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희"

2023년 5월 29일의 대화


15살 무렵부터 힙합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당시 유행했던 ‘mc스나이퍼’의 <better than yesterday>가 시작이었고, 그 후 검색에 검색에 검색을 거쳐 온갖 힙합 음악을 찾아 듣기 시작했다. 그때 처음 앨범 단위로 음악을 듣는 것에 대해 배웠고, 내가 들은 음악이 내 몸 안에 시간순으로 쌓여가는 걸 체감했었다. 

지하철을 한 시간 반 넘게 타고 경기도의 어느 극장에 가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봤던 게 시작이었다. 집에 돌아와 일주일 내내 그의 필모그래피를 따라갔고, 다음은 ‘왕가위’, 다음은 ‘기타노 다케시’ 그리고 ‘마틴 스코세이지’, ‘홍상수’, ‘봉준호’, ‘쿠엔틴 타란티노’로 이어지는 시간을 쌓았다.

취향은 역사다. 어떤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책을 본다고 해서 그게 취향이라 말할 수는 없다. 취향은 자신만이 아는 고민과 내면의 갈등, 구축과 해체의 반복, 내던진 입장과 맞닥뜨리는 붕괴 등의 시간을 거쳐 천천히 형성되는 것이다. 긴 글을 읽는 사람이 없고, 진지한 표현을 뜯어 보는 사람이 없고, 앨범 단위로 음악을 듣는 사람이 없는 요즘, 나는 취향에 대해 물을 일이 없었다.

‘김동희’를 만나러 밀양으로 가는 날, 부산과 밀양을 연결하는 도로 위엔 계속해서 비가 내렸다. 가는 동안 나는 ‘이창동’의 <밀양>을 떠올리고, 밀양에서 벌어졌던 어떤 사건들을 떠올리고, 영화와 사건의 이미지 그리고 내 눈에 조금씩 잡히기 시작하는 차창 너머 밀양의 이미지를 겹쳐보았다. 마지막엔 김동희의 피드에서 느꼈던 감정을 재료 삼아 가상의 이미지를 만든 뒤, 앞서 중첩한 이미지 위에 덧대보았는데, 그러자 눈앞엔 차창을 닦는 와이퍼만이 남아있었다



비가 엄청 내린다.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편인가


비 오는 날 집에 있는 건 좋은데, 비 맞는 건 싫다. 집에 있거나, 어디 안에서 감정에 잠기는 건 좋은데 비를 맞고 싶진 않다. 그건 너무 귀찮은 일이다


그런 날 이렇게 나와줘서 고맙다. 밀양에 왔으니 다짜고짜 묻지 않을 수 없다. 밀양은 어떤 곳인가


여기 사람들은 말이 너무 많고, 남 얘기를 많이 한다. 서로 눈치도 많이 보고. 그런 거 신경 안 쓰고 나 자신으로 살고 싶은데, 여기는 서로를 신경 쓰고, 그래서 포장하고, 남들의 기준에 맞춰서 자신을 바꾸고 그런다. 우리 엄마도, 동생도 그렇다. 대신 또 인심은 좋다. 예를 들어 밀양에 있는 아줌마들은 인심이 후하고, 마음이 넉넉한 분들이 많다고 느껴진다. 그런데 내 또래들의 인심은 위선이라 느껴지고, 뒤에서는 어떤 말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무조건 있다. 이런 것에 크게 피해받고 그런 적은 없는데, 음.. 영화 <밀양>을 보면 아들 유괴 사건 있고 나서 약국, 옷 가게 사장이 오지랖을 부리지 않나. 그런 거다. 난 그런 게 너무 귀찮다. 나한테 밀양은 갑갑하고, 항상 나가고 싶고, 그래서 영화 보러 대구나 부산에 갈 때 탈출하는 느낌이다. 그런데 또 그 탈출하는 느낌을 받게 하는, 탈출하고자 하는 힘을 주는 곳이 밀양이기도 하고, 뭐 그렇다 


방금 당신이 말한 밀양에 대한 건 당신과 당신 주변의 관계 속에서의 밀양이라면, 온전히 혼자 밀양을 바라볼 때는 어떤가


사람 빼고 풍경은 다 좋다. 내가 여중, 여고를 나왔는데, 학교가 산이었다. 학교에서 나무나 꽃 보면서 시간 보내고 했다. 그런 시간이 당시의 나를 소녀답게 만들어줬다. 별거 아닌 것들에도 까르르 웃으면서 즐거워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요즘엔 차가 있으니까, 애인이랑 헤어지거나 하면 밀양 안에서도 드라이브를 많이 하는데 어딘지 몰라도 그냥 돌아다니다 보면 되게 예쁜 곳이 많다


아주 어릴 때의 일이지만, 밀양에 처음 왔을 때의 기억이 있나


내가 이혼 가정에서 자랐다. 5살 때쯤 부모님이 이혼하셨고, 나는 스님인 할아버지의 마산 절에서 동생과 아빠랑 같이 살았다. 그러다 어느 날, 엄마가 우리에게 어떻게 연락하셔서 엄마와 살고 싶냐 물었고, 내가 그렇다고 하니 할아버지한테 얘기해보라고 하더라. 그래서 할아버지를 찾아갔다. 할아버지가 스님이니 예의를 갖춰 무릎 꿇고 앉아 말씀드렸더니, 원하는 대로 하라고 하시더라. 그렇게 동생과 함께 엄마가 있는 밀양으로 왔다. 밀양초등학교로 전학 오게 됐는데, 내가 마산에 있을 때도 여러 명의 친구와 자주 놀고 하는 편은 아니었다. 한두 명의 친구와만 놀고, 걔네 집에 놀러 가고, 그게 아니면 절에 가서 지내고 그랬는데, 밀양에 왔더니 당시 아주 소극적이었던 나에게 한 친구가 예쁘다고 해줬다. 오자마자 그 말을 들으니 너무 좋았다. 난 절에 살다 왔고, 밀양도 처음이고, 다 새로운 와중인데 그렇게 말해주니까 마음이 쉽게 열렸다. 날 예쁘게 봐준다는 게 마치 환영해주는 것 같아서 좋았다. 그 말이 내가 마음을 열게 했다. 밀양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를 떠올리면 유독 선명한 기억이 하나 있는데, 내가 사는 아파트와 학교 가는 길에서 느꼈던 평화로움이다. 그제서야 찾은 일상 같았달까, 내가 절에 살다 와서 그런지 평범한 일상의 그 평범함이 나에겐 안락함을 줬다. 밀양만의 특별한 인상보단 밀양의 일상적 평화로움이 내겐 더 강력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오늘 조금 일찍 밀양에 도착해 천천히 둘러보고, 다시 영화 <밀양>을 생각하면서 왜 밀양이어야 했을까 생각했다. <밀양>은 지역성이 크게 드러나는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궁금해졌다. 나는 밀양 하면 이런 저런 사건들이 떠오르고, 그 사건들과 밀양을 둘러싸고 있는 강, 강으로부터 오는 습기가 뒤섞인다. 오늘 비가 와서 아마 더욱 그랬을 텐데, 오늘 도착해 둘러본 밀양은 내가 가지고 있던 인상을 확인하는 장소였다. 물론 일부분이겠지만 말이다. 간단히 정리해 영화 <밀양>이 가지고 있는 세밀하고 분명한 온기와 잠깐이지만 내가 실제 밀양에서 느낀 밀양의 인상은 거리가 있다고 느껴졌는데, ‘이창동’ 감독은 왜 밀양으로 갔을까


내가 느끼기엔 <밀양> 속에 사는 사람들과 내가 사는 밀양에 사는 사람들은 비슷하다. 영화에서 느껴지는, 당신이 말한 세밀하고 분명한 온기가 여기 밀양에 있는 것도 맞다. 내가 아까 위선 뭐 그런 얘기를 하긴 했지만, 그들도 나쁜 의도는 없다. 친구와도 밀양 사람에 대해 가끔 얘기하는데, 그래도 밀양 사람들은 착하다로 귀결된다. 영화 속에서도 어쨌든 신애를 도와주기 위해 모두가 그러는 거지 않나. 실제로도 그렇다는 거다. 영화의 영어 제목이 Secret Sunshine인데, 나도 밀양에 살면 그런 온기를 실제로 느낀다. 이게 밀양이라 그런 건지, 내가 사는 공간에서 보는 햇빛이 그렇게 느껴지는 건지 모르겠지만, 회사에서나 어디서나 밀양 안에서 햇빛을 볼 때 생각한다. 설명하기 힘든 온기가 있다


당신을 만나봐야겠다고 결정한 마음에 복합적인 것들이 섞여 있다. 그 얘기를 좀 해보자면, 처음 당신의 인스타그램 피드를 보게 된 건 아마 3년 또는 4년 정도 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당시는 내가 과거엔 별로라고 생각했던 ‘검정치마’의 앨범이 좋아지기 시작하던 때였고, 동시에 ‘홍상수’의 영화가 훨씬 더 몸에 잘 붙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은 어떻게 듣고, 어떻게 보는지 궁금해 인스타그램에 ‘검정치마’와 ‘홍상수’를 검색했고, 그러다 인스타그램이 추천해준 당신의 피드를 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당신의 피드에 대한 첫인상은 공포였다. 거의 모든 게시물이 ‘검정치마’와 ‘홍상수’였고, 맥락도 없이 계속해서 그들과 관련된 게시물이 쏟아졌기 때문인데. 그걸 보고 있으니 ‘이 사람은 분명 뭔가 문제가 좀 있을 거다. 저 과도하고, 과격한 에너지는 그에 못지않은 문제에서 생겨난 걸 테다.’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공포가 주는 선정성이 또 있지 않나. 그 선정성에 끌려 기괴하다 생각하면서도 종종 보게 됐다. ‘와 이 사람 진짜 좀 이상한데..’ 하면서. 그러다 자연스레 인스타그램이 당신을 내게 추천하지 않게 됐고, 내 기억 속에서 당신의 계정은 사라져갔다. 그러다 최근에, 오랜만에 인스타그램이, 마치 아이폰이 ‘1년 전 오늘..’ 하면서 사진을 추천해 주듯 당신의 계정을 내게 추천했다. 물론 ‘검정치마’에 대한 내용이었다. 난 오랜만에 당신의 계정을 구경했고, ‘와 이 사람 아직도 이러고 있네’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엔 처음 느꼈던 그 공포가 과하게 말하면 존경으로 바뀌더라. 그 꾸준함에 대해, 순정이라고 말해도 좋을 그 마음에 대해, 그리고 당신의 꾸준한 행위에서 느껴지는 어떤 절박함과 그 절박함을 성취하고자 반복하는 행위에 대해서. 인사가 늦었다. 만나게 돼 반갑다


너무 재밌다. 그리고 다 맞는 얘기다. 과격하고, 과도하고, 그런 부분이 내게 분명히 있다. 노골적인 것도 있고. 물론 이런 것들이 남들에게 무례할 수 있기에 조심하긴 하지만 온전한 나는 그렇다. 그리고 맹목적인 부분도 분명히 있다. 맹목적이기도 한데, 사람을 잘 믿기까지 한다. 친한 친구가 왜 그렇게까지 쉽게 믿냐고 할 정도로. 부모님이 내가 어릴 때 이혼하셨고, 아버지가 과격한 면도 있어서, 가정에서 온 결핍도 분명히 영향이 있을 거다. 그런데 그런 결핍이 내가 다른 것들을 좋아하는 힘이 된다. 매주 몇 편씩 대구로, 부산으로, 서울로 영화를 보러 다니고 하는 것도 다 같은 맥락이다. 이런 나를 보면서 사람들이 대단하다, 어떻게 그러냐 하는데, 나는 그렇게 말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동시에 새삼스럽기도 하다. 나는 그냥 이게 자연스러우니까. 그런가? 하게 되는 거다. 그냥 내 눈에 온전히 보이는 대로, 상대를 그렇게 보고 싶다. 상대가 나를 그렇게 봐줬으면 좋겠으니까


내가 당신에겐 다른 사람을 만날 때보다 비교적 육감적으로 만나자고 요청했기 때문에, 만나기로 하고 나서야 무슨 얘기를 해야 할까 생각하게 됐다. 그러다 떠오른 단어가 취향이었다. 알고리즘의 시대지 않나, 다르게 말하면 뾰족한 취향을 가진 사람을 만나기가 점점 힘들다. 하지만 당신은 분명한 취향과 그 취향을 거리낌 없이 전시한다. 당신에게 취향이란 뭔가


‘검정치마’도 그렇고 ‘홍상수’도 그렇고, 내가 운명을 믿는 편이 아닌데, 정말 운명처럼 다가왔다. 검정치마를 좋아하게 된 건 랩퍼 ‘C JAMM’이 가사에 ‘검정치마보다 가사가 힙합스럽지 않아’라고 쓴 걸 본 게 시작이었다. 그 때 한창 ‘C JAMM’을 좋아할 때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은 어떤지 한번 들어보자 하면서 찾아 듣게 됐다. 많은 ‘검정치마’ 노래 제목을 봤을 때 처음 눈에 들어 온 건 <음악하는 여자>라는 노래였다. 듣자마자 너무 좋았다. 그렇게 ‘검정치마’ 노래를 엄청 듣기 시작했다. 그렇게까지 한 가수를 좋아한 적이 없었는데, 당시 괜찮은 알바를 하며 여유가 좀 있을 때라 콘서트 소식을 듣고 콘서트를 가기로 했다. 콘서트라는 개념도 그때 처음 알았다. 돈이 없었다면 안 갔을 텐데 돈이 있었고, 그렇게 내가 ‘검정치마’에 빠질 수 있는 조건이 다 갖춰져 있었다. 콘서트를 가니까 또 너무 좋았고, 동시에 모르는 노래가 많았는데, 내 앞에 있는 여자들은 전주가 나오자마자 꺅 소리를 지르더라. 나는 그걸 보며 이 노래는 뭐지? 나도 바로 반응하고 싶다 하면서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영화도 처음엔 왓챠 별점을 체크하면서 추천해주는 걸 보다가, ‘홍상수’ 얘기를 여기저기서 하길래 지인이 추천해준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를 봤다. 본지 10분 좀 넘어서 ‘와 이영화는 미쳤다, 내 머리에 있는 생각이 김민희 입에서 다 나오네’ 생각했다. 둘 다 나의 상황에 너무 맞게, 운명처럼 다가왔다. 운명처럼 다가오고, 그걸 받아들일 준비가 나도 갖춰져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다


뜻 취, 향할 향, 뜻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는 말이 취향이고, 이를 다르게 말하면 입장을 분명히 한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요즘 취향을 가진 사람을 만나기 힘든 이유 중 큰 부분은, 취향을 내세웠을 때, 입장을 분명히 했을 때 감당해야 하는 책임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부담감 안에는 생각이 다른 이와 부딪혔을 때 생길 피곤함, 공격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 끝에 생기는 타인과 무언가를 나누고 싶은 욕구에 대한 포기가 섞여 있다고 생각한다. 슬프게도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는데, 얘기를 듣다 보니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예전에는 ‘검정치마’를 좋아했다고 얘기하면서 요즘은 안 좋아한다고 하더라. 그 사람을 보면서 여전히 좋아하는데 뭔가를 숨기기 위해 저렇게 얘기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말하면 되는 건데 말이다. 당신의 말 대로라면 나는 그럼 책임감에 부담이 없는 사람일 거다. 그리고 나는 항상 내 얘기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검정치마’나 ‘홍상수’를 좋아한다고 하면 상대가 어떤 반박을 할 때가 있는데, 그런 것에 스트레스도 받지만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해서 안 할 수는 없는 사람이 나다. 내 입장을 정확하게 밝힌다. 그 입장이 나에게 분명하니까. 귀찮다고 안 한다면 그건 진짜 좋아하는 게 아닌 거지. 그런 걸 포기할 생각이 없다


그렇다면 당신이 당신의 인스타그램에 당신의 취향을 올리는 이유는 뭔가


이것에 대해 2020, 2021, 2022년도까지도 난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최근이 되어서야 생각해보게 됐다. 생각해 볼 필요가 없는 부분이라 여겼었는데, 요즘 들어 주변 사람들이 나의 이런 행동에 의문을 가지기도 했고, 주변 상황도 조금씩 변하면서 생각해 보게 된 거다. 당신이 나의 인스타그램을 보며 느낀 것처럼, 나의 내면에 흘러가는, 그런데 나는 잘 모르는 것들이 포효하듯 나오는 것이라는 거다. 다르게 말하면 내가 결백하고 싶은 것 같다. 내면에 오류가 없고 싶다는 얘기다. 내가 하는 생각들, 만든 논리가 틀렸고, 부정당해도 좋다. 하지만 우선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논리를 쌓았는지를 다 밝히고, 그 과정에서 나도 그걸 다시 한번 깨닫고, 정리하고, 그래서 그것들로부터 해방되고 싶다. 난 나에 대해 잘 알고 싶다. ‘홍상수’ 영화를 보던 초반엔 나에 대해 좀 알겠다 생각했는데, 계속 보다 보니 나를 점점 더 잘 모르겠더라. 그래서 계속해서 스스로에게도 묻고, 밖으로 얘기하고 그렇게 반복한다. 어떤 생각을 내가 가진다 해서 그 생각이 변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지금 당장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아야 한다고 본다. 영화를 계속 보러 다니는 것도 이런 생각에 더 다가서고 싶어서다 


당신이 인스타그램에 무언가를 올릴 때를 상상해봤는데, 음악 또는 영화를 듣거나 보고 나면 당신이 가진 불안을 포함한 여러 감정과 마음이 증폭되는 게 먼저, 그 후 인스타그램에 게시물을 올리며 증폭된 감정과 마음이 조금이나마 해소되는 과정이 아닐까 짐작했다


맞다, 내겐 해소다


또 다르게 보자면 마음은 실체가 없다는 명제에 의해 발생하는 근원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실체가 있는 언어 또는 이미지로 반복해서 표출하고, 그 과정에서 마음의 실체를 확인한 뒤 잠깐이나마 안도한다고 볼 수도 있을까


맞다, 당신이 내 마음을 잘 정리해주고 있다


내가 지금 계속 얘기하는 불안이라는 것이 당신 안에 존재한다는 걸 자각하고 있었나


난 내가 불안한 줄 몰랐다. 오늘 얘기를 나누면서 알았다. 불안해서 내가 그러고 있다는 걸. 불안하고, 불안정하고, 그러다 보니 뭐가 맞는지 찾아 나서려는 과정에서 영화를 보고, 콘서트를 가고, 인스타에 계속해서 올리고 그랬나 보다. 그런데 내가 불안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건, 아마 바로바로 해소를 해서 그런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내가 불안하다는 걸 알고 나니, 몰랐던 게 나았던 거 같기도 하다. 아니까 더 불안해지는 거 같기도 하고


내가 불안이란 단어를 즉각적으로 떠올린 건 아마 당신이 맹렬하게 사랑하는 대상이 ‘검정치마’와 ‘홍상수’였기 때문이지 않을까. 두 사람은 내게 가장 불안하며, 동시에 아주 선명한 작품을 만드는, 그래서 결국 그 작품으로 불안한 것들을 껴안는 사람들에 포함된다


불안을 껴안는 게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거라고 생각한다. 근데 나는 그런 고통과 불편함을 자각하지 못하면서 동시에 껴안고 있기도 한 것 같다. 그래서 ‘검정치마’ 음악을 듣고, ‘홍상수’ 영화를 보면 이건 정말 나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든다


두 사람 외에도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엔 ‘에릭 로메르’가 포함되고, 난 이들 세 명이 어느 정도 비슷한 선상에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걸 말로 풀어보자면 확신에 대한 끊임없는 불신이고, 진실을 향해 반복하는 도전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이들 세 명이 어떻게 연결되고, 또 어떻게 다르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느낀 이들의 차이는 없다. 공통점을 얘기할 땐 ‘홍상수’를 대표로 잡아서 얘기하면 편한데, ‘홍상수’ 영화 제목 ‘잘 알지도 못하면서’처럼 알고 싶어도 다 알 수 없는 것, 알고 싶지만 절대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얘기한다는 것 아닐까. 내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주관이 강하다고 한다. 실제로 그런 부분도 있을 거다. 하지만 난 여전히 뭐가 맞는지 모르고, 내 생각도 계속 변하고, 내 주관에 대한 확신이 나는 없다. ‘홍상수’ 영화를 봐도 영화에 따라 ‘홍상수’의 생각도 계속 변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변화가 솔직함이겠지. 그 솔직함이 그들의 공통점이고, 그 솔직함이 찌질하고 귀여워서 좋다. 그리고 그들은 꾸준히 관계에 대해, 감정을 가지고 얘기한다



지금까지 인스타그램 속 당신에 대해 얘기했다면 이제 밀양에 거주하는 20대 후반의 김동희에 대해 얘기해보자. 김동희는 밀양에서 뭐 하며 살고 있나, 당신 친구들은 당신 인스타그램 보면 뭐라고 하나


밀양에서는 식품회사 공장에서 사무직으로 일하고 있다. 일할 땐 그냥 일하고, 집에 가고, 워라밸이 좋다. 살기 위한 자본을 버는 정도랄까. 밀양 친구들은 일단 대부분 내 인스타를 그렇게 열심히 안 보지만, 그중 한명은 내가 생각을 아주 솔직하게 잘 표현하는 것 같다고, 그래서 그 양이 엄청 많지만 하나하나 다 보려고 한다더라. 또 다른 한 명은 내가 주관이 뚜렷해 보여서, 엄청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그 점이 좋아서 나랑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했다. 밀양의 친구들은 내 곁에 잘 있어 준다. 내가 ‘검정치마’를 좋아하고, ‘홍상수’를 좋아하는 걸 그 친구들에게 많이 말하진 않는다. 그 친구들이 피곤할 수 있으니까. 그냥 그런 것과 상관 없이 내 곁에 잘 있다


영화나 공연을 보기 위해 서울, 대구, 부산 가리지 않고 운전해 다니지 않나. 운전할 때 어떤 생각들이 오가나


운전해 영화나 공연을 보러 갈 때 밀양을 탈출하게 되고, 탈출하면서 산이나 강 같은 자연을 보게 되는데, 세상을 만끽하는 기분이 들지. 정신적으로 풍요로워지고, 이 예쁜 세상 속에 내가 해맑게 있는 기분이 든다. 몸에 전율이 일어나 머리가 찌릿할 때도 있다. 밀양으로 돌아올 땐 봤던 영화나 공연에 대한 생각을 몸속에 가득 채운다. 그래야 밀양으로 돌아왔을 때 아쉬움이 덜하니까


그 체력과 적지 않게 드는 돈에 대한 부담은 없나


부담이 아예 없진 않지만, 큰 부담은 없다. 체력도 좋은 편이고, 돈은, 이런 데 쓰는 돈은 하나도 안 아깝다. 원 없이 쓴다, 이런 것들에


이 이야기를 나눌지 말지 고민을 했는데, 사전 질문지에서 당신이 언급했으니 한번 해보자. 최근 중심망막동맥폐쇄 진단을 받은 것으로 안다. 이에 대해 말해도 좋고, 말하지 않아도 좋고, 말한다면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해라


못할 얘기는 전혀 아니다. 하지만 정말 힘든 건 사실이다. 실명이 될 수도 있는 병이니까.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고, 그 병의 진실을 마주하는 것까진 했는데, 이 진실은 마주한다고 해서 변하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니까.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들으며 운전할 땐 잠시 잊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마주하게 되고, 그럼 울컥하게 된다. 가까운 주변 사람이 내가 겉으론 괜찮은 척을 하니까 정말 내가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내가 영화와 공연 보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는 사람이 어떻게 내가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싶어서 크게 실망한 적도 있었다. 영화를 보고, 콘서트를 볼 때 행복한 건 여전하다. 하지만 괜찮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알겠다고만 대답하겠다. 대화도 슬슬 마쳐야 하니 마지막을 즐겁게 마무리해 보자. 당신이 ‘홍상수’ 영화제와 ‘검정치마’ 베스트 앨범을 만든다 가정하자. 우선 ‘홍상수’ 영화제부터. 1박 2일로 진행되는 이 영화제는 첫날 3편, 둘째 날 2편, 총 5편의 영화가 상영된다. 프로그래머 김동희, 프로그램을 짜달라. 이유에 대한 언급은 마음대로


일단 시작은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홍상수’ 데뷔작이고, 가장 날 것의 ‘홍상수’니까. 가장 심연에 있는 ‘홍상수’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이게 가장 대중적이란 얘기가 많고, ‘김민희’가 처음 등장하는 영화이기도 하니까, ‘홍상수’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영화 두 편인 것 같다. 저녁에는 <밤의 해변에서 혼자> ‘김민희’와 ‘홍상수’와 관련된 논란이 처음 막 생기기 시작할 때 나온 영화인데, 이 영화 속에 ‘김민희’는 언젠가 혼자 남겨질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런 ‘김민희’를 위해 만든 영화인 것 같아서, 저녁에 보면 좋을 것 같다. 다음 날 첫 영화는 <그 후> 요즘 비겁하다는 것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데, 이 영화가 비겁하다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고 하더라. 난 이해가 안 됐다. 아직도 잘 모르겠고. 난 이 영화가 믿음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때 보면 좋겠다. 마지막은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 이 영화는 갈수록 내가 좋아하는 영화다. <녹색광선>이 떠오르기도 하고. 이 영화는 ‘홍상수’ 영화 중 유일한 해피엔딩이기도 하다. 사람에 대해 온전히 봐줄 수 있게 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다 알지 못하겠다면 그냥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겠니? 하는 이 영화가 엄청나게 희망적으로 느껴졌다


다음은 ‘검정치마’ 베스트 앨범. LP로 제작될 예정이기에 총 7곡이 수록된다. A-SIDE에 4곡, B-SIDE에 3곡이다


 첫 번째는 무조건 <좋아해줘> 그다음 <매미들>, <Put me on drugs>, <Girl Scout!> B-SIDE 첫 곡은 <음악하는 여자>, <Garden State Dreamers>마지막은 <Everything> 그리고 히든 트랙으로 <Fling; Fig From France> 너무 어렵다. 잠깐.. <Big Love>도 넣어야 하는데,, 앨범에서 다 골고루 넣어야 하고,, 히든트랙을.. <Big Love>으로 바꾸겠다



즐거워 보이니 나도 좋다. 마지막 질문이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청량한 말을 듣고 싶다. 타오르지 않고, 얼어붙지 않는, 산뜻하게 내려앉을 수 있는 말 


그 질문을 딱 들으니 나에게 그런 말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굳이 떠올려보자면.. 나는 이 세상을 만끽하며 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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