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언제나 카메라를 경유해 시간의 비밀을 벗겨 보려는 인간의 노력으로 내게 다가왔었다. 따라서 단편 영화라는 형식이 가진 시간의 한계엔 쉽사리 설득되지 않았고, 충분하지 못 한 시간 안에 장편 영화에나 어울릴만한 이야기를 집어 넣느라 미어 터지고야 마는 단편 영화들을 보고 난 후면 불쾌감 까지도 느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나의 생각이 나의 게으름에서 비롯됐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영화를 지난 여름 만났는데, 그 영화가 바로 그날 대화를 나눈 이다영 감독의 <작년에 봤던 새>였다. 난 영화가 끝나자마자 마치 그래야만 한다는 듯 감상문을 쓰기 시작했고, 그 글의 마지막 마침표를 찍었을 때야 비로소 <작년에 봤던 새>가 온전히 소화됐다고 느꼈다. 내게 <작년에 봤던 새>가 가져다 준 건, 새로운 시간적 가능성이었을 테다.
절기상 입추가 한참 지났지만, 이제야 비로소 가을이 다가오는 것이 실감 나는 요즘이다. 가을이 되면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되나
갈무리되는 것에 대한 슬픔이 있다. 그래서 가을과 겨울은 우울하다고 느낀다. 그 우울함을 어떻게 건강하게 해결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이야기로 풀까에 관해 요즘 들어 자주 생각한다. 가을과 겨울이 오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난 오히려 봄과 여름이 되면 에너지가 더 생기는 편이다. 가을이 되어 추워지기 시작하면 에너지가 빠지고 있다고 느낀다. 겁이 좀 난다.
얼마 전에 다음 작품 촬영을 끝마친 것으로 알고 있다. 에너지를 많이 쓰는 촬영이 가을이 오기 전에 끝났으니 다행이라고 말해도 되는 걸까
촬영은 끝났는데 마무리 작업이 남아 있다. 마무리 작업은 주로 혼자 하는 게 많아서 너무 움츠러들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나에게 여름이 끝났다는 생각을 하게되는 순간은 이른 아침 출근하기 위해 집을 나섰을 때 피부로 달려드는 찬 공기다. 그런데 작년에 이어 올해는 마스크를 쓴 탓에 그 차가움이 주는 쾌감이 덜하다. 야외 촬영이 많은 영화를 찍어왔는데, 이런 시기에 영화를 찍으며 느끼는 아쉬움 또는 오히려 좋은 점 같은 것이 있나
글쎄.. 코로나.. 좋은 건 없고, 영화 찍는 일에 있어서는 힘든 게 훨씬 많다. 예를 들어 마스크는 포커스 아웃을 해도 너무 잘 보이기 때문에 프레임 안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모두 통제해야 하고, 장소를 섭외하기도 쉽지 않다. 또 사람 사이의 의심이 많아지는 것도 큰 고충이다. 예전 같으면 장소 섭외를 할 때 사장님들께 웃으며 부탁드리면 좋은 마음으로 도와주시곤 했는데 지금은 벽이 쳐져 있다고 느낀다. 상영할 때도 마찬가지다. 영화제 상영이 잡혔다 하더라도 마지막까지 안전히 상영을 마칠 수 있을까 걱정한다. 그러니까 영화를 만들기 시작할 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어렵게 됐다.
2019년에 <정원씨>를 그리고 2020년 <작년에 봤던 새>, 2021년 <한비>까지 매년 한 편의 영화씩 꾸준히 내놓고 있다. 그리고 아까 말했듯 현재 또 하나의 작품을 촬영을 끝냈다. 이런 흐름은 계획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그때그때 찍어야겠다 판단이 서는 것에 대한 자연스러운 표출인가
우선 <정원씨>와 <작년에 봤던 새>는 학생이던 시절에 찍었다. 그래서 학사 일정에 맞춰 영화를 꼭 찍어야 하기도 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그 당시에 가장 많이 생각하던 것들이 담겼다. 영화에 담긴 생각은 주변에서 일어난 일을 옆에서 지켜봤던 경우이던든, 내가 직접 겪은 경우이든, 모두 내가 소화했거나, 혹은 소화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들이다. 소화하고 싶은 쪽이 더 많은 것 같다. 학교에 다닐 때의 두 작품이 그랬다면 <한비>나 지금 작업 중인 작품은 꼭 해야만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해야 되겠는데? 라는 마음이 들었던 작품이다. ‘사회에다 이 이야기를 해야 해!’라기 보단 그냥 이 이야기를 꺼내고 싶은 마음.
영화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조금은 변두리의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보고 싶다. 처음엔 글을 쓰고 싶어 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현재는 표현하는 도구로 영상을 택했다. 본인에게 글과 영상은 어떻게 다른가
영상의 매력은 내가 의도하지 않은 것도 담긴다는 점이다. 시나리오를 쓸 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들이 영상에 담겨 있거나 나타나는 경우가 있는데, 이건 우연일 수도 있지만, 그 우연이 또 너무 매력적이다. 글로 쓸 때는 단순히 'A'라는 감정인 줄 알고 쓴 글이었는데, 그걸 영상으로 찍고 보니 그 이상의 감정을 마주하게 된 달까. 이런 걸 또 매번 느끼는 건 아니기 때문에 이 우연의 순간을 또 만나고 싶어서 계속 찍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럼 본인에겐 영상이 글보단 보다 풍부한 도구인가
아직까지는 나에게 그런 것 같다. 내가 쓰고 있는 글은 영상을 만들기 위한 재료이다 보니 그렇게 느끼게 된다. 질문해줬던 것처럼 처음엔 글을 쓰고 싶었고, 내가 앞서 영상에 대해서 말한 그런 성질을 가진 글을 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내 글이 누군가에게 닿았을 때, 나의 의도가 잘 읽힐 것으로 생각했는데.. 글쓰기 실력이 부족한 거겠지 뭐.. 그래도 글쓰기에 대한 욕망은 여전히 있다. 시나리오와 소설을 여전히 병행하며 쓰는 중이다.
그 선택의 과정엔 당연히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작가에서 영화감독으로 옮겨가는 것을 단순히 생각하면 창작자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도구만 변경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에겐 글에서 영상으로 옮겨간다는 것은, 게다가 개인 작업인 글쓰기에서 단체 작업인 영화로 옮겨간다는 것은 단순한 도구의 변화가 아닌, 품어온 성질과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변해야 하는 지점이란 의미다
영화 촬영의 경우 그리 좋은 비유란 생각은 안 들지만 수능을 보는 기분이다. 아까 말한 우연의 순간도 많지만, 순간순간에 결정되는 것도 많다. 영화를 찍기 위해선 돈도 너무 많이 들고, 내가 준비한 시간도 긴데, 정작 상황이 따라주지 않으면 준비한 100에서 30밖에 못 보여 줄 수도 있다. 그리고 단체 작업이다 보니 나 혼자서 잘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이쪽저쪽에서 다 잘해줘야 한다. 그러다 보니 내가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때는 다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더 깊게 고민하는 시간도 좀 가지고, 혼자서도 다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거다. 하지만 또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아까 말한 우연을 만나면 그래 이 맛이지 한다. 그냥 그런 반복이다.
어떤 영화를 작업해야 한다고 마음먹으면 루틴을 짜고 움직이는 편인가?
<한비>를 찍으며 생긴 루틴이 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일어나는 시간 보다 서너 시간 정도 일찍 일어난다. 그리고 잘 때도 빨리 잔다. 주위에도 밤에 연락하면 내가 받지 못함을 알린다. 그렇게 조금이라도 일찍 일어나는 것이 중요한 게, 쫓기듯이 작업을 하는 것과 한두 시간이라도 일찍 일어나 내 안에서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는 건 다르다. 예를 들면 어제 있었던 배우 리딩에서 내가 미처 대답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는 그런 시간을 가진다. 한두 시간이면 가능한 건데, 그 시간을 일찍 일어나는 식으로 만들지 않으면 계속해서 쫓기듯 작업하게 된다. 그리고 영화와 관련되지 않은 것들을 20분이라도 하려 한다. 영화와 상관없는 책이나, 운동, 산책 그런 것들. 영화와 관련된 것들은 작업이 잘 안될 경우 어떻게든 영향을 줘서 내가 쉽게 우울해지더라.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물어보고 싶은 게, 지금까지 같이 작업을 해온 스탭, 배우들이 모두 일상에서도 굉장히 친한 관계인 걸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일상과 작업을 분리하려고 해도 그 사람들을 만나면 자연스레 작업 생각이 날 것 같다. 웃으며 맥주 한잔 마시며 놀다가도 불현듯 ‘아, 내일 쟤랑 촬영해야 하는데..’ 하는 식이랄까. 그런 것에서 오는 어려움은 없나
그런 부분은 사실 아직도 잘 안 된다. 그냥 일로 만난 관계면 그 사람의 사생활은 전혀 알 수 없지 않나. 그런데 난 그런 게 아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작은 변화도 우리 작업에 어떤 영향을 줄지 신경이 쓰인다. 예를 들면 애인이 생겼다고 할 때 ‘그럼 우리 작업에 소홀해지려나..’ 생각하고, 게임 하는 걸 보게 되면 ‘지금 게임 할 시간이 어딨지..?’ 하게 된다. 사실 이건 해결 방법이 없다. 같이 하는 작업이긴 하지만 모두에게 같은 크기의 작업은 아니기 때문에 뭐라 요구할 순 없다. 그냥 내 개인의 서운함이니 내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 생각하며 마음을 고쳐먹으려 한다. 그들도 나에게 그럴 수 있고.
이제 작품 이야기를 좀 해보자. <정원씨> 같은 경우엔 외람되지만 조금은 갈팡질팡하는 작품처럼 느껴졌다. 고민 끝에, 해야만 하는 이야기를 꺼내놓고야 말았다기보단, 20대라면 마땅히 해야 한다 여겨지는 이야기를 선택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이렇게 느끼는 것엔 학교라는 테두리도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짐작해 봤다. 작업자 개인의 내면으로 파고들어 이야기를 건져 올리는 것보단 속해 있는 무리, 그러니까 20대, 대학생 등의 집단으로 들어가 이야기를 하는 건 비교적 손쉬우니까.
그 당시 영화가 나왔을 때가 2018년이었고, 미투로 많은 이야기가 나오던 시기였다. 그리고 내가 속해 있던 학교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내가 겪은 일도 있었고. 그래서 영화로 이 이야기를 꼭 하고 싶었다. 학교에서 만든 영화를 다 같이 보는 시간이 있는데, 그 자리에서 이 영화를 틀고 싶었다. 그때는 이걸 토해내야만 했다. 영화 마지막에 정원이가 “뭐가 그렇게 다들 쉬운 거냐”라고 말하는데, 이 대사는 실제 현실에선 내가 하지 못했던 말이었기에, 영화로나마 그 당시에 내가 그런 생각을 했었다는 걸 전하고 싶었다.
그런 맥락이 있었다면 섣불리 판단한 것에 대해 사과하겠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토해내지 못하고 있던 감정에 대한 하나의 마침표를 찍었기에 비로소 <작년에 봤던 새>와 <한비>를 찍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학교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해보자. 방금 나눈 이야기와 맥이 닿아 있는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또 영 상관이 없는 이야기는 아닌 거 같으니. 예술을 배운다는 것에 난 아무런 의문이 없는 사람이지만, 현재 한국 대학의 시스템처럼 마치 퀘스트를 수행하고 나면 자격증이 주어지는 형태의 과정엔 의문이 생긴다. 게다가 그 자격증마저도 큰 힘은 없다. 굳이 장점을 생각해보자면 비슷한 분야에 관심사를 두고 있는 사람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싶은데, 학교에서 4년간 영화를 배우는 것은 어떤 시간이었나
우선 나는 그 당시 학교 선생님들에게 영향을 꽤 받은 편이다. 그분들의 생각이나 영화를 대하는 마음을 보며 많이 배웠다. 나이에 대한 조급함도 덜어낼 수 있었던 것 같고. 동료 이야기를 해보자면 영화과라고 하지만 사실 영화를 하는 사람은 정말 소수다. 그런 와중에 동료를 찾았다는 건 굉장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영화과에 왔다고 해서 동료를 찾을 수 있는 건 아니란 이야기다. 그리고 대학 커리큘럼이 이런 식으로 짜여 있는 건, 대학이 결과를 내야 하기 때문인 건데, 그 커리큘럼이 나에겐 너무 급하게 느껴졌다. 난 아직 깊어지지 않았고, 정리되지 않았는데, 결과를 내야 하니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창피하게 느껴지는 것들을 꺼내야만 하는 스트레스도 있었다.
나는 예술을 전공한 적이 없기 때문에 방금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 부분에 대해선 장단점이 있을 것도 같다. 비전공자들은 해야만 하는 상황을 맞이해본 적이 없으니, 끝맺음을 짓는 것에 굉장히 약하다. 강제적으로라도 끝을 내보고, 사람들 앞에 내놓아본 경험이 없으니까. 억지로나마 완성한 것이라 할지라도 완성했다는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기가 힘들다. 그러니 항상 이야기만 하고, 고민만 한다. 내가 그랬단 얘기다.
그럴 수도 있겠다.
<정원씨>에서 <작년에 봤던 새>로 넘어가는 과정은 더욱 사적인 이야기 속으로 파고드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봤다. 두 영화는 아주 다르다. 크레딧을 지우고 영화를 봤다면 같은 감독이 만든 영화라곤 짐작도 못 할 만큼. 그 차이에 대해 말해보자면 <정원씨>는 확고한 인물들, 변동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인물들 그리고 그 인물들의 과거나 미래는 전혀 짐작되지 않고, 감독이 찍은 표면만 보였다. 하지만 <작년에 봤던 새> 같은 경우엔 그 인물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 사람들의 과거나 미래가 상상됐고 그래서 더 알고 싶어졌다. 터놓고 말해 <정원씨>와 <작년에 봤던 새> 사이의 시간엔 감독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싶을 정도의 많은 발전이 존재한다고 느꼈다. 그 사이의 시간은 어떤 시간이었나
나도 비슷하게 생각하긴 하지만 그 6개월 정도의 시간이 무엇이었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어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작년에 봤던 새> 다음 작품인 <한비>를 만들 때도 <작년에 봤던 새>가 발전인지 운인지 알 수 없어 불안하기도 했다. 그 불안은 지금도 안고 있다. <정원씨> 때부터 내 작업 과정을 가까이에서 지켜봐 온 사람들의 반응도 당신의 반응과 비슷했다. ‘무슨 일이야?’ 하는. 지금 생각해보면 <정원씨>를 찍었을 때의 마음과 <작년에 봤던 새>를 찍었을 때의 마음이 달랐던 건 <정원씨> 때는 힘이 많이 들어갔다. 뭔가 보여줘야겠다는 그런. 그런데 완성하고 보니 사실 내 성에 차진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작년에 봤던 새>를 찍을 땐 힘을 다 풀고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컸다. 촬영감독과 ‘이걸 정말 힘 빼고 편한 마음으로 찍자, 한명이 힘이 들어가면 한명이 힘을 빼주자’라고 이야기했다. 내가 힘이 들어가는 순간 생각 회로가 좀 제대로 안 돌아가는 거 같다.
듣다 보니 두 가지가 궁금해졌다. 하나는 ‘힘이 들어갔다’고 표현했는데 <정원씨> 같은 경우 감독에게 해야만 하는 이야기고, 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지만, 마음 깊은 곳에선 사실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는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게 아닌데, 이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가 없으니 했어야만 하지 않았을까 하는.
그럴 수도 있겠다. <작년에 봤던 새> 같은 경우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관객이 못 들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작업 과정에서 발생하는 실수도 시원하게 넘어 가졌다. 하지만 <정원씨>는 내 이야기가 안 들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 아주 컸다. 그러다 보니 컷마다 딱딱한 게 있다. 그런 차이가 아닐까 싶다.
두 번째는 <작년에 봤던 새>가 운이었을까 불안했다 했는데, 그 운은 어떤 것을 말하는 건가.
예를 들어 영화에 나오는 제주도 카페가 있는데, 그곳에 큰 창이 있다. 만약 그 창에 햇빛이 들어왔다면 굉장히 힘들었을 거다. 근데 그때 마침 비가 왔고, 따라서 흐렸고, 그런 것들이 영화의 분위기를 아주 잘 잡아줬다. 그뿐만 아니라 촬영 과정에서 어떤 장면 때문에 딱 한 번만 해가 떠주길 바랐는데, 1주일 작업하는 동안 해가 딱 2시간만 쨍쨍했다. 그 순간 ‘하늘이 도와주나?’ 생각했다. 이런 순간이 아주 많았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작년에 봤던 새>가 감독 스스로에게 선물 같은 작품이 아니었을까 싶다. 제주도라는 지역이 도와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작년에 봤던 새>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해보자. <작년에 봤던 새>의 많은 설정과 조건은 피할 수 없는 이별과 부재의 순간을 맞닥뜨리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속해 있는 시간이 영원하지 않음에 대한 은유로 느껴지고, 그렇다면 불가능한 영원이 가져오는 서글픔 속에 행복은 어디서 발생하는가에 관하여 묻게 된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등장인물도 적고, 큰 사건도 없는 아주 작은 이야기이지만, 절대 가벼이 할 수도 없으며 함부로 할 수도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단편이란 형식 안에서 이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에 부담감은 없었나.
없었던 것 같다. <작년에 봤던 새>는 오히려 줄이라고 한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줄였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당시에 나를 믿어보자면 영화 속 두 인물에게 그곳을 정리하는 데 있어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는 생각이다. 사실 계획은 20분 내외였다. 하지만 찍고 편집하는 과정에서 앞서 말했듯 지금의 러닝타임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는 판단이 들었다. 물론 <작년에 봤던 새>를 보고 나에게 장편 호흡을 좋아하겠다고 말한 사람들이 있었고, 나 역시도 나에게 더 많은 시간이 주어지길 바라지만, 또 단편만이 가진 매력이 있다.
굳이 골라야 한다면 빼고 싶은 장면이 있나? 나는 두 인물이 선착장에서 손을 모으고 호흡하는 장면이 조금 튄다고 느끼긴 했다. 대부분이 일상적인 장면인데, 이 장면만 유독 아름다워서 오히려 잠깐 멈칫하게 됐던 거 같다. 오히려 나는 이어지는 장면에서 두 인물 옆으로 ‘먼지’가 등장하고, ‘먼지’ 옆으로 ‘양수’가 걸으며 춤을 출 때 울컥했다. 물론 그 이전의 호흡 장면이 있어 이 장면이 더 울컥했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빼고 싶은 장면은 없다. 말이 나왔으니 ‘먼지’ 이야기를 하자면 ‘먼지’가 촬영하는 내내 우리를 쫓아다녔다. 촬영장 근처 가게에 사는 개였는데, 제주도엔 그런 집 고양이, 집 개가 많다. 아무튼 ‘먼지’가 우리와 조금 떨어져 계속 함께 다니다 그 장면에서 패닝을 했는데 신기하게 프레임 안으로 딱 들어왔다. 물론 ‘먼지’가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는 우연이 없었다 하더라도 그 쇼트는 의미를 가졌겠지만, ‘먼지’가 등장함으로써 더욱더 좋은 쇼트가 됐다.
제주도라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로 <작년에 봤던 새>에 관한 이야기를 마무리해 보자. 육지 사람들에게 제주도는 언제나 타지다. 타지이기에 잠깐 머무는 곳이고 그러므로 특별하고 편안하며 자유롭다. 하지만 그 특별함은 결코 일상이 될 순 없기에 언제나 다시 돌아가야 하는 일상이 내포한 불안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제주도를 생각하면 어떤가.
(한참을 생각하고)....제주도는... 제주도에서 머물 때 같이 지냈던 사람들에겐 어떻게 보면 나는 ‘양수’다. 그 사람들과 영상통화를 하거나 명절이면 안부 인사를 묻곤 하는데,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들 때가 있다. 마치 떨어져 있는 부모님에게 자주 연락드리지 못하는 느낌이랄까. 제주도를 생각하면 내가 너무 좋아하는 사람들이 거기 있는데, 당장 갈 수는 없고, 난 여기서 바쁘고, 그들이 기억하는 나도 바쁘고, 그러다 보니 미안해진다. 그리고 또 다른 생각 하나는 제주도를 작년에 한번 갔었는데, 1년 사이인데도 많이 바뀌어있었다. 그게 서글프게 만들더라. 5년 10년 된 가게를 찾기 힘들고, 내가 자주 가던 건물 옥상에서 보였던 한라산이 맞은편에 새롭게 올라간 건물에 가려 보이지 않는 그런 변화들이. 나에게 제주도는 휴식이나 파라다이스, 그런 거라기보단 조금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특히나 문화, 예술 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은 서울로 향할 수밖에 없는 한국의 상황 속에서, 타지에서 서울로 온 이들은 마음속에 고향을 늘 품고 사는 경우가 많지만, 오히려 수도권에서 자란 이들은 고향이란 정의 자체가 낯설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내게 고향이란 나를 가장 편히 설명할 수 있는 정서가 집약돼 있고, 그곳의 사람들을 생각했을 때 가장 다정하게 느껴지는 곳이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기 전 사전에 건넨 질문지에서 감독 역시 딱히 고향이라 느껴지는 곳은 없다고 답했는데, 감독에겐 제주도가 일종의 고향의 기능을 하는 것인가
그건 또 조금 다른 것 같다. 내가 태어난 고향은 수원인데 수원을 생각하면 내 정체성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따라붙는다. 태어난 곳은 수원이고, 지금 사는 곳은 관악구지만, 관악에 산다고 말하기도 뭐하고, 수원에 산다기도 뭐하다. 아직 어느 곳에도 발붙이지 못하고 붕 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지방에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할 때도 있었다. 지방 사람들이 가지는 연대 같은 것들이 나에겐 없으니까.
<한비>로 이야기를 이어 가보자. <한비>를 보며 기억에 대한 감독의 고민이 <한비>에 이르러 더욱더 맹렬하게 진행되다 <한비>가 끝나며 함께 종료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한비>가 기억을 어떻게 떠안고 또는 품고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감독의 마지막 정리처럼 느껴지는 한편, 각 인물의 기억 투쟁이 벌어지는 싸움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작년에 봤던 새>에선 서로에 대한 그리움과 기억을 따뜻하게 감싸 안으려는 인물만이 등장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는 분명 새로운 지점이고, <한비>가 <작년에 봤던 새> 이후 작품이란 점을 생각하면 더욱더 그렇다. 이미 정리된 생각의 막을 불쑥 찢고 올라온, 피하려 했다 결국 마주할 수밖에 없었던 고민에 대한 응답으로 느껴졌달까. <한비>가 <작년에 봤던 새> 이후에 시작된 이유가 있을까
<작년에 봤던 새>를 만들었을 때는 ‘기억하는 게 중요하지’하는 딱 거기까지만 생각했다. 조금 나이브하게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 이후 <한비> 이전까지 더는 만나지 않는 사람들, 볼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내가 가지고 있는 기억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면서 ‘기억하는 게 중요한 건 맞는데, 내가 모든 걸 기억할 수 있나? 내가 모든 걸 기억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어떻게 간직해야 하지?’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기억에 대해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한비>를 찍으며 정리가 됐다.
기억 투쟁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보자. 인물들은 계속해서 ‘한비’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다툰다. 그리고 서로의 기억이 다를 때 불안해하고, 화를 내고, 이미 사라진 이에 대한 기억의 권력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예민하게 반응한다. 이는 실제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자주 벌어지는 일이며, 왜 이런 일이 자주 벌어지나를 생각해봤을 때, 과거의 일 중 어떤 것을 망각하고, 어떤 것을 기억할지 선택하는 그 기준에 의해 각자의 정체성이 확립되기 때문이 아닐까. 내겐 각자의 기억이 맞다고 주장하는 것은 달리 말하면 내가 정리한 나에 대해 토 달지 말란 이야기로 들린다.
비슷한 것 같다. 인물들이 서로의 기억이 다를 때 날카롭게 반응하는 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니었을까. 자신의 기억과 기억 속의 한비를 그런 식으로 지켜야만 자신들이 살 수 있기 때문에. 극장에서 상영했을 때 객석에서 이런 질문이 나온 적이 있었다. ‘도대체 그럼 한비의 이름에 관한 맞는 설명은 뭐냐’하는. 근데 사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않나. 실제로 ‘한비’가 그렇게 말했을 수도 있고, ‘해수’의 기억이 뒤죽박죽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건 ‘해수’에게 ‘한비’와 이름에 관해 나눈 그 대화가 강렬하게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건 ‘해수’에게 ‘한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영화엔 ‘한비’의 부재를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해수’의 내레이션이 나온다. 그걸 따라 쭉 적어봤고, 마지막 ‘한비’의 내레이션까지 따라 적었는데, ‘한비’는 ‘사람들이 잘 때 눈동자를 양옆으로 움직이는데, 버릴 기억을 고르기 위해서래. 그래서 그걸 따라서 눈동자를 굴려보는 거야. 천천히 나의 속도에 맞춰서. 아무리 눈동자를 굴려도 사라지지 않는 기억이 있는데, 난 그걸 잘 껴안고 살아보려고 해’라고 말하더라. 이 말은 기억과 망각을 선택하는 기준에 작동하는 이데올로기를 뛰어넘어 필연적으로 남는 기억이 있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이데올로기가 개입한다는 건 기억이 행하는 진실의 변질이다. 실제 그렇게 일어난 일이 아닌데도 기억하는 사람의 이데올로기가 그렇게 기억하게끔 하는 것이다. 좀 다른 이야기일 수 있지만, 내가 오랜 시간 가지고 있었던 기억에 대해 엄마에게 말한 적이 있는데, 엄마는 그런 적이 없다고 했다. 그때 고민하게 된 것이 난 왜 일어나지도 않은 이런 기억을 가지고 있는가였다, 결론은 내 안에 이미, 방금 말한 이데올로기의 판단이 이루어지기에 앞서 먼저 자리 잡고 있는 기억이 존재한다는 거다. 그리고 난 이런 기억을 어떻게 껴안아야 하나 생각하게 된다. <작년에 봤던 새>에서는 인물들이 연대하며 기억을 나눈다. 그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각자가 스스로 기억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 역시도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 마지막에 ‘해수’가 이별을 택하는 것 역시 혼자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본인의 영화를 통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가감 없이, 그리고 비교적 친절하게 전달하는 편이다. 조금은 숨긴다거나, 상징을 집어넣는다거나, 불친절하게 전달하고 싶은 욕망은 없나?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한비>를 상영하고 나온 반응은 ‘어렵다’였다. <정원씨>나 <작년에 봤던 새>와 비교했을 때 <한비>의 템포가 조금 다르긴 해서 의아한 반응은 아니었다. 영화가 ‘해수’의 머리 안으로만 진행되기 때문에. 그래도 난 어렵지는 않다고 생각해서..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어려움의 기준이 다 너무 달라서.. 잘 모르겠다.
대화 초반에 말했다시피 김예지, 강진아, 조정민, 조은진, 김현규 등 일종의 ‘팀 이다영’처럼 같은 멤버로 계속해서 영화를 만들고 있다. 자주 같이 작업하다 보면 서로 간에 쌓이는 이야기도 많을 것 같다. 작업 현장은 어떤 분위기고, 모이면 주로 어떤 이야기들이 오가나
팀처럼 같이 움직이는 건 아무래도 촬영감독인 조은진과 사운드를 담당하는 김현규다. 둘이 처음부터 끝까지 신경을 많이 써준다. 22살부터 조은진 촬영감독이 아닌 다른 사람과는 한 번도 작업한 적이 없다. 시나리오를 같이 썼다고 말하거나 공동 연출이라 말해도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둘 사이에서만 통하는 의사소통법이 있어서 다른 스탭들에게 이를 잘 설명하기 위해 고민한다. 이번에 같이 촬영하며 새롭게 느꼈던 건, 나의 아주 작은 한숨이나 표정에서도 컷에 대한 만족도를 조은진 촬영감독이 다 알아차린다는 거다. 이정도 사이가 되다 보니 어떤 큰일이 있지 않은 이상 서로가 함께하기를 원한다. 강진아 배우나 조정민 배우는 내가 도움을 요청하면 배역의 크기와 상관없이 흔쾌히 도움을 주고, 김예지 배우는 같이 작품을 할 때마다 서로에게 공부가 된다. 나는 배우들과 이야기하는 것도 좋아하고, 연기연출을 너무 좋아해서 김예지 배우와는 늘 새로운 시도를 위한 스터디를 하는 기분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촬영감독은 매우 중요한 포지션이지 않나. 혹시 다른 촬영감독과 작업해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나.
<작년에 봤던 새>를 찍기 전에 다른 촬영감독에게 제안이 왔던 적이 있다. 그때 잠깐 흔들리긴 했다. 조은진 촬영감독이 못미더워서가 아니라, 그냥 ‘다른 사람이랑도 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결국 조은진 촬영감독과 하기로 했다. 학교에 다니며 함께 작업해온 시간을 같이 갈무리하고 싶기도 했고, 앞서 말했듯 내 영화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다.
뒤늦은 질문이지만 순서가 지금이 맞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 현장으로 가 촬영했을 때, 완성된 작품을 처음 상영했을 때가 기억나나?
첫 촬영은 22살 습작 때였다. 영화가 뭔지도 몰랐지만, 흥분했던 것 같다. 그런 거 있지 않나. 선배들 촬영장 가서 구경할 때 난 찍어본 적도 없으면서 ‘쟤보단 잘할 거 같은데?’하고 생각하는. 난 내가 당연히 잘할 줄 알았고, 첫 촬영 때 실제로도 꽤 잘했던 것 같아서 흥분했다. 촬영장이 겁나고, 촬영에 대한 불안한 상상을 많이 하게 되는 건 <정원씨> 때 부터였다. 극장 상영이 처음 이루어진 곳은 인천의 ‘영화 공간 주안’이었는데, 불안했다. 그리고 이건 아직도 매 순간 불안하다. 상영사고가 나진 않을까, 소리는 제대로 나올까, 내 옆에 앉아 있는 이 관객은 어떻게 느낄까, 그런 불안한 상상이 마구 든다.
약 3년의 세월에 걸쳐 기억에 대한 이야기, 기억 앞에서 망설이는 사람들, 뒤늦게나마 말을 건네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왔다. 만약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어떤 이야기가 나올까
기억이란 챕터가 갈무리됐다곤 느끼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기억과 상실이란 단어에 끌린다. 이번에 찍은 영화는 한 커플이 오랜 시간 동거해 온 공간을 떠날지 말지 고민하는 시기를 담고 있는데, 그때 그들이 느끼는 것도 그 공간에서 자신들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이번에도 이런 영화를 찍고, 비슷한 감정이 끼어드는 걸 보면 아직 그 챕터가 끝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wonblueman2021-10-13 20:36
잘 읽었습니다
영화를 보고 읽었으면 더 좋았을것 같기도 하고, 읽고 영화를 봐서 이해가 더 잘될것 같기도 하네요.
영화도 볼게요
**본 대화에서 얘기되는 영화들을 볼 수 있는 곳은 아래와 같습니다
"정원씨" - 퍼플레이 https://www.purplay.co.kr/service/detail.php?id=203
"작년에 봤던 새" - 추후 OTT를 통한 공개
"한비" - 현재 영화제 상영중, 추후 OTT를 통한 공개
2021년 9월 23일의 대화
영화는 언제나 카메라를 경유해 시간의 비밀을 벗겨 보려는 인간의 노력으로 내게 다가왔었다. 따라서 단편 영화라는 형식이 가진 시간의 한계엔 쉽사리 설득되지 않았고, 충분하지 못 한 시간 안에 장편 영화에나 어울릴만한 이야기를 집어 넣느라 미어 터지고야 마는 단편 영화들을 보고 난 후면 불쾌감 까지도 느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나의 생각이 나의 게으름에서 비롯됐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영화를 지난 여름 만났는데, 그 영화가 바로 그날 대화를 나눈 이다영 감독의 <작년에 봤던 새>였다. 난 영화가 끝나자마자 마치 그래야만 한다는 듯 감상문을 쓰기 시작했고, 그 글의 마지막 마침표를 찍었을 때야 비로소 <작년에 봤던 새>가 온전히 소화됐다고 느꼈다. 내게 <작년에 봤던 새>가 가져다 준 건, 새로운 시간적 가능성이었을 테다.
절기상 입추가 한참 지났지만, 이제야 비로소 가을이 다가오는 것이 실감 나는 요즘이다. 가을이 되면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되나
갈무리되는 것에 대한 슬픔이 있다. 그래서 가을과 겨울은 우울하다고 느낀다. 그 우울함을 어떻게 건강하게 해결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이야기로 풀까에 관해 요즘 들어 자주 생각한다. 가을과 겨울이 오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난 오히려 봄과 여름이 되면 에너지가 더 생기는 편이다. 가을이 되어 추워지기 시작하면 에너지가 빠지고 있다고 느낀다. 겁이 좀 난다.
얼마 전에 다음 작품 촬영을 끝마친 것으로 알고 있다. 에너지를 많이 쓰는 촬영이 가을이 오기 전에 끝났으니 다행이라고 말해도 되는 걸까
촬영은 끝났는데 마무리 작업이 남아 있다. 마무리 작업은 주로 혼자 하는 게 많아서 너무 움츠러들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나에게 여름이 끝났다는 생각을 하게되는 순간은 이른 아침 출근하기 위해 집을 나섰을 때 피부로 달려드는 찬 공기다. 그런데 작년에 이어 올해는 마스크를 쓴 탓에 그 차가움이 주는 쾌감이 덜하다. 야외 촬영이 많은 영화를 찍어왔는데, 이런 시기에 영화를 찍으며 느끼는 아쉬움 또는 오히려 좋은 점 같은 것이 있나
글쎄.. 코로나.. 좋은 건 없고, 영화 찍는 일에 있어서는 힘든 게 훨씬 많다. 예를 들어 마스크는 포커스 아웃을 해도 너무 잘 보이기 때문에 프레임 안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모두 통제해야 하고, 장소를 섭외하기도 쉽지 않다. 또 사람 사이의 의심이 많아지는 것도 큰 고충이다. 예전 같으면 장소 섭외를 할 때 사장님들께 웃으며 부탁드리면 좋은 마음으로 도와주시곤 했는데 지금은 벽이 쳐져 있다고 느낀다. 상영할 때도 마찬가지다. 영화제 상영이 잡혔다 하더라도 마지막까지 안전히 상영을 마칠 수 있을까 걱정한다. 그러니까 영화를 만들기 시작할 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어렵게 됐다.
2019년에 <정원씨>를 그리고 2020년 <작년에 봤던 새>, 2021년 <한비>까지 매년 한 편의 영화씩 꾸준히 내놓고 있다. 그리고 아까 말했듯 현재 또 하나의 작품을 촬영을 끝냈다. 이런 흐름은 계획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그때그때 찍어야겠다 판단이 서는 것에 대한 자연스러운 표출인가
우선 <정원씨>와 <작년에 봤던 새>는 학생이던 시절에 찍었다. 그래서 학사 일정에 맞춰 영화를 꼭 찍어야 하기도 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그 당시에 가장 많이 생각하던 것들이 담겼다. 영화에 담긴 생각은 주변에서 일어난 일을 옆에서 지켜봤던 경우이던든, 내가 직접 겪은 경우이든, 모두 내가 소화했거나, 혹은 소화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들이다. 소화하고 싶은 쪽이 더 많은 것 같다. 학교에 다닐 때의 두 작품이 그랬다면 <한비>나 지금 작업 중인 작품은 꼭 해야만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해야 되겠는데? 라는 마음이 들었던 작품이다. ‘사회에다 이 이야기를 해야 해!’라기 보단 그냥 이 이야기를 꺼내고 싶은 마음.
영화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조금은 변두리의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보고 싶다. 처음엔 글을 쓰고 싶어 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현재는 표현하는 도구로 영상을 택했다. 본인에게 글과 영상은 어떻게 다른가
영상의 매력은 내가 의도하지 않은 것도 담긴다는 점이다. 시나리오를 쓸 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들이 영상에 담겨 있거나 나타나는 경우가 있는데, 이건 우연일 수도 있지만, 그 우연이 또 너무 매력적이다. 글로 쓸 때는 단순히 'A'라는 감정인 줄 알고 쓴 글이었는데, 그걸 영상으로 찍고 보니 그 이상의 감정을 마주하게 된 달까. 이런 걸 또 매번 느끼는 건 아니기 때문에 이 우연의 순간을 또 만나고 싶어서 계속 찍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럼 본인에겐 영상이 글보단 보다 풍부한 도구인가
아직까지는 나에게 그런 것 같다. 내가 쓰고 있는 글은 영상을 만들기 위한 재료이다 보니 그렇게 느끼게 된다. 질문해줬던 것처럼 처음엔 글을 쓰고 싶었고, 내가 앞서 영상에 대해서 말한 그런 성질을 가진 글을 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내 글이 누군가에게 닿았을 때, 나의 의도가 잘 읽힐 것으로 생각했는데.. 글쓰기 실력이 부족한 거겠지 뭐.. 그래도 글쓰기에 대한 욕망은 여전히 있다. 시나리오와 소설을 여전히 병행하며 쓰는 중이다.
그 선택의 과정엔 당연히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작가에서 영화감독으로 옮겨가는 것을 단순히 생각하면 창작자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도구만 변경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에겐 글에서 영상으로 옮겨간다는 것은, 게다가 개인 작업인 글쓰기에서 단체 작업인 영화로 옮겨간다는 것은 단순한 도구의 변화가 아닌, 품어온 성질과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변해야 하는 지점이란 의미다
영화 촬영의 경우 그리 좋은 비유란 생각은 안 들지만 수능을 보는 기분이다. 아까 말한 우연의 순간도 많지만, 순간순간에 결정되는 것도 많다. 영화를 찍기 위해선 돈도 너무 많이 들고, 내가 준비한 시간도 긴데, 정작 상황이 따라주지 않으면 준비한 100에서 30밖에 못 보여 줄 수도 있다. 그리고 단체 작업이다 보니 나 혼자서 잘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이쪽저쪽에서 다 잘해줘야 한다. 그러다 보니 내가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때는 다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더 깊게 고민하는 시간도 좀 가지고, 혼자서도 다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거다. 하지만 또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아까 말한 우연을 만나면 그래 이 맛이지 한다. 그냥 그런 반복이다.
어떤 영화를 작업해야 한다고 마음먹으면 루틴을 짜고 움직이는 편인가?
<한비>를 찍으며 생긴 루틴이 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일어나는 시간 보다 서너 시간 정도 일찍 일어난다. 그리고 잘 때도 빨리 잔다. 주위에도 밤에 연락하면 내가 받지 못함을 알린다. 그렇게 조금이라도 일찍 일어나는 것이 중요한 게, 쫓기듯이 작업을 하는 것과 한두 시간이라도 일찍 일어나 내 안에서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는 건 다르다. 예를 들면 어제 있었던 배우 리딩에서 내가 미처 대답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는 그런 시간을 가진다. 한두 시간이면 가능한 건데, 그 시간을 일찍 일어나는 식으로 만들지 않으면 계속해서 쫓기듯 작업하게 된다. 그리고 영화와 관련되지 않은 것들을 20분이라도 하려 한다. 영화와 상관없는 책이나, 운동, 산책 그런 것들. 영화와 관련된 것들은 작업이 잘 안될 경우 어떻게든 영향을 줘서 내가 쉽게 우울해지더라.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물어보고 싶은 게, 지금까지 같이 작업을 해온 스탭, 배우들이 모두 일상에서도 굉장히 친한 관계인 걸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일상과 작업을 분리하려고 해도 그 사람들을 만나면 자연스레 작업 생각이 날 것 같다. 웃으며 맥주 한잔 마시며 놀다가도 불현듯 ‘아, 내일 쟤랑 촬영해야 하는데..’ 하는 식이랄까. 그런 것에서 오는 어려움은 없나
그런 부분은 사실 아직도 잘 안 된다. 그냥 일로 만난 관계면 그 사람의 사생활은 전혀 알 수 없지 않나. 그런데 난 그런 게 아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작은 변화도 우리 작업에 어떤 영향을 줄지 신경이 쓰인다. 예를 들면 애인이 생겼다고 할 때 ‘그럼 우리 작업에 소홀해지려나..’ 생각하고, 게임 하는 걸 보게 되면 ‘지금 게임 할 시간이 어딨지..?’ 하게 된다. 사실 이건 해결 방법이 없다. 같이 하는 작업이긴 하지만 모두에게 같은 크기의 작업은 아니기 때문에 뭐라 요구할 순 없다. 그냥 내 개인의 서운함이니 내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 생각하며 마음을 고쳐먹으려 한다. 그들도 나에게 그럴 수 있고.
이제 작품 이야기를 좀 해보자. <정원씨> 같은 경우엔 외람되지만 조금은 갈팡질팡하는 작품처럼 느껴졌다. 고민 끝에, 해야만 하는 이야기를 꺼내놓고야 말았다기보단, 20대라면 마땅히 해야 한다 여겨지는 이야기를 선택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이렇게 느끼는 것엔 학교라는 테두리도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짐작해 봤다. 작업자 개인의 내면으로 파고들어 이야기를 건져 올리는 것보단 속해 있는 무리, 그러니까 20대, 대학생 등의 집단으로 들어가 이야기를 하는 건 비교적 손쉬우니까.
그 당시 영화가 나왔을 때가 2018년이었고, 미투로 많은 이야기가 나오던 시기였다. 그리고 내가 속해 있던 학교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내가 겪은 일도 있었고. 그래서 영화로 이 이야기를 꼭 하고 싶었다. 학교에서 만든 영화를 다 같이 보는 시간이 있는데, 그 자리에서 이 영화를 틀고 싶었다. 그때는 이걸 토해내야만 했다. 영화 마지막에 정원이가 “뭐가 그렇게 다들 쉬운 거냐”라고 말하는데, 이 대사는 실제 현실에선 내가 하지 못했던 말이었기에, 영화로나마 그 당시에 내가 그런 생각을 했었다는 걸 전하고 싶었다.
그런 맥락이 있었다면 섣불리 판단한 것에 대해 사과하겠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토해내지 못하고 있던 감정에 대한 하나의 마침표를 찍었기에 비로소 <작년에 봤던 새>와 <한비>를 찍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학교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해보자. 방금 나눈 이야기와 맥이 닿아 있는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또 영 상관이 없는 이야기는 아닌 거 같으니. 예술을 배운다는 것에 난 아무런 의문이 없는 사람이지만, 현재 한국 대학의 시스템처럼 마치 퀘스트를 수행하고 나면 자격증이 주어지는 형태의 과정엔 의문이 생긴다. 게다가 그 자격증마저도 큰 힘은 없다. 굳이 장점을 생각해보자면 비슷한 분야에 관심사를 두고 있는 사람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싶은데, 학교에서 4년간 영화를 배우는 것은 어떤 시간이었나
우선 나는 그 당시 학교 선생님들에게 영향을 꽤 받은 편이다. 그분들의 생각이나 영화를 대하는 마음을 보며 많이 배웠다. 나이에 대한 조급함도 덜어낼 수 있었던 것 같고. 동료 이야기를 해보자면 영화과라고 하지만 사실 영화를 하는 사람은 정말 소수다. 그런 와중에 동료를 찾았다는 건 굉장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영화과에 왔다고 해서 동료를 찾을 수 있는 건 아니란 이야기다. 그리고 대학 커리큘럼이 이런 식으로 짜여 있는 건, 대학이 결과를 내야 하기 때문인 건데, 그 커리큘럼이 나에겐 너무 급하게 느껴졌다. 난 아직 깊어지지 않았고, 정리되지 않았는데, 결과를 내야 하니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창피하게 느껴지는 것들을 꺼내야만 하는 스트레스도 있었다.
나는 예술을 전공한 적이 없기 때문에 방금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 부분에 대해선 장단점이 있을 것도 같다. 비전공자들은 해야만 하는 상황을 맞이해본 적이 없으니, 끝맺음을 짓는 것에 굉장히 약하다. 강제적으로라도 끝을 내보고, 사람들 앞에 내놓아본 경험이 없으니까. 억지로나마 완성한 것이라 할지라도 완성했다는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기가 힘들다. 그러니 항상 이야기만 하고, 고민만 한다. 내가 그랬단 얘기다.
그럴 수도 있겠다.
<정원씨>에서 <작년에 봤던 새>로 넘어가는 과정은 더욱 사적인 이야기 속으로 파고드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봤다. 두 영화는 아주 다르다. 크레딧을 지우고 영화를 봤다면 같은 감독이 만든 영화라곤 짐작도 못 할 만큼. 그 차이에 대해 말해보자면 <정원씨>는 확고한 인물들, 변동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인물들 그리고 그 인물들의 과거나 미래는 전혀 짐작되지 않고, 감독이 찍은 표면만 보였다. 하지만 <작년에 봤던 새> 같은 경우엔 그 인물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 사람들의 과거나 미래가 상상됐고 그래서 더 알고 싶어졌다. 터놓고 말해 <정원씨>와 <작년에 봤던 새> 사이의 시간엔 감독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싶을 정도의 많은 발전이 존재한다고 느꼈다. 그 사이의 시간은 어떤 시간이었나
나도 비슷하게 생각하긴 하지만 그 6개월 정도의 시간이 무엇이었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어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작년에 봤던 새> 다음 작품인 <한비>를 만들 때도 <작년에 봤던 새>가 발전인지 운인지 알 수 없어 불안하기도 했다. 그 불안은 지금도 안고 있다. <정원씨> 때부터 내 작업 과정을 가까이에서 지켜봐 온 사람들의 반응도 당신의 반응과 비슷했다. ‘무슨 일이야?’ 하는. 지금 생각해보면 <정원씨>를 찍었을 때의 마음과 <작년에 봤던 새>를 찍었을 때의 마음이 달랐던 건 <정원씨> 때는 힘이 많이 들어갔다. 뭔가 보여줘야겠다는 그런. 그런데 완성하고 보니 사실 내 성에 차진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작년에 봤던 새>를 찍을 땐 힘을 다 풀고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컸다. 촬영감독과 ‘이걸 정말 힘 빼고 편한 마음으로 찍자, 한명이 힘이 들어가면 한명이 힘을 빼주자’라고 이야기했다. 내가 힘이 들어가는 순간 생각 회로가 좀 제대로 안 돌아가는 거 같다.
듣다 보니 두 가지가 궁금해졌다. 하나는 ‘힘이 들어갔다’고 표현했는데 <정원씨> 같은 경우 감독에게 해야만 하는 이야기고, 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지만, 마음 깊은 곳에선 사실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는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게 아닌데, 이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가 없으니 했어야만 하지 않았을까 하는.
그럴 수도 있겠다. <작년에 봤던 새> 같은 경우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관객이 못 들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작업 과정에서 발생하는 실수도 시원하게 넘어 가졌다. 하지만 <정원씨>는 내 이야기가 안 들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 아주 컸다. 그러다 보니 컷마다 딱딱한 게 있다. 그런 차이가 아닐까 싶다.
두 번째는 <작년에 봤던 새>가 운이었을까 불안했다 했는데, 그 운은 어떤 것을 말하는 건가.
예를 들어 영화에 나오는 제주도 카페가 있는데, 그곳에 큰 창이 있다. 만약 그 창에 햇빛이 들어왔다면 굉장히 힘들었을 거다. 근데 그때 마침 비가 왔고, 따라서 흐렸고, 그런 것들이 영화의 분위기를 아주 잘 잡아줬다. 그뿐만 아니라 촬영 과정에서 어떤 장면 때문에 딱 한 번만 해가 떠주길 바랐는데, 1주일 작업하는 동안 해가 딱 2시간만 쨍쨍했다. 그 순간 ‘하늘이 도와주나?’ 생각했다. 이런 순간이 아주 많았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작년에 봤던 새>가 감독 스스로에게 선물 같은 작품이 아니었을까 싶다. 제주도라는 지역이 도와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작년에 봤던 새>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해보자. <작년에 봤던 새>의 많은 설정과 조건은 피할 수 없는 이별과 부재의 순간을 맞닥뜨리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속해 있는 시간이 영원하지 않음에 대한 은유로 느껴지고, 그렇다면 불가능한 영원이 가져오는 서글픔 속에 행복은 어디서 발생하는가에 관하여 묻게 된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등장인물도 적고, 큰 사건도 없는 아주 작은 이야기이지만, 절대 가벼이 할 수도 없으며 함부로 할 수도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단편이란 형식 안에서 이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에 부담감은 없었나.
없었던 것 같다. <작년에 봤던 새>는 오히려 줄이라고 한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줄였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당시에 나를 믿어보자면 영화 속 두 인물에게 그곳을 정리하는 데 있어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는 생각이다. 사실 계획은 20분 내외였다. 하지만 찍고 편집하는 과정에서 앞서 말했듯 지금의 러닝타임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는 판단이 들었다. 물론 <작년에 봤던 새>를 보고 나에게 장편 호흡을 좋아하겠다고 말한 사람들이 있었고, 나 역시도 나에게 더 많은 시간이 주어지길 바라지만, 또 단편만이 가진 매력이 있다.
굳이 골라야 한다면 빼고 싶은 장면이 있나? 나는 두 인물이 선착장에서 손을 모으고 호흡하는 장면이 조금 튄다고 느끼긴 했다. 대부분이 일상적인 장면인데, 이 장면만 유독 아름다워서 오히려 잠깐 멈칫하게 됐던 거 같다. 오히려 나는 이어지는 장면에서 두 인물 옆으로 ‘먼지’가 등장하고, ‘먼지’ 옆으로 ‘양수’가 걸으며 춤을 출 때 울컥했다. 물론 그 이전의 호흡 장면이 있어 이 장면이 더 울컥했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빼고 싶은 장면은 없다. 말이 나왔으니 ‘먼지’ 이야기를 하자면 ‘먼지’가 촬영하는 내내 우리를 쫓아다녔다. 촬영장 근처 가게에 사는 개였는데, 제주도엔 그런 집 고양이, 집 개가 많다. 아무튼 ‘먼지’가 우리와 조금 떨어져 계속 함께 다니다 그 장면에서 패닝을 했는데 신기하게 프레임 안으로 딱 들어왔다. 물론 ‘먼지’가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는 우연이 없었다 하더라도 그 쇼트는 의미를 가졌겠지만, ‘먼지’가 등장함으로써 더욱더 좋은 쇼트가 됐다.
제주도라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로 <작년에 봤던 새>에 관한 이야기를 마무리해 보자. 육지 사람들에게 제주도는 언제나 타지다. 타지이기에 잠깐 머무는 곳이고 그러므로 특별하고 편안하며 자유롭다. 하지만 그 특별함은 결코 일상이 될 순 없기에 언제나 다시 돌아가야 하는 일상이 내포한 불안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제주도를 생각하면 어떤가.
(한참을 생각하고)....제주도는... 제주도에서 머물 때 같이 지냈던 사람들에겐 어떻게 보면 나는 ‘양수’다. 그 사람들과 영상통화를 하거나 명절이면 안부 인사를 묻곤 하는데,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들 때가 있다. 마치 떨어져 있는 부모님에게 자주 연락드리지 못하는 느낌이랄까. 제주도를 생각하면 내가 너무 좋아하는 사람들이 거기 있는데, 당장 갈 수는 없고, 난 여기서 바쁘고, 그들이 기억하는 나도 바쁘고, 그러다 보니 미안해진다. 그리고 또 다른 생각 하나는 제주도를 작년에 한번 갔었는데, 1년 사이인데도 많이 바뀌어있었다. 그게 서글프게 만들더라. 5년 10년 된 가게를 찾기 힘들고, 내가 자주 가던 건물 옥상에서 보였던 한라산이 맞은편에 새롭게 올라간 건물에 가려 보이지 않는 그런 변화들이. 나에게 제주도는 휴식이나 파라다이스, 그런 거라기보단 조금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특히나 문화, 예술 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은 서울로 향할 수밖에 없는 한국의 상황 속에서, 타지에서 서울로 온 이들은 마음속에 고향을 늘 품고 사는 경우가 많지만, 오히려 수도권에서 자란 이들은 고향이란 정의 자체가 낯설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내게 고향이란 나를 가장 편히 설명할 수 있는 정서가 집약돼 있고, 그곳의 사람들을 생각했을 때 가장 다정하게 느껴지는 곳이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기 전 사전에 건넨 질문지에서 감독 역시 딱히 고향이라 느껴지는 곳은 없다고 답했는데, 감독에겐 제주도가 일종의 고향의 기능을 하는 것인가
그건 또 조금 다른 것 같다. 내가 태어난 고향은 수원인데 수원을 생각하면 내 정체성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따라붙는다. 태어난 곳은 수원이고, 지금 사는 곳은 관악구지만, 관악에 산다고 말하기도 뭐하고, 수원에 산다기도 뭐하다. 아직 어느 곳에도 발붙이지 못하고 붕 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지방에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할 때도 있었다. 지방 사람들이 가지는 연대 같은 것들이 나에겐 없으니까.
<한비>로 이야기를 이어 가보자. <한비>를 보며 기억에 대한 감독의 고민이 <한비>에 이르러 더욱더 맹렬하게 진행되다 <한비>가 끝나며 함께 종료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한비>가 기억을 어떻게 떠안고 또는 품고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감독의 마지막 정리처럼 느껴지는 한편, 각 인물의 기억 투쟁이 벌어지는 싸움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작년에 봤던 새>에선 서로에 대한 그리움과 기억을 따뜻하게 감싸 안으려는 인물만이 등장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는 분명 새로운 지점이고, <한비>가 <작년에 봤던 새> 이후 작품이란 점을 생각하면 더욱더 그렇다. 이미 정리된 생각의 막을 불쑥 찢고 올라온, 피하려 했다 결국 마주할 수밖에 없었던 고민에 대한 응답으로 느껴졌달까. <한비>가 <작년에 봤던 새> 이후에 시작된 이유가 있을까
<작년에 봤던 새>를 만들었을 때는 ‘기억하는 게 중요하지’하는 딱 거기까지만 생각했다. 조금 나이브하게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 이후 <한비> 이전까지 더는 만나지 않는 사람들, 볼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내가 가지고 있는 기억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면서 ‘기억하는 게 중요한 건 맞는데, 내가 모든 걸 기억할 수 있나? 내가 모든 걸 기억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어떻게 간직해야 하지?’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기억에 대해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한비>를 찍으며 정리가 됐다.
기억 투쟁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보자. 인물들은 계속해서 ‘한비’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다툰다. 그리고 서로의 기억이 다를 때 불안해하고, 화를 내고, 이미 사라진 이에 대한 기억의 권력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예민하게 반응한다. 이는 실제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자주 벌어지는 일이며, 왜 이런 일이 자주 벌어지나를 생각해봤을 때, 과거의 일 중 어떤 것을 망각하고, 어떤 것을 기억할지 선택하는 그 기준에 의해 각자의 정체성이 확립되기 때문이 아닐까. 내겐 각자의 기억이 맞다고 주장하는 것은 달리 말하면 내가 정리한 나에 대해 토 달지 말란 이야기로 들린다.
비슷한 것 같다. 인물들이 서로의 기억이 다를 때 날카롭게 반응하는 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니었을까. 자신의 기억과 기억 속의 한비를 그런 식으로 지켜야만 자신들이 살 수 있기 때문에. 극장에서 상영했을 때 객석에서 이런 질문이 나온 적이 있었다. ‘도대체 그럼 한비의 이름에 관한 맞는 설명은 뭐냐’하는. 근데 사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않나. 실제로 ‘한비’가 그렇게 말했을 수도 있고, ‘해수’의 기억이 뒤죽박죽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건 ‘해수’에게 ‘한비’와 이름에 관해 나눈 그 대화가 강렬하게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건 ‘해수’에게 ‘한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영화엔 ‘한비’의 부재를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해수’의 내레이션이 나온다. 그걸 따라 쭉 적어봤고, 마지막 ‘한비’의 내레이션까지 따라 적었는데, ‘한비’는 ‘사람들이 잘 때 눈동자를 양옆으로 움직이는데, 버릴 기억을 고르기 위해서래. 그래서 그걸 따라서 눈동자를 굴려보는 거야. 천천히 나의 속도에 맞춰서. 아무리 눈동자를 굴려도 사라지지 않는 기억이 있는데, 난 그걸 잘 껴안고 살아보려고 해’라고 말하더라. 이 말은 기억과 망각을 선택하는 기준에 작동하는 이데올로기를 뛰어넘어 필연적으로 남는 기억이 있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이데올로기가 개입한다는 건 기억이 행하는 진실의 변질이다. 실제 그렇게 일어난 일이 아닌데도 기억하는 사람의 이데올로기가 그렇게 기억하게끔 하는 것이다. 좀 다른 이야기일 수 있지만, 내가 오랜 시간 가지고 있었던 기억에 대해 엄마에게 말한 적이 있는데, 엄마는 그런 적이 없다고 했다. 그때 고민하게 된 것이 난 왜 일어나지도 않은 이런 기억을 가지고 있는가였다, 결론은 내 안에 이미, 방금 말한 이데올로기의 판단이 이루어지기에 앞서 먼저 자리 잡고 있는 기억이 존재한다는 거다. 그리고 난 이런 기억을 어떻게 껴안아야 하나 생각하게 된다. <작년에 봤던 새>에서는 인물들이 연대하며 기억을 나눈다. 그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각자가 스스로 기억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 역시도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 마지막에 ‘해수’가 이별을 택하는 것 역시 혼자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본인의 영화를 통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가감 없이, 그리고 비교적 친절하게 전달하는 편이다. 조금은 숨긴다거나, 상징을 집어넣는다거나, 불친절하게 전달하고 싶은 욕망은 없나?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한비>를 상영하고 나온 반응은 ‘어렵다’였다. <정원씨>나 <작년에 봤던 새>와 비교했을 때 <한비>의 템포가 조금 다르긴 해서 의아한 반응은 아니었다. 영화가 ‘해수’의 머리 안으로만 진행되기 때문에. 그래도 난 어렵지는 않다고 생각해서..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어려움의 기준이 다 너무 달라서.. 잘 모르겠다.
대화 초반에 말했다시피 김예지, 강진아, 조정민, 조은진, 김현규 등 일종의 ‘팀 이다영’처럼 같은 멤버로 계속해서 영화를 만들고 있다. 자주 같이 작업하다 보면 서로 간에 쌓이는 이야기도 많을 것 같다. 작업 현장은 어떤 분위기고, 모이면 주로 어떤 이야기들이 오가나
팀처럼 같이 움직이는 건 아무래도 촬영감독인 조은진과 사운드를 담당하는 김현규다. 둘이 처음부터 끝까지 신경을 많이 써준다. 22살부터 조은진 촬영감독이 아닌 다른 사람과는 한 번도 작업한 적이 없다. 시나리오를 같이 썼다고 말하거나 공동 연출이라 말해도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둘 사이에서만 통하는 의사소통법이 있어서 다른 스탭들에게 이를 잘 설명하기 위해 고민한다. 이번에 같이 촬영하며 새롭게 느꼈던 건, 나의 아주 작은 한숨이나 표정에서도 컷에 대한 만족도를 조은진 촬영감독이 다 알아차린다는 거다. 이정도 사이가 되다 보니 어떤 큰일이 있지 않은 이상 서로가 함께하기를 원한다. 강진아 배우나 조정민 배우는 내가 도움을 요청하면 배역의 크기와 상관없이 흔쾌히 도움을 주고, 김예지 배우는 같이 작품을 할 때마다 서로에게 공부가 된다. 나는 배우들과 이야기하는 것도 좋아하고, 연기연출을 너무 좋아해서 김예지 배우와는 늘 새로운 시도를 위한 스터디를 하는 기분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촬영감독은 매우 중요한 포지션이지 않나. 혹시 다른 촬영감독과 작업해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나.
<작년에 봤던 새>를 찍기 전에 다른 촬영감독에게 제안이 왔던 적이 있다. 그때 잠깐 흔들리긴 했다. 조은진 촬영감독이 못미더워서가 아니라, 그냥 ‘다른 사람이랑도 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결국 조은진 촬영감독과 하기로 했다. 학교에 다니며 함께 작업해온 시간을 같이 갈무리하고 싶기도 했고, 앞서 말했듯 내 영화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다.
뒤늦은 질문이지만 순서가 지금이 맞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 현장으로 가 촬영했을 때, 완성된 작품을 처음 상영했을 때가 기억나나?
첫 촬영은 22살 습작 때였다. 영화가 뭔지도 몰랐지만, 흥분했던 것 같다. 그런 거 있지 않나. 선배들 촬영장 가서 구경할 때 난 찍어본 적도 없으면서 ‘쟤보단 잘할 거 같은데?’하고 생각하는. 난 내가 당연히 잘할 줄 알았고, 첫 촬영 때 실제로도 꽤 잘했던 것 같아서 흥분했다. 촬영장이 겁나고, 촬영에 대한 불안한 상상을 많이 하게 되는 건 <정원씨> 때 부터였다. 극장 상영이 처음 이루어진 곳은 인천의 ‘영화 공간 주안’이었는데, 불안했다. 그리고 이건 아직도 매 순간 불안하다. 상영사고가 나진 않을까, 소리는 제대로 나올까, 내 옆에 앉아 있는 이 관객은 어떻게 느낄까, 그런 불안한 상상이 마구 든다.
약 3년의 세월에 걸쳐 기억에 대한 이야기, 기억 앞에서 망설이는 사람들, 뒤늦게나마 말을 건네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왔다. 만약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어떤 이야기가 나올까
기억이란 챕터가 갈무리됐다곤 느끼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기억과 상실이란 단어에 끌린다. 이번에 찍은 영화는 한 커플이 오랜 시간 동거해 온 공간을 떠날지 말지 고민하는 시기를 담고 있는데, 그때 그들이 느끼는 것도 그 공간에서 자신들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이번에도 이런 영화를 찍고, 비슷한 감정이 끼어드는 걸 보면 아직 그 챕터가 끝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