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

2021년 9월 28일의 대화


 대화를 나눌 때 예를 든다는 건, 자신이 전달하려는 바를 상대에게 정확하게 도착시키고야 말겠다는 노력이다. 하지만 이 노력은 자칫하면 대화를 지루하게 만들 수 있고, 그 예가 적절치 못 한 경우엔 오히려 영 생각지도 못 했던 것을 상대에 건네게 만든다. 게다가 재미없는 예시를 반복해 사용한다면 듣는 이로 하여금 내면의 수준과 크기에 대한 불신을 얻기에도 딱 좋다. 하지만 이 노력이 정말 딱 들어맞는 타이밍에 정확한 모양으로 들어선다면 그건 그 사람의 얘기와 그 사람 자체에 대한 믿음과 호감을 한층 끌어 올리게 된다. '지혜'는 약 2시간 정도 진행했던 대화의 대부분을 '예를 들면'이라 덧붙이며 말을 이어나갔는데, 자신의 생각을 전달할 때 '지혜'가 내비치는 이런 결벽증적인 태도는 '지혜'의 작업에 관한 가장 명료한 설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혜'가 평생을 보낸 동네의 한 카페의 창가 자리에 우리는 자리 잡았다.  


 

대화를 준비하며 ‘지혜’의 글을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다른 것보다 눈에 띄었던 건, 내 기억보다 ‘지혜’의 글에 음식에 관한 얘기가 많더라는 거다. 글에 자주 등장한다는 건, 어느 정도의 애착 또는 최소한의 일상적 관심이 향해있다는 얘기지 않나. 그래서 우리 대화의 시작을 요즘 들어 유독 맛있게 먹고 있다거나, 자주 찾는 음식이 있는지를 묻는 것으로 하는 게 어떨까 생각했다

 

요즘은.. 초콜릿? 초콜릿이 들어간 음식을 많이 먹는 것 같다. 글에도 몇 번 묘사한 적이 있는데, ABC초콜릿 같은 초콜릿을 까먹기 시작하면 테이블 위에 껍질이 수북이 쌓일 정도로 먹는다. 요즘 회사에 다니는 중인데, 첫 번째 서랍은 초콜릿 서랍으로 정했다. 열면 바로 초콜릿이 보이게. 점심시간이 끝나면 카페를 가는데, 그때도 카페인 대신 초콜릿이 들어간 음료를 마신다. 엄청 단.

 

유독 초콜릿을 자주 찾는 이유가 있나

 

다들 그럴 거 같은데, 힘들거나 스트레스 받을 때 자주 찾는다. 나도 잘 모르고 있다가 어느 순간 초콜릿을 계속 찾고 있는 날 보면서 깨닫는다. ‘내가 지금 상태가 안 좋다’ 하면서.

 

우리가 종종 만나긴 했지만, 여름에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 얇은 옷을 입고 있는 모습도 처음 본다. 두꺼운 코트에 몸을 숨기고 있는 모습만 보다, 피부가 드러나는 옷을 입은 모습을 보니 새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올해의 여름은 어떤 여름이었나

 

혼자 있어 본 여름. 이전의 여름들을 생각해보면 가족들이 다 있었고, 같이 부딪히는 가족들이 많았으니 말할 사람도 많았다. 남자친구도 있었고. 그런데 이번 년도 여름 같은 경우엔, 다 빠져나가고 혼자 남겨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가족 중에서도 보낸 사람이 있고, 연애도 끝났고, 친구나 주변 인물들도 조금씩 정리가 됐다. 그런 정리가 끝나고 맞이하는 첫 여름이었다.

 

우리는 아무래도 오늘 글에 관한 얘기를 많이 하게 될 텐데, 그에 관한 준비를 하다가 사전 놀이를 해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내가 당신의 글을 읽으며 추린 몇 가지 단어를 듣고 ‘지혜’의 식대로 정의 내려는 거다. 첫 번째는 ‘슬픔’이다.

 

검정. 그럴 때 있지 않나. 집에 있을 때 문을 닫고, 커튼도 다 치면 완전히 캄캄해져서 눈을 떠도 캄캄한 느낌이 드는 그런 순간. 암전 같은 검정.

 

다음은 ‘분노’

 

분노.. 분노... 이거는 그냥 짧은 문장으로 말해도 될까? ‘끝나지 않는 것’ 같다. 내가 분노를 해소하는 것에 좀 취약한 편이다. 분노를 안고 가는 편이고, 짐 버리듯이 조금씩 그 감정을 버린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날 엄청 분노하게 만들었다면 그 감정은 삼사 년 후에야 사라진다.

 

마지막은 ‘후회’

 

조금만 생각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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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서도 얘기했었는데 나는 후회가 생필품 같다. 휴지나 칫솔 이런 것처럼 늘 옆에 있는 거.

 

내가 왜 이 세 단어를 골랐는지 짐작 가는 이유가 있나

 

아니, 없다.


저 세 단어가 ‘지혜’의 작업을 관통하는 단어라서 물어본 건 아니다. 오히려 ‘지혜’의 작업을 볼 때, 잘 느낄 수 없는 감정들에 가깝다. 슬픔이 있어야 할 자리에 그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되게 화가 나 있는 것 같은데 왜 분노하진 않을까 생각했다. 또 뭔가를 그리워하고, 아쉬워하는 것 같은데 후회하진 않는 것 같았으며, 그냥 단념하고 받아들인 사람이 보였달까.

 

나는 어떤 감정을 느낀다 해서 그걸 그대로 표현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그 감정에 대해 돌려돌려 말하게 되고, 그럼 그 끝에 다른 감정이 나온다. 예를 들어 내가 슬픔을 느꼈을 때,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생각하며 글을 쓰다 보면 정반대에 있는 감정인 행복이 나올 때가 있다. 이런 과정은 내가 살아가면서 잡으려 한 균형이었다. 처음에 작업을 시작했을 땐, 그리움을 그리움으로 받고, 분노를 분노로 받았고, 사랑을 느끼면 사랑으로 받았다. 그런데 지금은 극과 극의 감정, 그 사이가 궁금하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내가 에세이를 많이 쓰다 보니, 자연스레 에세이를 많이 읽곤 했는데 감정을 그대로 받는 글이 동어반복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면서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볼 수 있진 않을까’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방금 나눈 질문과 대답이 이 대화를 읽는 사람들에겐 하나의 이정표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잠깐 이야기의 흐름을 멈추고, ‘지혜’의 처음으로 가보자. 순수미술을 전공했고, 영상을 만들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주된 작업 도구는 글과 사진이다. 전공만 생각하면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우는 작업이 더 익숙할 것 같은데, 글에 사진을 곁들이는 작업을 시작하게 된 그때의 이야기가 듣고 싶다

 

아빠가 카메라를 사줬다. 중3 때. 난 사달라고 한 적도 없었고, 사진을 찍는 취미도 없었는데, 아빠가 카메라를 덜컥 사 오면서 주변에 있는 것들을 찍기 시작했다. 가족들과 멀리 여행을 간 적이 없기 때문에 더욱 주변의 것들을 찍었던 것 같다. 노을이 보이면 노을을 찍고, 친구들이랑 놀다가도 뭔가를 찍고, 그렇게 내 앞의 사물을 찍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다. 고등학교 때쯤, 아이폰을 사고 난 뒤로는 DSLR을 내려놓고 핸드폰으로 작업을 이어나갔고. 글 같은 경우엔 처음부터 쓰진 않았다. 20대 초반, 혼자 쓰고 혼자 읽는 일기를 쓴 것이 다였다. 그런데 그 무렵 학교에서 내 작업에 대한 스테이트먼트를 쓰게 됐고, 그러면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글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기를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했고, 페이스북엔 일기의 한 문장 정도 되는 일부와 사진과 함께 올리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게 시작이 돼서 글과 사진을 주된 것으로 작업하는 사람이 됐다. 스스로에게도, 봐주는 사람들에게도.

 

글과 사진은 너무 다른 종류의 도구다. 두 가지를 다 사용하는 작업을 보면 언제나 한 쪽으로의 쏠림을 발견하곤 하는데 ‘지혜’의 작업은 사진은 글 같고, 글은 사진 같아서, 두 가지가 서로를 보완하며 함께할 때 완성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처음엔 사진만 찍었다고 했는데, 그걸 좀 더 설명할 수 있고, 채워줄 수 있는 도구가 나에겐 글이었다. 예를 들어 테이블 위에 자두가 하나 놓여 있으면 나는 여름에 자두를 씻어 내어줬던 엄마에게까지 생각이 도달한다. 그럴 때 사진만 있으면 그걸 보는 사람들은 내가 회상하는 것을 알 방법이 없지 않나. 또 글만 뒀을 땐, 내가 느끼는 분위기나 공기를 사람들이 느낄 수 없다. 나에게 글과 사진은 하나로 연결돼 있다. 하나의 덩어리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지혜’의 작업 중 가장 좋았던 건 영상이었다. 앞으로 글 얘기를 좀 더 많이 할 테니 영상 얘기를 먼저 끝낼까 한다. 영상 중, 가장 좋았던 건 <매일이 그렇듯> 전시의 영상이다. 처음 전시장에 방문해 영상을 봤을 땐 현장에서 전시를 보고 바로 봤기 때문에 유독 좋은가 했지만, 인터뷰를 준비하며 다시 봐도 여전히 좋더라. 그리고 영상의 이미지와 글의 서사가 향하는 방향이 같지 않음에도, 자막의 순서에 맞춰 등장하는 이미지들의 맥락이 수긍이 갔다. 글은 한 번에 쓴 글 같고, 이미지는 찍어왔던 걸 재배치한 것 같은데, 쉽게 덤빌 수 있는 작업은 아니었을 것 같다

 

일단 그 영상을 보면 모든 장면이 분명하지 않다. 설명적이지 않은 것도 많고, 어디서 찍은 건지도 불분명하고, 상황들이 겹쳐져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내가 일상을 보내면서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것들을 묘사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연출했다. 나의 머릿속은 그 영상과 같은 느낌으로 흘러간다. 예를 들어 밤바다를 봤던 장면이 머릿속에 맴돌다 그것이 내가 지하철에 혼자 서있던 장면과 교차하고, 그 장면은 또 다른 장면과 겹친다. 그런 과정이 영상에 그대로 담겼으면 했다. <매일이 그렇듯> 영상 속 글은 내가 살아 온 시간을 한 번에 압축해 놓은 글이다. 결국 영상과 글이 같은 의미다. 내가 살아온 시간을 글로 압축하고, 영상은 내가 그동안 짧게짧게 모아 두었던 영상들을 모아 정리한 거니까. 영상의 순서 역시 내 몸이 반응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라 배치했고.

 

영상 얘기를 좀 더 하자면 넓게 겹쳐진 디졸브에 관한 것이다. 디졸브가 쓰일 때 그 역할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설명은 제쳐두고. <매일이 그렇듯>에서의 디졸브는 내게 머뭇거리므로 다가왔다. 거의 모든 영상 사이에 디졸브가 아주 두껍게 걸려 있고, 한 장면이 단독으로 존재하는 건 아주 잠깐이다. 영상에 담기 위해 골라낸 장면이 ‘지혜’의 생각이라 말해도 된다면, 각각의 생각에 충분히 머물지 못 했다는 아쉬움과 그럼에도 다음 장면으로, 다음 생각으로 갈 수밖에 없는 불가피함 사이의 머뭇거림으로 다가왔다는 얘기다.

 

정확하게 봤다. 난 어떤 장면을 생각하면 그 생각이 잘 끝나지 않는다. 그 생각이 잘 끝나지 않고, 잘 마무리되지 않고, 다음으로 넘어 가지지 않는다. 머뭇거림이란 표현이 맞는 것 같다.

 

마지막으론 자막이다. <매일이 그렇듯> 영상 속 글은 나래이션으로 처리해도 됐겠지만 사람의 음성은 배제하고 자막만으로 처리했다. 특별한 음악 없이 영상 원본의 현장음만을 넣었기 때문에 사람의 음성을 배제한 것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다. 영상의 장면들에도 형태로서의 인간은 등장하지만, 특정한 인물이 등장하는 건 아니기도 하고

 

한정되고 싶지 않았다. 내 작업은 나의 사적인 기록이지만, 내가 전달하는 장면을 본 사람들도 같이 그 장면 안으로 들어가 주길 바랐다. 내가 만약 나래이션을 녹음했다면 보는 사람은 나를 여성으로 인식했을 거고, 나의 목소리에서도 느끼는 것들이 있었을 거다. 그렇다고 해서 남성의 목소리를 쓴다고 하면 또 느낌이 다르고, 일어로 했을 때, 영어로 했을 때도 그 느낌이 다 다를 거다. 그래서 내가 나의 의도를 가장 잘 전달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방법이 나래이션을 빼는 거였다. 그래야지만 보는 사람이 영상에 이입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방금 한 질문은 ‘지혜’의 글에서도 사람이 배제돼 있다는 인상을 종종 받았기 때문에 물어본 질문이다. 물론 특정 이름들이 가끔 등장하고, 엄마나 할머니, 고모가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지혜’의 글에서 가장 부각되는 건 단편적인 장면이다. 그것도 현재 목격되고 있는 장면이 아닌, 남겨져 있는 장면이라 뒤돌아봐야만 하는 장면이고. 그리고 ‘지혜’는 그렇게 남겨진 장면 속의 흔적에 사람이 있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나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떠난 자리라던가, 내가 머물렀던 방 안의 사물이라던가, 그런 흔적을 따라가면서 사람을 떠올리고 기억을 쫓아가는 사람인 것 같다. 가족 중 한 명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 사람이 남긴 흔적들을 보면서 더 많은 걸 생각했다. 그 사람을 직접 봤을 때 드는 생각 보다, 그 사람이 남긴 흔적들을 보면서. 그 흔적이 더 많은 얘기를 해준다고 생각한다.

 

‘지혜’가 기록한 흔적을 감상하는 데 있어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 계절감이다. 사람마다 1년을 구분하는 방식이 있다. 예컨대 나 같은 경우엔 24절기이고, ‘지혜’의 경우엔 계절이 아닐까 짐작했다. 첫 책인 <내가 놓친 게 있다면>의 구획이 계절로 지어진 것 역시 그래서인가

 

일기를 쓴 걸 하나로 묶을 기준이 필요했는데 그게 계절이었다. 원래는 계절에 대한 감각을 예민하게 하진 않았다. 그런데 방금도 잠깐 말했던 가족 중의 한명이 정말 더웠던 여름에 떠났고, 그 이후로 계절에 예민한 사람이 됐다. 피부로 계절이 오는 걸 느낄 때마다 지나간 계절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내가 놓친 게 있다면> 이후, 작년과 올해에 걸쳐 출간된 연작 메모집 <너무나도 사적인 말>, <물이 지나가는 길>, <매일이 그렇듯>은 월로 구획이 지어졌는데, 이는 메모집이란 다소 경량한 형식이 영향을 준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두 책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

 

<내가 놓친 게 있다면>은 함께 만드는 출판사와 편집장님이 있었고, 대중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 낸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직접 만들어 본 독립출판물이다. 그리고 이 연작 메모집을 나는 평생 내고 싶은 욕심이 있다. 그래서 최대한 나에게 부담이 가지 않는 방식으로 기록하려 한다. 나에게 있었던 일을 계절보다 월별로 나누는 것이 조금 더 이성적인 구분이란 생각도 했고. 그냥 꾸준히 하는 기록이니까, 너무 감상적이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세 메모집에서 조차 ‘지혜’의 글을 나누는 건 계절이라 여겨졌고, 그중에서도 부각되는 계절은 여름과 겨울이었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여름은 지긋지긋해 보였고, 겨울은 떨고 있는 사람이라 생각돼 마음이 아팠다. 그 지긋지긋함과 떨림이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글을 읽으며 계속해서 생각했는데,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게 된 것은 지금은 부재한 것들에 대한 원망과 미안함이었다. 글에는 설명되지 않는 이유로 만날 수 없는 사람이 종종 등장하고, 몇 번의 죽음이 등장한다. 그간의 시간 동안 이들을 원망하기도 하고, 미안해하기도 하며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자꾸 얘기하게 되는 그 일이 있고 난 뒤로 여름은 내게 상징적인 계절이 됐다. 떠난 사람은 나에게 많은 사랑을 줬지만, 그 당시에는 난 그게 사랑이라는 걸 잘 알아채지 못 했고, 잘해드리지도 못 해서 사이가 안 좋기도 했다. 그런 상황 속에 돌아가셨다. 그래서 여름만 되면 그 사람을 생각하며 많은 감정이 일어나는데, 거기엔 원망도 있고, 분노도 있다. 이것들과 땀이 나는 여름 날씨가 뒤섞여 징글징글해진다. 내 글을 순차적으로 보면 그 시기에 가까울수록 징글징글하다는 말을 많이 쓰는데, 그래도 지금은 조금 유순해진 편이다. 여름이 그렇다면 겨울은 무거워진다. 봄, 여름, 가을에 느꼈던 감정, 만나고 헤어진 사람, 얻은 것과 잃은 것 등이 나를 누른다. 무겁고 어두워진달까. 그래서 겨울에 쓴 것들은 그것들을 잘 피해서 겨울을 버틸 수 있는 힘을 비축한 다음, 그 힘으로 겨울을 잘 보내고 싶다는 글에 가깝다.

 


지혜는 무엇에 기대고 의지하나 궁금해진다. 자신을 탓하기 바쁜 사람은 타인에게 의지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의지할 수 없다면 버텨내는 것 역시 불가능하니, 지혜가 지금 계속해서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다는 건, 어딘가에 기대고 있다는 것에 대한 반증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작업자이기도 하면서 회사에 출근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물론 회사에서 하는 일도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일이지만 내가 하는 작업과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내가 기대는 건 실존하는 존재라기보단, 작업과 일 사이를 병행하는 과정이다. 한쪽에 너무 오래 머무르면 힘들고 지치니 그럴 때 반대쪽으로 피한다. 그런 식으로 교차하면서 힘을 버는 사람이다.

 

방금 질문에서 언급했듯, ‘지혜’는 계속해서 쓰고 찍는다. 그리고 그 행위의 연속이 나에게 ‘지혜’의 작업을 긍정하게 만들었다.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예전엔 ‘지혜’의 작업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우울과 불안에 관한 가볍고, 손쉬운 제스처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작업이 3년 넘게 이어졌을 때, 그것이 제스처였다면 3년 내내 이어질 순 없다고 생각했고, 다시 글을 읽어본 뒤 <매일이 그렇듯> 전시장으로 향했다. 그때야 비로소 ‘지혜’의 작업이 조금에 닿았던 것 같다. SNS나 블로그, 노트북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뭔가를 남기는 행위는 분명 쉬운 일이 아니다. 그 긴 시간을 뒤돌아보면 어떤 마음인가

 

내가 쓴 글에서 빌려와 말해보고 싶다. 내가 쓴 것 중, ‘많은 어깨에 기대서 계절을 났다’라는 글이 있다. 8년이란 시간 동안 나 혼자 쓰고 찍고 했지만, 그걸 봐주는 사람들이 있었고, 전시장에 찾아와주는 사람들이 있어 계속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간혹 전혀 모르는 사람이 불쑥 등장해 ’6년 동안 잘 보고 있어요‘ 같은 말을 할 때가 있다. 그런 말을 들으면 난 멈출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 사람은 나와 같이 살아가는 사람이고, 함께 호흡하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면서 연대가 느껴진다. 그리고 난 시간의 힘을 믿는 편인데, 내가 1년에서 2년 정도 쓰고 찍었을 때와 8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은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변했고, 나 자신도 변했다. 그 긴 시간이 나에게 단단한 기둥처럼 있다. 물론 가끔 하고 싶지 않을 때도 있다. 8년을 멈추지 않고 해왔기 때문에 지긋지긋할 때도 있고. 하지만 이제는 내 삶을 이어가는 방법이 돼버려서,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생각이다.



‘지혜’가 자신을 지켜보는 사람들을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공간은 전시장이다. <매일이 그렇듯> 전시를 찾았을 때 ‘지혜’는 전시장 구석에 앉아 전시장을 찾은 사람들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 사람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나

 

내가 저 사람을 확인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내 예상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전시장을 찾았기 때문에 표현하지 않고 보고만 있는 사람이 많다는 걸 강하게 느끼기도 했고.

 

<매일이 그렇듯> 전시장은 ‘지혜’의 시간이 모두 기록돼 있는 공간이었다. 난 역으로 구석에 있는 당신을 보며 이 사람이 무언가를 남기는 것을 혹은 남겨온 것들을 모아 발표하는 일을 잠시 유보한 체, 그 덩어리들을 키워 본다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런 바람은 <내가 놓친 게 있다면>과 세 메모집의 차이에서 다시 한번 곱씹었다. 각각의 두 시리즈에 실린 글과 사진은 분명 비슷한 결을 유지하지만, 후자에 이르러 더욱더 세밀해지고 색이 짙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면 더는 미안함이나 원망에 머무르지 않고 보다 밝은 것들에 관한 이야기가 자연스레 지혜에게 찾아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한 발자국 떨어져 나와 바라보고 싶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지금이 그런 시기인 것 같다. 잘 정리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다음 챕터로 넘어가게 된다면 지금의 내 시선과는 다른 시선으로 일상을 바라보고, 그로부터 느낀 것들에 관해 얘기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건 글의 내용이 달라지는 것에 관한 얘기기도 하고, 표현하는 방식의 변화에 관한 얘기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내가 작업한 지 10년이 다 되어가니, 그동안 지켜봐 온 사람들에게 선물을 하고 싶단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 선물을 내가 아직 한 번도 연 적이 없는 사진전에서, 최근 다시 만지기 시작한 피아노로 음악을 연주해 들려주는 것이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덧붙여본다.



사진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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