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이제" - <0%를 향하여>

2021년 12월 11일의 대화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블루>를 보러 <서울아트시네마>로 향하던 길이었다. 보통은 가방에 책 한 권이 들어있는데, 그날따라 가방은 가벼웠고, 영화 시작까지 시간은 넉넉히 남아있어서, 극장에 가기 전 교보문고에 먼저 들리기로 했다. 한국 문학 코너를 서성이고, 해외 문학 코너를 두리번거렸다. 책이 잘 골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한국 문학 코너와 해외 문학 코너를 오가며 30분이 넘는 시간을 보냈지만, 여전히 오늘 읽을 책을 고를 수 없었다. 다 읽어 보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읽고 싶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영화 시작까진 한 시간 정도가 남아 있었고, 고민 끝에 한 번도 사본 적 없었던, '문학동네'의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기로 결정했다. '서이제'란 이름 때문이었다. '서이제'의 글을 읽은 적은 없었지만, 작가의 이름은 이미 다양한 경로를 통해 눈에 익어 있었고, 오늘이 우리가 만날 날이었나 보다 하는 마음으로 카페에 들어가 책을 펼쳤다. 제목, <0%를 향하여> 영화에 관한 소설이었다. 극장에 관한 소설이었다. 종로에 관한 소설이었다. 학생에 관한 소설이었고, 어른에 관한 소설이기도 했는데, 무엇에 관한 소설이라고 말하기가 어렵다고도 생각했다. 그리고 읽었던 소설 중 좋은 소설은 대부분 그랬다. 잘 모르겠다. 잘 모르겠지만, 좀 더 나누어 보고 싶다. 그러다 보면 알 것도 같은데, 결국 잘 모르겠지만, 알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게 알 수 없는 마음으로 '서이제'의 SNS를 찾아 메시지를 보냈다. 한 달 뒤, 우리는 종로에서 만났다



12월도 중순에 접어들고 있다. 본격적으로 추워지나 싶더니, 요즘 들어 다시 포근해졌다.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나

 

올해는 발표도 많이 했고, 따라서 작업량도, 인터뷰도 많았다. 근황을 말해보자면, 계속 글만 썼다. 예외적인 게 있다면 양갱을 많이 먹었고. 1일 1양갱 하고 그랬다

 

양갱? 뭐 그냥 슈퍼에 파는 롯데 양갱 같은 걸 말하는 건가

 

맞다. 원래 양갱을 좋아했다. 모나카나 양갱처럼 팥 들어간 걸 좋아하는데, 내가 뭐 하나에 꽂히면 몇 달 동안 그것만 먹는다. 요즘은 양갱에 꽂혀있다. 양갱 먹고, 소설 쓰고, 한다

 

책의 작가 소개를 보면 <km/s> 동인으로 활동 중이라고 적혀있다. <km/s> 동인에 대해 얘기해줄 수 있을까

 

동인이다. 동인이고, 작년부터 ‘신종원’ 작가랑 같이하고 있다. ‘신종원’ 작가랑 소설 쓰는 스타일은 달랐지만, 달라서 오히려 도움이 될 것 같았고, 영향을 많이 주고받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같기도 했고. 작년 여름에 시작했다

 

동인을 한다는 건 뭔가

 

팀? 소속감 같은 게 생긴다. 서로의 글을 봐주기도 하고. 크루 같은 개념이라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혼자 ‘이런 소설을 쓰겠다’ 했을 땐, 그냥 혼자 말하는 게 되는데, 동인을 통해 말하게 되면 현상이나 분위기가 된다. 목소리에 힘이 좀 더 생긴 달까. 올해 ‘신종원’ 작가와 나, 각자의 첫 책이 나와서, 더불어 동인 홍보를 많이 했다. 그러다 보니 동인 단위의 원고 청탁이 많이 들어오더라. 그렇게 같이 쓴 소설을 문예지 <자음과 모음>을 통해 발표했고. 앞으로도 계속 나올 예정이다

 

오늘 당신을 만나러 오는 길에, 나는 당신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며 종로로 오고 있을까 궁금했다. 나는 1호선을 타고 왔는데, 약 50분 정도가 걸리니, 자려고 눈을 감았다. 그런데 잠은 오지 않고, 오래된 라디오 방송이 하나 생각나더라. 고 ‘정은임’ 아나운서가 했던 <FM 영화음악>이었다. 이 방송이 팟캐스트에 꽤 잘 정리돼 있으니까, 생각난 김에, 팟캐스트 어플에 들어가 게스트로 ‘노영심’이 나온 편을 재생했다. ‘노영심’이 영화 <아홉 살 인생> 스코어 작업을 했던 과정에 대해 설명해줬는데, 스코어 중 4개의 손이 피아노를 연주한 부분에 관한 것이었다. ‘정은임’ 아나운서가 이 부분은 어떻게 작업한 것이냐 물었더니, 두 손으로 한번 녹음하고, 그 위에 덧대어 다시 녹음하는 방식으로 작업했다고 ‘노영심’이 대답했다. 별 대단한 이야기는 아닌데, 그 대화를 듣고 있으니 종로라는 지역에 과거와 현재가 중첩되는 과정이 떠올랐다. 의미는 내가 부여한 거지만, 공교로운 마음이었다

 

핸드폰 메모장에 소설을 쓰면서 왔다. 바쁠 때는 이렇게도 하는데.. 그러다 보니 당신처럼 사유를 하며 오진 않았다. 이따 집에 가서도 소설을 써야 한다

 

따로 기대한 답변이 있는 건 아니니, 아무래도 좋다. 우리가 오늘 <서울아트시네마>가 있는 종로에서 만난 건, 물론 <0%를 향하여>에 종로 얘기가 많이 나오기 때문이고, 따라서 서로의 종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그전에 서울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해보자. 당신의 고향은 청주고, 나의 고향은 부산이다. 내가 처음 서울에 온 건 중학교 2학년 수학여행 때였고, 혼자 서울을 찾은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그 두 번의 방문은 서울이란 도시에 관한 각기 다른 인상을 심어줬고, 그 두 인상이 지금까지도 내가 가지는 서울에 대한 생각의 지반으로 자리 잡고 있다. 첫 번째 인상은 명동의 신세계 백화점, 한국은행 본점, 우리은행 건물을 보면서 느낀 것들이다. 강력한 힘이 느껴졌고,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그 건물들을 보며 수도의 역사가 피부로 재빠르게 달라붙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KTX를 타고 영등포역에 내렸을 때인데, 흐렸던 날로 기억한다. 먹구름 아래, 타임스퀘어가 번쩍이고 있고, 길엔 노숙자와 성매매 호객하는 할머니들이 듬성듬성 있었다. 그리고 낡은 영등포역 광장엔 털이 떡진 비둘기가 버려진 담배꽁초 사이에 숨은 식량을 쪼는 중이었고. 난 그 풍경을 통과해 맥도날드로 들어갔다. 1층 창가 자리에 앉아 ‘상하이 스파이시 버거’를 먹으며 이번엔 수도의 역사가 아닌, 단 한 번도 청산을 성공하지 못한 한국의 근현대와 현대를 곱씹었다

 

중/고등학교 때도 공연이나 영화를 보러 서울에 온 적은 있었지만, 지리를 잘 모르니, 구경하며 느끼기엔 길 찾느라 바빴다. 그 후 안산으로 대학을 갔는데, 그때는 또 안산에만 주로 있었다. 서울은 대학 졸업하고서야 다니기 시작했다. 서울에 있는 극장들도 졸업 후에야 다녔고. 서울은 내게 거대한 미술관 또는 박물관처럼 느껴졌다. 시공을 초월하는 느낌이 있어서, 시간성에 관하여 다시 고민하게 만드는 공간이기도 하고. 이 도시에서 만들어지는 움직임 자체가 청주나 안산과는 달랐다. 우선 사람이나 자동차가 너무 많은데, 그들은 아주 빠르게 각자의 갈 길을 간다. 거기서 발생하는 리듬, 운동성이 있다. 청주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걸어가는 날 친다던지, 내 시야를 가린다던지 할 일이 없는데, 서울은 그렇지 않으니까 방금 말한 그 운동성을 집중해 보게 된다. 또 사람이 많으니 이벤트가 많다. 걸어가다 보면 별일이 막 생긴다. 당신이 말해줬던 종로에서 허경영 만난 이야기(여느 날처럼 종로3가로 영화를 보러 갔다가, 하얀색 롤스로이스에서 내려 유세하는 허경영과 그의 지지자들을 만난 적이 있었단 이야기를 들려줬었다)도 그렇고. 많은 수의 사람이 각자의 사건을 가지고 있으니까, 동시다발적으로 일이 벌어진다. 볼거리가 많은 서울이다

 

그런 서울 중에서도 종로는 당신에게 특별한 지역처럼 보인다. 표제작인 <0%를 향하여> 외에도 수록된 많은 소설에 종로가 등장한다. 나 역시도 서울에서 종로를 가장 좋아하기에 책을 읽는 내내 괜히 든든했다

 

종로를 많이 걸었다. ‘정지돈’ 작가의 <건축이냐 혁명이냐>를 좋아해서 그 소설에 나오는 곳을 다 찾으러 다닌 적도 있고. 그 소설이 건축에 대해 생각하게끔 했다. 종로에 있는 낡은 건물과 새로 지은 건물이 예술 작품으로 보이기 시작했고, 감상하는 게 즐거웠다. 또 여기엔 극장이 많으니까, 내 운을 시험해보게 된다. 걸어 다니다 보면 내가 아는 누군가를 만날까? 하는 식의. 그 운은 꽤 적중할 때가 많다. 사실 예전엔 종로가 안산에서 너무 머니까, 내가 굳이 영화 보러 저기까지 가야 해? 하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근데 영화를 보고 나면 그 마음이 다 사라지더라. 그리고 영화를 보기 위해 종로까지 오가는 그 길이 어쩌면 영화보다 더 좋았다. 영화를 보기 위해 내 일상 중 이 만큼의 시간을 쓸 수 있다는 게 감사하기도 했고. 거기다 영화까지 좋아버리면 영화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길게 주어지는 거니까. 좀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경복궁에 깔린 박석을 좋아한다. 그 모양이 언어적이라 느끼기 때문인데, 박석을 보면 각기 다르고, 타일처럼 정확하지 않은데, 그럼에도 잘 어우러져 있다. 언어도 마찬가지지 않나. 단어는 공유하지만, 그 의미는 정확하게 공유되는 게 아님에도 우리는 의사소통을 하니까. 물론 약간 어긋나는 지점도 생기지만, 결국엔 대화가 이어지니까. 그런 맥락에서 박석의 이미지가 내겐 언어적이다. 그걸 보며 산책하는 게 좋다

 

게다가 경복궁은 가격도 싸다. 나도 아주 좋아한다. 운동성 얘기를 하니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가끔 종로3가 14번 출구로 나와, 지금은 없어진, 맞은편의 유니클로 쪽을 바라보며, 이 길 위에 세 개의 극장이 있던 시절을 상상해보곤 했다. 내가 직접 겪은 극장은 <서울극장>뿐이지만, 워낙 이 거리의 극장에 관한 글을 많이 봐서 그런지, 온갖 상상의 이미지가 떠오르더라. 그리고 그 무형의 이미지를 상상하며 현실의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건너는 모습을 보면, 영사기 안으로 필름이 들어가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었는데. 그렇게 이 거리는 풍경 자체가 영화로 느껴질 때가 많았다

 

나는 중학교 2학년, 3학년 때부터 영화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 서른을 넘기고 나니, 이미 영화가 나에게 너무 많은 것을 줘서 더 이상 나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를 영화와 극장에 가는 체험이 바꿔줬으니까. 영화를 어떻게 봤는지 생각하는 과정이, 일상에서의 대상을 바라보는 감각도 바꿔줬다는 얘기다. 당신이 방금 종로3가의 거리가 영화처럼 느껴졌다고 했는데, 나도 산책하며 보게 되는 풍경을 두고 ‘영화 같다’, ‘영화 보는 거랑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왔을 때 뭘 보게 되느냐가 하나의 서사처럼 읽혀서, 그 관계에 주목하게 되는데, 그런 맥락에서 종로와 서울은 볼거리가 많으니, 한참을 돌아다니게 된다 



당신을 만나기 전에 <서울아트시네마>의 종로3가 시대를 기록하기 위해 몇몇 관객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의 공통된 얘기 중 하나는 <서울아트시네마>에 갈 땐, 영화를 만날 거란 기대가 생긴다는 것이었다.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에 가는 것이니 영화를 만나는 건 당연한 얘기다. 하지만 그때 그들이 말한 영화는. 그동안 써왔던 영화와는 다른 단어처럼 읽혔고, 그들의 입도 다르게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서울아트시네마>에 오기 위해 종로3가로 올 때 기대하게 되는 것이 있나

 

나는 지하철에서 바빠가지고... 항상 바쁘다. 근데 사람 만날 기대를 하게 되는 건 있다. ‘이름은 모르지만, 저번에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봤던 그 사람이 또 올까? 오늘은 친구와 함께 올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아니면 예를 들어 ‘아네스 바르다’ 특별전을 보러 가는 길엔, ‘아네스 바르다’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생각나면서 ‘걔들이 올까?’ 생각하게 되고

 

좋다. 그럼 조금 다른 이야기이자 비슷한 이야기. 나는 이 동네의 영화관을 얘기할 땐 부러 극장이라고 강조하며 부르게 된다. 영화관과 극장. 이 두 단어를 발음할 때 느껴지는 차이가 단순히 감각적인 것인지, 혹은 그저 언어에 대한 나의 허영인지 의심스러워 사전을 찾아봤다. 영화관은 ‘영화를 상영하는 시설을 갖춘 건물’이라 되어있고, 극장은 ‘영화를 상영하기 위하여 무대와 객석 등을 설치한 건물’이라 되어 있었다. 여전히 속이 시원하진 않아 한자를 살피니, 관은 ‘집 관’자를 쓰고, 장은 ‘마당 장’자를 쓰더라. 사심을 섞어 유추했을 때, 관에서 오는 닫힌 느낌과 장이 주는 열린 느낌이 그 차이를 만드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영화관이라고 했을 땐 멀티플렉스가 생각나고, 극장이라 했을 땐 이를테면 <서울아트시네마>가 생각나는 건, 똑같이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지만, 공간에 따라 내가 영화를 대하는 태도부터가 다르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나도 극장이란 말을 더 좋아하고, 많이 쓰게 된다. 최근 극장에 관한 에세이를 쓴 적이 있다. 그때 썼던 극장의 의미는 ‘극이 벌어지는 장소’였다. 영화의 서사뿐만이 아니라, 극장을 오가며 만나게 되는 극적인 순간, 영화를 봤던 감각까지 포함한 개념으로 극장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영화관은 일단 세 글자여서.. 발음하기에도 극장이 편한 느낌이다. 또 최근 지인들과 있을 때, 어떤 분이 ‘극장 갈래?’란 말을 꺼냈더니 다른 사람들이 막 웃으며 나이 들어 보인다고 하더라. 영화관이란 말이 있는데 왜 극장이란 말을 쓰냐고 묻기도 했고. 작은 해프닝이었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됐다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얘기인데, <0%를 향하여>를 읽을 때 여러 가지 생각을 했지만, 가장 나눠보고 싶었던 건, 말의 선택에 관한 기준이었다. 예를 들면 담배에 관한 동사로 ‘태운다’를 선택하는 것. 대다수가 ‘핀다’고 적는데, <0%를 향하여>엔 한번을 제외하곤 모두 ‘태운다’고 돼 있다. ‘피우다’와 ‘태우다’의 차이는 뭔가. 그리고 이 예시가 아니더라도 말을 고를 때 어떤 생각들이 기준으로 자리 잡는가

 

일단 단어의 경우엔 당연히 앞뒤 문장의 분위기에 따라 선택이 달라진다. 그 소설의 톤과도 맞춰야 하고. 또 문장을 쓸 때, 작곡하는 것처럼 음악성을 많이 생각하는데, 내가 고르는 단어나 서술어는 앞뒤 문장을 읽어 내려갈 때의 그 음악성에 따라 선택된다

 

단어 선택의 신중함이 반가웠던 건, 그만큼 말을 선택하는 것에 대부분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단 뜻이기도 하다. 얘기를 이어가 보자면 나는 단어의 선택에도 유행이 개입한다고 자주 생각했다. 말을 가장 예민하게 다루어야 할 작가나 기자 조차 이런 유행의 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종종 느낄 정도였고. 이를테면 최근엔 ‘무용’ ‘폐기’ ‘애정’ 등의 말이 대유행이다. 이 단어들이 등장하는 글이 정말 여기저기서 눈에 띄고, 그러다 보니 나는 글을 재밌게 읽다가도, 저 단어들을 만나게 되면 순식간에 맥이 풀려버린다. 물론 꼭 저 단어를 써야만 하는 근거가 느껴지는 글도 있다. 그런 건 괜찮다. 하지만 대부분은 무턱대고 등장한다. 그리고 그렇게 등장한 단어와 그 단어가 포함된 글은 코스튬 그 이상 이하도 아니란 게 내 생각이다

 

이런 얘기가 너무 반갑다. 지금은 이야기나 소재가 너무 중요시되지 않나. 그런데 나는 영화나 소설을 볼 때, 소설에서는 문장, 영화에서는 이미지의 배열이 이야기보다 훨씬 더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줄거리가 재밌어서 소설이나 영화를 소비한다면 ‘그냥 줄거리만 들으면 되지 않나?’ 하고 생각해볼 때도 있다. 같은 맥락에서 스포일러에 너무 예민한 것도 좀 이상하게 느껴진다. 결말을 알아도 괜찮다. 결말을 알아도, 그 이미지를 본 적은 없으니까. 책도 마찬가지다. ‘사건’이라는 개념을 조금 더 폭넓게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 문장 자체가 사건이 될 수도 있는 거다

 

소재 얘기를 받아 좀 더 말해보겠다. 단어의 유행이 어디서 올까 했을 때, 소재의 유행과 굉장히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최근 한국 소설을 읽으며 감지했던 어떤 흐름은, 개인의 내밀한 부분에 관한 얘기를 하다가도, 어느 순간 벽에 부딪혀 더 들어가지 못하고 튕겨 나온다는 거다. 그때, 그렇게 튕겨 나온 채로 끝낼 순 없으니, 작가는 공동체를 끌어오는 선택을 하게 되고, 그럴 때 소설은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애매한 지점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끝나버린다. 이런 흐름이 발생하는 까닭은 작가가 작가 개인의 소재와 주제가 아닌, 사실은 유행에 휩쓸린 거지만, ‘동시대와 호흡하기 위해 나는 이 이야기를 써야만 한다’는 거짓 깃발에 매달리기 때문이라는 게 내 판단이다. 그렇게 유행이 사라질 때까지, 소재가 반복되고, 소재와 함께 이야기가 반복되고, 이야기를 이루는 단어가 반복된다. 그리고 이건 비단 소설에 관한 이야기만은 아닐 거다

 

소재가 좋으면 다 된다는 식의 태도를 제일 싫어한다. ‘소재가 좋으면 다 된 거야’란 말이 맞다면 점점 자극적인 소재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로그라인이나 줄거리만 봤을 땐 평범하거나 진부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정작 작품을 확인했을 때 좋은 것들이 훨씬 더 좋다. 소재가 반복되는 건 시장의 흐름에 탓도 있다. 보통은 투자자가 따로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어떤 내용인지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고, 아직 찍지 않은 영화, 아직 쓰지 않은 소설을 줄거리만 가지고 이야기해야 하니까, 유행하는 소재를 끌어올 수밖에 없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나는 방금 우리가 나눈 단어, 소재, 문장, 이런 것들 덕분에 <0%를 향하여>를 읽으며 흥분했다. 멋진 부분이 많지만, 먼저 얘기해보고 싶은 건 이런 부분이다. ‘뭘 이렇게까지 장황하게 모든 마음의 과정을 적어놔?’ 할 정도로 문장을 쓴 뒤, 바로 다음 문장에서 방금 쓴 문장을 부정하고, 다시 이어지는 문장에서는 그 부정을 부정하고, 그렇게 부정하고 부정하고 부정하다 아예 다른 개념으로 또다시 연결됐던 <0%를 향하여> 속 문장들 말이다. 그 문장들을 보고 있으면 당신이 글을 쓸 때의 태도를 생각해보게 되는데, 그 태도는 품에서 단어와 문장을 고르고 골라 집어 꺼내 드는 게 아니라, ‘이왕 이렇게 된 거 뭐가 맞나 어디 한 번 봅시다.’ 하듯 바닥에 문장을 쫙 뿌린 뒤, 정확한 게 남을 때까지 추려 내가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이렇게 되면 비슷한 말이 반복될 수밖에 없으니까, 여러 가지 이유로 쉽지 않은 시도였을 텐데, 용기 있게 써줘서 고맙기도 했고

 

나에게 서사는 그런 거다. 생각의 흐름, 움직임, 앞으로 나아갈 때 변주되고, 변화하는 것이 나에겐 서사다. 그 운동성 자체가 나에겐 서사로 이해된다는 이야기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도 그런 게 많다. 걸음걸이, 몸짓, 손짓 등 이런 움직임이 중요하다. 문장으로 그런 것들을 표현하고 싶었다. 한 가지 얘기를 더 하자면 어릴 때부터 말하는 게 힘들었다. 예를 들면 ‘이 쿠키는 맛있어’라는 얘기를 할 때 ‘맛있는 건 뭐지?’ ‘정말 맛있나?’ ‘맛있다는 건 어느 정도로 정할 수 있는 거지?’ ‘조금 맛있어와 아주 맛있어의 차이는 뭐지’ 하면서 생각이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소설을 쓰니 해결됐다. ‘맛있다’라는 결론을 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한 생각과 고민을 나열하고, 나열함으로 인해 생기는 운동성을 보여주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달은 거다. 맛있어 맛없어가 아닌 ‘맛있는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근데 또..’ 하는 그 상태 자체를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다. 쉽지 않은 시도라고 했는데, 그런 것 치고 책이 나름 잘됐다. ‘영화를 전공해서’, ‘글을 배운 사람이 아니어서’, 하며 용인되는 게 좀 있는 거 같기도 하고. 못 써도 영화전공자여서 못 쓰는 거고, 새로운 시선을 가져도 영화전공자여서 새로운 시선을 가진 것으로 치부되긴 하지만..

 

기성 문인들 사이에서도 이런 글을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들이 꽤 있지 않았을까. 발표되는 대다수의 글을 보며, 이대로 가면 안 된다는 위기는 느끼지만, 나서서 말을 꺼내기엔 조심스러웠던 사람들이, 당신의 글을 보면서 기다렸단 듯이 반응했던 거란 생각이 든다

 

덕담해주다니..

 

진심이다. 그리고 방금 내가 쉽지 않은 시도라고 말한 이유 중 하나는 문장의 경제성 때문이기도 하다. 요즘은 좀 덜한 것 같지만, 어느 때부턴가 단문만이 좋은 글인 것처럼 얘기하는 사람이 많았고, 불필요한 것들은 최대한 제거해야 좋은 글이 된다는 얘기도 많았다. 하지만 나는 필요를 위해 불필요가 함께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글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쌓여 있는 불필요 덕분에 필요의 가치가 더욱더 강하게 읽힐 때 좋은 소설을 읽었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되면 또 결과적으로 불필요는 꼭필요가 되니 그것 역시 아름다운 과정이다

 

경제적인 언어라고 말하는 정확하고 적확한 것에 관한 불신이 늘 있었다. 아까 말했던 것처럼 아주 어릴 때, 말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부터 지닌 불신. 따라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면, 그건 이미지가 해결한다고 생각했다. 영화를 봤을 때 내 마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해결해준다고 느낄 때가 많았으니까. 그래서 그림을 그리거나, 이미지를 만드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거고. 근데 막상 거기로 갔더니, 내가 하려는 걸 투자받기 위해선 또 정확한 말, 적확한 말을 써야 하더라. 그러던 와중에 우연히 소설을 썼다. 소설을 써 보니, 쓴 문장의 운동성과 과정을 담은 문장을 통해 이것이야말로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깨달았다. 말을 하면서 자유를 느꼈다. 처음이었다. 소설은 나에게 가장 정확한 말이다.

 

경제성 얘기를 하니 궁금해지는 게 있다. 경제성이라고 할 땐, 들인 노동력과 자본에 대비해 생산되는 재화, 그리고 그 재화를 통해 벌어들일 수 있는 수익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글에 경제성을 대입했을 땐, 물론 분량에 관한 얘기도 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보단, 결국 쓰는 사람이 추구하는 글쓰기의 이유와 완성도에 관한 이야기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서이제의 글을 무엇을 향하나

 

소설 관련 수업을 아예 안 들은 건 아니고, 졸업하기 전에 문창과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소설과 시가 묶인 수업이었고, 나는 교과서에 실린 시 외에는 읽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큰일 났다 싶었다. 첫 수업이 좋아하는 시 발표였는데, 난 좋아하는 시조차 없었으니까. 그 수업에서 내가 쓴 시를 보고 교수님이 왜 이렇게 시를 짧게 썼냐 물으시기에, 시는 원래 짧은 거 아니냐고 답했다. 그랬더니 교수님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절제하지 말라고 하시더라. 시를 쓰는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못 한다면 그것만큼 억울한 일이 없다고 하시면서. 그 말을 듣는데 울컥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늘 있었지만, 그 경제성이란 것 때문에 늘 추리는 것만 해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또 짧은 시를 쓰기 위해선 더 많은 정서가 축적돼야 하고, 그러려면 더 많은 글을 써봐야 한다는 내용의 말씀도 해주셨다. 나의 글쓰기가 무엇을 향한다 그러면 너무 거창한 이야기가 되니까, 그 수업이 나의 소설 쓰기에 영향을 많이 끼쳤다고 정리하겠다


 

좋다. 이번엔 리듬 얘기를 해보자. 내가 힙합 음악이 익숙해 그런지 몰라도 당신의 글이 랩처럼 읽힐 때가 많았다. 그리고 그 빠른 리듬의 문장 끝에, 다소 허무하지만, ‘더 이상 이렇게 계속해서 빠르기만 하면 안 돼’라는 마음이 담긴 농담이 등장하면 감탄하기도 했고

 

너무 정확하게 봐줘서 감동이다. 문장에 대해 이렇게 디테일한 이야기를 해준 게 처음이다. 아무튼.. 사실 내가 힙합 음악을 굉장히 좋아한다. 고등학교 때 <소울컴퍼니>의 팬이었고, 공연 보러 서울에 많이 갔다. 외국 힙합 음악 보단 한국 힙합 음악의 가사 보는 걸 좋아했는데, 거기서 위로나 힘도 많이 받았다. 나중에 알게 된 건데, 기본적으로 내가 흑인 음악을 좋아하더라. 재즈, 힙합, R&B 등등. 쓸 때도 많이 듣고, 리듬도 그 음악들의 리듬을 살려서 쓰려고 한다. 재즈는 원래 악보가 없는 음악이었고,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넘어오는 음악이니까, 내 소설이 악보 없이 전해지는 재즈처럼 읽히길 바랐다

 

리듬 얘기를 조금 더 해볼 건데, 굉장히 자주 등장하는 쉼표와 마침표에 관한 것이다. 특히 쉼표가 정말 많이 등장하는데, 나 역시도 쉼표를 의식적으로 많이 쓰기 때문에 반가운 느낌을 받았다. 나에게 쉼표는 과속방지턱 같은 거다. 문장이란 게, 쓰다 보면 자꾸만 가속도가 붙어서 달리고 싶은 욕망을 발생시키니까. 그렇게 문장이 빠른 속도로 아무런 마찰 없이 매끄럽게 달리려 할 때, 달리는 차의 브레이크를 밟는 게 아닌, 주차 브레이크를 올려버리듯 쉼표를 집어넣는다. 읽을 땐 좀 불편할 수도 있다. 자꾸만 멈춰야 하니까. 하지만 그렇게 해야만 내가 쓰려고 했던 것에 더 정확히 가닿는다는 생각으로 쉼표를 쓴다. 퇴고할 때 지워도 보지만, 결국 다시 넣게 된다

 

글을 내가 원하는 리듬으로 쓴다 해도, 읽는 사람 역시 자신만의 리듬이 있으니까, 내가 쓴 리듬과 읽는 사람의 리듬이 충돌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렇게 충돌하면서 생기는 관계성이 나에겐 중요하다. 내가 쉼표를 찍으면 읽는 사람은 쭉 읽으려다가도 멈칫하게 되고, 아예 멈출 것인가, 아니면 쭉 밀고 나갈 것인가 하는 판단을 내려야만 한다. 나는 독자가 책을 읽을 때 최대한 많은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상황에 놓이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읽으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거나, 압도되었다는 것 보다, 읽으면서 딴생각을 하게 되고, 자료를 찾게 되고, 계속 읽을 건지, 쉴 건지, 그런 판단을 많이 하는 게 좋다. 쉼표는 기본적으로는 내가 좋아하는 리듬을 만들기 위한 것이고, 두 번째로는 읽는 독자와의 관계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근데 교정지를 보내면 다 빠져서 온다. 그럼 나는 또 ‘그대로..’ 하고 말씀드린다 



거듭 얘기했던 것처럼 영화를 전공했고, 소설을 쓰고 있다. 책을 읽기 전, 영화 만들기를 포기하고 글을 선택한 건 아닐까 하는 우려가 있었고, 그 포기의 마음이 글에서 느껴진다면 얘기 나누기가 조심스러워질 것 같아 걱정했는데, 그런 마음은 전혀 느껴지지 않더라. 오히려 글로 영화를 찍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하며 읽었다. 시간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건 뒤죽박죽 섞여 있는 쇼트가 배열된 영화를 보는 것 같았고, 소설 사이사이 굵은 글씨로 표시한 말들은 ‘#1’처럼 씬 번호로 느껴졌다

 

영화를 포기해서 소설을 쓴 건 아니었다. 영화를 배울 때 좋은 얘기가 좋은 영화를 만든다는 말을 6년 가까이 들었다. 그 정도면 그러려니 할 법도 한데, 난 계속 의문이 들더라, ‘좋은 얘기는 뭐지?’ ‘큰 사건이 벌어지고, 해결되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그런 건가?’ ‘난 별일 안 일어났으면 좋겠는데?’ 하며 반문도 많이 했다. 그러다 졸업할 무렵에 소설을 써보게 됐고, 써보고 나니 텍스트와 이미지가 분리된 것이 아닌, 시각적 의사소통 체계 안에서 묶이는 거라는 걸 깨달았다. 시를 읽으면서도 ‘행 갈이를 왜 여기서 했을까?’ 같은 고민을 통해 텍스트와 이미지의 차이보다는 공통점을 더 많이 느꼈다. 이 책에도 스도쿠를 넣는다던지, 모자 모양의 텍스트 등을 시도했는데, 보기와 읽기의 협동 사이에서 책을 감상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적극적으로 더 해보고 싶고. 두 번째 소설집에 묶일 소설들은 더 극대화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혹시 소설을 쓰며 떠올린 영화도 있나? 나는 소설을 쓸 때 오히려 소설보다 영화에서 자극을 더 많이 받는 편이라 궁금했다

 

참고한 영화는 없었지만, ‘윤성호’ 감독 영화를 훑어보고 싶은 마음이 있긴 했다. 그의 영화는 내가 처음으로 독립영화를 인지하게 만들었다. 그 영화는 그의 첫 장편 <은하해방전선>이었고. 이 영화가 말장난을 많이 친다. 좀 읽어주고 싶으니 검색하겠다. (검색 중...) ‘먹기 위해 사는 건지, 살기 위해 먹는 건지, 오줌을 싸다 보니 똥이 마려웠던 건지, 똥이 마려운데 오줌이 먼저 나온 건지’ 뭐 이런 식의 말장난. 중학교 때 이걸 보니 다 외우고 싶은 욕심이 나더라. 그래서 영화 보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머릿속으로 계속 ‘중얼중얼중얼중얼중얼중얼’ 하며 걸었다. 하지만 사실 그때 이후로 ‘윤성호’ 감독을 잠시 잊고 살았는데, 이번 책을 쓰다 보니 내가 이 사람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윤성호 감독의 다른 영화에도 말장난이 많이 나오는데.. 아무래도 그에게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우리가 너무 진지한 얘기만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사실 <0%를 향하여>를 읽으며 웃었던 기억이 많다. 흐뭇하게 웃는 게 아니라 진짜 웃겨서 웃는 웃음. 개그 욕심이 좀 있는 편인가

 

맞다. 하고 싶지만, 애초에 못 할 것 같아 포기하는 꿈 같은 게 다들 하나씩 있지 않나. 나에게도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가 래퍼였고, 하나는 코미디언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나랑 안 어울리고, 못 할 것 같았다. 난 사람들 앞에 서는 것도 별로 안 좋아했으니까. 근데 그 두 가지를 다 할 수 있었던 게 소설이었다. 언어를 가지고 음악을 만들었고, 사람들을 웃겼다. 그래서 책만 보고 나를 만나시는 분 중엔 간혹 내가 장난기도 많고, 말도 많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신다. 근데 전혀 안 그렇지 않나? 별로 웃긴 타입도 아니고. 근데 개그 욕심은 있다 



말이 적진 않은 것 같고, 중간중간 뉘앙스에서 장난치고 싶은 녀석이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게 느껴지긴 한다. 아무튼 슬슬 마무리할까 싶은데, 나는 책갈피 엽서에 들어 있는 편지가 이 책에 실린 다른 어느 작품만큼이나 좋더라. 그리고 이것이 또 책갈피로 실려 있으니, 책을 다시 펼칠 때마다 작가의 마음에 대해 다시 생각하며 자세를 고쳐 앉게 되기도 했다

 

편집자님 아이디어였다. 독자들에게 드릴 수 있는 엽서를 내보자며 이 엽서를 써달라 요청하셨다. 엽서에 들어갈 글과 작가의 말이 늦어져 출판 일정이 밀릴 뻔하긴 했지만.. 이 엽서에 언급된 ‘요리스 이벤스’의 <비>라는 작품을 정말 좋아한다. 매년 보기도 하고, 주변에 사람이 있으면 유튜브로 틀어서 바로 보기도 할 정도로. 영화는 비 내리기 전, 비 내릴 때, 비 내리고 나서의 모습이 전부다. 근데 그 이미지의 나열이 만들어내는 서사가 내가 소설로 하고 싶었던 것, 내가 좋아하는 영화에 대한 설명, 그 전부를 다 해줄 수 있겠다 싶어서 골랐다. 책 디자인이랑도 연관이 있고

 

마지막으론 시간과 공간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 시간과 공간, 영화 얘기를 하면 지겹도록 등장하는 이 두 축은 <0%를 향하여>에도 곳곳에 선명히 존재를 드러낸다. 그 두 축을 지지대 삼아 소설을 읽다 보면, 다른 그 무엇보다 시공간을 가지고 세계를 구축해나가는 과정 자체가 당신에겐 가장 중요하다고 느껴졌다. 시간과 공간에 관한 이야기로 오늘 대화를 마무리해달라

 

시간과 공간이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건 영화가 내게 알려준 것이다. 필름이란 것도, 하나의 물질이고, 덩어리고, 공간을 차지하는 부피인데, 거기에 시간이 말려 있는 거지 않나. 그렇게 영화를 통해서 이해한 시간과 공간이 이번 책을 쓸 때 굉장히 중요했다. 영화를 하기 전엔 그림을 계속 그렸었다. 미대를 생각했을 정도로. 그런데 역시나 입시미술이 너무 싫어서 그만뒀다. 내가 그리고 싶은 건 순간을 포착하는 게 아니라 변해가는 과정이었는데, 입시미술에선 그걸 할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어렸을 때, 그러니까 초등학교 때쯤 많이 그렸던 그림은 한 인물의 아기 때, 1년 뒤 모습, 할머니 됐을 때 이런 걸 쭉 그려서 한 페이지에 모아 놓은 것이었다. 긴 시간을 한눈에 보고 싶어 했던 욕망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있었던 거다. 그걸 어떤 방식으로 표현해야 할 지를 몰라서 그림도 그렸고, 영화도 했지만, 궁극적으로 책을 쓰는 것에 도착하게 됐다. 글을 쓰면서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알게 됐고. 책이라는 공간을 쓴다고 생각하며 글을 쓰고 있다

 

이제 연말이다. 마감하다 끝날 것 같아 보이지만.. 할 수만 있다면 뭘 하면서 연말을 보내고 싶나

 

영화 보고 싶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해피 아워>처럼 러닝타임인 긴 영화를 보면서 새해를 맞으면 재밌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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