왼쪽 어깨를 두드렸고, 스탕은 지팡이를 짚으며 집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 하얀 봉투 하나를 가지고 나왔다. 살로메는 스탕에게 받은 봉투를 내게 건넸고, 봉투 안에 들어 있는 종이를 펴 보니 여덟 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언젠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꼭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던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확신하지 말고, 자신하지 마라. 모든 일이 순조롭기만 할 때를 경계하며, 언제라도 그만둘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거라.”


나는 종이를 접어 봉투 안에 집어 넣었고, 봉투는 품 안으로 밀어 넣었다.


“네.”


“혼메를 데리고 가거라. 매월 그믐일 때, 갈대밭에서 스탕이 널 기다릴 거다.”


“알겠습니다.”


살로메와 나의 대화가 끝난 걸 확인한 스탕은 내 앞으로 와 들고 있던 지팡이로 나의 양쪽 어깨와 허벅지를 지그시 눌렀다. 나는 둘에게 묵례를 건넸고, 휘파람을 불자 물가를 돌며 목을 축이고 있던 혼메가 다가왔다. 내 품에 부비는 혼메의 머리는 따뜻했고, 그 따뜻함은 앞으로의 내가 기댈 수 있을 유일한 것이었다. 나는 살로메와 스탕의 얼굴을 정확히 바라본 뒤, 혼메 위에 올라타 길을 나섰다. 7년 전 일이다.


해가 자취를 감췄음을 알아차린 건 진흙을 깊게 짓누르며 천천히 다가오는 지팡이 소리 덕분이었다. 스탕은 지팡이로 앞을 확인하며 갈대들을 헤쳐 내게 다가오고 있었고, 내가 허리를 한 번 두드리자 조바심을 내고 있던 혼메가 스탕을 향해 서둘러 걸어갔다. 겨울은 아직이었지만 밤공기는 꽤 차가웠고, 그믐달의 여린 빛이 감도는 갈대밭 속에서, 나와 스탕은 서로를 마주했다.


“스탕.”


나의 목소리에 스탕은 곧바로 걸음을 멈췄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고, 스탕은 나를 한번 껴안은 뒤, 내가 입고 있는 옷 위로 손목, 팔꿈치, 어깨, 등, 허리를 주물렀다. 그의 손길에 따라 명주실로 지은 검정 옷은 구겨졌다 펴지고, 다시 구겨졌다 펴지기를 반복했다.


“바다였던 곳 아니냐, 늦가을은 겨울과 다름없어. 옷이 너무 얇다.”


“괜찮습니다. 그래도 아직 가을인걸요.”


“몸이 더 자랐구나. 얼굴을 만지려면 이젠 발을 들어야겠어.”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습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스탕이 건넨 지팡이를 받아 들었고, 스탕은 혼메의 안장에서 흘러내린 끈을 잡았다. 


“괜찮다. 살로메도, 나도, 여전히 그대로니까.”


스탕은 혼메의 목을 쓰다듬으며 대답하고는 다시 왔던 길로 걷기 시작했다. 혼메는 자신을 만지는 낯설고도 익숙한 손바닥 표면을 온전히 느끼며 그와 속도를 맞췄다.


“7년 동안 매달 한 번씩 여기 나와 절 기다리신 건가요.”


손을 많이 탄 덕분에 매끈하게 정리돼 있는 지팡이의 손잡이를 어루만지며 내가 물었다.


“기다렸다고 해야 하나.” 


잠시 말을 끊은 스탕이 나를 향해 오른손을 뻗었고, 내가 지팡이를 건네자 스탕은 왼손으로 잡고 있던 줄을 놓은 후 다시 지팡이를 짚고 걷기 시작했다.


“너를 기다리기 위해 나온 것만은 아닐 거다. 그날이 온전히 끝나기를 바란 마음이라고 얘기하는 게 맞겠지.”


나는 스탕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고, 셋은 말 없이 한참을 더 걸었다. 마침내 갈대밭을 빠져나왔을 땐, 밤하늘 아래 잎이 검게 변한 감태나무들이 우리 앞에 버티고 있었다. 스탕의 속도에 맞춰, 나무들 사이를 천천히 걷자 마른 감태나뭇잎들이 양쪽 볼과 손끝을 아슬아슬하게 스쳤고, 땅에 떨어져 있던 가지가 발에 밟혀 으스러지는 소리만이 드문드문 숲을 울렸다. 규칙 없이 반복되는 그 소리가 나무들의 몸통을 끼고 돌자 스탕의 지팡이와 발은 점점 더 빨라졌고, 그 속도를 따라가는 나의 등허리는 조금씩 땀으로 젖어들었다. 어느새 이마에도 맺힌 땀이 흘러내리려 할 때쯤, 스탕은 걸음의 속도를 서서히 늦추기 시작했다. 혼메가 속도를 내 스탕을 앞질러 나간 것도 그쯤이었다. 혼메가 향하는 방향 끝에 자리 잡은 물웅덩이와 나무로 지은 작은 집 하나. 잠시 멈춰 선 스탕은 나를 흘깃 쳐다보더니 다시 걸어가 집 앞에 다다랐고, 지팡이로 문을 두드렸다. 앞서간 혼메는 저수지의 가장자리에 앉아 물을 할짝댔고, 혼메의 혀가 튀기는 물소리에 천천히 삐걱거리며 열리는 문소리가 끼어들었을 때, 동물의 털을 덧대 만든 검정 옷을 걸친 살로메가 두 팔을 벌리며 큰 소리로 내 이름을 외쳤다.


“체루코.”


나의 가슴팍에 겨우 닿는 키와 비정할 정도로 마른 몸, 얼굴 대부분을 덮은 하얀 수염과 두피가 모두 드러나는 머리. 스탕의 말대로 살로메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여전히 그대로였기에,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묻고 싶었던 질문들이 마음속에서 더욱 거세게 요동쳤다. 가볍게 쥐어진 두 주먹은 오갈 데 없이 떨리기 시작했고, 당장 혼메를 불러 보따리 속에서 칼을 꺼내 그의 목을 향해 휘두르고 싶었다. 하지만 난 그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쏟아내고 싶은 질문에 섞일 분노도, 그를 향해 휘두르고 싶은 칼에 담길 서러움도, 순식간에 자리 잡아 버린 반가움에 비하면 완연하지 못한 것이었으니까. 나는 조용하고도 우악스럽게 거대해지는 안온함을 부정할 수 없었다.


“체루코”


살로메가 다시 한번 나의 이름을 부르며 내게 다가왔다. 그가 가까워질수록 거대한 세월이 덮쳐온다는 생각에 온몸이 움츠러들었다. 멍청하게 서 있는 나의 표정을 확인했을 살로메는 나의 표정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점점 더 내게 가까워졌다. 얼굴이 맞닿을 거리에서 멈춘 살로메는 양손으로 나의 목을 어루만지며 자기 이마를 나의 이마에 맞대고는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나는 발바닥으로 땅을 세게 밀어내며 쏟아지는 현기증으로부터 버텨야 했다. 지난달, 하치마르에게 10년 전 그날의 진실에 대해 들은 후, 이곳으로 오는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반복했던 상상엔 결정적인 것이 누락되었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주체하기 어려운 분노를 겨우 가라앉히고, 어떻게든 차분하게 질문을 던져 살로메의 대답을 끄집어낸 뒤, 그 대답의 내용이 무엇이라 하더라도 절대 현혹되지 않고 끝내 그를 베는 상상. 그 상상엔 그와 맞닿는 순간 뜨겁게 밀려들어 나를 휘감는 그리움이 빠져 있었다.


“건장해졌구나, 체루코. 이렇게 보니 좋구나.”


고개를 든 살로메가 말을 꺼낸 뒤 나의 얼굴을 구석구석 살폈다. 잠시 후, 멀찌감치 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스탕이 지팡이로 문을 두드렸고, 살로메는 손등으로 나의 얼굴을 천천히 닦아준 뒤 왼쪽 팔로 나의 어깨를 감쌌다.


“들어가자꾸나. 뭐라도 좀 먹어야지.”


스탕과 살로메는 차례대로 문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나는 쉽게 움직일 수 없었고, 혼메를 불러 허리에 머리를 댄 체 천천히 숨을 골랐다. 나의 정신을 조금씩 돌아오게 만드는 건 얼굴을 핥아주는 혼메의 혓바닥이었다. 나는 혼메의 허리에서 보따리를 풀어 나의 허리에 다시 묶으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문으로부터 가장 먼 곳엔 나무로 만든 작은 침대 두 개가 마주 보며 누워 있었고, 바로 연결된 통로에 마련된 부엌 옆은 회색빛 돌을 깎아 만든 식탁과 나무 의자 세 개로 비좁았다. 이곳을 떠나던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시간이 조금도 흐르지 않은 것처럼. 순간 시간은 정말 흐르지 않았고,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안착하려 했다. 하지만 가장 안쪽 의자에 앉아 자신의 옆에 앉기를 권하는 살로메의 다정한 눈짓이 냉정하게 그 시도를 차단했다. 식탁 위 자리 잡은 냄비 속에는 버섯향이 나는 우윳빛 수프가 가득 김을 내고 있었다.


“먹을거지?”


스탕이 국자와 그릇을 가져와 수프를 옮겨 담으며 내게 물었다.


“먹을 수 있는 게 점점 줄고 있어. 이제는 동물들도 이곳을 떠나는 모양이다.”


“고맙습니다.”


나는 스탕이 내민 그릇과 숟가락을 받아 들었고, 가장 바깥쪽 의자에 앉으며 스탕이 살로메와 자신의 것을 그릇에 옮겨 담는 모습을 바라봤다.


“어서 먹자. 금방 식어버릴 거다.”


스탕에게 그릇을 건네받는 살로메의 목소리는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살로메는 숟가락을 들어 수프를 천천히 입에 넣었고, 우리 둘 사이에 앉은 스탕 역시 아무 말 없이 수프만 먹을 뿐이었다. 나는 머릿속을 뒤져 과거엔 어땠는지를 떠올렸다. 머릿속 기억은 그날을 기준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스탕은 두 쪽 모두 조용한 편이었고, 그날 전까지만 해도 식사자리에서 대화를 주도했던 살로메는 그날 이후엔 어떤 경우에도 입을 잘 열지 않았다. 그래서 그날 이후 우리의 식사는 늘 조용했다. 그리고 조용한 식사는 늘 나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비스듬히 마주 앉아 각자의 생각으로 공통의 침묵을 공유하는 자리. 7년 전의 나에겐 그 자리를 견딜 힘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7년 만에 함께 식사하는 그 자리에 조금이라도 대화가 오갔다면 내가 더 참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조차도 짐작하지 못한 순간에 결국 살로메에게 질문을 던지고야 말았다.


zcott.camus@gmail.com

대화의 기억과 내용에 대한 권한은 

대화를 나눈 이들과 '대화록' 페이지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