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선 위 선을 이룬 나무들 아래 - 下

“당신은 왜 여기 남았습니까, 살로메.”


나는 숟가락으로 스프를 휘저었고, 그릇 속 소용돌이에 시선을 숨긴 채 질문을 덧대었다.


“이렇게 묻는 게 맞을까요? 당신은 어째서 여태 이곳에 남아 있고,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나를 보살핀 뒤 그들에게 보낸 것입니까.”


소용돌이는 점점 더 빠르게 돌기 시작했고, 식탁엔 미세한 진동이 일어났다.


“왜 그랬습니까, 전 앞서 만난 여덟 중 그 누구에게도 왜 그랬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에겐 물어야 합니다, 살로메. 왜 그랬습니까.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입니까.”


그릇 바닥을 너무 강하게 짓누르며 돌린 탓에 숟가락은 손에서 빠져 식탁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숟가락을 줍기 위해 자리를 벗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스탕은 고개를 떨군 채 팔짱을 끼고 있었고, 살로메는 들고 있던 자신의 숟가락을 식탁에 내려놓은 뒤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는 눈동자를 천천히 껌뻑거렸다.


“왜 당신이 건넨 명단에 당신의 이름은 없었습니까. 내가 알 수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까.”


계속되는 질문에 미동도 없이 앉아 있던 살로메가 다시 숟가락을 들어 식탁을 천천히 두 번 두드리고 내려놓았다. 그러자 스탕은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 위에서 역할을 잃은 것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살로메는 몸을 조금 돌려 앉아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 모든 일을 마무리 짓고 싶었다.”


스탕은 물이 든 컵 두 잔을 식탁에 내려놓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정면을 향해 허리를 펴고, 팔을 들어 두 눈을 가리고 있던 하얀 헝겊을 한번 풀었다 다시 조여 맸다. 살로메는 그런 스탕을 기다렸고, 스탕이 식탁에 팔을 내려놓자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그날로부터 한 달 전, 달의 아침에 위르토 족이 들이닥쳤다. 자신들의 땅이 모두 메마르고 있으니, 우리가 가진 바다를 메워 함께 살길 바란다는 요청을 전하기 위해서였지. 요청이라고 말했지만, 우리 땅을 빼앗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전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고 말했으니까. 함께 산다는 것 역시 허울 좋은 말에 불과했다. 너도 과거의 일들에 대해 익히 들어 알겠지. 그들은 필요하다면 무슨 일이라도 벌이는 자들이다. 그리고 자신들보다 약한 이들이라면 닥치는 대로 부리며 사는 자들이지. 우리가 그들과 함께 살기로 결정했다면 노예가 됐을 거고, 요청을 거부했다면 모조리 목숨을 잃을 게 분명했다.”


살로메는 스탕이 가져다 놓은 물을 한 모금 마셨고, 양손을 식탁 위에 올린 뒤 깍지를 꼈다.


“달의 아침은 그날 이후 매일 모였다. 하지만 그 시간은 괴롭기만 했어. 위르토 족이 제안한 것 중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없었으니까. 물론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인 후 훗날을 모색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고, 끝까지 맞서 싸워야 한다는 이들도 있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이 땅을 지켜야 한다고 했지. 그들도 그 방법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그래서, 답이 나오지 않아서, 그런 결정을 내린 겁니까.”


“우리는 위르토 족 아래서 30년을 넘게 살아본 사람들이니까. 그렇게 사는 건 어떠한 마음도 품지 못한 채 숨만 쉬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마음을 품지 못한다는 건, 살아가는 데 있어 소중히 여길 것이 없어진다는 거야. 그 지옥 같은 세월의 반복을 부족 사람들이 겪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모조리 죽는다 할지라도 말입니까.”


“그래. 차라리 죽는 게 나을 때도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나이가 들어서일지도 모르겠구나. 우리는 평생을 싸웠고, 그 끝에 쟁취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쟁취가 아닌 파국의 유보라는 걸 알아차렸을 때, 더는 싸울 힘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세월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나아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들먹이며 끝까지 버텨보라는 얘기는 차마 건넬 수 없었다. 우리에게 선택이란 모든 세월을 묻으며 끝내고자 마음먹을 때만 가능한 것이었고, 마지막이라도 우리의 선택에 의해 결정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당신이 말하는 우리는 누구입니까. 배에 탔던 46명, 그러니까 47명 중 당신을 제외한, 달의 아침에 참여하지 않은 46명은 그날 그 배가 불탈 거라고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모든 집을 돌아다니며 함께 가야 할 곳이 있으니 그날 아침 배에서 만나자고 했죠. 그 사람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그 배에 올라탔습니다. 부족 전체가 신뢰하는 당신의 말이었기 때문이죠. 올라탄 배가 바다 한가운데 멈춰 서, 불타 사라질 것이란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단 말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무엇이 우리의 선택이란 말입니까.”


“달의 아침이 내린 결정을 미리 알려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위르토 족을 겪어보지 않은 이들이 설명만으로 그 선택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했을 테니까. 미리 알렸다면 대부분 배에 타지 않았겠지. 하지만 그렇게 살아남아 위르토 족 아래 살게 된다면 곧바로 후회했을 거다. 달의 아침에 참석한 여덟 명이 그날 도망간 이후 어떻게 살고 있는지 너도 보지 않았니. 그들은 자신의 앞날을 결정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마저 빼앗긴 체 숨만 쉬고 있을 뿐이었다. 그건 삶에 대한 무책임한 도피다. 때로는 죽음이 사는 것보다 더 책임감 있는 결정이 되기도 하는 거야. 난 우리 부족이 그런 결정을 내렸으면 했다.”


“당신의 말대로 그들은 처참했습니다. 그르치키는 동굴에서, 츠푸라케는 숲의 땅굴에서, 하티카와 쿠자보투는 위르토 족의 노예가 되어, 토리츠네는 위르토 족의 사냥놀이 장난감으로, 파지우비와 소치우레는 위르토족의 저잣거리에서 구걸하며 그리고 하치마르는 위르토 족의 망나니가 되어 목숨만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얼굴에서 웃음이란 찾아볼 수 없었고, 부족을 배신한 이들이라며 위르토족에게조차 손가락질당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럼에도 그들의 처지가 그날 배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것보단 나아 보였습니다. 살아 있다는 건 그런 것이었습니다. 동굴이나 땅굴에서 살 것을 결정할 수 있고, 노예나 장난감이 되고, 구걸을 하거나 망나니짓을 하면서라도 살아가겠다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 말입니다. 그 선택이 비록 비열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선택에 대한 결과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렇게라도 살아 있는, 그래서 자신의 앞날을 선택할 수 있는 그들의 모습은 제게 그 어떤 죽음보다도 고결해 보였습니다. 그 고결함 때문에 저는 그들을 벨 때마다 망설였습니다. 처참한 그들의 얼굴 속, 삶에 대한 책임감만은 여전히 두터워서 두려움마저 느꼈습니다. 그날 이후 3년간 당신이 내게 지겹도록 반복했던 말, 부족 모두를 배에 모아 다 같이 끝내자고 결정했지만 정작 자신들은 도망친 8인을 절대 용서할 수 없다는 그 말, 그 말이 저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지 않았다면 전 그들을 죽이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목에서 피가 솟구치면서도 이 모든 일을 주도한 건 당신이라고 털어놓았던 하치마르를 가장 먼저 만났다면, 전 당신이 3년간 내게 촘촘히 새겨 넣은 복수심을 조금도 빠짐없이 가지고 당신을 향해 달려왔을 겁니다. 부족 사람 중 삶으로부터 무책임한 도피를 선택한 건 오직 당신 한 사람뿐입니다. 그리고 46명이 선택할 기회마저 당신의 생각이 옳다는 오만으로 빼앗아 버렸습니다. 저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지금껏 살아왔습니까. 산다는 것이 당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달콤한 것이어서, 부족을 등졌음에도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정리되지 않던 생각은 말이 되자 막힘없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터져 나오는 말과 함께 몸은 점점 거세게 떨렸고, 앉아 있었음에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살로메는 고개를 떨군 채 입을 열지 않았다. 난 그의 대답을 기다리다 스탕을 바라봤고, 그는 여전히 같은 자세로 듣고 있을 뿐이었다. 순간 나는 스탕이 이 이야기들을 알고 있었던 건지, 알고 있었다면 그럼에도 살로메 곁에 남아 10년의 세월을 보낸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 싶어졌다. 


달의 아침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 중 배에 탔다 살아남은 사람은 스탕과 나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선미에서 시작한 배의 불길이 선수까지 치달을 무렵, 스탕은 연기에 정신을 잃어가는 나를 배 아래로 집어 던졌다. 바닷속 깊이 가라앉았다 떠오른 나의 눈앞엔 이미 정신을 잃은 살로메를 한 손으로 부여잡고, 다른 한 손으론 물에 뜬 나무판을 지탱하며 나를 기다리고 있는 스탕이 있었다. 우리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알 수 없을 만큼 오래 바다에 떠 있었다. 내 키의 절반이 조금 넘는 나무판에 의지해 땅의 방향으로 팔을 휘저으며. 뭍에 도착하자마자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뜬 내 오른쪽엔 살로메가 누워 있었고, 왼쪽엔 우리를 구출하는 과정에서 불이 옮겨붙어 눈을 제대로 뜰 수 없게 된 스탕이 바다를 향해 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스탕은 부족의 아이들에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가르치는 사람이었다. 나무와 흙으로 집을 짓는 방법이나, 바닷속으로 들어가 조개를 따는 일, 겨우내 불이 꺼지지 않도록 관리하는 법. 또는 필요한 만큼의 동물만 사냥하는 것, 달리는 말이 지치지 않도록 말의 반응을 감각하는 것, 낮은 파도가 치는 잔잔한 바다라 할지라도 겸손해야 한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들을 아이들에게 전해주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아이들 곁이 그의 자리였고, 나 역시 그에게 많은 것을 배우며 자랐기에, 나는 스탕이 흘리는 눈물을 보며 덜컥 겁을 먹고 말았다.


내가 깨어난 걸 확인한 스탕은 나를 데리고 숲으로 들어가 나무를 주웠다. 점점 흐릿해지는 시야 때문인지 스탕은 서둘러 움직였고, 나는 그의 지시에 따라 나무를 주워 옮기며 헐떡였다. 가지고 온 나무로 불을 피운 스탕은 남은 나무 몇 가지를 깎아 창을 만들어 내게 건넸다. 곧 눈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것 같으니, 사냥도, 집을 짓는 일도 내가 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그러고는 살로메에게 마을로 돌아가 간단한 도구들을 가져오겠다고 말했다. 살로메는 안광이 사라진 눈으로 바다를 바라보며 아무 대답이 없었다.


스탕과 함께 도착한 마을은 고요했다. 당연하게도. 난 마을의 당연한 고요함 앞에 서고 나서야 지난 하루 동안 벌어진 일들에 대해 처음으로 곱씹을 수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일들은 나를 맥없이 주저앉혔다. 스탕은 내 옆에 조심스레 자리 잡더니 이미 그 시간을 다 보낸 사람처럼 나의 손을 잡아 주었다. 한참을 앉아 시간을 흘린 스탕과 나는 겨우 일어나 칼과 도끼 그리고 조금의 식량을 챙겼고, 마구간에 홀로 남아 있던 혼메와 함께 살로메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나와 스탕 그리고 살로메는 그곳에서 며칠 더 시간을 보낸 후, 위르토 족의 발이 닿지 않을 곳을 찾아 나섰다. 지금 이 집이 있는 곳에 자리 잡게 된 건 그로부터 열흘이 넘게 지났을 무렵이었다. 숲을 한참 지나야 나타나는 작은 공터를 보자 스탕은 여기면 되겠다며 걸음을 멈췄다. 작은 집 하나 짓기에는 부족함 없는 크기였고, 산에서 흘러나온 물이 있었기에 혼메를 위해서도 적당한 곳이었다. 스탕과 나는 며칠에 걸쳐 집을 지었고, 집에 필요한 것들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그 일들에 집중할 때만이 바다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살로메는 언제나 나와 스탕으로부터 조금 떨어져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아무런 힘도 남아 있지 않은 사람의 얼굴로 끊임없이 바다만을 바라보면서.


“네가 알고 있는 건 모두 사실이다 체루코. 단 한 가지만 빼고.”


한참 길어지는 정적을 견디지 못하고 움직인 건 스탕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스탕은 손을 뻗어 나의 어깨를 더듬은 뒤, 나의 허리에 묶여 있는 보따리 속으로 손을 찔러 넣었다 빼며 칼을 꺼냈다. 그의 빠른 손짓에 내가 몸을 움츠리며 놀라는 사이 스탕은 손등으로 칼날을 점검했고, 앞에 놓인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이어갔다.


“그들을 죽이기 위해 널 보낸 건 살로메가 아니야. 내가 보낸 거다. 너에게 그들을 죽여야 한다고 주입한 것도 내가 살로메에게 지시한 일이었어. 살로메는 내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스탕이 시키는 대로 했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들은 것 그대로다. 모두 다 내가 계획한 일이야. 이 집을 짓고 일주일 정도 지난 날, 나는 숲의 나무에 목을 매단 살로메를 발견했다. 조금만 더 늦게 발견했더라면 살로메는 이 자리에 없었겠지. 아무런 말도 없이 바다만 보고 있는 살로메를 늘 신경 쓰고 있었기에 그가 사라졌단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무에서 내려와 울음을 터뜨리며 털어놓은 달의 아침 이야기를 듣고 나자 난 곧바로 후회했다. 두 번이나 죽기 직전의 그를 살려낸 스스로가 너무나도 원망스러웠어. 난 홧김에 당신은 죽여도 내가 죽일 것이니 절대 죽지 말고 기다리라 한 뒤 며칠을 고민했다. 하지만 모르겠더구나. 용서가 무엇인지, 짓누르는 과거 아래 폐허가 된 현재를 버티듯 사는 게 가능한 일인지 도무지 알 수 없더구나. 부족을 버리고 도망간 이들과 부족을 불에 타 없어질 배에 태운 살로메와 그 와중에도 부족의 큰어른이란 이유로 눈에 띄었던 살로메를 살려낸 나 자신 모두를 죽이고 싶은 마음만 점점 커질 뿐이었다.”


“그럼에도 스탕은 저에게 그런 일을 시킬 사람은 아닙니다. 당신이 하는 말을 저는 믿을 수 없어요.”


“나의 부모는 내가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었다. 위르토 족과의 접경 지역에서 사냥을 한 것이 문제였어. 그곳의 사냥꾼들에게 포로로 붙잡혔고, 그들은 석방 조건으로 달의 아침에 많은 양의 식량을 요구했다. 하지만 달의 아침은 그들의 요구에 따를 경우 부족 전체가 한 달여의 시간 동안 궁핍하게 지내야 한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어. 그 결과는 숲에 걸린 내 부모의 시체였다. 난 어른이 되고 나서야 달의 아침이 내린 결정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어른이 되고 나니 이해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꼭 옳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됐지. 그때부터 난 달의 아침과 달의 아침이 내린 결정을 묵인했던 부족의 어른들을 마주하기 힘들었다. 어떤 날은 분노가 치밀었고, 어떤 날은 부족의 동료를 허망하게 떠나보내야 했던 그들이 측은했어. 그들과 마주하고 있으면 서로의 무기력함 외에는 나눌 수 있는 것이 없었기에, 되도록 나는 아이들만을 대하려 애썼다. 아이들은 아직 그 무력감으로부터 자유로웠고, 그것이 부족 안에서 내가 살아갈 수 있도록 나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말을 잠시 멈춘 스탕은 여전히 들고 있던 칼을 가지고 살로메의 등 뒤에 섰다. 살로메는 스탕의 움직임에 반응하지 않았고, 난 스탕의 손에 있는 칼이 불안하게 느껴져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스탕이 칼을 얼굴 높이까지 들어 올렸고, 칼날이 베어낸 건 그의 눈을 가리고 있던 헝겊이었다.


“체루코, 나는 너희들을 가르칠 때 너희만큼은 청산하지 못한 우리 부족의 과거로부터 자유롭길 바랐다.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면 과거의 부족 일들을 모르고 살아가길 바랐어. 그저 현재의 현실만을 느끼며 자유로웠으면 했다.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너희가 그렇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바라는 것이 내가 살아가는 힘이었다. 그런데 그날 바다에서의 일은 모든 것을 앗아갔다. 자신들의 풍족함을 위해 어떤 짓도 개의치 않는 위르토 족과 자신들의 기준으로 46명의 존재를 부정한 달의 아침이 함께 만든 괴물은 하루아침에 세상을 무너뜨렸어. 그날 이후 나는 점점 멀어가는 이 눈과 함께 왜 하필 내가 살아남았을까 원망했다. 그리고 아직도 어리기만 한 널 어떻게 해야 하나 절망적이었지. 하지만 살로메에게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모든 것이 매끄럽게 정리되더구나. 내가 할 일은 무너진 세상의 잔여물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라는 걸. 그 후 네가 새로운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말이야. 만약 내가 직접 처리할 수 있었다면, 나의 눈이 한쪽이라도 성했다면 너를 보내지 않았을 거다 체루코. 하지만 방법이 없었어. 우리 셋 중 그 일을 할 수 있는 건 너뿐이었다. 그리고 네가 그들을 베는 데 어떠한 죄책감도 가지지 않을 수 있다면, 오히려 그 일이 자부심이 된다면, 비록 누군가를 죽이더라도 앞으로 새롭게 살아가는 건 가능할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살로메가 그날의 일을 주도한 거라고 말하지 않은 건 그래서였어. 달의 아침은 그저 살로메의 말에 따른 것뿐이라는 생각에 네가 그들을 죽이는 것에 죄책감을 가져서는 안 됐으니까.”


살로메는 눈을 감은 체 스탕이 꺼내 놓는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오래도록 기다려온 무언가가 눈앞에 다가왔다는 걸 아는 사람처럼. 스탕은 살로메가 이미 없는 사람이라는 듯, 조금의 관심도 두지 않으며 말을 덧붙였다.


“네가 돌아오면 난 너에게 그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곳을 떠나게 하려고 했다. 하치마르 탓에 그 계획은 틀어졌지만, 난 그렇다 해도 달라질 건 없다고 생각한다. 넌 네가 죽인 이들에 대해, 네가 떠나고 나면 이제는 정말 사라질 나와 살로메에 대해 어떠한 종류의 마음도 품을 필요가 없다. 떠나거라 체루코. 오늘로 그날은 끝났다. 너는 이제 그동안의 모든 일을 지우고, 새롭게 살면 되는 거야.”


화상 흉터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감긴 눈으로 칼을 들고 서 있는 스탕과 그 아래서 숨죽이고 있는 살로메. 나는 그들을 보며 지독한 외로움을 느꼈다. 부족에서 보낸 모든 시간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고, 동시에 살로메와 스탕을 향한 원망과 분노 그리고 슬픔이 솟구쳐 올랐다. 지은 모든 죄를 죽음으로 외면하려는 그들을 붙잡고 싶었다. 난 그들이 앞으로의 세상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탕, 당신이 나를 두고 내린 결정이, 살로메와 달의 아침이 그날에 대해 내린 선택과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정말 모릅니까? 당신 역시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짓밟았습니다. 죄책감을 품을지라도 내가 선택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부족의 과거와 무너진 현실을 품고 사는 것도, 모른 척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일로 지워버리고 사는 것도, 사는 것이 나라면 살아갈 나 스스로만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욕심이, 당신의 경험만으로 나의 선택을 저울질한 그 게으름이 저를 다시 한번 그날의 배 위에 태운 거란 말입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스탕에게 다가간 후 그가 들고 있던 칼을 빼앗아 다시 보따리 안으로 집어넣었다. 살로메는 살며시 눈을 떠 나의 행동을 살폈고, 스탕은 미동 없이 귀를 통해 나의 움직임을 느꼈다.


“살로메, 스탕, 당신들은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죽어선 안 됩니다. 부족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미안한 마음이 있다면, 나에 대해, 지난날에 대해 조금이라도 후회한다면 꼭 살아야 합니다. 살아야 그 무엇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살로메, 내가 떠나던 날 당신이 했던 말 기억 하십니까. 확신하지 말고, 자신하지 말라고. 언제라도 그만둘 수 있음을 잊지 말라고. 그 말은 확신에 차 사람들을 배에 태웠던 과거에 대한 후회에서 나온 말이었습니까. 무슨 마음으로 그런 말을 했습니까. 그 말은 분명 스탕의 의지가 아닌 당신이 직접 한 것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살아요. 절대 죽지 말고, 어떻게든 살아남으십시오.”


여전히 같은 자세로 앉아만 있던 살로메가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의 손잡이를 잡고, 고개를 떨궜다 들기를 천천히 반복하더니 잠시 후 문을 열었다. 열린 문 사이로 그사이 더 차가워진 바깥 공기가 집 안으로 빠르게 파고들었다. 깨끗한 차가운 공기가.


“체루코, 더 이상 답해줄 수 있는 얘기가 없구나. 너 역시 더는 아무것도 묻지 않길 바란다.”


살로메가 휘파람을 불었고, 그 소리를 들은 혼메가 집의 뒤편에서 돌아 나오며 문밖에 모습을 드러냈다. 


“네가 어릴 때 내게 와 늘 해주던 얘기 기억하니? 저 멀리 있는 산 능선 위 선을 이룬 나무들을 보며 그 나무들 아래로 이름 모를 짐승들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걸어 다니고 있다고. 난 네 얘기를 들을 때마다 네가 가리키는 곳을 쳐다봤지만, 네가 말하는 것들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 머무는 동안, 정말 네 눈엔 그것들이 보였고, 정말 저 능선에는 새로운 것들이 가득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혼메와 함께 그곳을 향해 가거라. 부디 이곳에 얽힌 모든 것을 잊고 살거라. 내가 해줄 수 있는 얘기는 그것뿐이다.”


문밖에선 혼메가 흩날리는 갈퀴 속의 맑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고, 문 안쪽에선 살로메와 스탕이 앙상한 몸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들을 떠난 사이 자란 키 탓에 그들의 몸은 더욱 작게 느껴졌다. 그들은 지쳐 보였고, 서 있는 것조차 버거워 보였다. 내가 저 문밖으로 나가면 저 작은 몸들조차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 남아 이들과 함께 사는 것 역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결국 난 저 문밖을 선택할 것이다. 그렇게 저 문밖을 나서면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이곳에 살로메와 스탕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내가 돌아오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건넬 수 있는 마지막 말을 겨우 골라냈다.


“식사 마저 하세요.”


난 그들의 어깨에 한 번씩 손을 얹은 후, 뒤돌아 문밖으로 나왔다. 날 기다리고 있던 혼메가 옆으로 따라붙었고, 젖어 있는 양쪽 뺨을 번갈아 핥아 주었다. 나는 다시 감태나무 숲을 지나 갈대밭을 가로질러야 한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바다였던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 과거의 내가 산 능선에서 무엇을 봤는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당장 내가 아는 목적지는 그곳뿐이다. 나는 혼메의 허리에 보따리를 묶었다. 혼메의 허리 위에 올라타 혼메의 목을 한번 어루만진 뒤, 허리를 세워 앞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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