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솔" - <호모픽투스 시네마클럽,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

2023년 4월 28일의 대화


유다솔과는 '클럽하우스'에서 만났다. 별 정보도 없는 타인과 떠들고 싶은 사람들이 모이던 '클럽하우스'엔 영화 관련 모임도 몇몇 생기기 시작했는데, 그중 어떤 건 영화 지식을 자랑하고 싶은 사람들의 모임이었고, 또 다른 어떤 건 영화계에서 방구 좀 뀐다는 사람들이 모였지만 할 말은 딱히 없는 그런 모임이었고, 이런 것들이 아닌 어떤 건 영화라는 키워드로 모였지만 영화 얘기는 딱히 안 하는 그런 모임이었다. 마지막 모임에 들어가 대화를 듣고 있으면 A는 성대모사를 하고, B는 사주를 봐주고, C는 리액션을 하고, D는 중간중간 아무런 질문을 하고, E~J 정도까지는 들락날락하며 성대모사만 듣고 나가버렸는데, L 정도의 위치에 유다솔이 있었다. 유다솔은 가만히 듣고만 있고, 가끔 몇 마디 하긴 했지만, 주로 가만히 듣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자주 들어와 있었고, 가장 오래 들어와 있었다. A~D 사이 어딘가에 속해 있던 나는 얼굴도 모르고, 마주해 본 적 없는 이들과의 대화가 질려 어느새 '클럽하우스'에 들어가지 않았는데, 그러다가도 가끔 '아직도 하는 사람이 있나?' 하는 생각에 들어가 보면 3명 또는 4명만 남은 그 모임에 유다솔이 포함돼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당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기서 뭐하지?' 매일 같이 별 행동도 없이 한 자리에 서성이고 있는 사람을 보면, 처음엔 그냥 스치다가도, 점점 저 사람에 대한 궁금함이 생기기 마련이지 않나. 그래서 난 만나자 제안했고, 우리는 망원동에서 만났는데, 2시간 정도 떠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클럽하우스'의 그 모임에 대해 떠올리면서 '정의 밖의 사람들이 모였었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영화계 또는 영화판에서 일하고 있지만, 영화계 또는 영화판에서 일하고 있다기엔 알려지지 않아서, 영화계 또는 영화판에서 일하고 있다고 말하기가 조심스러워지는 사람들. 그 사람 중 누군가는 기존에 정의된 영화계 또는 영화판으로 진입했고, 일부는 영화 자체를 떠났으며, 극소수는 영화계 또는 영화판의 정의를 다시 내리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난 4월, 유다솔이 <호모픽투스 시네마클럽>이란 상영회를 개최한다는 소식을 인스타그램을 통해 전했다. '김호'라는 비교적 덜 알려진 감독의 단독 작품전이었고, 극장은 150석 정도의 규모인 KU시네마테크, 결과는 매진. 이 과정을 보면서 나는 '클럽하우스'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유다솔을 생각했고, 망원에서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밝은 표정 아래 욕심과 분노를 숨기고 있던 유다솔을 생각했다. <호모픽투스 시네마클럽>은 영화 운동이라고, 분명하게 말하는 유다솔과 다시 한번 망원에서 만났다.  



최근 많은 일이 있었다. 그 많은 이야기를 정신 없이 시작하면 오늘의 대화도 정신 없이 흐를 것 같고, 오랜만에 찾은 서울에서 반갑게 만난 당신과 정신 없이 시간을 보내고 싶진 않으니 다른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해보자. 벚꽃도 이제는 다 졌고, 여지없는 봄이 찾아왔다. 봄엔 어떤 상태가 되나


봄이 생일이다. 그리고 봄은 영화제의 본격적인 준비 시작 기간이고. 학교 다닐 때 새 학기가 시작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냥 음.. 이제 시작이다 하면서 열심히 살고 있다는 얘기다. <호모픽투스 시네마클럽>이 잘 됐으니까, 이걸 잘 유지해야겠다는 생각도 있고. 항상 긴장과 다짐을 하면서 지낸다. 봄이 와서 설레고 이런 건 대학 졸업 이후로는 느껴본 적 없고, 뭐 그렇다. 걱정이 많은 타입이라 그런가, 항상 다음 날 뭘 해야 할지 긴장을 많이 한다


오랜만에 서울로 향하면서 기억 속의 서울의 봄에 대해 생각해봤다. 꽤나 쌀쌀하고, 적당한 취기에 걷는 찹찹한 밤공기가 설렜던 시간. 한강의 색은 옅고, 공기는 미세먼지에 뿌열 때, 아직 겨울옷을 집어넣지 않은 사람과 더위를 많이 타는지 벌써부터 반팔 티셔츠를 꺼내 입은 사람이 함께 앉아 있는 버스 안. 그런 장면들이 떠올랐다. 당신에게 서울의 봄은 어떤 장면들로 남아 있나


사무실에서 바라보는 망원의 길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4월, 5월이면 사람도 만나고, 놀고 해야 하는데, 난 이제부터 바빠지니까, 제일 기억에 남는 건 사무실에서 내려다보는 망원의 길이다. 별생각이 없다. 풀들이 자라는 게 좋아서 풀 사진을 자주 찍는다. 난 별거 안 했는데, 걔네는 쑥쑥 자라니까, 시간이 간다는 걸 느낀다


봄이 주는 생명력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그 에너지에 감탄하다가, 또 수많은 죽음이 있었던 4월의 그날들에 생각이 도착해버린다. 이건 막을 수 없는 흐름이다. 며칠을 그 생각에 몰두하는 건 아니지만, 4월을 지내다 보면 길을 걷다가, 밥을 먹다가, 운동을 하다가, 잠에 들다가, 그런 와중에 번뜩 떠올리고야 마는 것이다. 그럴 때 나는 영화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 한계를 절감했고, 다시 그럼에도 계속해서 영화를 찍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막을 수 없는 흐름을 어딘가로, 그래도 조금은 나은 곳으로 흘려보내려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이다. 그 사람들 중엔 당신처럼 열렬히 영화를 사랑하며 영화제를 만들고, 상영회를 꾸리는 사람도 포함된다. 처음부터 너무 무거운 질문일 수 있지만, 지금 묻고 대화를 시작해야 이 대화의 방향이 잡힐 것 같다. 무엇이 당신을 영화에게, 영화와 함께 움직이게 만드나


진짜 솔직하게 말하면 명예욕이다. 난 내 이름을 알리고자 하는 욕구가 굉장히 강한 사람이다. 사회를 생각했을 때 한국 영화에 대한 인지도나 애정이 대중적으로 적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국영화가 이렇게 재밌는 게 많다는 걸 알리려고 하는 거고. 그럼으로써 그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나에게 고마워하고, 내가 알린 영화를 많이 보려고 할 때 오는 성취에 취해 사는 거지. 그래서 이런 일들을 하게 됐다. 그리고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한국영화계도 새로운 이야기와 흐름이 만들어져야  더 건강해지고,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호모픽투스 시네마클럽>은 그렇게 90년대, 00년대생, 즉 나의 세대들이 새로운 누벨바그를 만들어보자 하면서 시작하게 된 거다. 이건 나에게 영화 운동이다. 그런 마음으로 열심히 하고 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정말 많은데, 불만, 불만이 정말 많은데, 영화제도 마찬가지다. 다 고전이 돼버린 거 같다. 그런 것들을 바꾸고 싶다. 대한민국에 많은 영화제가 있지만 그 영화제들을 운영하시는 분들을 보면 그분들만큼 영화제를 사랑하고 기획과 운영에 재능이 있는 젊은 사람도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 10년 넘게 영화제를 운영하시는 분들도 물론 필요하지만, 젊은 세대의 의견이나 생각들이 반영되어야만 영화제를 더 다양한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다고 본다


난 영화가 한국에선 굉장히 대중적인 예술 형태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흔히 영화쟁이들이 말하는 영화는 또 진입장벽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그들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이런 말도 웃기지만 기득권 영화쟁이들의 한 줌 권력으로 만든 벽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걸 부수고 싶은 거라고 이해하면 될까


맞다. 근데 내가 혼자 할 수 있는 건 없다. 주변에 나와 뜻이 맞는 사람들이 있어서, 있기 때문에 내가 움직이고 행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조금씩 하고 있는 거다. 나와 뜻이 같은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는 건, 그런 사람이 소수가 아닐 수도 있다는 자신감에 시작하게 됐다



영화에 대한 사랑이 시작되기 전의 이야기부터 해보자. 해외에서, 그것도 많은 한국인이 생소할 게 분명한 아프리카의 콩고, 콩고의 킨샤사Kinshasa에서 자랐다. 어떻게 거기로 가게 된 건가


무역 일을 하는 아버지가 애국심이 넘치셨고, 내 국적이 한국이길 바라시는 마음에 태어나긴 한국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1년 뒤에 동생이 태어난 뒤, 같이 콩고로 가게 됐지


그렇다면 아마 당신이 가진 최초의 기억은 킨샤사에서 시작될 텐데, 어떤 것들이 떠오르나


흙냄새와 사람 냄새, 그 흑인들의 체향 냄새. 주변에 있었던, 가족이 아닌, 굉장히 많은 타인의 체향 냄새가 생각난다. 잔디밭이나 흙밭에서 논 기억도 난다. 나무도 올라타고, 연못을 만들겠다고 흙도 파보고 그랬다. 어릴 때 한국어랑 불어를 동시에 배웠고, 킨샤사가 내 고향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나만 아시안이었는데, 다들 날 신기해했지만, 인종차별을 겪은 건 전혀 없었다


그때의 이야기만으로도 한참을 떠들 수 있겠지만 그 시간은 다음에 갖기로 하고, 당장 떠오르는 몇 장면만 소개해달라


아버지가 수영을 가르쳐주겠다고 튜브도 없이 날 수영장에 던져버린 거, 콧속으로 물이 다 들어갔던 기억. 또 그때는 운전기사분이 계셨는데, 하교하다 말고 지금 전쟁이 일어났으니 앉아있지 말고 밑에 숨으라는 거다. 그러고는 차를 멈추고, 나뭇가지를 뜯어와서 차에 막 꽂았다.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는 뜻이었다. 지나갈 때 쏘지 말아 달라는. 그때는 총과 전쟁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에 무섭지도 않았다. 그냥 신기했다. 그 아저씨 이름이 무께MUKE인데, 기억이 많이 난다. 내가 어릴 때 장난치다 한 실수도 덮어주시고, 감싸주시고, 목마도 태워주시고, 그러셨는데 한국에서 몇 년 살던 사이에 아버지로부터 무께 아저씨가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처음으로 그 지역의 원주민 집에 간 것도 무께 아저씨 집이었다. 키가 엄청 크고, 체형이 단단하고, 잘생겼었다. 자식이 6명 정도 있었는데, 아내는 한 명이었다. 거기는 한 명이 아닌 경우가 많거든. 그리고 나한테 처음으로 토종어인 링갈라어를 알려주셨다. 현지 음식도 처음 먹여주셨고


어떤 음식이었나? 요즘엔 뭐 전 세계의 음식을 쉽게 사 먹을 수도, 해 먹을 수도 있게 됐지만, 잘 모르는 입장에서 콩고의 음식이라고 하면 한국에서 쉽사리 먹긴 쉽지 않을 거 같다


푸푸Fufu 와 마껨바Makemba라는 건데, 푸푸는 마를 반죽처럼 만든 뒤, 맵게 볶은 우거지 같은 걸 양념처럼 손으로 싸 먹는 거다. 카레 같기도 한데, 우거지 맛이 났던 거 같다. 마껨바는 큰 바나나를 튀겨 먹는 건데 정말 맛있다. 그게 사과만큼 딱딱한데, 튀기면 부드러워지면서 달달하고 맛있다. 디저트 같은 건데 내가 정말 좋아했다. 2015년이었나, 내가 이태원에 한창 다닐 땐데, 이태원에 아프리칸 푸드를 파는 음식점이 있어서 여동생을 데리고 갔다. 마껨바가 그때 그 맛이었다. 알고 봤더니 그 가게를 운영하던 흑인 가족들이 킨샤사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너무 반가워서 인사하고, 자주 놀러 가고 그랬다. 그런데 갑자기 사라져서 너무 슬펐다. 그때가 내가 마지막으로 먹은 마껨바다


그 시간을 거쳐 한국에 왔다. 한국에서도 서울로. 서울의 인상은 어땠나. 그 당시의 서울은 어떤 장면으로 기억되나


고등학교에 가기 전 서울로 왔다. 어머니가 초록색, 빨간색, 파란색 중에 뭐가 좋냐고 하셔서 파란색이 좋다고 했고, 그렇게 파란색 교복을 입는 중학교에 들어갔다. 처음 입어 본 교복이었고, 모두가 나랑 인종이 같고, 나와 똑같이 한국말을 하는데, 그게 너무 낯설었다. 그래서 적응을 잘 못했다. 게다가 담임 선생님이 본인이 처음 맡아 본 유학생이라 나를 엄청 편애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애들이 의아해했지. 나중엔 친해졌지만. 그리고 난 한국어를 영화로 배운 부분도 있는데, 영화를 보다 보면 씨발이란 욕이 나오지 않나. 그 말을 중학생들이 막 하는 거다. 너무 충격적이었다. 미디어에서 보긴 했지만, 쓰면 안 되는 말이라고 배웠는데, 학생들이 너무 당연하게 쓰다 보니까.. 초반엔 욕을 쓰던 같은 반 친구들을 경계했지만 그러다 점차 적응하고, 익숙해졌을 때부터 사람들을 다양하게 알고 지내고 싶어서 반장도 나가고, 신문부 동아리 부장도 하고 그랬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랬다. 내가 조금만 친해지면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있어서 그런지, 깊게 좁고가 아니라 넓고 얕게 친구를 사귀려 했다. 고등학교 때도, 대학생 때도. 그래서 학교 다닐 때 친구들과의 관계는 넓으면서도 얕다


개인적인 경험에 대한 얘기들이 그런 거라면, 풍경에 대해 느낀 차이에 대한 기억이 있나


우선 아프리카는 신호등이 없고, 버스를 만석으로 타서 차체 위와 옆에 매달릴 정도다. 빈부격차도 심했는데, 한국에선 일반적인 경제력이지만, 거기선 중산층으로 살 수 있었고, 학교, 수영장, 마트 등 모든 이동은 은 차를 타고 다녀야만 했다. 골프장, 테니스장 같은 것들도 다 구비가 돼 있었고. 다양한 경치, 풍경을 볼 수 있는 식당들이 있었는데, 그 식당에 앉아 킨샤사를 흐르는 강을 보면서 밥을 먹었던 게 기억에 남아 있다. 또 집 앞에 아보카도 나무가 있어서, 아보카도 나무를 오르려고 연습했던 것도 기억난다. 만다린을 파는 아줌마가 지르던 소리도 기억나고. 또 우기와 건기가 있으니까, 그 우기의 재난들이 기억에 남는다. 목까지 차오르는 물에 어른들이 아이를 업고 다니고 그랬다. 건기에는 길거리에서, 거기엔 봉지에 물을 담아 지나다니는 운전자들에게 파는데, 물을 팔기 위해 다니던 사람들도 기억난다. 그에 반해 서울에 대한 첫 기억은 색이 없다는 거였다. 모노톤이었다. 건물도, 사람도, 자동차 색마저 다 비슷했다. 공항에 처음 도착해서 서울로 이동할 때 거리가 텅 비어있었는데, 이게 한국인가? 했다. 차가웠다. 두려움 같은 것도 있었다. 아프리카에 있을 때도 ‘궁’ 같은 웬만한 드라마는 다 보고 살았지만, 한국에 오니 그래도 난 그 유행에 맞춰지지 않는다는 느낌과 친해질 수 있을까 하는 걱정, 그런 것들이 들었다. 사춘기여서 더 그랬을 거다. 한국어를 할 줄은 알았지만, 국어 수업을 따라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서울에 대한 정의는 앞으로도 계속 바뀌겠지만, 지금 정의해 보자면 어떤가? 나는 서울을 떠나 서울에 대해 생각해 보니 서울은 완곡한 도시라고 정리되더라. 내가 요즘 지내는 부산만 해도 분명 큰 도시이지만, 바다가 있어 오직 도시로만 인식되진 않는다. 하지만 서울은 정말 완곡하다. 의심의 여지 없는 도시이고, 도시가 주는 온갖 장면과 감정만이 뒤섞이고 들끓는다. 그것이 서울이 가진 매력이라면 매력일 것이고, 내가 그만 서울을 떠나고 싶게 만든 부분이기도 할 거다. 당신의 서울은 어떤가


욕망으로 점철된 사람의 집단이 살고, 다들 아둥바둥하는 느낌이다. 각자의 목적이 있어서, 그래서 일단 나 먼저 하는 사람의 모임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 이후에 타인


그렇다면 킨샤사에서 살다 10대 중반에 서울로 온, 지금까지의 당신의 정체성 어떻게 변해왔나. 이렇게 문장으로만 읽으면 요즘은 하나의 코스튬이 되어버린 이방인, 경계인으로 당신을 그리기 쉽지만, 내가 느낀 유다솔은 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보다 더 서울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에 묻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서울 사람이라는 건, 물론 서울 사람의 여러 가지 면이 있겠지만, 지금 말하는 서울 사람은 앞서 내가 말한 완곡한 도시인 서울을 누구보다 잘 즐기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는 얘기다. 당신은 솔직하고, 가감 없고, 용감하며, 뜨겁다고 내게 인식돼 있다. 그리고 동시에 예의 바르고, 배려 깊고, 조심스럽기도 하다. 당신이 생각할 때 서울에 살며 당신은 어떻게 변해왔나


처음엔 일단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모두와 어울리기 위해 노력하고, 내가 생각하는 서울 사람의 틀에 맞추려 애썼다. 지금은 거기서 더 나아가 이 사람들 중에서 눈에 띄는 사람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적응은 이제 다 했고, ‘이제 나 한다’하는 느낌이랄까. 이건 서울에 와서 살며 바뀐 부분이 아닐까. 난 원래 내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살았다. 그런데 사람을 다양하게 만나다 보니까 나도 나만의 브랜딩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면서 욕심이 생겼다. 원래부터 욕심이 많고 그랬던 사람은 아니다. 아무래도 영화판에 들어온 게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계속해서 무언가를 만들어 내야 하는 곳이니까


누군가는 당신을 유다솔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로사드로 부른다. 다르게 발음되지만 모두 당신을 지칭하는 말인데, 두 이름을 각각 감각할 때의 차이가 있는가?


있다. 다솔이라 하면 내가 좀 편하게 대해도 될 거 같고, 로사드라 하면 내가 이 이름에 걸맞게 멋있어야 할 거 같다. 로사드는 예술뽕에 찼을 때 내가 감독이나 작가 같은 창작자가 될 줄 알고 만든 이름이라 그런가, 이건 내 간판 같은 거라서, 멋있게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 졸업 후에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 대다수와 영화 쪽 관계자들은 날 다 로사드라고 부르니까 더 그런 것도 있고


이제 영화와 만난 얘기를 해보자. 꽤 오랜 시간 전부터 거의 매일 영화를 보는 것으로 알고 있다. 장르, 제작 규모, 제작된 국가, 출연 배우, 감독 등 여러 기준에 상관 없이 정말 닥치는 대로 영화를 보지 않나. 이걸 당신은 습관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런 습관이 만들어지기 위해선 첫 순간이 필요한 법이다. 영화를 처음 본 건, 그러니까 영화를 영화로 인식하고 처음 본 건 언제인가


얼마 되지 않았다. 그 전엔 내게 영화는 언어 배우기 용도였고, 그냥 이야기가 재밌어서 본 거였다. 내가 대학교를 불어불문 특기자 전형으로 갔다. 근데 교수님이 수업에 나오지 말라고 하셨다. 아마 내 수업 태도가 별로 안 좋았나 보다. 그래서 시험 때 시험만 치면 A+ 줄 테니까, 그 시간에 내가 왜 대학에 왔는지를 생각해보라고 하시더라. 그래서 이것저것 다 기웃거리다 융복합 전공 중 스토리텔링 전공이란 게 생긴 걸 알게 됐다. 호기심에 듣게 됐고, 들어 보니 너무 재밌었다. 그때 이야기를 담은 여러 매체 중, 교수님들이 가장 많이 예로 드신 게 영화였고, 그러다 보니 나도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모 대학의 영화학과 친구들과 얘기할 일이 있었는데, 걔네한테 스토리텔링을 공부하게 됐다고 하니, 자기들이 아는 영화에 대해 맨스플레인을 하기 시작하더라.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그래서 걔네한테 지기 싫어서 열심히 보기 시작한 것도 있다. 그렇게 보다 보니 관심이 더 커지기 시작했고, 각자의 관심 영역으로 깊어지는 시기에 나는 계속 영화를 팠다. 처음 그 교수님의 제안이 계기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어릴 때부터 틀어놓고 보던 행위에 익숙해진 것이 쌓여 있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쌓여 온 에너지가 적절한 순간에 모인 것이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매일 영화를 보지만, 봤던 영화의 결말과 3막 구조가 기억나지 않으면 다시 본다고 들었다. 이 말이 꽤나 재밌게 들렸는데, 그건 내가 영화를 볼 땐, 결말이나 3막 구조가 별로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게 됐다. 누가 맞고 틀린 건 없겠지. 영화라는 건 늘 변하면서 정의되니까. 다만 영화에 대한 지금 당장의 정의, 당신에게 영화가 무엇인지는 들어보고 싶었다.


영화? 영화는 나한테.. 커피 아니면 팬티 같은 거다. 안 입어도 살 수 있지만 입어야 하고, 뭐 그런 거다


나는 요즘 맹렬하게 좋아하는 영화도 없고, 찾아보는 감독도 딱히 없지만, 생각을 하다 보면 결국 홍상수 영화를 가장 많이 생각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이 홍상수 영화를 어떻게 보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계속해서 떠올리는 건 <그 후>에서 택시 안에 탄 김민희가 창문을 내리는 장면이다. 우리의 일상은 크게 대단할 수 없고, 가끔 작은 소동 정도나 생기면서, 또 그냥 그렇게, 저렇게 흘러갈 뿐일 텐데, 그 와중에 찰나의 빛나는 순간이 어쩌다 가끔 있는 거 아니겠나. 그 장면은 내게 그런 순간을 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느껴졌다. 그러니까 내게 영화는 그런 순간을 포착해서 스크린 위로 끌어 올리는 행위인 거다. 그런 순간이 좀 더 나은 쪽으로 살아가게 만드니까. 영화는 그렇게 그런 장면을 계속 보여줘서, 사람들이 스스로도 그런 순간을 더 쉽게 발견하게끔 도와주는 게 아닐까 한다


나한테 가장 중요한 건 감독이 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얘기하고 싶은지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의 하이라이트 장면을 유심히 보는 편이고, 이 이야기로 하여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할 수 있게 될지 많이 생각한다. 영화에서 중요한 건 간접경험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얼마나 많은 간접경험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하며 영화를 대하는 거 같다. 소설을 볼 때도 마찬가지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 어떤 생각과 감정을 가지게 되는지가 중요하다


좋아하는 영화가 뭐냐는 질문을 들으면 답할 수 없다며, 그 이유는 영화가 장르, 국가, 제작 연도, 소재, 엔딩 등으로 구분되고, 감독이나 배우도 생사여부, 국적, 성별, 스타일 등으로 구분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난 이 이유가 정말 재밌었는데, 지극히 기획자스러운 이유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을 만들어 왔기에 이런 이유가 당신에게 자리 잡게 된 것이 맞을까


맞다, 너무 맞다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 얘기를 해보자. 한국의 영화제는 우선 부산, 전주, 부천에서 크게 있고, 제천, 강릉, 무주 등에서도 팬층이 두터운 영화제가 열린다. 그에 반해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은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는 영화제이고, 하지만 또 올해로 20회째를 맞는 장수 영화제이기도 하다. 외람되지만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에 대한 소개를 좀 해달라


보통 쉽게 설명할 땐, 백남준 작가를 예로 들면서 미술관에 갔을 때 벽에 쏴지고 있는 영상이 실험영화라고 말한다. 배우가 없을 수 있고, 서사가 없을 수도 있다. 또 작가 중심의 작품이라 포맷, 연출 등에 대한 터치가 전혀 없는 예술 영화의 영화제다. 극영화가 아니다 보니 미술 쪽과 가깝다고 말하기도 한다. 뭐 다 맞는 말이지만 이 세상에 극영화만 존재하면 심심하니까, 이런 영화도 있다는 걸 알려주는 영화제가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실험영화이기 위해선 일단 영화여야 한다는 건데,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에서 상영되는 영화를 보면 어떤 사람들은 ‘이게 무슨 영화냐’ 하고 반응할 거다. 그런 말을 들으면 생각해보게 된다. 지금은 누구나 영상을 찍는 시대인데, 영상과 영화를 구분 짓게 하는 건 뭘까. 사실 같은 걸까. 영화의 태초는 그랬으니까


영상은 움직이는 이미지고, 영화는 그걸 찍은 사람이 작가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의도가 있고, 메시지가 있으면 영화가 되는 거다. 모든 영상이 물론 의도가 있겠지만, 구분하긴 힘들지만.. 음.. 그 의도가 자기 자신 스스로에게서 나온 것이어야 한다는 거다.


그 말이 명쾌한 설명으로 들린다. 모든 영상에 의도가 있지만, 영화가 되게 하는 의도와 그렇지 않은 의도를 대부분 다 경험한 적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무빙이미지포럼’이 영화제를 총괄하는 것으로 나와 있는데, ‘무빙이미지포럼’에 대한 소개도 부탁한다. 그리고 당신은 여기서 어떻게 일하게 된건가


‘무빙이미지포럼’은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다. 내가 들어가게 된 건, 대학생 때 영화 관련 자원활동가를 열심히 했는데,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도 자원활동가로 참여하게 됐고, 그 당시 프로그래머님과 현 집행위원장님이 나를 인력으로 사용하기 위해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자리를 제안해주셨다. 그래서 입사했는데, 입사하자마자 당시 사무국장님이 배우가 되기 위해 퇴사했다. 그렇게 갑자기 사무국이 텅텅 비게 됐다. 그렇게 시작을 사무차장으로 하게 된 거다. 그렇게 1년을 배웠고, 나는 사무국장이 됐다. 초반에는 이 직함에 취해서 내가 대단해 보이고, 날 멋지다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냥 월급 받으며 일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다. 뭐 그렇다.


무빙이미지  포럼이 생긴 건 왜 생긴 거냐


우리 윗세대 아저씨들이 충무로에서 영화 운동 하실 때 실험 영화라는 걸 만들어보자 하셨다더라. 그렇게 2004년에 ‘박동현’ 집행위원장을 필두로 <서울실험영화제>를 시작하게 됐고, 그게 이어져 2010년에 ‘무빙이미지포럼’이라는 이름으로 설립하게 됐다.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이라는 이름도 그때 붙었고. 아시아에서 실험영화제로는 가장 큰 영화제다


아무래도 생소할 수밖에 없는 영화들이 많이 상영되는 영화제이다 보니, 찾아주는 관객과의 관계도 유독 특별할 것 같다. 당신과 당신의 동료들이 만드는 영화제를 찾는 관객이 무엇을 기대하며 온다고 생각하나, 그리고 당신과 당신의 동료들은 무엇을 전하려 하나


이 세상에 다양한 영화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에 오는 거 같다. 또 실험 영화도 중요한 영화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네임드 감독들의 영화를 보러 왔다가 다른 감독들의 영화도 보게 되는 경우가 많을 거다. ‘스탠 브래키지Stan Brakhage’, ‘요나스 메카스Jonas Mekas’, ‘백남준', 이런 사람들이 영상을 만들었는데 그게 영화래’ 하면서, 그래서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에 왔는데, 그렇게 왔다가 보게 되는 거 아닐까. 나만 아는 영화를 봤다는 쾌감도 있을 거고. 관객들 스타일이 정말 다양하다. 한국에도 실험영화제가 있고, 실험 영화를 알리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그 관객들이 알아주길 바란다



좀 더 본질적인 얘기를 해보자면 영화제가 과연 뭐냐는 거다. 나는 <전주국제영화제>를 20대부터 거의 매년 갔고, 작년 부산으로 오면서 <부산국제영화제>도 처음으로 즐겨봤는데, <전주국제영화제>는 어쩐지 몇 년 전부터 영 예전 같지 않고, <부산국제영화제>는 정말 별로였다. 상영되는 영화 중 기억에 남는 영화가 점점 줄어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관계성이 점점 영화제에서 사라진다는 인상을 받은 게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다르게 말하면 내가 영화제에서 희열을 느끼는 순간은 영화를 매개로 한 관계성을 확인할 때라는 것인데, 영화는 애초부터 집단의 예술이고, 물론 집에서 혼자 볼 때 좋은 영화도 있지만, 극장이란 물리적 공간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볼 때 그 파동은 훨씬 더 강하다. 그것 자체가 영화가 가진 관계성의 힘이고, 영화제는 이 관계성이 극대화되는 축제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데 최근의 영화제들은 관계성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코로나란 큰 원인이 있기도 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나도 동의한다. 영화제도 똑같다. 새로운 유입은 적고 고여만 있다. 그리고 이제 영화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관객에게 영화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영화를 사고파는 마켓이다. 장사가 돼버렸다. 코로나 때문에 아직도 개봉 못 한 영화가 쌓여있고, 언제 개봉할지 눈치 싸움 중인데, 영화제는 외부에 사고파는 시장이 돼버렸다는 게, 그게 중심이 되는 식으로 변해버렸다. <부산국제영화제>처럼 대형 영화제는 이제 장사를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내게 영화제는 홍보의 개념이었다. 많은 사람이 영화제를 찾는 이유는 남들에게 보여지기 위함인데, 지금은 돈이 오가는 게 주인 행사가 됐다. 사람이 오는 건 그냥 오는 거고, 제일 중요한 건 뒤에서 하는 마켓이 됐다


물론 팔려야 보여지는 거지만, 뭐가 중심에 놓이는 지는 또 다른 얘기니까. 그런 맥락에서 <호모픽투스 시네마클럽>, 그러니까 최근 당신을 정신없게 만들어버린 그 상영회는, 아쉽게도 내가 현장에서 확인하진 못했지만, 들려온 소식만으로도 진한 감동을 줬다.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감독의 단독 작품전으로 매진을 기록했으니 말이다. 어떻게 시작된 일인가


시작은 당연히 술 먹다 벌어진 일이다. 2022년 1월 쯤, ‘형슬우’ 감독이 ‘김호’ 감독을 소개해줬고, 술을 마시며 사적인 친분을 쌓았다. 그 자리에서 나만 영화를 제작하는 게 아닌, 만들어진 영화를 배급 또는 기획하는 사람이었다 보니, 형감독이 김호 감독 얘기를 하면서 기획전 한번 해보자 하더라. 난 또 취해서 그래 뭐 할게요 했고. 그러고 나서 혼자 삘 받아서 사업계획서를 썼다. 근데 써보니 할만하더라. 돈만 좀 있으면. 그래서 사업계획서를 보여줬고, 다 같이 해보자 해보자 된 거다. 그런데 2022년 봄부터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 하면서 뜸을 좀 들이게 됐고, 6개월간의 영화제 준비가 끝나고, 난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진이 다 빠진 상태여서 이걸 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내 나쁜 특성으로 미루고 피했는데, 작년 12월에 김호 감독이랑 커피를 마시다 김호 감독이 그때 말한 거 할 거냐 말 거냐 이렇게 된 거다. 지금 정하자 그러더라. 난 솔직히 하기 싫었다. 여러 명이 기획한 영화제도 너무 힘들었는데 혼자서 한 행사를 기획하라니 도저히 못 할 거 같았고. 근데 난 또 내뱉은 말은 지켜야 한다는 사람이라 또 그 순간 내 스스로에게 실망할까봐 할게요 해버렸다. 그래서 내가 믿고 의지하는 친구 두 명한테 같이 하자 제안했고, 그들은 나 하나만 믿어주며 아무 대가 없이 나섰다. 그렇게 한 달 반만에 만들어서 하게 됐다. ‘장주영’과 ‘호윤정'이 없었으면 <호모픽투스 시네마클럽>은 만들어지지도 않았을 것이고, 심지어  2022년의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 마저 초라한 행사가 되었을 것이다



근데 형슬우 감독은 왜 자기 작품도 아니고, 남의 작품으로 먼저 작품전을 하자고 한 건가


그 감독은 굉장히 이타심이 크다. 자기한테 뭔가 제안이 들어왔는데, 자기가 못하는 상황이라면 어떻게든 꼭 대타를 찾아주는 식이다. 자기 주변 사람이 잘되길 바라는 거지. 내가 늘 고마워한다. 물론 본인은 자신이 말만 하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나는 형감독 덕분에 영화제에서만 일하는 직원으로 머물지 않았고, 스스로의 것을 만들게 됐다. 이분이 어떤 제안을 해주면 내 능력에 한해서 새로운 것들을 실천하게 되고, 내 스스로가 앉은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더 나아가게 되니 말이다. 뭐 그렇게 시작이 됐다. 난 기대를 정말 안 했다. 예약 시스템 준비도 실패하고, 대관도 실패하고, 진짜 산전수전이 많았다. 김호랑도 의견이 안 맞았고. 그래서 대충 마무리 지어야지 했는데, 30명 올 줄 알았던 게 만석이 되니까.. 이제 주변에서 2회를 기대한다. 그리고 나도 공곰이 생각해봤는데, 김호 감독전만 하고 끝내 버리면.. 나쁘게 말해서 김호 똥 닦아준 것밖에 안 되지 않냐. 남 좋은 일 하고 끝내는 게 된다. 이게 내 것이 되려면 내가 계속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2회차 감독을 물색 중이다


작품전을 한다는 건, 어쨌든 그 영화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 아닌가. 김호 감독 작품의 어떤 점들이 당신을 이렇게 움직이게 만든 건가


나는 일단 서사가 오케이였다. 내 합격선을 넘어가는 잘 만든 이야기고, 연출이 좋다고 생각했다. 근데 그중에 <유라>라는 작품엔 의문이 좀 들었는데, 왜 남성 감독이 여성의 월경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했지? 이건 욕심이고, 뭘 안다고 하는 거지? 하는 생각을 한 거지. 이걸 김호 감독에게 직접, 쏘아붙이듯이 다 말했다. 근데 그 감독이 자기의 생각과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이 선 순간을 말했을 때 타당하다고 느꼈다. 또 내가 봤을 때 과장 됐다고 느끼거나, 이건 좀 아니라고 생각했던 요소에 대한 질문에도 내가 납득 가능하게 설명하더라. 그리고 김호는 목소리와 딕션이 좋고, 어휘력이 좋아서, 내가 홀라당 넘어가버렸다. 그래서 같이하게 됐다. <자리>와 <미아>는 그냥 처음부터 좋기도 했고. 네 작품을 다 합쳤을 때 80분인 것도 마음에 들었다


이날 이 자리의 풍경, 당신이 느꼈던 마음들에 대해 자세히 말해줄 수 있을까


정신없었다. 나는 뚜벅이라 온갖 짐을 들고 건대에 가 준비했는데, 친구 두 명이랑 같이 준비하니까 뚝딱 되더라고. 아마 우리가 2022년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도 함께 운영했기 때문에 손발이 잘 맞았겠지. 그래도 티켓 부스 오픈하기 10분 전부터는 발발 떨리고.. 가슴이 너무 떨렸다. 예매는 다 됐는데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 너무 걱정했는데, 영화 시작 20분 전부터 밀려들기 시작했다. 날 응원하러 와준 친구들과도 티켓 줄 때만 겨우 인사했다. 계속 떨리고 정신없었다. 행사가 마무리되고, 뒤풀이 자리에서, 이 행사의 기획이 나란 걸 알고 몇몇 사람들이 고생했다고 인사해줬는데, 그때 너무 뿌듯했다. 제일 좋았던 건 GV를 하는데 모두가 집중하고 있던 순간이었다. 그걸 보면서 감독이 영화를 잘 만들었구나, 대답을 잘하고 있구나 생각하면서.. 극장 안에 모든 사람이 모더레이터와 김호를 지켜보는데.. 그 모든 사람을 내가 모았다는 것과 그 모든 사람이 뒤에서 지켜보는 나에겐 아무런 관심도 안 줄 때, 그때 굉장한 희열을 느꼈다


다양한 사람들의 각기 다른 열망과 또 영화에 대한 동질의 욕망이 이날 ‘KU시네마테크’에 모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이 마음들을 모아낸 건, 아마 유다솔이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당신이 영화와 함께 만난 사람들, 그 사람들과 보낸 시간의 에너지가 그 대단한 순간을 만들어 냈을 거다. 이런 증명에 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나도 고맙다. 고마운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지만, 직접적으로 이 행사를 함께 만든 사람들 얘기를 하자면 디자인과 촬영 맡아준 장주영, 티켓 발권과 행사 운영의 호윤정, 매년 영화제도 도와주고 이번 첫 행사까지도 아무 말 없이 도와준 이택수, 그들에게 정말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첫 행사에 도전해준 김호 감독도 고맙다. 그리고 이 행사는 형슬우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다. 형쏘공, 고맙다. 이 밖에도 고마운 사람들이 너무 많지만 다 언급할 수 없는 게 아쉽다



보도자료에 의하면 다음 <호모픽투스 시네마클럽>은 올해 하반기에 또 이어질 것으로 계획돼 있다고 전해졌는데, 이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알려줄 수 있을까


감독 후보를 찾고 있고, 주변에서도 제안이 들어온다. 일단 작품이 내 마음에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감독도 나와 잘 맞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고민 중이다. 여성 감독을 찾는 중이고. 계속해서 감독전을 할 거다. 배우전을 하기엔 제약이 많다. 이전 작품의 과거 연기를 안 보고 싶어하는 배우도 많고, 너무 유명한 배우를 하자니, 우리의 행사 취지에 맞지 않기 때문에 제약이 있다. 우리가 처음에 하고 싶었던 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렇게 잘 만든 영화를 찍는 감독이 있다는 걸 알리는 거였으니까. 감독전을 계속 할거다. 단편 묶음으로


음력으로도 얼마 전 3월이 지났고, 전주를 시작으로 전국의 영화제가 시작되면 또 당신의 미어터지는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 스케줄도 진행되겠다. 무엇보다 건강 잘 챙기길 바라며, 영화와 함께 가고 싶은 다음 지점이 있다면 얘기해 달라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이 아시아 최대 실험영화제이고, 20년 된 장수 영화제임에도 불구하고 서울시에서 지원을 끊었다는 게 가장 충격적이다. 그 지원이 끊어짐으로써 우리는 행사의 모든 부분을 축소해야 하고, 오프라인을 포기하고 온라인으로 돌려야 할 실정이다. 서울시에선 지원을 끊은 이유를 명확히 알려주지도 않는다. 그래서 성명서와 운동을 준비해야 하는데, 그 동시에 또 영화제 준비도 해야 한다. 너무 정신없다. 하지만 어떻게든 행사는 진행이 될 거고, ‘아핏차퐁 위라세따쿤Apichatpong Weerasethakul’이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 참여로 한국에 온다. 또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과 별개의 내 목표는, <호모픽투스 시네마클럽> 출신의 감독이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던 <호모픽투스 시네마클럽> 출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행사가 되게 하는 거다. 시네마 클럽이라는 소속감을 계속 가져가고 싶다. 더 나아가 하나의 행사인 동시에 영화 운동 단체를 만들고 싶다. 행사도 있고 교육도 있는, 그런 일을 하고 싶다. 나를 통해서 자기가 알려졌다는 영화인이 생기면 좋겠다


좋다. 이제 마지막이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 같은 질문은 싫다고 했지만, 지금 당장 보고 싶은 영화 정도는 괜찮겠지. 알려준다면 이 대화를 보고 있는 사람들도 언젠가 함께 볼 거 같다. 그 권유로 대화를 마치자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의 <국외자들Bande à p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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