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수"

2022년 2월 8일의 대화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온 사람을 만나면 대부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서울에 산 지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여전히 낯설다는 둥, 고향 생각이 자꾸 나지만 어쩔 수 없이 서울에 살고 있다는 둥, 여기서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는 둥. 나 역시도 서울에 산 시간이 10년이 다 되어가지만, 종종 비슷한 감정을 느끼곤 한다. 그 까닭엔 풍경이 있고, 서울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지불해야하는 비용이 있고, 막상 가서 살면 그건 또 뭐 그리 행복하기만 하겠냐마는, 서울에서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하나의 환상으로 자리 잡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 처음엔 그 그리움을 극복하려 했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땐 잠시 잊기도 했다가, 그러다 시간이 훌쩍 지나버리면 그 그리움을 좀 더 세세하게 들여다보게 됐는데, 들여다보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애석하게도 나의 자리는 이곳 서울도, 떠나온 고향에도 없다는 생각만이 짙어지곤 했다. 그리고 생각하게 됐다. 내가 원하는 공간은 어디에 있을까. 어딘가 있지 않다면 내가 만들어내야 할 텐데, 그렇다면 그렇게 만들어 낸 공간은 어떤 모습일까 하고. 물론 생각해낸 모습은 늘 바뀐다. 어떨 땐 서울에 가깝고, 어떨 땐 고향에 가깝다. 그 모습이 어떤 쪽에 가깝든, 결국 현재 나의 모습을 헐겁게 정리하는 것으로 그 생각은 마무리되고, 눈앞에 다가온 현실을 처리하는 데  시간을 쏟다 보면, 오늘이, 내일이, 이미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반지수'의 그림을 처음 봤을 때, 나는 '반지수'가 그 지나감을 그저 지나가게 두지 않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 아닐까 생각했었다. '반지수'는 서울이 좋다고 했다가, 싫어진다고 했다가, 언제라도 떠날 수 있다고 했다가, 아직은 아니라고 내게 말했다. 그의 표정은 소란했고, 틈이 날 때마다 붙잡아봤지만, 풀리지 않는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마음이 담겨있었다. 그는 과도기란 말을 사용했지만, 난 그 말로는 그의 현재를 설명하기엔 충분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이것저것, 나눠 보고 싶은 이야기들을 꺼냈다



며칠 전 입춘이었다. 나는 절기의 이름이 주는 느낌이나 의미가 좋아서 늘 절기의 변화에 관심을 가지는 편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절기가 잘 맞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래도 미세한 변화를 감각하려 집중해보면 각 절기는 무릎을 탁 치게 만든다. 입춘은 시작을 의미하는 때이기도 한데,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나

 

작업을 하는 것에 있어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시기다. 지금 진행 중인 의뢰 작업이 많긴 하지만, 앞으로는 의뢰 작업은 최대한 덜 하고, 내가 하고 싶은 작업을 더 많이 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계절의 변화는 해의 길이에 의해 가장 먼저 포착되곤 하는데, 몇 주 전부터 해가 부쩍 길어졌음을 실감하고 있다. 밤이 좋은 사람은 이 변화가 아쉬울 것이고, 낮이 좋은 사람은 반기는 변화일 텐데, 밤과 낮 중 어느 쪽에 더 살아나나

 

나는 완전히... 낮을.. 아니다, 낮이랑 밤, 둘 다 좋아한다. 밤도 좋지만, 햇빛이 있는 시간대를 유독 좋아하는데,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원래는 채광이 되게 좋았다. 그런데 옆에 건물이 세워지면서 해가 다 막혔다. 겨울엔 해가 낮으니 빛이 더 잘 안 들어왔고. 최근 들어서야 빛이 좀 들어오는데, 그런 이유 때문에 요즘 계절이 바뀌고 있는 게 좋다

 

제도권 교육과 회사 생활을 통과하면 사실 우리는 모두 해가 떠 있을 때 움직이고, 해가 지면 휴식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어야 하는데, 그것만큼은 반복해 온 세월과 상관없이 모두 자기 멋대로다. 아침형 인간 같은 게 유행하기도 했고, 최근엔 미라클 모닝이니 하는 것이 여기저기서 소개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대부분은 자신의 루틴으로 돌아가게 된다. 작업 루틴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고, 동시에 그 루틴이 자리 잡은 것은 언제쯤일지도 물어보고 싶다

 

생각 좀 해보겠다.. 음.. 내가 어떤 작업을 하느냐에 따라 다른데, 나는 애니메이션과 일러스트레이션 작업 두 가지를 하고 있다. 애니메이션은 노동량이 엄청 많다. 하루도 일을 거르면 안 될 정도로. 하루 종일 열심히 그려야 1초가 완성되고 그런다. 그래서 애니메이션할 때는 직장인처럼 아침에 일어나 9 to 6로 일한다. 그런데 일러스트레이션은 작업량은 비교적 적지만, 생각할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애니메이션은 기획이 끝나면 노동만 하면 되는데, 일러스트레이션은 아이디어를 얻는 시간이 계속해서 필요하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야행성이 되고. 요즘은 일러스트레이터로 살고 있어서, 열두 시쯤 일어나 밥 먹고, 저녁에 일 엄청 하고, 일 끝나자마자 잠드는 식이다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을 밤에 하는 건, 아무래도 아이디어는 밤에 더 잘 떠오르기 때문인가

 

맞다. 아침에 자리 잡는다고 해서 아이디어가 떠오르진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낮엔 자료를 찾고, 답사를 다니며 시간을 보낸다. 애니메이션은 영상이니까, 영상은 컷을 쪼개고, 그 쪼개진 컷들이 모여서 작품이 되는데, 일러스트레이션은 한 장 안에 분위기와 의미 등 모든 걸 담아야 하니까, 결과물의 크기나 분량에 비해 생각이 더 많이 필요하다

 

경상북도 예천에서 태어나 자랐고, 20대가 시작되며 서울에 왔다. 예천이란 곳이 나에겐 생소해서, 고향에 관한 이야기를 이것저것 해보고 싶더라. 서울에서의 10년이 지금의 당신에겐 매우 중요해 보이지만, 우선 예천 먼저. 예천은 어떤 곳인가

 

흠.. 고향 얘기.. 예천은 어떤 곳이냐.. 예천은 굉장히 작은 곳이고, 뭐가 많이 없다. 내가 중학교 때 롯데리아가, 편의점은 고등학교 때 처음 생겼다. 지금은 없는 훼미리마트. 게다가 우리 집은 읍내가 아닌 산골, 그것도 엄청 산골에 있어서, 깡촌 생활을 한 거지. 나에게 예천이라 하면 자연..? 뭐가 많이 없는 곳. 지금 떠올려 보니 난 거기서 평생 살았으니까, 예천이 어떤 곳이다 하고 생각해보게 된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래도 말을 해보자면 사람들이 되게 보수적이라서 나랑 안 맞았다. 나는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열린 토론을 좋아하는데, 예천은 선생님도, 부모님도 다 보수적이어서, 내가 많이 힘들어했다. 애증이 섞인 곳이지. 근데 예천은 나를 되게 좋아한다. 예천신문에서 나를 항상 실어준다. 자꾸 나를 실어주시는데.. 별거 아닌 거로 실어주셔서.. 조금 부담스럽다

 

대화를 준비하며 인터넷을 좀 찾아봤는데 웃긴 얘기가 하나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남아선호사상이 가장 강한 지역’이라는 이야기. 웃긴다고 말했지만, 그저 웃을 수만은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니, 사실은 무시무시한 이야기지

 

경북 어딜 가나 비슷할 거 같기도 한데,. 나도 오빠가 있어서, 대놓고 받은 건 아니지만, 은은한 차별을 계속 받으며 자랐다. 오빠 방 청소는 내가 해야 한다던지, 오빠에겐 자질구레한 집안일을 시키는 걸 본 적도 없다. 심지어 내가 중학교 때까지 닭 다리를 먹어본 적이 없다. 치킨 먹을 때. 무슨 맛인지 몰랐다. 왜냐하면 항상 오빠가 먹는 거였으니까. 친구들하고 시켜 먹을 때야 처음 닭 다리 맛을 봤다. 그런 차별이 너무 당연했다고 해야 하나? 또 당시엔 잘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여중 여고를 나왔는데, 선생님들이 성희롱적인 발언을 많이 했다. 돌이켜보자면 그런 게 많지. 근데 그런 건 시대라는 게 있으니, 서울이었어도 마찬가지였을까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우리 동네엔 할아버지, 할머니도 많이 계시고, 그분들과 같이 살아야 하는 곳이어서, 그런 분위기가 더 강했던 건 분명하다

 

닭 다리는.. 은은한 정도가.. 음.. 내가 그쪽 지역에 대해 기억나는 건, 초등학교 때였나, 중학교 때였나, 가족여행으로 안동에 간 적이 있는데, 그때 안동 길거리에서 형이랑 투덕거린 적이 있다. 근데 그랬더니 지나가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르더라. 형한테 그러는 놈이 어디 있냐고. 여기는 진짜구나.. 했다

 

안동.. 선비의 고장..

 

예천에서만 먹는 음식이 있나? 예천에서만 먹는다고 하면 좀 웃기게 들리니까, 그냥 고향 생각하면 떠오르는 음식 정도를 들어보고 싶다

 

예천에서 자랄 땐 외식해본 적이 거의 없다. 부모님이 거의 다 해주셨고, 학교에선 급식을 먹었으니까. 부모님 음식만 생각이 나는데, 그게 특별히 예천의 음식이다 할 건 없을 것 같다. 예천 음식.. 진짜 하나도 모르겠다

 

알겠다. 얘기를 들어 보면 예천이란 곳은 예술을 하기 위한 저변과 관련된 경험이 부족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또 동네의 정서라는 게 있으니, 생각을 자유롭게 하기도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그곳에서 자라며 그림을 어떻게 시작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물론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선 깊은 산골에 살며 자유롭게 창작하는 캐릭터가 간혹 등장하긴 하지만, 현실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기엔 제약이 너무 많으니까

 

열 살 때까지는 읍내에 살았는데, 아까 말한 오빠가 만화를 진짜 좋아했다. 난 그 영향을 많이 받았고. 아무리 시골이라도 만화책 정도는 구할 수 있었으니까. 또 부모님이 맞벌이하셔서 TV를 많이 봤다. TV를 보면 만화영화를 항상 봤고, 아니면 어머니가 사놓으셨던 그림책을 보곤 했다. 그리고 엄마가 그림을 잘 그리셨다. 벽에 그림이 걸려 있었고, 이젤도 있고 그랬다. 그래서 우리 남매가 다 그림을 잘 그린다. 나도 엄마를 보며 어릴 때부터 그림을 많이 그렸고. 어릴 때를 생각하면 집에서 오빠랑 만화를 보거나, 엄마랑 그림을 그리거나, 그런 기억이 떠오른다. 하지만 제약이 너무 많았던 것도 맞지. 극장도 내가 고등학생일 때 처음 갔고, 미술학원도 제대로 다닐 수 없어서, 전공으로 미술을 선택할 수 없었으니까. 배울 곳이 없다고 느끼니 자연스럽게 안 하게 되더라

 

그 당시 봤던 만화나 그림책 중에 생각나는 게 있나

 

만화는 그 시대에 했던 건 안 본 게 없을 정도로 다 봤다. 만화책은 기준 없이 유명한 만화들을 봤다. 여자애들은 다 알 텐데.. <파티>라고 순정만화 월간지가 있었는데.. 오빠는 <점프>를 보고, 나는 <파티>를 봤다. 거기 나오는 만화들 안 가리고 다 봤지. 어릴 때라 그런지 취향이란 게 없었다. <영심이> 이런 것도 좋아하고. 그림책은 집에 있는 거 그냥 다 봤는데, 사실 그때 봤던 그림책을 너무 찾고 싶다. 전집으로 나온 그림책인데, 그림체가 정말 클래식한 유럽 판화 느낌인 그림책이었다. <신데렐라>부터 해서 고전들만 모은. 그 그림이 너무 예뻐서 내가 맨날 들여다봤다. 어디서 나온 전집이었는지.. 너무 찾고 싶다


 


그러다 서울로 오게 된 건, 물론 진학과 관련된 변화이기도 했겠지만, 예천에서 느꼈을 여러 가지 한계를 뛰어 넘어보고 싶었기 때문일 거라 짐작된다

 

내가 전공은 정치 외교를 했다. 고등학교 때 사회문제에 심취해 있었다. 그림은 이미 늦은 것 같아 포기한 상태였고. 난 진짜 놀기만 했는데, 다른 애들은 예고 다니면서 준비하고 하는 걸 봤으니까. 그러던 차에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돼서, 정치인이나 변호사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고3일 때, 당시는 이명박 정권이었고, 광우병 관련 시위가 서울에선 한창 벌어지고 있었는데, 그런 곳을 너무 가보고 싶은 거다. 그런 곳에 나가는 대학생이 되고 싶었고. 그 당시엔 이런 이유 때문에 서울로 오고 싶었다. 그림은 나중에 할머니 되면 해야지 정도로 생각했다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나

 

일단 내가 반골 기질이 있어서, 근현대사 시간에도 역사를 배우면 나 혼자 부글부글 끓고 그랬다. 그러다 고3 때,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는 언니들, 오빠들을 알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 그 언니들, 오빠들 싸이월드에 들어가 보면 시위 관련된 게시물이 올라오는 거다. 그게 멋있어 보였다. 나도 저런 지식인이 되야겠다.. 생각했다. 멋있어 보이는 거 보면 하고 싶어지니까. 그 언니들, 오빠들의 영향이 크다. 뭔가 잘못 돌아가는 걸 보면 내가 바꿔야겠다고 생각하는 성향도 한 몫 했고

 

서울에 있는 언니들 오빠들을 어떻게 알게 된 건가, 말하기 곤란하면 말하지 않아도 된다

 

하하..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 <도전 골든벨> 촬영이 왔었다. 내가 최후의 1인이었고.. 최후의 1인이 되면 마지막 후반부에 역사탐방 보내주는 문제를 풀게 된다. 그 문제를 맞히면 최후의 1인이었던 학생들과 모여 역사탐방을 가는 거지. 근데 그게 작년에 촬영한 사람, 재작년에 촬영한 사람 등등이 모이다 보니 절반은 고등학생, 절반은 대학생이었다. 그 언니들, 오빠들이 다 똑똑하고, 서울에 있었고, 역사탐방이니 역사 얘기를 하게 됐는데, 너무 잘 알고 있으니 멋있었다

 

역사 얘기를 하니 불쑥 궁금해지는 건데, 대구경북 즉 TK 지역에 대한 선입견일 수도 있지만, 예천에서 다닌 학교의 역사 교육은 어땠다고 기억하나. 역사는 정말 어떻게 해석하고, 어디에 초점을 맞추는지에 따라 제각각 다르게 얘기될 수 있는 거니까

 

학교엔 같은 과목이라 할지라도 여러 선생님이 있지 않나. 개인차가 다 있었던 것 같다. TK가 물론 보수적인 곳이긴 한데, 어떤 여자 선생님은 정의감을 자극하는 수업과 썰을 많이 풀어주셨고, 어떤 남자 선생님은 완전 뉴라이트여서 수업 시간에 이명박 찬양하고 그랬다. 그럼 우리끼리 왜 저러냐고 욕하고.. 그때를 생각해보면 애들이 아무리 정치적인 것에 관심이 없어도, 우리는 또 인터넷 세대고 하니까, 그런 말 하는 선생님에 대한 반감을 공유할 수 있었다고 본다. 휩쓸리지 않고. 그냥 상식적으로

 

현재 그 친구들의 정치 성향은 어떤가. 방금 한 마지막 말이 나 역시도 정말 공감되는데, 한 편으론 지금 내 부산의 친구들을 만나면 과거에 비해 정말 많이 보수화돼 있다. 우리 세대는 그래도 김대중, 노무현 때 초중학교를 나왔는데, 그렇게 자연스레 민주주의나 자유에 관한 가치를 습득하며 자랐다고 생각했는데, 지킬 것이 조금씩 생기는 나이대가 돼서 그런지, 다들 쉽게 보수화되더라. 보수화된다는 말이 사실 정확한 말은 아니지. 그냥 정치에 무관심해지고, 무관심하다 보니 조중동에서 뿌리고, 조중동에서 온라인 언론사 엮어서 뿌리는 어뷰징 기사들, 그렇게 포털 메인에 자극적으로 노출되는 기사의 타이틀만 스치듯 보다 보니까, 더 이상 정치에 대해 판단하는 기준 자체가 사라진 느낌이다. 상식적인 사고가 안 되는 거지

 

나는 여중 여고를 나왔는데, 여자애들이 아무래도 왼쪽 성향이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자란 지역의 정서에 대한 반감도 작용했겠지. 적극적이진 않더라도, 여자가 겪는 문제를 자각하면서, 왼쪽..적인.. 사람으로 자라는 거 같다. 내가 느끼기엔. 왼쪽적인... 하하...

 

대선이 있기도 해서 그런지 정치 얘기로 급물살을 타 버렸다. 다시 돌아가자. 앞서 말한 생각의 과정으로 서울에 왔을 때, 오기 전 생각했던 것들과 실제 서울에서 지내며 느낀 건 또 다를 거 같다. 차이가 있다면 어떤 차이가 크고, 바랐던 대로 이루어진 건 어떤 게 있나

 

그냥 너무 좋았고, 이제야 살 것 같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의 개입이 심한 편은 아니어서 억압받은 기억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했다는 게 너무 좋더라. 그리고 대학생 되자마자 온갖 사회활동을 다 했다. 시간 허투루 쓰지 않고,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좋았고, 서울에서 할 수 있는 걸 많이 누렸다. 가장 좋았던 건 다양한 재능을 가진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 다양한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이나 전시에 갈 수 있다는 것, 다양한 도시 경관을 체험할 수 있다는 점인 것 같다. 이런 점들은 시골에 살면 절대 누리기 힘든 것들이니까.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나는 뭔가를 좋아하면 확실히 좋아하기 때문에, 아쉬운 건 딱히 기억나지 않는다. 오히려 돈을 벌어야 하는, 현실을 생각해야 하는 사회인이 되면서 서울이 조금씩 싫어지기도 했다. 서울에는 살고 싶고, 가능하면 쾌적한 삶을 살고 싶은데, 거기에 드는 비용이 너무 많아서 점점 괴로워졌던 것 같다. 요즘은 어딜 가나 재테크에 대한 이야기가 많고, 그걸 안 하면 바보인 분위기가 있는데, ‘그렇게 살아야만 정말 이 서울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건가?’라는 의문이 들어서 이 도시에 대한 애증이 커지고 있다

 

맞다. 서울에 살면 돈 생각을 자주 안 할 순 없지만, 그럼에도 늘 돈 얘기만 오가니, 그로 인해 쌓인 피로감이 나에게도 엄청나다는 생각을 요즘 자주 했다. 나도 서울에 산 지 10년이 되어가다 보니 그런 것 같다. 당신도 서울에 온 지 이제 10년이 지났다. 예천을 정리해본 것처럼, 누군가 당신에게 서울이 어떤 도시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하겠나

 

내 경험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꿈꾸는 게 있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서울로 오라고 할 것 같다. 문화적인 경험 차이가 크니까. 그런데 이미 잘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굳이 서울에 안 와도 된다고 말할 것 같다. 밑으로 동생도 두 명이 있는데, 막냇동생이 서울에서 너무 살고 싶어 한다. 그러면 나는 굳이 올 필요 없다고 얘기해주고. 거기서 잘 살고 있으니까. 반짝이고 그런 게 좋은 거면 종종 와서 놀기만 하라고. 내가 동생에게 이렇게 말하는 건 이런 것도 있을 거다. 지금의 나는 서울에 대한 마음이 좀 복잡해서, 지금 좀 마음에 안 드니까. 아까 한 돈 얘기랑 연장선인데, 이사를 하려고 알아보니, 나의 예산 안에서 갈 수 있는 곳이 서울엔 없더라. 그때부터 ‘왜 서울엔 내가 갈 수 있는 공간이 없지?’ 하며 서울이 미워졌다. 요즘 집에서 작업하고 있고, 그러다 보니 집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데,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집의 선택폭이 너무 좁다는 생각이 드니까, 미움이 생기더라

 

나도 이사를 할 때마다 느끼는 마음이다. 이사를 할 때마다 셈을 하게 되는데, 그 셈은 굉장히 불쾌한 셈이다. 끊임없이 원하는 것들을 제거해나가야 하는 과정이니까. ‘가진 것 중에 포기하는 것도 있어야지.’하는 마음이 아니라, ‘이런 거까지 포기하며 살아야 하나’하는 마음이란 거다. 여러 가지 이유로, 서울에 산 시간이 꽤 돼서 그런지, 요즘 다시 고향인 부산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부산에서 일할 순 없을까, 내가 작업이랍시고 하는 것들을 부산에서 할 순 없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드는 거다. 어떤 종류든, 작업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서울에 있으니, 재밌는 작업도 점점 줄어드는 것 같다는 생각도 하고. 난 개인의 작업이 속한 지역의 틀 안에서 형성된다고 생각하는데, 다 같은 도시에 있으니, 다른 것 같으면서도 결국 비슷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 같달까

 

나도 서울에서 살 만큼 살았고, 그 시간 동안 서울에서 받을 수 있는 영향은 받을 만큼 받아서, 30대 이후엔 서울로부터 자극을 받는게 점점 약해진다고 느낄 때가 있다. 처음엔 엄청 많이 배우고, 자극받고 그랬는데, 지금은 내가 많이 다져져 있으니, 이 도시가 아니더라도 잘 살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서 서울이 아닌 곳에서 살까 생각도 해봤는데, 결국 이사를 못 한 까닭은,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이나, 구상하고 있는 애니메이션의 이야기 공간이 아직은 서울이어서, 자료 조사하고 답사하려면 서울에 계속 살 수밖에 없다고 결론이 났다. 지방으로 가면 쾌적해지는 건 분명히 있겠지만, 해야 하는 작업 때문에 서울을 못 벗어나겠다고 결론 내린 상태다. 서울의 단점은 단점대로 받아들이고, 장점을 생각하며 살자.. 한다. 나중엔 언제라도 옮길 생각이 있다

 

간다면 그곳은 예천인가

 

예천은 진짜 가기 싫다.. 가고 싶긴 한데.. 오래 못 있을 것 같다. 뭐 가봤자 경기도? 아니면 강원도도 생각했다. 전라남도도 갈 수 있고. 근데 예천.. 경상도는 안 가고 싶다

 


하하, 그래서 그럴까. 당신은 대화를 나누기 전 내가 건넨 질문에서 마음속 고향은 서울이라고 답했다. 그 답을 보자마자 묻고 싶더라. 정말 그러냐고. 시간의 부피를 따져도 예천에서의 시간이 길고, 예천에 가본 적은 없지만, 인터넷 속 사진을 통해 유추해봤을 때 서울과는 전혀 다른 풍경의 동네일 거 같은데, 그렇다면 큰 부피의 시간을 보낸 그 공간이 절대 쉽게 잊힐 순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묻는 것이다. 무례할 질문일지 모르겠지만, 혹은 당신이 예천에서의 시간과 조금은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건 아닐까 하고도 생각해봤다

 

학창 시절이 그렇게 좋지 않았다. 어른이 돼서 너무 좋은 것 중 하나가 낮에 학교에 있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유치원생 때 말고는 낮엔 학교에 있게 되니까, 난 낮이 너무 좋은데, 산책하고, 날씨 즐기고, 세상 돌아가는 거 구경하는 게 정말 좋은데, 10대 때 그 시간을 다 학교 안에서 보냈다는 게 너무 싫었다. 예천이란 공간도 집이랑 학교 말고는 생각나는 게 거의 없다. 예천의 유명한 곳을 가본 적도 없고. 그러다 보니 ‘예천이 나에게 뭐지?’하는 질문도 거의 해보지 않았다. 물론 친구들이랑 놀았던 건 재밌었고, 아름다워서, 그런 구체적인 기억은 그 자체로 내게 좋은 추억이지만, 강제로 입시 공부를 해야 했던, 그 수동적이고 독립적이지 못했던 시절이 좋았다고 기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서울은 내가 선택한 곳이니까. 내 삶을 내가 독립적으로 이끌어나갈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처음부터 회사원이 될 생각은 안 했던 게, 낮에 회사에 있다 생각하면 학교 다닐 때가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앞서 한 질문과 연관 지어 생각하며 당신 그림을 다시 한번 천천히 봤다. 그리고 그때야 당신의 위치가 눈에 보이더라. 당신이 풍경을 그리든, 공간을 그리든, 자연을, 사람을, 물건을 그리든, 그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그림엔 보이지 않는 곳에 서서 그 그림을 그리고 있는 당신이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당신을 상상하면 조금은 쓸쓸해졌다

 

음.. 맞다.. 맞는 것 같다. 사람들이 내 그림이라고 알고 있는 건 대부분 풍경 그림인데, 그건 산책하다 찍은 사진을 조합해 그리는 거다. 그 산책은 보통 혼자 하는 경우가 많았고, 돌이켜보면 그 산책은 대부분 외로웠던 것 같다. 친구들이랑 같이 보내는 시간도 많았지만, 결국엔 집에 오면 혼자고, 이 도시에 소속돼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런 느낌을 받으면 다시 서울을 누비기 위해 산책하기 시작했고. 나는 이 도시를 사랑하는데, 이 도시는 나를 끌어안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 ‘언제 내가 여기에 온전히 소속될 수 있을까’하는 마음으로 걷고, 사람들을 봤다. 도시에 이미 소속된 사람들을 부러워하면서. 그럼 감정이 있지 나한테

 

내가 그렇게 느낀 건, 아마 나의 지난 서울 10년을 돌이키며 당신의 그림으로 들어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꼭 서울과 연관 짓지 않아도 되겠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얘기는 결국 관찰자일 수밖에 없다는 거다. 서울에 대한 많은 시간과 기억이 쌓여도 난 늘 손님이라 느끼고, 이런 느낌은 서울에서 만난 사람이나 공간을 대할 때도 거리를 만들어 낸다. 그 거리가 작업할 땐 꽤 유용하지만, 그저 개인이라 생각해봤을 땐 꽤나 서글픈 얘기이기도 하다. 당신 그림에서도 마찬가지의 감정을 느꼈다. 당신 그림 속에선, 빛은 따뜻하고, 사람은 평화롭고, 물건은 가지런한데, 그럼에도 당신이 그린 그림 속으로 완전히 들어갈 순 없는 거리가 느껴졌다

 

여전히 서울이 낯설다. 그리고 서울뿐만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익숙한 것들도 낯설게 보이는 경우가 많다. 지금 사는 집이나, 동네도 마찬가지고. 익숙하다 생각했는데, 문득문득 ‘아 여기가 도시긴 도시구나..’ 하게 되는 거다.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영화를 볼 때도 사람을 멀리서 찍은 장면을 좋아한다. 움직임이 작아 보이는 장면이나, 멀리 보이는 창 안의 모습을 찍은 장면 같은 것들. 다르게 말하면 이입하는 것보단, 멀리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것을 통해, 그 사람들이 하는 생각이나 고민을 작아 보이게 만드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 사람이 작게 보이면 각자가 가진 특징도 잘 안 보이고, 그로 인해 각자가 가진 개별적인 고민도, 멀리서 봤을 땐 그 사람만이 하는 고민이 아니라 보편적인 고민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거고. 나부터가 생각과 고민이 너무 많아서, 그 생각과 고민을 가볍고, 편하게 만들어주는 시선이 좋더라

 

‘그 거리감이 주는 쓸쓸함을 어떤 방식으로 마주하나’하고 물어보려 했는데, 생각하다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그저 작업에 집중하는 방법밖엔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

 

인생을 돌아보게 되는 질문인데.. 나에겐 내가 커뮤니티에 속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가족에 속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꾸준히 있었다. 가족들이 아직도 조금 불편하고. 그래서 항상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공동체에 속하는 게 꿈이다, 드라마나 영화도 그런 내용을 좋아한다. 결혼하고 나서야 커뮤니티에 속하고자 하는 욕망이 조금씩 해결됐다. 내가 그림을 시작하고부터 일을 정말 많이 했다. 일로 그린 그림인 거지. 그러다 작년에 <보통의 것이 좋아>란 책을 냈는데, 이 책은 나에게 일이 아니었다. 음악으로 치면 앨범을 내는 셈인 건데, 의뢰받아서 그린 것 말고, 내가 스스로 그린 것들을 모아서 꼭 책으로 내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완벽하게 책이 나오진 않았지만, 책을 내기 위해 글을 쓰고, 그림을 모으면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내가 이거 평생 해야겠구나’ 하는. 내 이야기 하는 걸 멈추는 동안 내가 나로 살고 있다는 느낌을 못 받는다는 것도 깨달았고. 프리랜서는 어차피 정년도 없고, 정해진 퇴근도 없으니까, 저 생각을 하면서 그냥 죽을 때까지 계속하면 되겠다고 생각하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안도했고

 


또 당신의 그림을 보며 생각했던 건, 당신 그림 속 공간이 가상의 공간처럼 느껴졌다는 점이다. SF적인 가상이 아니라, 당신의 기억과 현실에서 포착한 장면을 조합해, 당신이 도착하고 싶은 어떤 공간을 계속해서 만들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 거다. 당신의 얘기를 들으니, 어쩌면 그 공간들이 당신이 꿈꾸는, 속하고 싶은 커뮤니티의 조각들일 수도 있겠다

 

질문이 너무 좋네.. 맞다. 예전에 사진작가가 되고 싶었던 적도 있는데, 결국엔 아니라고 생각한 이유가, 물론 사진에도 작가의 시선이 개입하지만, 결과적으론 보이는 그대로 담길 수밖에 없으니까, 난 그것보단 내가 꿈꾸는 모습을 좀 더 부여해서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그림이 사진보다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는 여지가 더 크니까. 그래서 그림을 그렸다. 그래서 실제 작업할 때도 더 좋아 보이게, 내 눈에 거슬리는 건 다 빼고 그린다. 예를 들어 온 길가에 세워져 있는 자동차를 빼고 그런다던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채색 계열 옷을 많이 입으니까, 옷에도 색을 넣는다던지 하는 식으로. 그러다 보면 생각하게 되지. ‘나는 내가 원하는 세상을 그리고 있는 건가?’하는

 

그렇게 당신이 그린 조각들이 모여 결국엔 ‘반지수’의 세상이 될 거다. 그 공간, 또는 세상은 어떤 곳인가

 

대답할 수 있지. 지금까지 했던 대화와도 연결되는데, 일단 사람들이 자기 자신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면 좋겠다. 멀리서 보면 사람들이 다 예쁘다. 자기만의 보석 같은 걸 가지고 있고. 정말로.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런 부분들을 잘 캐치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한편으론 조심스럽기도 하다. 지금에 만족하라는 말로 들릴까봐. 언제든 나아져야 하고, 좋은 쪽으로 가야 하는 게 맞지. 하지만 자기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지는 않게, 좋은 걸 많이 생각하며 살았으면 좋겠다는 거다

 

최근엔 책 표지 작업도 많이 했다. 그뿐만 아니라 강의도 했고, 본인의 책도 냈다. 한 마디로 바빠 보인다. 그래서 물어볼까 한다. 뭐가 제일 하고 싶나. 6년 전쯤 했던 어느 인터뷰에선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 들어가는 게 꿈이라고 말했던데, 지금은 스튜디오를 차려도 되는 상황이지 않나

 

일단 책 표지 작업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작업이다. 내가 책을 좋아하기도 하고, 책을 읽은 감상을 그리는 거라서, 의뢰 작업 중엔 가장 나다운 걸 할 수 있다. 애니메이션은.. 그때 인터뷰하고 바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 들어갔다. 1년 일한 뒤 나왔고, 지금은 <도요새 스튜디오>라고, 나 한 명 있는. 내가 만든 스튜디오가 있다. 거기서 단편 애니메이션을 준비하고 있다. 미래엔 아까 얘기했듯 커뮤니티가 드러나는, 사람이 많이 나오는 그런 작품을 하고 싶다. 내가 사람을 많이 만나지는 않는데, 그런 커뮤니티가 필요하다 생각하고, 좋아해서 그런 것 같다. 우리나라에선 사람을 만나는 게 스트레스일 때도 많지 않나. 근데 그런 거 말고, 정말 서로를 아끼고 애정을 나누는 공동체, 그런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쉽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에 더욱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고

 

대화를 준비하다 보니 당신이 어느 지점으로 나아갈지가 궁금해지더라. 지금까지는 당신 안에 아주 어릴 때부터 쌓인 것들을 소화 시키고, 밖으로 꺼내 놓는 시기였던 거 같은데, 이제는 또 다른 기억과 감정, 사건들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반지수’를 그저 얌전하고 평화로운 그림을 그리는 작가라고 설명하기엔, 당신 그림 속에서 느껴지는 어딘가 모를 삐딱함이 자꾸만 눈에 밟히기도 한다. 여기서 삐딱함이란 건 불량함이 아니라, 당신의 시선으로, 제대로 세상을 바라보고야 말겠다는 의지라고 이해해주면 되겠다

 

삐딱함.. 재밌다. 나도 나 자신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는데, 나의 장점이자 단점은 내가 너무 긍정적이라는 거다. 낙천적이고. 좋은 것만 보고 싶어 한다. 어릴 때 안 좋은 기억이 많아서 그런 것 같다. 불우한 가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런데 그렇게 되면 난 가족의 아픔에 관한 이야기도 할 수 있어야 하는 거지 않나. 근데 난 그걸 못했다. 난 왜 그걸 못하지? 의문을 품게 됐고, 돌이켜봐도 나는 사람들한테 뭐가 좋고, 행복한지에 관한 이야기만 하는 사람이었던 거다. 그런데 그게 저절로 그렇게 됐다. 그러다 보니 난 왜 그럴까 생각해보게 된 시절도 있었지만, 그냥 요즘엔 이런 부분이 나의 장점일 수도 있겠다 생각한다. 내가 만나는 끔찍한 사건이나, 사람들의 끔찍한 사건을 외면할 생각도 없고, 인지하는 게 중요하다고도 생각하는데, 정치를 꿈꿨을 만큼 세상의 지옥 같은 이야기를 인지하려고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희망의 방향으로만 생각하는 내가 이상하기도 하다. 그런데 그냥 이게 나인가 보다 싶어서, 앞으로도 이렇게 작업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니까 나한테는, 평화로운 모습을 골라서 세상에 보여주고 그걸 주장하는 게 오히려 나의 삐딱함인 것 같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거짓말하지 않는 작가이고 싶고. 희망적인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거짓말하고 싶지는 않다는 거다. 이번에 책 내면서도 그 부분을 많이 고민했고

 

하고 싶은 얘기가 많지만, 뜬금없이 이런 이야기로 마무리해보고 싶다. 사실 뜬금없는 질문이라고 준비했지만, 뜬금없지 않아져 버렸다. 우리가 오늘 정치 얘기를 너무 많이 해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냐면, 곧 있으면 대선이지 않나. 누가 당선되든 변화가 찾아올 텐데, 바뀌는 정치 환경이 당신의 어떤 문제를 해결해주면 좋겠나

 

예상치 못한 질문이긴 하다.. 음.. 나는 근데 기본적으로 대한민국 정치를 믿지 않는다. 대한민국 정치뿐만 아니라, 의회 제도가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게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정치를 공부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 사람들이 나에게 해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좋다. 그러면 질문의 방향을 조금 틀어서, 나는 해줄 수 있는 게 없을 순 있지만, 어떤 끔찍한 일이 안 일어나게 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2008년부터의 10년은 정말 다시 생각하기도 힘든 일이 많이 일어났으니까

 

글쎄. 나는 터지는 일들을 보면, 수십 수백 년간 쌓인 문제가 터지고 있는 것 같아서.. 음.. 바뀌었으면 하는 게 있다면 교육제도가 좀 바뀌었으면 좋겠다. 애들 고생도 좀 덜 시키고, 공부도 덜 시키면 좋겠다. 어린아이들부터 공부를 덜 시켜야 세상이 좀 밝아지지 않을까

 

내가 묻고 싶은 건 끝났다. 마지막으로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

 

음, 우선 어디서도 듣지 못한 질문들, 재밌었다. 내가 얘기를 잘했는지는 모르겠고. 내가 지금 너무 과도기에 있어서, 항상 물음표를 달고 산다. 어디 가서 내 이야기를 하는 게 힘든 시기이기도 하고. 오늘 오면서도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게 될까’ 생각했는데, 나도 이야기하면서 내 생각 정리가 좀 됐다. 재밌었다



그림/사진 I 반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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