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02월 03일의 대화
'권혁인'을 처음 만난 건, 2015년 여름, <SJ 쿤스트할레>에서 진행했던 <VISLA>의 <서울 헤리티지> 사진전에서였다. <서울 헤리티지>는 당시 <VISLA>가 했던 설명으론 '서울의 길거리 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어온 사람들이 필름 카메라로 기록한 서울의 모습'을 보여주는 전시였는데, 이 전시를 보기 위해 <SJ 쿤스트할레>가 있는 도산공원 근처로 가던 나는 쭈뼛거리며 길을 걸었었다. 당시는 내가 <VISLA>를 본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는데, 그들의 콘텐츠에 늘 매력을 느꼈지만, <VISLA>에서 풍기는 분위기와 이야기는 나를 핸드폰 화면 앞으로 더욱 바짝 당겼지만, 그럼에도 스트릿, 서브 컬쳐 등의 단어에 난 여전히 겉돈다고 느껴왔던 터라, <서울 헤리티지> 전시를 찾아가던 나의 마음은, 마치 늘 겉돌던 아이가 신나게 노는 아이들 무리로 섞이기 위해선 품어야만 하는 긴장한 용기 같은 것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걸은 지 몇 분 뒤, 난 조심스럽게 전시장에 도착했고, 시커먼 옷을 입은 세 사람이 웃으며 전시에 관한 안내를 설명해줬을 때야, 비로소 나는 조금은 편해진 마음으로 벽에 걸린 사진을 바라볼 수 있었다. 전시 관람엔 한 시간 정도가 걸렸다. 그리고 전시를 다 본 사람에겐 전시된 사진 중 하나를 골라 복사본으로 가져갈 수 있는 혜택이 주어졌는데, 전시장에서 내 시선을 빼앗은 사진은 두 장이었기에, 난 다시 한번 용기를 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시 내가 사진을 한 장 더 얻을 수 있겠냐고. 그때 양옆에 선 둘은 모두 가운데 선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가운데 선 그는 시장 만두집 사장님 같은 미소를 지으며, 그냥 가져가라는 말과 함께, 내가 고른 두 장의 사진을 돌돌 말아 포장해주었다. 그리고 그 포스터를 내게 건네는 그의 얼굴에서 읽혔던 황홀함을, 마음속에서 상상하던 일을 도모한 뒤, 성공적인 실체로 만들어 낸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그 황홀함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후 7년의 세월이 지났고, <VISLA>는 여전히, 더욱 활발하게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중이다. 그리고 '권혁인'은 한 권의 책을 발표했다
최근 사무실이 이사한 것으로 알고 있다. 바뀐 위치와 공간은 마음에 드나
집과 사무실 모두 이태원 앤틱 거리 쪽으로 옮겼다. 집 이사 계획은 없었는데 룸메이트가 자기 브랜드를 시작하면서 사무실 겸용으로 쓸 더 큰 공간이 필요하다고 하더라. 그래서 급작스레 나도 집을 알아보고 이왕 가는 거 사무실 근처로 가야지 싶었다. 이전 사무실은 믹스맥 코리아 분들과 함께 쓰던 곳인데 건물주가 바뀌면서 계약 기간이 지나면 관리비를 대폭 올릴 계획이라고 했다. 사실상 나가달라는 말이지. 이사 비용이라도 챙기는 게 좋을 거 같아 이태원 상권 쪽을 알아보고 지금 사무실 자리를 계약했다. 코로나 이후 이태원 쪽 빈 상가도 많고 월세도 많이 내려간 터라 칙칙한 사무실 공간보다는 재밌는 상가 건물을 꾸미는 것이 더 매력적이었다. 지금 자리 잡은 공간은 이전에 자메이칸 레스토랑으로 운영하던 곳이다. 통유리로 된 창도 많아 볕도 잘 들고 여러모로 마음에 든다.
이사를 한다는 건 정말 큰 일이다. 게다가 좁은 땅에, 비싼 값을 지불해야 하는 서울에서의 이사란, 계속해서 셈을 하게 만드니까. 위치와 크기, 앞으로의 계획 등 여러 가지 것들을 고려했을 텐데 어떤 고민이 있었나
지하는 일단 피하자고 했다. 한남동 사무실 이전엔 지하의 창고 같은 사무실에서 다닥다닥 붙어 지내는 생활을 2년 반 정도 했었기 때문에, 나를 비롯한 멤버들 모두가 지하만 아니면 좋겠다, 그리고 계단이 너무 많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도를 생각했다. 다른 조건은 별 게 없었다. 우리가 과거에 겪었던 것 중에 가장 괴로웠던 것들만 피하자라는 생각으로 찾았다. 좀 더 싸게 가려면 을지로도 있고 그랬었는데, 이태원 여기가 교통이 정말 좋으니까. 어디든 가기 쉽고. 그렇게 선택했다
이태원이란 동네에서 지낸 지 꽤 오래되지 않았나. 난 이태원이 참 익숙해지지 않더라. 엔틱 거리 지나 올라가면 나오는 우사단에서 1년 정도 일한 적이 있음에도, 뭔가 늘 낯설고 움츠러드는 게 있다. 좀 쪼는 거지 내가, 이태원에 오면. 근데 이게 무섭고 두려워서라기보단, 낯선 것이 주는 긴장인 것 같다. 당신의 이태원은 어떤가
너무 오래전부터 이태원에 있었기 때문에, 내겐 너무 자연스러워져서, 다른 동네에 비해 특출한 매력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도 서울 사람이 아니지만, 내가 서울에 처음 나왔을 때 온 동네가 이태원이라서, 나에게는 가장 익숙한 동네다. 뭐 표면적으로 눈에 띄는 건 외국인이 많다는 거. 내가 사는 건물 지하에도 외국인이 살고, 외국인이 하는 식당도 많고, 대사관도 많으니까. 예전엔 미군 기지도 있었고. 한국인만 있는 게 아니라 그들의 터전이기도 하니까, 그런 점들이 외관상으로 다르게 느껴진다. 마트에 갔는데 외국인이 뭔가를 고르고 있고, 나도 고르고 있고, 술 한잔하러 가면 외국인들이 삼겹살 구워 먹고, 그런 풍경이 재밌지. 또 여기 옆엔 보광 초등학교가 있는데, 외국인 꼬맹이들이 가방 메고 막 다닌다. 그런 게 재밌다. 다른 동네 사람들에겐 다른 풍경일 수도 있겠다. 위화감이 든달까? 그런데 나에겐 그게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외국인에 대한 부담감도 없어서 그런지.. 좋다
처음 왔을 때의 이태원과 지금의 이태원을 생각하면 다른 게 있나? 내가 이태원에 처음 왔을 때 이곳에서 오랫동안 산 사람들은 이태원도 이젠 상업화가 너무 많이 돼서 옛날 같지 않다는 얘기를 자주 하시더라. 당신도 그런 차이를 느끼나
그런 예전을 얘기하려면 2000년대 초반, 90년대까지 가야 할 것 같다. 10년 전 이태원과 지금의 이태원은 크게 다르지 않은 거 같다. 비슷한 거 같은데? 예전에 취재하다가 90년대부터 이태원에서 계신 분들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확실히 험악한 분위기가 있었다 하긴 하더라고. 살인 사건도 있었고, 클럽들 주변에서 약물을 하는 외국인들도 많았고. 또 한강진 쪽이 지금은 번화했지만, 예전엔 일본인들이 많이 드나들던 동네였다고 들었다. 그들을 상대하던 업소들도 제법 있었다고 하더라. 그런데 내가 이태원에 드나들기 시작했을 땐.. 뭐 그런 건 분명히 있었지. 고등학교 때 옷 사러 오면 무서운 형들이 낮에 데려다가 ‘일단 봐봐’ 하면서 창고 같은데 데려가고, ‘다 진짜야, 10만 원이야. 뭐야 5만 원 밖에 없어? 근데 왜 진작 얘기 안 했어?’ 하는 그런 건 있었는데, 그건 뭐 동대문도 똑같았으니까.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과거의 이태원에 대해 얘기할 만큼 내가 과거의 이태원을 잘 알진 못한다
알겠다. 그렇다면.. 이태원의 음식 얘기를 빼놓을 순 없겠지. 이번에 출판한 <Notes of a chair and a lamp stand>를 보면 먹는 것에 관심도 많아 보이고, 식사에 관한 마음이 느껴진다
동네에 오래 터를 잡고 있는 식당에 가는 걸 좋아한다. 딱히 맛집을 찾아다니거나 줄 서는 식당에 가는 걸 싫어해서 그저 집 근처에서 갈 만한 식당 또는 다른 지역에 들렀을 때 그 동네에 잘 묻는 곳에 간다. 이태원에는 유독 케밥 가게가 많다. 보광동에는 매력적인 한식당이 많은데 가끔 한 번씩 꼭 들르는 곤드레 쌈밥집을 추천하고 싶다. 미각이 둔한 편이라 그냥 내 입에만 맞으면 된다
중국집 얘기가 없는 게 의아하다. 책에 중국집이 자주 등장하니까
책에 나온 중국집 얘기는 친구가 좋아해서 자주 나온 거고, 나는 뭐 그렇게 중국집을 찾아다니는 편이 아니다
내가 중국집에 가 요리 몇 가지 시켜 놓고 앉아 있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유감이다. 본격적으로 얘기를 좀 시작해보자. 최근에 출판한 <Notes of a chair and a lamp stand>를 너무 재밌게 읽어서 책 이야기를 먼저 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VISLA>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순 없을 것 같다. 그리고 그 전에, <VISLA> 이전의 당신 이야기를 좀 들어보고 싶다. <VISLA> 이전엔 직장 생활을 전혀 안 한 건가
직장 생활 경험은 전혀 없다. 휴학했을 때 대학 선배가 운영하던 브랜드에서 반년? 9개월? 정도 아르바이트로 일한 적은 있다. 가방 브랜드였는데, 뭐 가방 포장하고, 배송 보내는 일이 거의 전부였다. 약소하게 메일, 거래처 관리도 하고 그랬다. 이외에도 몇 가지 아르바이트 외에는 회사에 다녀본 적은 없다
전공은 뭔가
경영학과. 전역했더니 성적이 낮다는 이유로 회계학과로 옮겨졌다. 이상한 학부 시스템 탓에 우리 학번 때 동기 몇이 불합리한 처우를 받았는데, 당시에는 딱히 따지지도 않고 그러려니 했다.
어찌됐든 <VISLA>를 경영하는 중이니, 전공을 살린 셈이 됐다
하하. 대학생활은 엉망이었다. 연달아 학사 경고를 받자 아버지가 군대에 보냈다. 전역하고 나서도 겨우 학점 채워서 졸업했다. 대학생활은 내겐 목적과 이유를 찾을 수 없던 10대 학창시절의 연장이었다
<VISLA> 안에서 당신의 활동을 보면 음악, 사진, 책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있어 보이는데, 이런 취향은 언제부터 생기기 시작했나
음악을 좋아하기 시작하면서 음악을 중심으로 파생돼 갔다. 문화라는 게 그렇잖아. 서로서로 영향을 주는 관계니까. 시작은 음악이었다. 형 영향을 받아서 초등학교 때부터 음악을 좋아했다. 형이 한국 음악을 잘 안 들었다. 나이 차가 좀 있는 형이 맨날 팝송 듣고 그랬는데, 괜히 멋있어 보이더라. 근데 형이 음악 듣고 있을 때 방에 들어오는 걸 싫어했다. 그래도 굳이 몰래 들어갔다. ‘조금만 있다 갈게.. 근데 이거 무슨 노래야? 이건 뭐야?’ 하면서.. 그럼 형은 막 나가라 그러고.. 그때 한참 들었던 게 ‘R.Kelly', 'Naughty By Nature' 'Michael Jackson' 그랬던 거 같다. 그리고 형이 마루에서 <MTV> 보고 있으면 옆에서 따라 보는 거다. 어느 날, 보고 있는데, 'Wu-Tang Clan' 뮤직비디오가 나왔다. 가면 쓰고 이렇게 하는. 그 곡이 ’Da Mystery Of Chessboxin'라는 곡인데, 그거 보고 충격을 받았다. ‘뭐야 저거’ 하면서. 초등학교 6학년 땐가 그랬는데, 그거 보고 분당 서현역에 있는 레코드샵에 갔다. 당시 서현역 앞엔 <라르고>랑 <소리마을>이라고 레코드샵 두 개가 있었다. 둘 중 내가 좋아했던 건 아마 <라르고>였던 거 같다. 작은 곳을 더 좋아했다. 거기 가서 내가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이런 거 이런 걸 봤다고 했더니, 아저씨가 힙합 같은데? 하시면서 몇 개 추천해주셨다. 거기서 ‘Wu-Tang Clan’ 테이프를 찾은 거다, 가면 쓰고 있는. 아저씨가 ‘초등학생이 이런 거 사면 안 되는데, 그래도 음악이니까 들어봐’ 하면서 주시더라. 그 뒤에 중학교 올라가면서 ‘드렁큰 타이거’, ‘2MC’ 이런 거 샀고. 그때부터 힙합에 꽂혔다. 그게 취향의 출발점이다. 보통 문화는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경우가 많지 않나, 근데 그때 처음으로 직접 찾아가면서 들었다는 얘기다. <VISLA> 하면서 취향의 폭이 더 넓어졌고. 예전엔 힙합, 자전거, 스케이트보드 등에 치중돼 있었다면, <VISLA>를 더 넓게 키우고 싶으니까, 책도 <VISLA> 하면서 읽게 됐다. 그전까진 문학을 전혀 몰랐다
내가 <VISLA>를 독자로 봐온 것만 해도 햇수로 벌써 7년이다. <VISLA>는 어느새 10년이 다 되어가고. 그 시간을 크로키 하듯 확 잡아채면 어떤 말들이 떠다니나
친구들과 열심히 노는 일과 비슷하다. 물론 지금은 좀 더 체계적인 회사의 형태를 갖추는 단계지만, <VISLA>의 시간을 돌이켜봤을 땐, 마치 친구들과 계획을 짜고 열심히 노는 일처럼 느껴진다. 그런 거 있지 않나. 그냥 놀면 기억에 잘 안 남는다. 근데 친구들이랑 계획을 짜고, 여기 가서 뭐 하고, 빡세게 한 번 놀아보자 계획을 짜는 순간, 그 놀이에 진지해지는 거. <VISLA>의 시간은 그런 경험과 비슷하다
'VISLA'를 검색하면 ‘비즐라는 헝가리 원산으로 헝가리안 포인터라고도 한다.’는 설명이 따라붙는 개가 등장하는데, 이 개에서 영감을 받아 지은 이름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든다. 이름은 어떻게 정하게 됐나
친구들끼리 쓰던 말이다. Visual Slave의 줄임말인데, 이걸 보드 타는 친구, DJ하는 친구, 그런 우리 친구들끼리 Visual Slave란 말을 썼다. 그걸 장민이가 줄여서 'VISLA'라고 쓰고 싶다 했고, ‘뭐, 그래. 써.’ 된 거다
<VISLA>가 어떻게 시작됐는지에 대한 얘기를 들어보자. <Notes of a chair and a lamp stand>를 보며 유추한 건, 마음 맞는 친구들과 함께, 젊은 치기로, 좋은 의미로 얼렁뚱땅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때가 2012년 정도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인, 방금 말한 장민이가, 부모님의 이민으로 미국에 가 있었는데, 그 무렵 나도 대학교 4학년이었고, 장민이도 졸업할 시기였다. 그때 장민이가 웹진 같은 걸 만들 거라고 하더라. 그즈음이 웹진이 많이 생기던 시기였다. 종이 잡지를 벗어나서 웹으로 미디어를 구현해보자며 산발적으로 나오던 때였다. 음악, 정치 등등. 종이 잡지를 만들 돈은 당연히 없으니, 자기가 이런 걸 해볼 생각이라고 장민이가 얘기했다. 그래서 ‘그러냐, 난 관심은 없다,’ 그랬고, 장민이는 ‘근데 뭐 기사라던지, 콘텐츠를 만들어 볼 생각도 없냐’ 물어서 ‘그건 있다’고 했다. 그렇게 한 두 개의 글을 기고했다. 하지만 장민이가 졸업을 앞두고 바빠졌고, 그러면서 아무것도 안 올라오는 소강상태가 찾아왔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다. 그러다 2013년으로 넘어가는 기점에, 내가 뭐에 홀렸는지, 별로 관심도 없던 이것에 꽂힌 거다. <Wax Poetics>, <Frank151> 같은, 내가 보고 싶어 했던 잡지가 원래 있었는데, 난 영어를 못 하거든. 그런 잡지를 구하기도 쉽지 않았고, 웹으로 봐도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더라. 지금이야 구글 번역되지만, 그때는 그런 것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하 시발 그냥 만들어버리면 어떨까’ 생각했고, 장민이가 이미 하던 게 있으니, ‘야 한 번 해보자’ 이렇게 됐다. 2012년 말, 2013년 초 이때 네이트온으로 계속 얘기를 했다. 2013년 초부터 난 한국에서 기사를 쓰기 시작했고, 장민이는 미국에서. 둘 다 좀 더 진지하게 된 거다. 둘이니까 힘이 나는 부분도 있었지. 그때부터 디자인은 진우 형이 했다. 그때 형이 로고도 예쁘게 만들어주고, 디자인 부분을 가미해주면서 셋이 조금씩 조금씩 하게 됐다.
좋다. 그렇게 셋이 조금씩 조금씩 하게 돼서, 계속해 달라
그렇게 하다가 그 해였나 다음 해였나, 장민이가 한국에 왔다. 장민이가 구한 자취방에서 맨날 모여서 회의하고, 나름의 규칙도 정했다. ‘매일 기사 하나씩 써야 해’하는 식의. 돈은 없으니까 알바도 했고. 그랬던 거 같다. 그러면서 주변에 글 쓰는 애들 좀 찾아보자 하게 됐고, 그때 비보이 하던 친구 윤범이가 들어왔다. 또 한 명이 우리가 한 걸 보고 함께하고 싶다는 메일을 보냈는데, 그게 지금도 있는 오욱석 에디터. 말도 안 되는, 그 후로 3년간은 돈 한 푼도 안 됐는데 그냥 했다. 알바한 돈으로 밥 사 먹고, 커피 사 먹고 하면서. 그 후 정부지원금 같은 거 신청도 해보고, 사업자를 내고, 진짜 얼렁뚱땅 갑자기 사업이 됐다. 장민이가 추진력이 좋았다. 나는 대학교를 졸업하는 과정에서 부모님의 기대도 있었기 때문에 이력서도 좀 넣었었고, 알바도 하고 있으니 <VISLA>가 내 사업처럼 느껴지진 않던 때였다. 그런데 장민이는 이거에만 몰두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장민이가 사업자를 내고, 뭘 하고, 이러면서 조금씩 조금씩 브랜드의 모습이 만들어졌다. 나는 봄을 지나는 시기에 이력서가 다 떨어지고 하면서 ‘취업 안 할래’ 이렇게 된 거고. 부모님은 엄청 싫어하셨지만. 점차 주변에 <VISLA>에 관심 있는 애들이 contributor editor가 돼줬고, 그 친구들도 조금씩 조금씩 같이 보고, 그렇게 3년이 지나면서 구색이 점차 만들어졌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 3년이 딱 지났을 때가 처음 내가 <VISLA>를 만난 시기이겠다
그렇지. 그때 친한 형님들이 하시던 회사에서 사무실도 공짜로 내줬다. 열심히 해서 키운 뒤에 자기들이랑 같이 비즈니스 하자면서. 고맙지. 정부지원금도 타먹어가면서 그렇게 본격적으로 하게 됐다. 벌이는 하나도 없었지만, 용돈은 따로 알바하면서 생활비 채우고, 그렇게 3년을 보냈다
아까 이야기 도중 갑작스레 ‘박진우’가 등장했는데, 그는 어떻게 합류하게 된 건가
<VISLA>를 시작하기도 전의 일인데, <360 Sounds> 파티를 다니던 내 또래 친구들이 있었다. 처음엔 물론 다 몰랐지만. <360 Sounds>의 형들의 영향을 받아 내가 친구들과 함께 디제잉을 연습해 파티를 열곤 했는데, 그때 자전거나 보드 타는 친구들, 영상이나 디자인을 배우는 친구들이 모이면서 친해졌다. 진우 형은 그 때 멤버 중 한 명이었고. 노원, 여의도 같은 서울 친구들이 분당까지 놀러왔고, 같이 놀면서 친해졌다
현재 <VISLA>의 멤버에 관한 소개도 부탁한다. 그 인물들은 <Notes of a chair and a lamp stand>에 등장하기도 하니까. 소설의 등장인물 소개하듯 소개해줄 수 있을까. 당신 식대로
최장민은 오랜 친구이자 <VISLA>의 파트너다. 그는 팀에서 가장 밝은 성격, 굳은 심지를 지니고 있다. 그것이 우리에게 언제나 긍정적이고 좋은 결과를 가져다준다. 오욱석은 다른 친구들이 각자의 상상을 펼치며 자칫 산으로 갈 때쯤, 현실적인 절충안으로 중심을 잡는다. 언제나 겸손하고, 묵묵히 자기 일을 해내는 친구다. 많은 이들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애쓰는 지금 시대에 그는 뒤에서 조용히 많은 일들을 처리한다. 박진우는 섬세한 시선으로 사건이나 상황을 바라본다. 그래픽 디자이너라는 직업이 단순히 아이디어를 시각적으로 구현해내는 것 이상으로 어떤 기준을 제시할 수 있는 포지션이라는 걸 형을 통해 알았다. 머릿속이 온통 음악이라, 음악과 관련된 일을 하는 것 외에는 달리 떠오르는 게 없는 친구가 황선웅이다. 언젠가 그 능력이 한국의 음악 풍토 어딘가에서 빛을 발하리라 생각한다. 한지은은 어느 시점에서부터 스스로 무언가 결심한 것처럼 느껴지더니, 그 누구보다 사려 깊고 매력적으로 일을 해내고 있다. <VISLA>가 더 성장하고 이 안에서 세대교체라는 것이 이루어진다면 가장 선두에 설 동료가 아닐까. 에이전시 멤버인 박정현과 김혜수는 공통적인 면이 있다. 그들의 경험과 경력은 상이하지만, 굉장히 프로페셔널하다는 점에서, 그 기준을 높게 유지하려 한다는 점에서 나 역시 배우고 있다. 체계적이고, 정확하게 일하는 사람들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만든 공간, <QUEST>의 보스, ‘시나힐(Sinahill)’을 소개한다. 디제이로서도, 바텐더로서도 그녀는 우리가 찾던 최적의 멤버다. 하이 퀄리티, 하이 레벨!
본인은 왜 빼먹나. 본인에 대한 얘기도 해달라
어디 물 새면 물 틀어막고, 먼지 떨어져 있으면 먼지 줍고, 뭐 그런 역할이지 않을까. 이 배가 무너지지 않게, 수리하고, 메꾸고, 뭐 그런 역할이겠지
내가 처음 <VISLA>를 본 건 페이스북 스폰서 광고를 통해 <VISLA>의 로고가 계속해서 내 피드에 노출됐기 때문이다. 로고가 맘에 들어서 사이트에 접속했다가, 재미난 글이 많아 심취해서 뒤적거렸다. 그리고 그때의 <VISLA>엔 당신이 ‘켄드릭 라마’의 <Section 80>에 대해 책에 적은 말 ‘프로가 되기 직전의 설익은 그 느낌’이 가득했다. 다르게 말하면 당신들이 다루고 있는 문화가 너무 좋아서, 신나게 <VISLA>를 채워나가는 느낌이 독자인 나에게도 생생히 전달됐다는 얘기다. 당시에 재미난 프로젝트도 많았다. <서울 헤리티지> 전시나, <스티커 전국체전>은 특히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이런 프로젝트를 통해 <VISLA>의 위치도 보다 위로 올랐다고 생각한다. 위로 올랐다는 건, 그전까지는 서브 컬쳐의 대표적인 팬덤 정도로 느껴지던 <VISLA>가 하나의 서브 컬쳐로 자리매김했다고 느꼈다는 얘기다
그때가 많이 그리울 때가 있지. 지금은 간혹 ‘뭘 하고 싶은지’가 아니라, ‘얼마를 벌어야 무너지지 않을지’로 목표가 잡힐 때도 있으니까. 근데 그때는 어차피 돈 못 버니까, 뭐 할래? 뭐가 재밌지? 이게 그냥 모든 회의의 끝과 시작이었다. 그런 에너지가 그립다. 지금은 시간을 쪼개서 아이디어 회의를 해야 하는 상황이다. 가끔은 나 스스로도 재미난 이야기를 쏟아 낼 준비가 안 돼 있다고 느낄 때가 있다. 마음이 딴 데 가 있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딴식으로 전시를 했지? 싶을 정도로 조악했는데, 그 순간에 팍! 하고 튀는.. 뭐랄까.. 물론 우리가 만약 그걸 좀 더 멋있게 잘했다면 굉장히 매력적인 전시가 될 수 있지도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서울 헤리티지> 같은 일은 순간의 스파크가 튀어서 하는 일이거든. 그런 일은 잘되든 못되든 누군가에겐 사랑을 받는 일이 되더라. 근데 억지로 짜내서 하는 일은, 더 많은 관객을 모객할 순 있어도, 그만큼 매력적으로 보이진 않을 가능성도 있는 거니까. <스티커 전국체전>도 마찬가지다. 스티커 모으는 사람 많으니까, 그냥 전국체전 하자 하는 그런 스파크. 지금은 그런 스파크들이 어떤 식으로 나왔는지를 생각하며 다시 돌아가야 할 때인 거 같다. 여유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는데, 지금은 좀 더 생계에 가까워지다 보니, 늘어져서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는 거지. 놀지를 못하니까 아이디어도 안 나오고. 아이디어가 너무 진지하다. 진짜 프로젝트 같고. 나는 그럼 안 된다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너무 프로젝트 같이 시작해버리면, 물론 그게 재밌는 게 될 수도 있지만, 앞서 말한 그런 순간이 분명 필요하다. 올해는 계속 그런 시간을 다시 만들어야 할 것 같다고 멤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편으론 그 시절의 <VISLA>가 그립기도 하다. 이건 뭐, 올드팬이 가지게 되는 응원 속 탄식 같은 것일 거다. 스파크 얘기를 하니, 당신의 분당 시절 파티 얘기가 다시 떠오르기도 하고. 요즘엔 채널이 많아지고, 대부분이 온라인으로 진행되다 보니, 가끔은 이게 다 뭔가 싶으면서 아무것도 실체가 없다고 느낄 때가 많다. 디지털의 정확성만큼이나 부정확성이 주는 재미가 없는 거지
그렇지, SNS 팔로워 많은 사람이야 이제 너무 많잖아. 그게 또 안 중요한 거 같진 않은데, 뭐 예를 들어 <The Book Society> 같은 곳이 있지 않나. 그런 곳이 팔로워 10만이 안 된다고 해서 영향력이 없는 건 아니란 거지. 책을 좋아하고, 예술 분야에 좀 더 깊게 정진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찾는 서점이니까. 그런 것처럼 오프라인에서의 힘은 온라인과는 다른 구석이 있는 거 같다
지금 우리가 나누는 말들이 <VISLA>가 종이로도 잡지를 조금씩 내기 시작한 것과도 연관이 있을까
손에 쥐고 만질 수 있다는 게 익숙하고 기분 좋은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바이닐 레코드나 책의 매력은 굳이 내가 말하지 않아도 될 거 같다. 다만 디지털과 아날로그 둘 중 한 쪽을 맹신하지도 않는다. 둘 다 지금에 와서는 선택할 수 있는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얘기를 듣다 보니 불쑥 궁금해지는 게 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다 했고, 새로운 것을 향한 지금의 고민도 가볍지 않아 보이는데, 어찌 됐든 <VISLA>를 10년 가까이 해오지 않았나. 그렇다면 그때로 돌아가는 것,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하는 의문도 드는 거다. 만약 그게 불가능하다고 판단되고, 아까 소개했던 <VISLA>의 스타팅 멤버보다 잘 할 거 같은 사람이 나타났을 때, 그들에게 <VISLA>를 넘겨줄 생각도 있나
물론이다. 언제나 매력적인 동료들로 들끓는 사무실을 상상한다. 그런 사람들이 <VISLA>를 운영하는 모습을 보는 일 또한 즐거울 거다. 그렇게 되면 난 또 다른 걸 하겠지.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어쨌든 난 계속 뭔가를 하고 싶거든
<VISLA>가 몸집을 키우기 시작했다고 느낀 게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약 3~4년 전부터 캠페인의 덩어리도 커지고, 여러 브랜드와 하는 협업이 눈에 띄더라. 이건 <VISLA>가 먼저 방향성을 가지고 브랜드에 제안한 것인가, 아니면 그동안 쌓인 <VISLA>의 콘텐츠를 보고 브랜드에서 다가오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나
자연스럽기도 했고, 우리가 스스로 선택한 방향이기도 하다. 브랜드에서 캠페인 작업이 좀 들어왔을 때, 번뜩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점점 더 브랜드 일이 많아지면 매거진과 에이전시 일이 섞이게 될 테니 미리 대비를 좀 해야지 싶었다. 그래서 몇 명 되지도 않는 팀이지만, 그때부터 매거진과 에이전시를 분리해서 나아가기로 했다. 그렇게 3년 뒤의 모습을 공유했다. 당시 5~6명이서 굳이 그런 구분이 중요하겠냐만, 이 생각을 공유한 것만으로도 우리가 일을 대하는 방식은 달라졌거든. 지금은 내가 매거진을, 장민이가 에이전시를 리드하고 있다
지금은 그 3년의 계획 중 어디쯤 와 있나
계획이 얼추 다 맞아 떨어졌다고 볼 수 있지. 이제 또 새로운 계획을 준비할 시기다
올드팬의 응원 속 탄식을 하나 더 말해보자면 내가 좋아하던 글을 보다 자주 볼 수 없게 된 것에 대한 아쉬움이다. 난 특히 당신과 오욱석의 글을 좋아했는데, 요즘도 물론 읽어볼 순 있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예전만큼 재밌진 않더라. 그건 아마 글에만 집중할 수 있는 여력과도 관련이 있을 텐데, <VISLA>의 몸집이 커지면서 아무래도 글에 집중할 수 있는 여력이 줄긴 했을 것 같다. 그런 글쓰기에 대한 아쉬움이 이번 <Notes of a chair and a lamp stand>로 묶여 나온 게 아닐까 짐작했다. 책은 정말 좋더라. 오랜만에 읽은, 내가 좋아하는 ‘권혁인’의 글이라 속이 다 시원했다. 책으로 묶을 계획은 어떻게 시작됐나
애초에 나는 글쓰기에 뜻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 수준까지 올려야한다고 느꼈을 뿐이다. 우리가 <VISLA>를 시작했을 땐 모든 능력과 경험이 부족했으니까. 따라서 글쓰기의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이 책을 쓴 건 아니고.. 언젠가부터 난, 개인적인 시간이 별로 없었다. <VISLA>에 완전히 몰두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밤늦게 집에 들어가면 샤워를 하듯 나를 씻겨주는 시간이 필요하다 느끼곤 했는데, 그게 단순히 누워서 잠자는 걸로는 해소가 안 된 거지. 그러다 마침 코로나가 터졌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일기를 쓰고 있더라. 두세 달 정도 썼을 때 ‘이거 묶어서 내봐도 되겠다, 그럼 내 친구들은 재밌게 읽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짬 날 때마다 조금씩 쓰던 어느 날, 11월 즈음이었나. 잠이 안 와서 노트북을 열고 가만히 앉아 있다가 떠오르는 말들을 옮겼는데, 그때 이 글이 마지막이겠구나 하고 느꼈다. 시작도, 끝나는 순간도 우연이었다. 사실 그게 내 성격이다. 굉장히 즉흥적인 사람이라거든. 물론 <VISLA>에서 난 항상 계획하고, 변수를 따진다.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우리처럼 작은 회사는 무너질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건 내 개인적인 즐거움이기에 특별히 머리를 쓰면서 하고 싶지 않았다. 창작물이라고 하기엔 거창하고, 충동적으로 뱉은 가래 같은 게 아닐까 싶다
<Notes of a chair and a lamp stand>란 제목은 글을 썼던 노트와 책에 등장하는 ‘잎새’가 사준, 책상이 책상이 되게 만든 의자, 그리고 새벽 시간에 켜져 있었을 램프, 즉 글을 쓰는 그 순간의 풍경에서 가져온 거겠지. 그 풍경을 좀 소개해줄 수 있나
누군가에게는 쓰레기장으로 느껴질 만큼 더럽고 정리되지 않은 혼란 그 자체... 가끔은 나조차도 숨이 막히는 그런 방에서 일기를 썼다. 물론 나는 그 방과 시간을 사랑했으니 그렇게 글을 쓸 수 있었다
얘기를 들으면서도 느낀 거고, 책을 읽을 때도 생각한 건데, ‘권혁인’은 어떤 결정을 내린 뒤, 밀고 나가는 사람이라기보단, 계속해서 고민하고, 이쪽 저쪽을 오가는 사람인 거 같다. 책 속엔 그 이쪽, 저쪽이 크게 두 종류 정도로 구분되더라. 첫 번째는 나른함과 치열함이었다
오래 방황했던 20대를 매듭짓고 삶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도 다 <VISLA> 덕분이다. 내게는 일이기도 하지만, 오롯이 내 삶과 고민이 들어간 분신 같기도 하다. 좀 거창한가? 그래서 치열하게 아등바등하는 거다. 일을 너무 감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안 되지만, 이곳에서 동료들을 통해 인간적으로도 조금이나마 성숙해진 것 같고, 돈 버는 어려움도 알았다. 또한 회사 경험, 멘토도 없던 내게 <VISLA>는 그 자체로 선생이었다. 원체 게으른 내가 스스로를 채찍질할 수 있는 건 이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아니었다면 나는 한적한 동네의 도서관 사서로 큰 욕심 없이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삶을 바랬으니까
좋다. 두 번째는 환멸과 희망. 이건 당신이 서울이란 도시에 가지는 감정과도 닿아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이태원, 한강진, 보광동 등등이 책에 나오는데, 당신은 이곳들을 지긋지긋해하기도 하면서, 한 편으로는 너무 좋아하고, 계속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인간은 너무 짧은 시간 안에 소멸하는 존재고, 그 잠시를 아등바등 하다 간다. 삶을 낙관할 필요도, 죽음을 비관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그 삶의 본질을 깨우친 기분이 좀 든다고 해서 염세적인 태도로 일관한다는 것도 너무 구리다는 거지. 그냥 농담도 던져가면서 걸어가는 거다. 산다는 건 진흙 속에서 발버둥 치는 일이다. 인간의 한계를 인식하고 나서도 끈질기게 명줄 붙드는 몸부림이 가장 인간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필연적인 삶의 비극을 그저 받아들이지 않고, 어떻게든 운명이든 뭐시기든 간에 그것에 한 번 저항해보려고 움직이는 인간에게서는 어떤 숭고함마저 느껴지니까
또 책 속 당신의 글 곳곳에 서려 있다고 느낀 또 다른 하나는 죽음이다. 죽음이 책 전반에 짙게 깔려 있더라. 방금 당신이 해준 얘기는 나도 평소에 굉장히 많이 하는 생각이다. 하지만 나는 죽음에 관한 생각은 또 별로 안 하는 편이어서,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묻고 싶더라
시간을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은 곧 죽음을 인지하고 있다는 말과도 같다. 처음에는 시간과 죽음이 막연하게 두려웠다. 우주의 막연함 같은 것처럼. 그러나 지금은 생과 사가 이분법적으로 느껴지기보다는 마치 0과 1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처럼 느낀다. 그러다 몇십만 번 째 0에서 죽을 수도 있고, 또 살 수도 있는 거겠지. 기왕이면 좀 더 길게 삶을 끌어서 아직 경험하지 못한 무언가를 볼 수 있길 바란다
당신의 이쪽, 저쪽 중 가장 큰 단위가 생과 사라고 이해하겠다. 책 이야기를 계속해보자. 중간중간 가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당신 친구들이야 속사정을 다 알 테니 이런 이야기가 낯설지 않겠지만, <VISLA> 편집장 ‘권혁인’의 책이라 생각하고 산 다른 사람들은 조금 놀라기도 할 거 같다. <VISLA>에 등장하는 대다수의 브랜드는 비싼 값을 지불해야 구매할 수 있으니까. 그걸 보면 당연히 <VISLA>의 멤버들도 비싼 옷으로 잘 치장하고 다닐 거라 예상할 테고, 그러다 보면 가난과 <VISLA>를 묶어서 생각하지는 않게 되니까
외부의 시선에서 볼 때는 <VISLA>가 다루는 브랜드의 때깔을 보고 <VISLA>에서 일하는 사람을 동일시하는 경우가 있더라고. 당연히 다르다. 우리 모두 각자 월세를 지불하거나 부모님 집에서, 또는 전셋집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내가 아는 한 특별히 잘사는 집 자제분들은 없는 거 같은데? 하하. 나 또한 독립한 뒤로 돈 걱정을 달고 살았다. 다만 나는 사고 싶은 걸 못 산다고 해서 괴로움을 느끼는 성격은 아니라 나름 속 편하게 산 거 같기도 하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얘기일 수 있는데, 소위 스트릿이라고 부르는 문화, 서브컬쳐라고 부르는 것들이 최근 명품 브랜드들과 함께하는 경우가 많지 않나. 거리에서 자연스레 시작한 브랜드들이 거대 자본을 쥔 명품 브랜드와 손을 잡은 흐름인데, 이런 흐름은 어떻게 생각하나
‘Virgil Abloh’가 불을 확 지른 거 같은데, 그의 영향으로 서브컬처 브랜드들을 하이엔드 브랜드들이 포섭하고, 디렉터도 기존까지 그 세계 안에서 통용되지 않던 의외의 인물을 기용하고 있다. 스트릿 브랜드에서도 럭셔리를 오마주하거나 패러디하는 등 뭐 그런 움직임이 많지 않았나. 하이엔드 브랜드와 스트릿 브랜드, 또는 길거리 미술과 파인 아트, 디지털 밈과 캔버스. 이런 것들이 아주 반대되는 지점에 있는 거 같지만, 비슷한 속성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얼핏 보면 완전히 다른 세계에 있는 듯하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없는 걸 가지고 있고, 독보적인 영역에 자리하기에 자기 문화에 대한 자생력이 강하다. 그러니 서로 끌릴 수밖에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그 가장 돋보일 수 있는 하나라는 점이, 처음으로 스트릿 또는 서브컬처에 접근하려는 사람들에겐 장벽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흥미가 생겨 기웃거려 보더라도, 다가가서 섞이기엔 그들이 너무 멋진 거지. 이걸 섞이지 못한다고, 그저 구리다고 무시하기보단, 아무나, 쉽게, 자연스럽게 섞일 수 없다면, 그렇다면 그건 또 스트릿이나 서브컬처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문화인가에 대한 고민이 생긴다는 얘기다
글쎄. 하위문화의 속성이 결국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를 튕겨내는 일종의 ‘반항’에 근거하니 결국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장벽이 자연스레 형성된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도 매력을 느끼는 게 아닌가?
이제 막바지다. 우리가 오늘 얘기 나눈 주제들. 예술, 문화, 가난, 죽음, 도시 등등 이 모든 것들이 정치와 연관된 것 아니겠나. 마침 곧 대선이 있기도 한데, 정치와 대선을 생각하면 어떤 마음인가
30대 중반을 지나며 조금씩 신문을 통해 정치 이슈를 살핀다. 나이가 먹었다는 이유로 정치에 관심을 의무적으로 가져야 한다는 말은 아니고, 이래저래 살다 보니 결국 인간이 벌이는 모든 활동이 결국 정치와 연관되어 있다는 걸 느끼면서부터다. 누구에게 표를 던질까 하는 문제를 떠나서, 좀 더 적극적인 형태로 정치라는 거대한 개념에 참여할 방법은 무엇일지 고민한다
코로나 상황에 스트릿 문화를 통해 생활하던 사람들의 고통도 어마어마했으니까. 어떤 움직임이 나올지 기대가 된다. 자, 이제 마지막 질문이다. 책에 <VISLA>의 앞으로를 생각하며 우리의 역량을 점검해보게 된다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 역량을 정리해보면, 앞으로의 <VISLA> 그리고 ‘권혁인’은 어디로 향할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 우리를 통해 기억에 남는 경험과 영감을 얻었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는 이 문화라는 거대한 흐름 안에서 오랫동안 일하며 살아가고 싶다
사진 제공 ㅣ 권혁인
2022년 02월 03일의 대화
'권혁인'을 처음 만난 건, 2015년 여름, <SJ 쿤스트할레>에서 진행했던 <VISLA>의 <서울 헤리티지> 사진전에서였다. <서울 헤리티지>는 당시 <VISLA>가 했던 설명으론 '서울의 길거리 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어온 사람들이 필름 카메라로 기록한 서울의 모습'을 보여주는 전시였는데, 이 전시를 보기 위해 <SJ 쿤스트할레>가 있는 도산공원 근처로 가던 나는 쭈뼛거리며 길을 걸었었다. 당시는 내가 <VISLA>를 본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는데, 그들의 콘텐츠에 늘 매력을 느꼈지만, <VISLA>에서 풍기는 분위기와 이야기는 나를 핸드폰 화면 앞으로 더욱 바짝 당겼지만, 그럼에도 스트릿, 서브 컬쳐 등의 단어에 난 여전히 겉돈다고 느껴왔던 터라, <서울 헤리티지> 전시를 찾아가던 나의 마음은, 마치 늘 겉돌던 아이가 신나게 노는 아이들 무리로 섞이기 위해선 품어야만 하는 긴장한 용기 같은 것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걸은 지 몇 분 뒤, 난 조심스럽게 전시장에 도착했고, 시커먼 옷을 입은 세 사람이 웃으며 전시에 관한 안내를 설명해줬을 때야, 비로소 나는 조금은 편해진 마음으로 벽에 걸린 사진을 바라볼 수 있었다. 전시 관람엔 한 시간 정도가 걸렸다. 그리고 전시를 다 본 사람에겐 전시된 사진 중 하나를 골라 복사본으로 가져갈 수 있는 혜택이 주어졌는데, 전시장에서 내 시선을 빼앗은 사진은 두 장이었기에, 난 다시 한번 용기를 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시 내가 사진을 한 장 더 얻을 수 있겠냐고. 그때 양옆에 선 둘은 모두 가운데 선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가운데 선 그는 시장 만두집 사장님 같은 미소를 지으며, 그냥 가져가라는 말과 함께, 내가 고른 두 장의 사진을 돌돌 말아 포장해주었다. 그리고 그 포스터를 내게 건네는 그의 얼굴에서 읽혔던 황홀함을, 마음속에서 상상하던 일을 도모한 뒤, 성공적인 실체로 만들어 낸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그 황홀함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후 7년의 세월이 지났고, <VISLA>는 여전히, 더욱 활발하게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중이다. 그리고 '권혁인'은 한 권의 책을 발표했다
최근 사무실이 이사한 것으로 알고 있다. 바뀐 위치와 공간은 마음에 드나
집과 사무실 모두 이태원 앤틱 거리 쪽으로 옮겼다. 집 이사 계획은 없었는데 룸메이트가 자기 브랜드를 시작하면서 사무실 겸용으로 쓸 더 큰 공간이 필요하다고 하더라. 그래서 급작스레 나도 집을 알아보고 이왕 가는 거 사무실 근처로 가야지 싶었다. 이전 사무실은 믹스맥 코리아 분들과 함께 쓰던 곳인데 건물주가 바뀌면서 계약 기간이 지나면 관리비를 대폭 올릴 계획이라고 했다. 사실상 나가달라는 말이지. 이사 비용이라도 챙기는 게 좋을 거 같아 이태원 상권 쪽을 알아보고 지금 사무실 자리를 계약했다. 코로나 이후 이태원 쪽 빈 상가도 많고 월세도 많이 내려간 터라 칙칙한 사무실 공간보다는 재밌는 상가 건물을 꾸미는 것이 더 매력적이었다. 지금 자리 잡은 공간은 이전에 자메이칸 레스토랑으로 운영하던 곳이다. 통유리로 된 창도 많아 볕도 잘 들고 여러모로 마음에 든다.
이사를 한다는 건 정말 큰 일이다. 게다가 좁은 땅에, 비싼 값을 지불해야 하는 서울에서의 이사란, 계속해서 셈을 하게 만드니까. 위치와 크기, 앞으로의 계획 등 여러 가지 것들을 고려했을 텐데 어떤 고민이 있었나
지하는 일단 피하자고 했다. 한남동 사무실 이전엔 지하의 창고 같은 사무실에서 다닥다닥 붙어 지내는 생활을 2년 반 정도 했었기 때문에, 나를 비롯한 멤버들 모두가 지하만 아니면 좋겠다, 그리고 계단이 너무 많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도를 생각했다. 다른 조건은 별 게 없었다. 우리가 과거에 겪었던 것 중에 가장 괴로웠던 것들만 피하자라는 생각으로 찾았다. 좀 더 싸게 가려면 을지로도 있고 그랬었는데, 이태원 여기가 교통이 정말 좋으니까. 어디든 가기 쉽고. 그렇게 선택했다
이태원이란 동네에서 지낸 지 꽤 오래되지 않았나. 난 이태원이 참 익숙해지지 않더라. 엔틱 거리 지나 올라가면 나오는 우사단에서 1년 정도 일한 적이 있음에도, 뭔가 늘 낯설고 움츠러드는 게 있다. 좀 쪼는 거지 내가, 이태원에 오면. 근데 이게 무섭고 두려워서라기보단, 낯선 것이 주는 긴장인 것 같다. 당신의 이태원은 어떤가
너무 오래전부터 이태원에 있었기 때문에, 내겐 너무 자연스러워져서, 다른 동네에 비해 특출한 매력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도 서울 사람이 아니지만, 내가 서울에 처음 나왔을 때 온 동네가 이태원이라서, 나에게는 가장 익숙한 동네다. 뭐 표면적으로 눈에 띄는 건 외국인이 많다는 거. 내가 사는 건물 지하에도 외국인이 살고, 외국인이 하는 식당도 많고, 대사관도 많으니까. 예전엔 미군 기지도 있었고. 한국인만 있는 게 아니라 그들의 터전이기도 하니까, 그런 점들이 외관상으로 다르게 느껴진다. 마트에 갔는데 외국인이 뭔가를 고르고 있고, 나도 고르고 있고, 술 한잔하러 가면 외국인들이 삼겹살 구워 먹고, 그런 풍경이 재밌지. 또 여기 옆엔 보광 초등학교가 있는데, 외국인 꼬맹이들이 가방 메고 막 다닌다. 그런 게 재밌다. 다른 동네 사람들에겐 다른 풍경일 수도 있겠다. 위화감이 든달까? 그런데 나에겐 그게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외국인에 대한 부담감도 없어서 그런지.. 좋다
처음 왔을 때의 이태원과 지금의 이태원을 생각하면 다른 게 있나? 내가 이태원에 처음 왔을 때 이곳에서 오랫동안 산 사람들은 이태원도 이젠 상업화가 너무 많이 돼서 옛날 같지 않다는 얘기를 자주 하시더라. 당신도 그런 차이를 느끼나
그런 예전을 얘기하려면 2000년대 초반, 90년대까지 가야 할 것 같다. 10년 전 이태원과 지금의 이태원은 크게 다르지 않은 거 같다. 비슷한 거 같은데? 예전에 취재하다가 90년대부터 이태원에서 계신 분들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확실히 험악한 분위기가 있었다 하긴 하더라고. 살인 사건도 있었고, 클럽들 주변에서 약물을 하는 외국인들도 많았고. 또 한강진 쪽이 지금은 번화했지만, 예전엔 일본인들이 많이 드나들던 동네였다고 들었다. 그들을 상대하던 업소들도 제법 있었다고 하더라. 그런데 내가 이태원에 드나들기 시작했을 땐.. 뭐 그런 건 분명히 있었지. 고등학교 때 옷 사러 오면 무서운 형들이 낮에 데려다가 ‘일단 봐봐’ 하면서 창고 같은데 데려가고, ‘다 진짜야, 10만 원이야. 뭐야 5만 원 밖에 없어? 근데 왜 진작 얘기 안 했어?’ 하는 그런 건 있었는데, 그건 뭐 동대문도 똑같았으니까.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과거의 이태원에 대해 얘기할 만큼 내가 과거의 이태원을 잘 알진 못한다
알겠다. 그렇다면.. 이태원의 음식 얘기를 빼놓을 순 없겠지. 이번에 출판한 <Notes of a chair and a lamp stand>를 보면 먹는 것에 관심도 많아 보이고, 식사에 관한 마음이 느껴진다
동네에 오래 터를 잡고 있는 식당에 가는 걸 좋아한다. 딱히 맛집을 찾아다니거나 줄 서는 식당에 가는 걸 싫어해서 그저 집 근처에서 갈 만한 식당 또는 다른 지역에 들렀을 때 그 동네에 잘 묻는 곳에 간다. 이태원에는 유독 케밥 가게가 많다. 보광동에는 매력적인 한식당이 많은데 가끔 한 번씩 꼭 들르는 곤드레 쌈밥집을 추천하고 싶다. 미각이 둔한 편이라 그냥 내 입에만 맞으면 된다
중국집 얘기가 없는 게 의아하다. 책에 중국집이 자주 등장하니까
책에 나온 중국집 얘기는 친구가 좋아해서 자주 나온 거고, 나는 뭐 그렇게 중국집을 찾아다니는 편이 아니다
내가 중국집에 가 요리 몇 가지 시켜 놓고 앉아 있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유감이다. 본격적으로 얘기를 좀 시작해보자. 최근에 출판한 <Notes of a chair and a lamp stand>를 너무 재밌게 읽어서 책 이야기를 먼저 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VISLA>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순 없을 것 같다. 그리고 그 전에, <VISLA> 이전의 당신 이야기를 좀 들어보고 싶다. <VISLA> 이전엔 직장 생활을 전혀 안 한 건가
직장 생활 경험은 전혀 없다. 휴학했을 때 대학 선배가 운영하던 브랜드에서 반년? 9개월? 정도 아르바이트로 일한 적은 있다. 가방 브랜드였는데, 뭐 가방 포장하고, 배송 보내는 일이 거의 전부였다. 약소하게 메일, 거래처 관리도 하고 그랬다. 이외에도 몇 가지 아르바이트 외에는 회사에 다녀본 적은 없다
전공은 뭔가
경영학과. 전역했더니 성적이 낮다는 이유로 회계학과로 옮겨졌다. 이상한 학부 시스템 탓에 우리 학번 때 동기 몇이 불합리한 처우를 받았는데, 당시에는 딱히 따지지도 않고 그러려니 했다.
어찌됐든 <VISLA>를 경영하는 중이니, 전공을 살린 셈이 됐다
하하. 대학생활은 엉망이었다. 연달아 학사 경고를 받자 아버지가 군대에 보냈다. 전역하고 나서도 겨우 학점 채워서 졸업했다. 대학생활은 내겐 목적과 이유를 찾을 수 없던 10대 학창시절의 연장이었다
<VISLA> 안에서 당신의 활동을 보면 음악, 사진, 책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있어 보이는데, 이런 취향은 언제부터 생기기 시작했나
음악을 좋아하기 시작하면서 음악을 중심으로 파생돼 갔다. 문화라는 게 그렇잖아. 서로서로 영향을 주는 관계니까. 시작은 음악이었다. 형 영향을 받아서 초등학교 때부터 음악을 좋아했다. 형이 한국 음악을 잘 안 들었다. 나이 차가 좀 있는 형이 맨날 팝송 듣고 그랬는데, 괜히 멋있어 보이더라. 근데 형이 음악 듣고 있을 때 방에 들어오는 걸 싫어했다. 그래도 굳이 몰래 들어갔다. ‘조금만 있다 갈게.. 근데 이거 무슨 노래야? 이건 뭐야?’ 하면서.. 그럼 형은 막 나가라 그러고.. 그때 한참 들었던 게 ‘R.Kelly', 'Naughty By Nature' 'Michael Jackson' 그랬던 거 같다. 그리고 형이 마루에서 <MTV> 보고 있으면 옆에서 따라 보는 거다. 어느 날, 보고 있는데, 'Wu-Tang Clan' 뮤직비디오가 나왔다. 가면 쓰고 이렇게 하는. 그 곡이 ’Da Mystery Of Chessboxin'라는 곡인데, 그거 보고 충격을 받았다. ‘뭐야 저거’ 하면서. 초등학교 6학년 땐가 그랬는데, 그거 보고 분당 서현역에 있는 레코드샵에 갔다. 당시 서현역 앞엔 <라르고>랑 <소리마을>이라고 레코드샵 두 개가 있었다. 둘 중 내가 좋아했던 건 아마 <라르고>였던 거 같다. 작은 곳을 더 좋아했다. 거기 가서 내가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이런 거 이런 걸 봤다고 했더니, 아저씨가 힙합 같은데? 하시면서 몇 개 추천해주셨다. 거기서 ‘Wu-Tang Clan’ 테이프를 찾은 거다, 가면 쓰고 있는. 아저씨가 ‘초등학생이 이런 거 사면 안 되는데, 그래도 음악이니까 들어봐’ 하면서 주시더라. 그 뒤에 중학교 올라가면서 ‘드렁큰 타이거’, ‘2MC’ 이런 거 샀고. 그때부터 힙합에 꽂혔다. 그게 취향의 출발점이다. 보통 문화는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경우가 많지 않나, 근데 그때 처음으로 직접 찾아가면서 들었다는 얘기다. <VISLA> 하면서 취향의 폭이 더 넓어졌고. 예전엔 힙합, 자전거, 스케이트보드 등에 치중돼 있었다면, <VISLA>를 더 넓게 키우고 싶으니까, 책도 <VISLA> 하면서 읽게 됐다. 그전까진 문학을 전혀 몰랐다
내가 <VISLA>를 독자로 봐온 것만 해도 햇수로 벌써 7년이다. <VISLA>는 어느새 10년이 다 되어가고. 그 시간을 크로키 하듯 확 잡아채면 어떤 말들이 떠다니나
친구들과 열심히 노는 일과 비슷하다. 물론 지금은 좀 더 체계적인 회사의 형태를 갖추는 단계지만, <VISLA>의 시간을 돌이켜봤을 땐, 마치 친구들과 계획을 짜고 열심히 노는 일처럼 느껴진다. 그런 거 있지 않나. 그냥 놀면 기억에 잘 안 남는다. 근데 친구들이랑 계획을 짜고, 여기 가서 뭐 하고, 빡세게 한 번 놀아보자 계획을 짜는 순간, 그 놀이에 진지해지는 거. <VISLA>의 시간은 그런 경험과 비슷하다
'VISLA'를 검색하면 ‘비즐라는 헝가리 원산으로 헝가리안 포인터라고도 한다.’는 설명이 따라붙는 개가 등장하는데, 이 개에서 영감을 받아 지은 이름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든다. 이름은 어떻게 정하게 됐나
친구들끼리 쓰던 말이다. Visual Slave의 줄임말인데, 이걸 보드 타는 친구, DJ하는 친구, 그런 우리 친구들끼리 Visual Slave란 말을 썼다. 그걸 장민이가 줄여서 'VISLA'라고 쓰고 싶다 했고, ‘뭐, 그래. 써.’ 된 거다
<VISLA>가 어떻게 시작됐는지에 대한 얘기를 들어보자. <Notes of a chair and a lamp stand>를 보며 유추한 건, 마음 맞는 친구들과 함께, 젊은 치기로, 좋은 의미로 얼렁뚱땅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때가 2012년 정도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인, 방금 말한 장민이가, 부모님의 이민으로 미국에 가 있었는데, 그 무렵 나도 대학교 4학년이었고, 장민이도 졸업할 시기였다. 그때 장민이가 웹진 같은 걸 만들 거라고 하더라. 그즈음이 웹진이 많이 생기던 시기였다. 종이 잡지를 벗어나서 웹으로 미디어를 구현해보자며 산발적으로 나오던 때였다. 음악, 정치 등등. 종이 잡지를 만들 돈은 당연히 없으니, 자기가 이런 걸 해볼 생각이라고 장민이가 얘기했다. 그래서 ‘그러냐, 난 관심은 없다,’ 그랬고, 장민이는 ‘근데 뭐 기사라던지, 콘텐츠를 만들어 볼 생각도 없냐’ 물어서 ‘그건 있다’고 했다. 그렇게 한 두 개의 글을 기고했다. 하지만 장민이가 졸업을 앞두고 바빠졌고, 그러면서 아무것도 안 올라오는 소강상태가 찾아왔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다. 그러다 2013년으로 넘어가는 기점에, 내가 뭐에 홀렸는지, 별로 관심도 없던 이것에 꽂힌 거다. <Wax Poetics>, <Frank151> 같은, 내가 보고 싶어 했던 잡지가 원래 있었는데, 난 영어를 못 하거든. 그런 잡지를 구하기도 쉽지 않았고, 웹으로 봐도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더라. 지금이야 구글 번역되지만, 그때는 그런 것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하 시발 그냥 만들어버리면 어떨까’ 생각했고, 장민이가 이미 하던 게 있으니, ‘야 한 번 해보자’ 이렇게 됐다. 2012년 말, 2013년 초 이때 네이트온으로 계속 얘기를 했다. 2013년 초부터 난 한국에서 기사를 쓰기 시작했고, 장민이는 미국에서. 둘 다 좀 더 진지하게 된 거다. 둘이니까 힘이 나는 부분도 있었지. 그때부터 디자인은 진우 형이 했다. 그때 형이 로고도 예쁘게 만들어주고, 디자인 부분을 가미해주면서 셋이 조금씩 조금씩 하게 됐다.
좋다. 그렇게 셋이 조금씩 조금씩 하게 돼서, 계속해 달라
그렇게 하다가 그 해였나 다음 해였나, 장민이가 한국에 왔다. 장민이가 구한 자취방에서 맨날 모여서 회의하고, 나름의 규칙도 정했다. ‘매일 기사 하나씩 써야 해’하는 식의. 돈은 없으니까 알바도 했고. 그랬던 거 같다. 그러면서 주변에 글 쓰는 애들 좀 찾아보자 하게 됐고, 그때 비보이 하던 친구 윤범이가 들어왔다. 또 한 명이 우리가 한 걸 보고 함께하고 싶다는 메일을 보냈는데, 그게 지금도 있는 오욱석 에디터. 말도 안 되는, 그 후로 3년간은 돈 한 푼도 안 됐는데 그냥 했다. 알바한 돈으로 밥 사 먹고, 커피 사 먹고 하면서. 그 후 정부지원금 같은 거 신청도 해보고, 사업자를 내고, 진짜 얼렁뚱땅 갑자기 사업이 됐다. 장민이가 추진력이 좋았다. 나는 대학교를 졸업하는 과정에서 부모님의 기대도 있었기 때문에 이력서도 좀 넣었었고, 알바도 하고 있으니 <VISLA>가 내 사업처럼 느껴지진 않던 때였다. 그런데 장민이는 이거에만 몰두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장민이가 사업자를 내고, 뭘 하고, 이러면서 조금씩 조금씩 브랜드의 모습이 만들어졌다. 나는 봄을 지나는 시기에 이력서가 다 떨어지고 하면서 ‘취업 안 할래’ 이렇게 된 거고. 부모님은 엄청 싫어하셨지만. 점차 주변에 <VISLA>에 관심 있는 애들이 contributor editor가 돼줬고, 그 친구들도 조금씩 조금씩 같이 보고, 그렇게 3년이 지나면서 구색이 점차 만들어졌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 3년이 딱 지났을 때가 처음 내가 <VISLA>를 만난 시기이겠다
그렇지. 그때 친한 형님들이 하시던 회사에서 사무실도 공짜로 내줬다. 열심히 해서 키운 뒤에 자기들이랑 같이 비즈니스 하자면서. 고맙지. 정부지원금도 타먹어가면서 그렇게 본격적으로 하게 됐다. 벌이는 하나도 없었지만, 용돈은 따로 알바하면서 생활비 채우고, 그렇게 3년을 보냈다
아까 이야기 도중 갑작스레 ‘박진우’가 등장했는데, 그는 어떻게 합류하게 된 건가
<VISLA>를 시작하기도 전의 일인데, <360 Sounds> 파티를 다니던 내 또래 친구들이 있었다. 처음엔 물론 다 몰랐지만. <360 Sounds>의 형들의 영향을 받아 내가 친구들과 함께 디제잉을 연습해 파티를 열곤 했는데, 그때 자전거나 보드 타는 친구들, 영상이나 디자인을 배우는 친구들이 모이면서 친해졌다. 진우 형은 그 때 멤버 중 한 명이었고. 노원, 여의도 같은 서울 친구들이 분당까지 놀러왔고, 같이 놀면서 친해졌다
현재 <VISLA>의 멤버에 관한 소개도 부탁한다. 그 인물들은 <Notes of a chair and a lamp stand>에 등장하기도 하니까. 소설의 등장인물 소개하듯 소개해줄 수 있을까. 당신 식대로
최장민은 오랜 친구이자 <VISLA>의 파트너다. 그는 팀에서 가장 밝은 성격, 굳은 심지를 지니고 있다. 그것이 우리에게 언제나 긍정적이고 좋은 결과를 가져다준다. 오욱석은 다른 친구들이 각자의 상상을 펼치며 자칫 산으로 갈 때쯤, 현실적인 절충안으로 중심을 잡는다. 언제나 겸손하고, 묵묵히 자기 일을 해내는 친구다. 많은 이들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애쓰는 지금 시대에 그는 뒤에서 조용히 많은 일들을 처리한다. 박진우는 섬세한 시선으로 사건이나 상황을 바라본다. 그래픽 디자이너라는 직업이 단순히 아이디어를 시각적으로 구현해내는 것 이상으로 어떤 기준을 제시할 수 있는 포지션이라는 걸 형을 통해 알았다. 머릿속이 온통 음악이라, 음악과 관련된 일을 하는 것 외에는 달리 떠오르는 게 없는 친구가 황선웅이다. 언젠가 그 능력이 한국의 음악 풍토 어딘가에서 빛을 발하리라 생각한다. 한지은은 어느 시점에서부터 스스로 무언가 결심한 것처럼 느껴지더니, 그 누구보다 사려 깊고 매력적으로 일을 해내고 있다. <VISLA>가 더 성장하고 이 안에서 세대교체라는 것이 이루어진다면 가장 선두에 설 동료가 아닐까. 에이전시 멤버인 박정현과 김혜수는 공통적인 면이 있다. 그들의 경험과 경력은 상이하지만, 굉장히 프로페셔널하다는 점에서, 그 기준을 높게 유지하려 한다는 점에서 나 역시 배우고 있다. 체계적이고, 정확하게 일하는 사람들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만든 공간, <QUEST>의 보스, ‘시나힐(Sinahill)’을 소개한다. 디제이로서도, 바텐더로서도 그녀는 우리가 찾던 최적의 멤버다. 하이 퀄리티, 하이 레벨!
본인은 왜 빼먹나. 본인에 대한 얘기도 해달라
어디 물 새면 물 틀어막고, 먼지 떨어져 있으면 먼지 줍고, 뭐 그런 역할이지 않을까. 이 배가 무너지지 않게, 수리하고, 메꾸고, 뭐 그런 역할이겠지
내가 처음 <VISLA>를 본 건 페이스북 스폰서 광고를 통해 <VISLA>의 로고가 계속해서 내 피드에 노출됐기 때문이다. 로고가 맘에 들어서 사이트에 접속했다가, 재미난 글이 많아 심취해서 뒤적거렸다. 그리고 그때의 <VISLA>엔 당신이 ‘켄드릭 라마’의 <Section 80>에 대해 책에 적은 말 ‘프로가 되기 직전의 설익은 그 느낌’이 가득했다. 다르게 말하면 당신들이 다루고 있는 문화가 너무 좋아서, 신나게 <VISLA>를 채워나가는 느낌이 독자인 나에게도 생생히 전달됐다는 얘기다. 당시에 재미난 프로젝트도 많았다. <서울 헤리티지> 전시나, <스티커 전국체전>은 특히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이런 프로젝트를 통해 <VISLA>의 위치도 보다 위로 올랐다고 생각한다. 위로 올랐다는 건, 그전까지는 서브 컬쳐의 대표적인 팬덤 정도로 느껴지던 <VISLA>가 하나의 서브 컬쳐로 자리매김했다고 느꼈다는 얘기다
그때가 많이 그리울 때가 있지. 지금은 간혹 ‘뭘 하고 싶은지’가 아니라, ‘얼마를 벌어야 무너지지 않을지’로 목표가 잡힐 때도 있으니까. 근데 그때는 어차피 돈 못 버니까, 뭐 할래? 뭐가 재밌지? 이게 그냥 모든 회의의 끝과 시작이었다. 그런 에너지가 그립다. 지금은 시간을 쪼개서 아이디어 회의를 해야 하는 상황이다. 가끔은 나 스스로도 재미난 이야기를 쏟아 낼 준비가 안 돼 있다고 느낄 때가 있다. 마음이 딴 데 가 있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딴식으로 전시를 했지? 싶을 정도로 조악했는데, 그 순간에 팍! 하고 튀는.. 뭐랄까.. 물론 우리가 만약 그걸 좀 더 멋있게 잘했다면 굉장히 매력적인 전시가 될 수 있지도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서울 헤리티지> 같은 일은 순간의 스파크가 튀어서 하는 일이거든. 그런 일은 잘되든 못되든 누군가에겐 사랑을 받는 일이 되더라. 근데 억지로 짜내서 하는 일은, 더 많은 관객을 모객할 순 있어도, 그만큼 매력적으로 보이진 않을 가능성도 있는 거니까. <스티커 전국체전>도 마찬가지다. 스티커 모으는 사람 많으니까, 그냥 전국체전 하자 하는 그런 스파크. 지금은 그런 스파크들이 어떤 식으로 나왔는지를 생각하며 다시 돌아가야 할 때인 거 같다. 여유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는데, 지금은 좀 더 생계에 가까워지다 보니, 늘어져서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는 거지. 놀지를 못하니까 아이디어도 안 나오고. 아이디어가 너무 진지하다. 진짜 프로젝트 같고. 나는 그럼 안 된다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너무 프로젝트 같이 시작해버리면, 물론 그게 재밌는 게 될 수도 있지만, 앞서 말한 그런 순간이 분명 필요하다. 올해는 계속 그런 시간을 다시 만들어야 할 것 같다고 멤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편으론 그 시절의 <VISLA>가 그립기도 하다. 이건 뭐, 올드팬이 가지게 되는 응원 속 탄식 같은 것일 거다. 스파크 얘기를 하니, 당신의 분당 시절 파티 얘기가 다시 떠오르기도 하고. 요즘엔 채널이 많아지고, 대부분이 온라인으로 진행되다 보니, 가끔은 이게 다 뭔가 싶으면서 아무것도 실체가 없다고 느낄 때가 많다. 디지털의 정확성만큼이나 부정확성이 주는 재미가 없는 거지
그렇지, SNS 팔로워 많은 사람이야 이제 너무 많잖아. 그게 또 안 중요한 거 같진 않은데, 뭐 예를 들어 <The Book Society> 같은 곳이 있지 않나. 그런 곳이 팔로워 10만이 안 된다고 해서 영향력이 없는 건 아니란 거지. 책을 좋아하고, 예술 분야에 좀 더 깊게 정진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찾는 서점이니까. 그런 것처럼 오프라인에서의 힘은 온라인과는 다른 구석이 있는 거 같다
지금 우리가 나누는 말들이 <VISLA>가 종이로도 잡지를 조금씩 내기 시작한 것과도 연관이 있을까
손에 쥐고 만질 수 있다는 게 익숙하고 기분 좋은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바이닐 레코드나 책의 매력은 굳이 내가 말하지 않아도 될 거 같다. 다만 디지털과 아날로그 둘 중 한 쪽을 맹신하지도 않는다. 둘 다 지금에 와서는 선택할 수 있는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얘기를 듣다 보니 불쑥 궁금해지는 게 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다 했고, 새로운 것을 향한 지금의 고민도 가볍지 않아 보이는데, 어찌 됐든 <VISLA>를 10년 가까이 해오지 않았나. 그렇다면 그때로 돌아가는 것,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하는 의문도 드는 거다. 만약 그게 불가능하다고 판단되고, 아까 소개했던 <VISLA>의 스타팅 멤버보다 잘 할 거 같은 사람이 나타났을 때, 그들에게 <VISLA>를 넘겨줄 생각도 있나
물론이다. 언제나 매력적인 동료들로 들끓는 사무실을 상상한다. 그런 사람들이 <VISLA>를 운영하는 모습을 보는 일 또한 즐거울 거다. 그렇게 되면 난 또 다른 걸 하겠지.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어쨌든 난 계속 뭔가를 하고 싶거든
<VISLA>가 몸집을 키우기 시작했다고 느낀 게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약 3~4년 전부터 캠페인의 덩어리도 커지고, 여러 브랜드와 하는 협업이 눈에 띄더라. 이건 <VISLA>가 먼저 방향성을 가지고 브랜드에 제안한 것인가, 아니면 그동안 쌓인 <VISLA>의 콘텐츠를 보고 브랜드에서 다가오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나
자연스럽기도 했고, 우리가 스스로 선택한 방향이기도 하다. 브랜드에서 캠페인 작업이 좀 들어왔을 때, 번뜩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점점 더 브랜드 일이 많아지면 매거진과 에이전시 일이 섞이게 될 테니 미리 대비를 좀 해야지 싶었다. 그래서 몇 명 되지도 않는 팀이지만, 그때부터 매거진과 에이전시를 분리해서 나아가기로 했다. 그렇게 3년 뒤의 모습을 공유했다. 당시 5~6명이서 굳이 그런 구분이 중요하겠냐만, 이 생각을 공유한 것만으로도 우리가 일을 대하는 방식은 달라졌거든. 지금은 내가 매거진을, 장민이가 에이전시를 리드하고 있다
지금은 그 3년의 계획 중 어디쯤 와 있나
계획이 얼추 다 맞아 떨어졌다고 볼 수 있지. 이제 또 새로운 계획을 준비할 시기다
올드팬의 응원 속 탄식을 하나 더 말해보자면 내가 좋아하던 글을 보다 자주 볼 수 없게 된 것에 대한 아쉬움이다. 난 특히 당신과 오욱석의 글을 좋아했는데, 요즘도 물론 읽어볼 순 있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예전만큼 재밌진 않더라. 그건 아마 글에만 집중할 수 있는 여력과도 관련이 있을 텐데, <VISLA>의 몸집이 커지면서 아무래도 글에 집중할 수 있는 여력이 줄긴 했을 것 같다. 그런 글쓰기에 대한 아쉬움이 이번 <Notes of a chair and a lamp stand>로 묶여 나온 게 아닐까 짐작했다. 책은 정말 좋더라. 오랜만에 읽은, 내가 좋아하는 ‘권혁인’의 글이라 속이 다 시원했다. 책으로 묶을 계획은 어떻게 시작됐나
애초에 나는 글쓰기에 뜻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 수준까지 올려야한다고 느꼈을 뿐이다. 우리가 <VISLA>를 시작했을 땐 모든 능력과 경험이 부족했으니까. 따라서 글쓰기의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이 책을 쓴 건 아니고.. 언젠가부터 난, 개인적인 시간이 별로 없었다. <VISLA>에 완전히 몰두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밤늦게 집에 들어가면 샤워를 하듯 나를 씻겨주는 시간이 필요하다 느끼곤 했는데, 그게 단순히 누워서 잠자는 걸로는 해소가 안 된 거지. 그러다 마침 코로나가 터졌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일기를 쓰고 있더라. 두세 달 정도 썼을 때 ‘이거 묶어서 내봐도 되겠다, 그럼 내 친구들은 재밌게 읽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짬 날 때마다 조금씩 쓰던 어느 날, 11월 즈음이었나. 잠이 안 와서 노트북을 열고 가만히 앉아 있다가 떠오르는 말들을 옮겼는데, 그때 이 글이 마지막이겠구나 하고 느꼈다. 시작도, 끝나는 순간도 우연이었다. 사실 그게 내 성격이다. 굉장히 즉흥적인 사람이라거든. 물론 <VISLA>에서 난 항상 계획하고, 변수를 따진다.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우리처럼 작은 회사는 무너질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건 내 개인적인 즐거움이기에 특별히 머리를 쓰면서 하고 싶지 않았다. 창작물이라고 하기엔 거창하고, 충동적으로 뱉은 가래 같은 게 아닐까 싶다
<Notes of a chair and a lamp stand>란 제목은 글을 썼던 노트와 책에 등장하는 ‘잎새’가 사준, 책상이 책상이 되게 만든 의자, 그리고 새벽 시간에 켜져 있었을 램프, 즉 글을 쓰는 그 순간의 풍경에서 가져온 거겠지. 그 풍경을 좀 소개해줄 수 있나
누군가에게는 쓰레기장으로 느껴질 만큼 더럽고 정리되지 않은 혼란 그 자체... 가끔은 나조차도 숨이 막히는 그런 방에서 일기를 썼다. 물론 나는 그 방과 시간을 사랑했으니 그렇게 글을 쓸 수 있었다
얘기를 들으면서도 느낀 거고, 책을 읽을 때도 생각한 건데, ‘권혁인’은 어떤 결정을 내린 뒤, 밀고 나가는 사람이라기보단, 계속해서 고민하고, 이쪽 저쪽을 오가는 사람인 거 같다. 책 속엔 그 이쪽, 저쪽이 크게 두 종류 정도로 구분되더라. 첫 번째는 나른함과 치열함이었다
오래 방황했던 20대를 매듭짓고 삶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도 다 <VISLA> 덕분이다. 내게는 일이기도 하지만, 오롯이 내 삶과 고민이 들어간 분신 같기도 하다. 좀 거창한가? 그래서 치열하게 아등바등하는 거다. 일을 너무 감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안 되지만, 이곳에서 동료들을 통해 인간적으로도 조금이나마 성숙해진 것 같고, 돈 버는 어려움도 알았다. 또한 회사 경험, 멘토도 없던 내게 <VISLA>는 그 자체로 선생이었다. 원체 게으른 내가 스스로를 채찍질할 수 있는 건 이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아니었다면 나는 한적한 동네의 도서관 사서로 큰 욕심 없이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삶을 바랬으니까
좋다. 두 번째는 환멸과 희망. 이건 당신이 서울이란 도시에 가지는 감정과도 닿아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이태원, 한강진, 보광동 등등이 책에 나오는데, 당신은 이곳들을 지긋지긋해하기도 하면서, 한 편으로는 너무 좋아하고, 계속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인간은 너무 짧은 시간 안에 소멸하는 존재고, 그 잠시를 아등바등 하다 간다. 삶을 낙관할 필요도, 죽음을 비관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그 삶의 본질을 깨우친 기분이 좀 든다고 해서 염세적인 태도로 일관한다는 것도 너무 구리다는 거지. 그냥 농담도 던져가면서 걸어가는 거다. 산다는 건 진흙 속에서 발버둥 치는 일이다. 인간의 한계를 인식하고 나서도 끈질기게 명줄 붙드는 몸부림이 가장 인간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필연적인 삶의 비극을 그저 받아들이지 않고, 어떻게든 운명이든 뭐시기든 간에 그것에 한 번 저항해보려고 움직이는 인간에게서는 어떤 숭고함마저 느껴지니까
또 책 속 당신의 글 곳곳에 서려 있다고 느낀 또 다른 하나는 죽음이다. 죽음이 책 전반에 짙게 깔려 있더라. 방금 당신이 해준 얘기는 나도 평소에 굉장히 많이 하는 생각이다. 하지만 나는 죽음에 관한 생각은 또 별로 안 하는 편이어서,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묻고 싶더라
시간을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은 곧 죽음을 인지하고 있다는 말과도 같다. 처음에는 시간과 죽음이 막연하게 두려웠다. 우주의 막연함 같은 것처럼. 그러나 지금은 생과 사가 이분법적으로 느껴지기보다는 마치 0과 1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처럼 느낀다. 그러다 몇십만 번 째 0에서 죽을 수도 있고, 또 살 수도 있는 거겠지. 기왕이면 좀 더 길게 삶을 끌어서 아직 경험하지 못한 무언가를 볼 수 있길 바란다
당신의 이쪽, 저쪽 중 가장 큰 단위가 생과 사라고 이해하겠다. 책 이야기를 계속해보자. 중간중간 가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당신 친구들이야 속사정을 다 알 테니 이런 이야기가 낯설지 않겠지만, <VISLA> 편집장 ‘권혁인’의 책이라 생각하고 산 다른 사람들은 조금 놀라기도 할 거 같다. <VISLA>에 등장하는 대다수의 브랜드는 비싼 값을 지불해야 구매할 수 있으니까. 그걸 보면 당연히 <VISLA>의 멤버들도 비싼 옷으로 잘 치장하고 다닐 거라 예상할 테고, 그러다 보면 가난과 <VISLA>를 묶어서 생각하지는 않게 되니까
외부의 시선에서 볼 때는 <VISLA>가 다루는 브랜드의 때깔을 보고 <VISLA>에서 일하는 사람을 동일시하는 경우가 있더라고. 당연히 다르다. 우리 모두 각자 월세를 지불하거나 부모님 집에서, 또는 전셋집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내가 아는 한 특별히 잘사는 집 자제분들은 없는 거 같은데? 하하. 나 또한 독립한 뒤로 돈 걱정을 달고 살았다. 다만 나는 사고 싶은 걸 못 산다고 해서 괴로움을 느끼는 성격은 아니라 나름 속 편하게 산 거 같기도 하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얘기일 수 있는데, 소위 스트릿이라고 부르는 문화, 서브컬쳐라고 부르는 것들이 최근 명품 브랜드들과 함께하는 경우가 많지 않나. 거리에서 자연스레 시작한 브랜드들이 거대 자본을 쥔 명품 브랜드와 손을 잡은 흐름인데, 이런 흐름은 어떻게 생각하나
‘Virgil Abloh’가 불을 확 지른 거 같은데, 그의 영향으로 서브컬처 브랜드들을 하이엔드 브랜드들이 포섭하고, 디렉터도 기존까지 그 세계 안에서 통용되지 않던 의외의 인물을 기용하고 있다. 스트릿 브랜드에서도 럭셔리를 오마주하거나 패러디하는 등 뭐 그런 움직임이 많지 않았나. 하이엔드 브랜드와 스트릿 브랜드, 또는 길거리 미술과 파인 아트, 디지털 밈과 캔버스. 이런 것들이 아주 반대되는 지점에 있는 거 같지만, 비슷한 속성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얼핏 보면 완전히 다른 세계에 있는 듯하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없는 걸 가지고 있고, 독보적인 영역에 자리하기에 자기 문화에 대한 자생력이 강하다. 그러니 서로 끌릴 수밖에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그 가장 돋보일 수 있는 하나라는 점이, 처음으로 스트릿 또는 서브컬처에 접근하려는 사람들에겐 장벽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흥미가 생겨 기웃거려 보더라도, 다가가서 섞이기엔 그들이 너무 멋진 거지. 이걸 섞이지 못한다고, 그저 구리다고 무시하기보단, 아무나, 쉽게, 자연스럽게 섞일 수 없다면, 그렇다면 그건 또 스트릿이나 서브컬처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문화인가에 대한 고민이 생긴다는 얘기다
글쎄. 하위문화의 속성이 결국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를 튕겨내는 일종의 ‘반항’에 근거하니 결국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장벽이 자연스레 형성된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도 매력을 느끼는 게 아닌가?
이제 막바지다. 우리가 오늘 얘기 나눈 주제들. 예술, 문화, 가난, 죽음, 도시 등등 이 모든 것들이 정치와 연관된 것 아니겠나. 마침 곧 대선이 있기도 한데, 정치와 대선을 생각하면 어떤 마음인가
30대 중반을 지나며 조금씩 신문을 통해 정치 이슈를 살핀다. 나이가 먹었다는 이유로 정치에 관심을 의무적으로 가져야 한다는 말은 아니고, 이래저래 살다 보니 결국 인간이 벌이는 모든 활동이 결국 정치와 연관되어 있다는 걸 느끼면서부터다. 누구에게 표를 던질까 하는 문제를 떠나서, 좀 더 적극적인 형태로 정치라는 거대한 개념에 참여할 방법은 무엇일지 고민한다
코로나 상황에 스트릿 문화를 통해 생활하던 사람들의 고통도 어마어마했으니까. 어떤 움직임이 나올지 기대가 된다. 자, 이제 마지막 질문이다. 책에 <VISLA>의 앞으로를 생각하며 우리의 역량을 점검해보게 된다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 역량을 정리해보면, 앞으로의 <VISLA> 그리고 ‘권혁인’은 어디로 향할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 우리를 통해 기억에 남는 경험과 영감을 얻었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는 이 문화라는 거대한 흐름 안에서 오랫동안 일하며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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