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 - <서울아트시네마>

2021년 8월부터 12월까지, 또는 오래전부터 이어온 대화


영화가 끝난 뒤 극장 밖으로 나오면 2차선 도로 건너편엔 포장마차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 속엔 소란했던 하루를 술을 마시며 달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방금 막 끝난 영화를 곱씹었다. 언제나 영화의 여운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기에, 그러나 시선에 잡히는 현실의 장면 역시 그 무게가 가볍진 않았기에, 난 극장과 포장마차 사이 2차선 도로 위에서, 영화와 현실의 경계에 멈춰, 한참을 머무르곤 했다.

방금 본 영화가 좋았던 날엔 내게 아무런 틈도 주지 않고 다가오는 저 현실의 풍경은 유난스러웠다. 그럴 때면 얼른 방금 본 영화의 사운드트랙을 찾아 귀를 막아버리곤 했는데, 그렇게 얼마 서 있다 보면 내가 느꼈던 유난이, 영화보다도 더욱 설명되지 않는 현실을 피해 영화 속으로 도망가고자 했던 비겁함이었다는 것을 새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영화가 마음에 잘 붙지 않는다 느껴지는 날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극장 앞에 더욱더 오래 머물렀다. 포장마차의 주인이 음식을 내는 모습, 들릴 듯 말 듯한 손님들의 이야기, 포장마차 주위를 맴돌며 아스팔트 사이에 낀 음식을 주워 먹는 비둘기, 그 옆을 스치듯 지나가는 차들을 보며 한참을 더 서 있었다. 몇 발자국 걸어 그 속으로 나를 포함하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내가 2차선 도로를 건너는 일은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말라있는 혀끝을 느끼며 몸을 돌려 여전히 불 밝은 극장 간판을 흘긴 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지하철역 쪽으로 걸을 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기억들 때문에 나는 부러 영화관 대신 극장이란 말을 골랐다. 내게 극장에 가 영화를 본다는 것은, 단순히 영화를 보고 나오면 끝나는 것이 아닌, 영화와 현실 그 틈 사이의 시간과 감정이 뒤섞이는 과정의 경험을 뜻하는 것이기에. 이 과정을 다 담아내기엔 영화관이란 말은 너무 매끄러웠다. 그 말은 거대한 쇼핑몰 안에 자리 잡은 체인 영화관에는 철썩 달라붙었지만, 서울의 시간과 풍경을 몇십 년째 온몸으로 끌어안고 있는 공간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런데 지금, 또 하나의 극장이 떠나가려 한다. 극장과 극장을 포함한 거리와 그 거리 위에 쌓인 시간의 물성이 사라지려 한다.

90년대에 태어나, 성인이 돼서야 서울에 올라온 나에겐, 종로3가에 도착하면 <단성사>와 <피카디리>, <서울극장>에 들러 상영 시간표를 보며 그날의 일정을 정했다는 과거, 각 극장이 흥행을 위해 표를 천천히 파는 등의 꼼수를 부리면서까지 손님들을 줄 세우는 것에 열심이었다는 과거, 각 영화의 반응은 해당 영화의 첫 상영일에 종로3가로 가면 확인할 수 있었다는 과거가 없다. <영웅본색>을 보고 나와 트렌치코트를 입고 성냥을 질겅이며 걷는 남자들을 본 적도 없고, <아비정전>이 누아르인 줄 알고 잔뜩 기대에 차 극장에 들어선 이들이, 몇 시간 뒤 욕을 하며 극장 밖을 나서는 현장을 본 적도 없다. 종로3가의 넓은 도로 위로 온종일 영화가 돌아가던 그 시절의 풍성한 기억을 나는 여기저기 흩어진 몇 줄의 글들로 겨우 짐작할 뿐이다.

그리고, 그래서, 이 대화를 남겨야겠다고, 결정했다. 극장이 사라지고, 거리가 사라지고, 그렇게 기억마저 사라지려는 어느 날, 이 대화가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는 상영관 안 공기처럼 조용하고, 아늑하게, 과거와 오늘을 다시 건져 올려 당신에게 전해주길 바란다. 종로3가의 마지막 극장에서, 영화에 기대 사람을 만났다.



<대화록>은 그동안 대화 상대의 소개를 부탁한 적이 없다. 하지만 이번 대화는, 종로3가 <서울아트시네마>에 다양한 사람의 기억이 존재한다는 걸, 간접적으로나마 보여주기 위해 소개를 부탁하려 한다. 쑥스럽겠지만

 

반갑다. <프릳츠>에서 일하고 있는 김병기라고 한다. 5살 정도에 서울로 와 쭉 살고 있다. 영화를 좋아한다

 

때론 영화가 표를 예매하는, 혹은 극장으로 출발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서울아트시네마>까지 가는 경로가 어떻게 되나

 

<서울아트시네마>에 다닌 지가 오래됐다. 그사이에 집은 계속 이사를 했지만, <서울아트시네마>는 지금 자리에 꽤 오랜 시간 그대로 있었다. 나는 사는 곳과 무관하게 항상 지하철을 타고 극장으로 갔는데, 지금은 집이 2호선 라인에 있어 을지로3가역에 내린다. 지하철역을 나와 살살살살 걸어 올라가다, 시간대가 맞으면 <을지면옥>에 들려 냉면 한 그릇을 먹거나, <을지면옥> 바로 위에 있는 <을지다방>에 가서 차 한잔하거나 한다. 주로 혼자 다녔고

 

극장에 가 영화를 보는 건, 일상적인 행위인 동시에, 작은 이벤트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기 위해 <서울아트시네마>로 가는 길에서 어떤 생각들을 했나

 

최근 코로나 상황이 조금 나아지면서 다시 극장에 자주 가고 있다. 그러면서 확실히 깨달았는데, 내가 영화를 그 어느 화면으로 보는 것 보다, 극장의 큰 스크린으로 보는 것을 훨씬 선호한다는 거다. <서울아트시네마>에 가는 건, 막연히 ‘영화 보러 가야겠다.’ 하고 멀티플렉스 영화관에 가는 것과는 다르다. <서울아트시네마>의 프로그램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기다렸을 법한 영화로 구성돼 있으니까. 정리해보면 ‘내가 드디어 이 영화를 극장에서 스크린으로 보게 되는구나’ 같은 기대감을 가지며 극장으로 간다

 

<서울아트시네마>에 처음 방문했던 기억도 아직 남아 있나. 처음이 기억나지 않는다면, 남아 있는 기억 중 최초의 것을 말해줘도 좋다

 

영화를 좋아하는 많은 사람에게 종로3가는 의미가 있는 곳이다. <단성사>부터 시작해 <피카디리>도 있었고, <서울극장>도, 종로3가는 극장으로 가득 차 있는 곳이다. 그래서 종로3가 자체가 내게 우선 특별했다. 지금 기억나는 건, 종로3가 거리의 맛있는 식당들. 냉면집이나 국밥집 혹은 극장 앞에 있는 오징어 파는 포장마차. 그리고 극장 옆 상가 1층의 식당이 계속 바뀌었는데. 그런 변화가 기억난다

 

<서울아트시네마>에 도착했을 때 반복하게 되는 행위가 있나? 나 같은 경우엔 종로3가역 14번 출구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와 바로 극장으로 향한다. 우선 표를 발권하고, 받은 표를 뒷주머니에 대충 찔러 넣은 뒤, 같은 층에 있는 스타벅스에 가 커피를 포장한다. 그리고는 극장을 나와 담배를 태우기 위해 옆 골목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하고 나면 상영 시간이 약 15분에서 20분 정도 남게 되는데, 그때 다시 극장으로 들어가 1층 화장실에서 손을 씻은 뒤, 상영관이 있는 3층으로 올라가 가장 빨리 상영관으로 입장한다. 그렇게 자리에 앉아 오늘 나와 같은 영화를 볼 사람들이 들어오는 걸 구경하며 영화를 기다린다

 

아까 말한 게 루틴인 것 같다. <을지면옥> 갔다가, <을지다방> 가고 하는 그런 게 시간 맞으면 내가 하는 루틴이다. 영화 보는 동안 커피나 다른 음료는 잘 마시지 않고. 조금 일찍 도착하면 <서울아트시네마>의 프로그램들을 꼼꼼히 살핀다.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스케줄러에 다 담아 놓기도 쉽지 않아서 프로그램 책자를 꼼꼼히 살피며 다음엔 어떤 영화를 볼지 생각한다. 이게 루틴이라면 루틴이겠다

 

말해준 대로 <서울아트시네마>엔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는데, 그중 특별히 아끼는 프로그램이 있나

 

영화 감독님이나 관계자분들이 추천해주신 영화를 볼 수 있는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를 좋아한다. 작년에도 변영주 감독님이 추천하셨던 <네트워크>와 김지운 감독님이 추천하신 <겨울의 심장>을 봤다. 특히 영화가 끝나고 난 뒤, 해당 상영작을 추천해주신 분과 대화 나누는 시간이 좋다. 감독이 직접 자신이 애정을 가진 영화에 관해 설명하는 걸 들을 기회는 거의 없지 않나. 그래서 더욱 특별하다. 이번엔 어떤 분이 어떤 영화를 추천했을까 하고 기다리게 되는 마음도 있고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봤던 영화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뭔가

 

방금 말한 <네트워크>와 <겨울의 심장>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겨울의 심장>은 김지운 감독님이 남자 주인공의 입장이 돼서 절절하게 설명해주셨는데, 그 생각이 난다. 김지운 감독님의 영화를 다 봤기에, 그분께서 그런 설명을 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장르의 끝까지 가시는 분이지 않나. 한국 영화의 너비를 계속 넓혀 가시는 분인데, 그런 분이 단 한 사람의 심정에 대해 절절하게 말씀하시니 전혀 새롭게 들렸다. 영화를 만들 때와 즐길 때는 또 다르구나 하고 생각하기도 했고. 변영주 감독님이 <네트워크>를 설명해주실 땐, 감독님이 쓰신 책과 만드신 영화에서 좋아했던 감독님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용기를 내서 책에 싸인도 받았는데, 우리 카페에 오신 적도 있다 해서 기분이 더 좋더라

 

종로3가의 <서울아트시네마>는 이제 끝이다. 그리고 어떤 건물도, 그저 건물로써만 존재하진 않는다. 건물은 건물이 서 있는 거리의 일부가 되고, 그 거리를 담은 풍경의 오브제가 된다. 훗날 종로3가의 <서울아트시네마>를 생각하면 어떤 풍경이 떠오를 것 같나

 

코로나 이후, 극장의 문이 잠깐 닫혔다가 다시 영화를 볼 수 있게 됐을 때, 그때 사람들이 극장에 와 방역수칙을 지켜가며 영화를 보던 모습이 떠오를 것 같다. 에스컬레이터를 타도 거리를 잘 유지하고, 앉아서 영화를 볼 때 지켜야 할 것들을 잘 지키던 그 모습들. 밀폐돼 있고 사람이 모일 수밖에 없는 극장에선 방영수칙을 지키는 게 어렵지 않나. 그럼에도 스크린으로 영화를 보겠다는 마음 하나로, 그 불편함을 다 감수하고 극장에 모인 모습 자체가 나에겐 동질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나처럼 영화를 좋아하고, 시네마테크를 좋아하고, <서울아트시네마>를 좋아하는 사람이 또 있구나 하는 동질감. 일면식도 없고, 전혀 모르는 분들이지만 큰 의미에서 동지애가 느껴지고, 뭉클했다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나도 너무 그 마음을 알겠다, 뭉클해진다

 

<서울아트시네마>에 관한 얘기를 해보자고 연락받았을 때, 생각이 많아졌었다. <서울아트시네마>에 영화를 보러 오는 사람의 마음이 다 비슷한 마음일 거란 생각도 했고

 

훗날 누군가에게 종로3가 <서울아트시네마>에 관한 얘기를 해줄 일이 있다면. 뭐라고 말할 것 같나

 

<서울아트시네마>는 나에게 언제나 큰 극장 속 아지트 같은 느낌이다. 으리으리하게 기세를 과시하는 극장은 아니었지만, 작더라도, 조금 불편하더라도, 다수의 관객과 동선이 조금 다르더라도, 그것들이 전혀 불편한 것으로 다가오지 않게 만드는 극장이었다고 설명하려나.. 음., 결국은 설명을 잘 못 할 거 같다. 이 감각이나 감정을 설명하기 어렵다. 내가 여동생이 있다. 여동생은 아이가 있고. 여동생에게 ‘아이가 있는 기분은 어때?’ 하고 물었더니, 한참 고민하다 설명을 잘 못 하겠다고 하더라. 이것도 마찬가지로 내가 여기를 너무 좋아하고, 크게 느끼니,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기가 힘들 것 같다

 

그 말이 또 좋은 설명이 되지 않겠나. 마지막 질문이다. 그동안 종로3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본 영화로 <서울아트시네마>의 상영 시간표를 짜 달라. <서울아트시네마>는 하루에 3회 상영하니까, 오후 2시와 4시 그리고 8시에 틀 영화를 말해주면 된다

 

뭐가 있을까... 음.. 1회차로 <엘리펀트>를 틀 것 같다. 2회차로는 ‘기타노 다케시’의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 3회차로는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본 영화는 아니지만, 그래도 꼭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보고 싶은 ‘임권택’ 감독님의 <길소뜸>

 

덧붙이고 싶은 얘기가 있나

 

<서울아트시네마>를 찾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영화라는 매체에 애정을 많이 가진 사람일 테니까. 또 다른 장소에서, 동지애를 느끼면서, 같이 재밌게 영화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서울아트시네마>를 운영하시는 분들이 극장의 명맥을 유지해주시는 게 정말 고맙다. 나도 회사를 운영하면서 매번 어려움을 느낀다. 정말 어렵다.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마음과 응원을 전하고 싶다


<서울아트시네마> - 관객 김병기

2021년 11월 24일의 대화 

 


<대화록>은 그동안 대화 상대의 소개를 부탁한 적이 없다. 하지만 이번 대화는, 종로3가 <서울아트시네마>에 다양한 사람의 기억이 존재한다는 걸, 간접적으로나마 보여주기 위해 소개를 부탁하려 한다. 쑥스럽겠지만

 

<서울아트시네마>와 <한국영상자료원>을 베이스로 활동하는 영화 평론가 오진우라고 한다

 

베이스로 활동한다는 말이 재밌게 들린다. 조금 더 설명해줄 수 있나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본 두 편의 영화를 녹여 쓴 글로 등단했다. 등단하고 보니, 기존의 평론가들은 이미 <서울아트시네마>를 많이 다니신 것 같더라. 나는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이니, 더욱 자주 <서울아트시네마>에 드나 드려 한다

 

때론 영화가 표를 예매하는 순간부터, 혹은 극장으로 출발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서울아트시네마>까지 가는 경로가 어떻게 되나

 

집이 연신내 쪽이라 3호선을 타고 종로3가로 오면 편하긴 하지만, 그렇게는 거의 안 갔다. 두 시간 정도 일찍 나와 버스를 타고, 광화문에 있는 교보문고에 먼저 들렸다. 오늘도 그렇게 왔고. 책 한 권을 사거나, 살펴보다, 길게는 한 시간, 짧으면 삼십 분 사이에 극장으로 온다. 극장에 도착하면 지금은 사라진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고, 상영관으로 올라갔다

 

극장에 가 영화를 보는 건, 일상적인 행위인 동시에, 작은 이벤트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기 위해 <서울아트시네마>로 가는 길에서 어떤 생각들을 했나

 

크게 없다. 그런 상상은 가끔 한다. 내가 프로그래머라면 작품을 어떻게 수급할 것이며, 책자는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하는 것들. 동시에 체급을 좀 키워야겠단 생각도 하고. 저런 책자들에 내 글을 실으면 좋겠는데, 나는 아직 급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기존에 영화도 많이 보고, 글도 많이 쓴 상태에서 등단했다면 이런 생각을 안 할 텐데, 난 빨리 된 편이라 지금부터 쌓아가야 하는 입장이다. 뒤따라가는 입장이고. 아, 그래서 그런 생각을 자주 한다. 내가 보는 이 영화들을 다른 평론가들은 이미 다 봤겠구나 하는. 나는 이제 시작이니까, 이미 다 했던 얘기를 또 할 순 없으니까, 난 다르게 봐야겠지? 그런 식의 생각

 

영화에 관한 글을 쓴 것이 얼마 되지 않은 건가

 

그렇다. 영화의 팬으로 블로그에 글을 쓴다던지 그런 적이 없다. 한예종 입학하면서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었다. <서울아트시네마>에 온 것도 그때가 처음이고

 


<서울아트시네마>에 처음 방문했던 기억도 아직 남아 있나. 처음이 기억나지 않는다면, 남아 있는 기억 중 가장 최초의 것을 말해줘도 좋다

 

헷갈릴까 봐 적어왔다. 2018년도에 학교 선생님이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35mm 필름 투어>란 프로그램 중 <시네마 퓨처>란 작품을 추천해주셨다. 기획전의 감독인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는 안 봤고, 이 영화만 봤다. 추천해주신 선생님도 우연히 여기서 만났고. 그게 첫 기억이다. 필름이 사라져가는 시대에, 역설적으로 필름이 가장 보관하기 쉬운 저장 장치라는 것을 얘기하며, 시네마의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영화였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터뷰도 담겨 있다고 해서 더 궁금했던 영화다. 공간에 관한 기억은.. 조금 생뚱맞지만, 내 몸에 의자가 가장 잘 맞는다는 느낌? 그게 아주 마음에 들었다. 또 나는 주로 맨 뒤에 앉아 사람 구경을 하는 편인데, 자주 오시는 분도 꽤 보인다. 그분들끼리 인사하는 것도 보게 되고. 그걸 보면 또 ‘아, 이게 커뮤니티가 있구나, 저렇게도 만나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난 늘 혼자서 다닌 사람이니까

 

다른 극장이 아닌, <서울아트시네마>를 방문할 때 특별히 하게 되는 생각이 있을까. 나는 여기서 트는 영화가 다소 어렵기도 해서, 기대하는 동시에 걱정도 하고, 걱정하다가도 정확히 보고 싶다는 승부욕 같은 게 생기기도 하더라. 좋은 영화를 보게 될 거란 신뢰도 당연히 있고

 

일단 ‘졸면 안 되겠다.’ 커피를 마시는 것도 그런 이유고. 볼 영화를 꼭 알아야겠다 하는 마음은 없다. 덜고 시작하는 편이다. 모를 수도 있는 거니까. 최근에 <아네트>를 보다가도 중간에 나왔다. 하지만 <서울아트시네마>에 오면 그건 있다. 프로그래머가 한 선택에 대한 존중이 있기 때문에 절대 중간에 나가진 않는다. 믿음이 있으니까. 그리고 나는 주로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보고, 아니면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영화를 보기 때문에, 어쩌면 거의 유일하게 돈을 지불하고 영화를 보는 곳이 <서울아트시네마>다. 시사회나 <한국영상자료원>을 통해 돈을 아끼게 됐으니, 그 아낀 돈의 최소 절반 정도라도 내 공력을 위해 써야 한다는 생각인데, 그러기에 가장 마땅한 곳이 <서울아트시네마>다

 

<서울아트시네마>엔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고, 말해준 대로 프로그램 대부분에서 프로그래머의 신중한 선택이 느껴진다. 그중 특별히 아끼는 프로그램이 있나

 

나는 프로그램보단 영화에 꽂혀 <서울아트시네마>를 찾았던 것 같다.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피닉스>나 ‘오다 가오리’의 <세노테>가 생각난다. 못 봐서 아쉬운 건 ‘하마구치 류스케’ 특별전. 학교 마지막 학기라 정신이 나가 있어서 영화를 많이 안 볼 때다. 그래서 저걸 놓쳤는데, 땅을 치며 후회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는데,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봤던 영화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뭔가

 

<피닉스>, ‘기욤 브락’의 <보물섬>, <러브 어페어: 우리가 말하는 것, 우리가 하는 것> 그리고 ‘요지 야마모토’의 컬렉션을 다룬 ‘빔 벤더스’의 영화 <도시와 옷에 놓인 공책> 정도가 생각난다. <피닉스>는 이 극장과의 무드가 잘 맞았던 것 같다. 영화 시작 전에 항상 틀어주는 영상이 있지 않나. 그게 나오고, 암전되고, 반주가 딱 나오는데 ‘끝났구나’ 생각했다. 참 근사하게 영화를 만든다는 생각에 빠지기도 했고. 올해 김병규 평론가가 ‘씨네21’에서 진행한 ‘2010~2020 영화 베스트’ 리스트에 <피닉스>를 뽑았었는데, 당시엔 못 본 상태라 도대체 이게 뭘까 했었다. 그러다 이걸 본 뒤엔 단박에 이해했다. ‘이분들은 이미 다 봤구나... 아직도 멀었다..’라는 생각과 함께

 

종로 3가의 <서울아트시네마>는 이제 끝이다. 그리고 어떤 건물도 그저 건물로써만 존재하진 않는다. 건물은 건물이 서 있는 거리의 일부가 되고, 그 거리를 담은 풍경의 오브제가 된다. 훗날 종로3가의 <서울아트시네마>를 생각하면 어떤 풍경이 떠오를 것 같나

 

그 정도로 나에게 추억이 있는지.. 모르겠다. 보통 크레딧이 올라갈 때 나는 나가버리는 편인데, 여기에 오면 그래도 최대한 있어 보려 한다. 그 분위기를 보면서. 처음 왔을 땐 왜 불을 안 켜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내가 나가면 다른 관객에게 방해가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다 모르는 관객이지만, 하나가 되는 느낌이 있다. 맨 뒤에서 보면 더 강하게 느끼고. 그 느낌이 간혹 생각날 것 같다

 

갑자기 궁금해진 건데, 제일 뒤에 앉는 이유가 있나

 

우선 앉은키가 크기 때문에 앞에 앉으면 방해가 될 거 같고.. 내 뒤에 아무도 없으니 편하기도 하다. 좀 꼼지락거릴 수도 있고

 


훗날 누군가에게 종로3가 <서울아트시네마>에 관한 얘기를 해줄 일이 있다면. 뭐라고 말할 것 같나

 

그럴싸한 말들을 준비 못 해서... 음.. 싫어하는 분들도 많지만, 나는 그냥 쓰겠다. 시네필의 성지. 여기는 진짜 영화 좋아하는 사람들이 오는구나, 나도 늙어서까지 여기를 다녀야겠다고 늘 생각한다. 간혹가다가 사적으로 아는 건 아니지만, 내가 얼굴을 아는 평론가들을 극장에서 볼 때가 있다. 그럼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하는 뿌듯함도 있고. 동시에 저분도 저렇게 열심히 다니는데 내가 뭐라고.. 그런 생각도 한다. 시네필이란 말에 관한 논의가 많은데, 뭐 나는 시네필이 되고 싶은 사람이니까. <서울아트시네마>는 시네필의 성지다, 뭐 그렇게 정리하겠다

 

마지막 질문이다. 그동안 종로3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본 영화로 <서울아트시네마>의 상영 시간표를 짜 달라. <서울아트시네마>는 하루에 3회 상영하니까, 오후 2시와 4시 그리고 8시에 틀 영화를 말해주면 된다

 

제일 마지막은 희망으로 가겠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 그리고 나는 극과 극을 좋아하니, 그 전엔 <뉴 오더>, 맨 처음엔 한국 영화를 틀자. <얼굴들> 이 세 편이 다 동시대 영화라고 생각한다. 요즘 동시대성, 동시대 영화라고 통칭하며 많은 얘기가 나오는데, 그저 지금 만들어진 영화라 해서 동시대 영화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당대에 공유하는 어떤 걸 녹여내야 동시대성이 있는 거라 생각하는데, 부산에서 봤던 <드라이브 마이 카>는 대단하게 녹여냈더라. ‘짱이다’, ‘거장이다’ 생각했다. 이 영화가 희망이라면 절망의 끝에 <뉴 오더>가 있다. <얼굴들>은 희망-절망과는 상관없지만,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의 동시대성을 가늠할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강현’ 감독의 다음 작품이 왜 안 나올까 늘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다


<서울아트시네마> 관객 - 오진우 

2021년 11월 27일의 대화



<대화록>은 그동안 대화 상대의 소개를 부탁한 적이 없다. 하지만 이번 대화는, 종로3가 <서울아트시네마>에 다양한 사람의 기억이 존재한다는 걸, 간접적으로나마 보여주기 위해 소개를 부탁하려 한다. 쑥스럽겠지만

 

김: 안녕하세요.. 저는 김.은.정이고, 24세 딸을 둔 50세 엄마입니다

신: 안녕하세요.. 저는 신채..린이고.. 어쩌다 보니 영화 전공을 하고 있는 24살 여자입니다

 

때론 영화가 표를 예매하는 순간부터, 혹은 극장으로 출발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서울아트시네마>까지 가는 경로가 어떻게 되나

 

신: 처음 <서울아트시네마>에 간 건 대치동 살 때였다. 그 이후 같은 3호선 라인이지만, 보다 서울 외곽으로 이사했고, 지금은 아예 경기도까지 나가버렸다. 근데 오히려 여기로 오고 <서울아트시네마엔 더 많이 갔다

김: 맞다, 프랑스 영화 보러 많이 갔다. 근데 원하는 대답이 이런 게 맞나?

 

원하는 대답 같은 건 없다. 경로에 대해 물은 거긴 하지만..

 

살았던 곳들이 다 3호선이어서 지하철을 타고 종로 3가로 갔다. 15번 출구였나?

그런 거까진... 대치에 살 때나, 이쪽에 살 때나, 종로3가가 중간이라 걸리는 시간은 비슷했다

아, 교보문고를 자주 들렀다

그렇게 되면 3호선을 타고 온 게 아니게 되는데.. 어찌 됐든, 얘가 워낙 교보문고를 좋아한다. 책을 들고 영화 보러 가면 무거운데, 그래서 나는 안 사길 바라는데, 꼭 이렇게 책을 들고 극장에 가려 한다. 그럼 나는 너무 힘들다

 

책을 옆구리에 끼고 극장에 가고 싶은 그런 마음 아닌가

 

맞다, 책을 꼭 사야 한다

인터넷으로 사라, 사진만 찍어 놔라 해도 꼭 사야 된다고 한다. 집에 와서 읽지도 않으면서

 


둘의 대화 호흡이 좋아 너무 재밌지만, 정리하기 쉽지 않겠다는 걱정은 조금 든다.. 뭐 그건 내가 할 일이니.. 계속해보자. 극장에 가 영화를 보는 건, 일상적인 행위인 동시에, 작은 이벤트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기 위해 <서울아트시네마>로 가는 길에서 어떤 생각들을 했나

 

일단 딸이 나랑 영화를 같이 봐주는 것 자체만으로도 고맙고 기분 좋다. 내가 먼저 가자고 한 적은 없다. 얘가 먼저 가자고 해주니 좋다. 같이 나가면 티격태격할 때도 있지만. 내가 원래 영화 자체를 워낙 좋아한다. 그래서 이미 본 영화인데, 봤다고 안 하고 같이 간 적도 많다. 내가 얘 나이 때 봤던 영화도 같이 많이 봤는데, 다시 보니까 기억이 전혀 안 나는 것도 있고, 다시 보니 더 좋은 것도 있더라. 거의 30년 가까이 지나서 다시 본 거니까. 여러 가지 생각이 많이 든다. 내가 젊을 때 유명했던 영화를 얘가 보고 좋아하는 모습이 재밌기도 하고. 그리고 종로3가는 내가 얘 나이 때 핫했던 동네니까. 그 기억을 다시 떠올린다. 나도 얘 나이 때 혼자 영화 보는 걸 좋아했다. 결혼하기 전까진 그랬는데, 결혼하고 나서는 전혀 혼자 영화 볼 기회가 없었다

내가 일본 영화를 좋아하는데, 그것도 엄마의 영향이 크다. 엄마가 집에서 일본 영화와 드라마를 계속 봤다. 일본 중독인 것처럼

나는 일본 영화 중에서도 가족 영화를 좋아했는데, ‘고레에다 히로카즈’처럼 유명한 감독의 영화도, 감독을 알았다기보단 영화가 좋아서 그냥 봤다. 보고 나니 얘도 보면 좋겠다 싶어 보여줬고. 얘랑 같이 일본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관련된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었다. 근데 요즘은 괜히 그랬나 싶기도 하다. 얘가 일본에 가서 영화 공부를 한다고 하니까. 어릴 때 간다고 하면 모르겠는데, 나이 들어서 그런다고 하니까..

아직 20대 초반인데 나이가 들긴.. 아무튼, 엄마가 본 영화에 관한 얘기를 워낙 재밌게 잘해준다. 연기를 섞어가면서. 엄마랑 처음 <서울아트시네마>에 왔던 것도, ‘하마구치 류스케’ 특별전을 보기 위해서였다

에이, 어릴 땐 일본 애니메이션 많이 보러 갔지

아니.. 지금은 <서울아트시네마> 얘기 하는 거니까..

아? 그런가?

아무튼 그래서 다시 돌아가자면, 엄마랑 같이 영화 보러 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지금 내 나이와 비슷했던 시절에 엄마도 종로에 와 영화를 봤다고 하니까, 처음엔 그게 굉장히 의외였다. 이런 걸 엄마가 좋아했다고? 하면서. 내가 딸이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내가 가진 엄마의 이미지엔 보수적인 느낌도 있다. 그래서 이런 영화는 감당 못 할 것 같다 생각했는데, 이미 내 나이 때 다 봤었다고 하고, 혼자 영화 보러 갔었다 하니 놀라웠다. 엄마의 그때를 상상해보기도 하며 <서울아트시네마>로 갔었던 것 같다. 나랑 엄마랑 친구였으면 어땠을까 그런 상상도 해보고

 

아까 <서울아트시네마>에 오면 옛날 기억이 떠오른다고 했는데, 그 기억을 좀 더 들어볼 수 있을까

 

내가 스물하나, 스물둘 정도였는데.. 그때는 아트시네마 이런 건 따로 없었고, 내 기억엔 종로2가 <코아아트홀>이 있었다. 프랑스 영화나 예술 영화는 거기서 자주 봤다. 그냥 개봉하는 영화는 친구들이랑 <피카디리>, <서울극장>, <단성사>에 가서 봤고, 혼자 영화를 볼 땐 <코아아트홀>에서 두 편, 세 편씩 봤다. 그 당시엔 프랑스 영화를 많이 해줬다. 제목은 잘 기억 안 나지만, 내가 좀 심심하고, 우리 신랑 기준에선 졸린 영화를 좋아한다. 그런 스타일이다 내가

 


<서울아트시네마>에 처음 방문했던 기억도 아직 남아 있나. 처음이 기억나지 않는다면, 남아 있는 기억 중 가장 최초의 것을 말해줘도 좋다

 

일단 극장에 딱 들어가면 할아버지가 계시지 않나. 그게 참 좋았다. 예매하고, 표 끊고 할 때 줄을 서야 했던 시절도 생각나고. 옛날엔 티켓도 다 모으고, 성냥도 모으고 그랬는데.. 그걸 왜 모았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다 버렸다

그걸 왜 버려

그러니까, 아무튼 요즘은 <서울아트시네마> 티켓 같은 그런 티켓이 잘 없으니까. 그리고 티켓을 끊으러 갔는데 조그만 창구가 있었고, 거기도 할아버지가 계셨다. 창구의 구멍으로 티켓을 주고받는데 그게 너무 좋더라. 아트시네마란 이름이랑도 너무 잘 어울리고. 내 스타일이었다. 깨끗하기도 하고, ‘이런 데가 있었나?’ 했다

나는 좀 다르다. 난 점점 좋아진 케이스다. 그동안 다녔던 영화관은 다 큰 곳이었으니까. 여긴 겉에서부터.. 입구인 줄 알고 들어갔더니 스타벅스고.. 길도 잘 모르겠고, 티켓을 어디서 끊어야 할 지도 모르겠고, <서울아트시네마>, <인디스페이스>, <서울극장> 세 개가 같이 있으니까 그것도 너무 복잡했다. 엄마가 좋다고 한 티켓 창구도 ‘이게 뭐지?’ 싶었다. 난 기계로 뽑는 게 익숙했으니까. 상영관 들어갔을 때 크기가 작은 것도 신기했는데, 영화 시작 전에 나오는 트레일러가 너무 좋은 바람에 당황하고 신기했던 마음이 조금씩 풀어지며 이곳이 좋아졌다

 

그때 봤던 영화가 <아사코>였는데, 영화는 어땠나

 

얘가 <아사코>를 진짜 좋아하더라고. 얘는 두 번?

아니다, 세 번, 네 번 봤다. 엄마아빠 여행 갔을 때, 몰래 혼자 심야 보러 갔다 오고 그랬다. 너무 인상적이어서 쇼크 먹었다. 그때 감독이 와서 GV를 했는데, 사실 그렇게 팬은 아니었지만 줄 서서 싸인도 받았다. 아직도 가지고 있다. 아, 그리고 GV를 보는 게 처음이어서, 사람들이 질문하는데 너무 신기했다. ‘난 영화 볼 때 그냥 보는데.. 사람들은 엄청 생각하면서 보는구나..’ 하면서 감명받았다

나만 그냥 일개 아줌마였던 것 같다. 어머.. 이런 데는 저런 젊은 사람들이 오는구나.. 그래도 얘는 젊지만, 나는 좀 그런 거다. 저렇게 똑똑하고 많이 아는 젊은이들이 많다는 게.. 근데 얘는 일본에 가 공부를 한다고 하고 있으니.. 얘는 왜 일본에 간다고 할까?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금도 그게 의문이고. 뭐.. 본인이 좋으니 거기서 영화 공부를 해보겠다고 하는 거겠지만. <아사코>는 배우들이 본인들에게 딱 맞는 캐릭터를 연기했다고 생각하면서 본 정도였다

 

<서울아트시네마>에 도착했을 때 반복하게 되는 행위가 있나? 나 같은 경우엔 종로3가역 14번 출구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와 바로 극장으로 향한다. 극장에서 우선 표를 발권하고, 받은 표를 뒷주머니에 대충 찔러 넣은 뒤, 같은 층에 있는 스타벅스에 가 커피를 포장한다. 그리고는 극장을 나와 담배를 태우기 위해 옆 골목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하고 나면 상영 시간이 약 15분에서 20분 정도 남게 되는데, 그때 화장실에 가 손을 한번 씻은 뒤, 상영관이 있는 3층으로 올라가 가장 빨리 상영관으로 입장한다. 그렇게 자리에 앉아 오늘 나와 같은 영화를 볼 사람들이 들어오는 걸 구경하며 영화를 기다린다

 

우리도 거의 1등으로 들어가는 편이다. 아무도 없을 때 들어와서 얘 사진을 막 찍어준다. 티켓 들고 상영관이랑 같이도 찍고. 이번에 <세 가지 색> 시리즈를 봤을 땐 머리가 희끗희끗하신 어르신들이 되게 많았다. 깜짝 놀랐다. 저분들의 연세는 나의 부모님과 비슷할 텐데, 이 영화를 과거에 봤기에 다시 보러 오신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너무 멋있었다. 나도 저 나이까지 예술 영화 보러 다닐 수 있으면 좋겠단 상상도 했고. 딸 혹은 남편이랑. 그러면서 반성도 했다. 우리 엄마를 저렇게 모시고 간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루틴 하니까 생각나는 게, 극장 근처에 무인 라면 가게가 있다. 한강 라면 기계 같은 걸 두고 하는 가겐데, 엄마랑 나랑 그걸 어느 날 갑자기 발견했다. 영화 시작 전이어서 먹진 못했고, 끝나고 나와 먹으러 갔는데 너무 좋더라. 우리 둘밖에 없었고

우리 둘 다 길을 잘 못 찾아서 막 헤매다가 발견했다. 진짜 거기서 영화 찍어도 될 것 같다. <중경삼림> 이런 게 생각났다. ‘금성무가 여기서 라면을 먹으면 어울리겠다.’ 그런 생각을 혼자 했다

나도 처음 듣는 얘긴데?

그 가게가 좀 그랬다. 옛날 스타일로

 

다른 극장이 아닌, <서울아트시네마>를 방문할 때 특별히 하게 되는 생각이 있을까. 나는 여기서 트는 영화가 다소 어렵기도 해서, 기대하는 동시에 걱정도 하고, 걱정하다가도 잘 보고 싶다는 승부욕 같은 게 생기기도 하더라. 좋은 영화를 보게 될 거란 신뢰도 당연히 있고

 

 <서울아트시네마>를 알게 되고 나서 큰 영화관을 간 적이 거의 없다. <아트나인>이나, <에무시네마>, <대한극장>을 종종 갔고, 주로 <서울아트시네마>로 갔다. 극장만의 프로그램이 있고, 특별전을 만들고 하는 것의 매력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런 거라 생각한다. 오랜만에 가면 벽에 붙어 있는 상영시간표나 프로그램을 보면서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되는데, 그런 것도 좋다. 항상 기대가 된다. 비교적 작은 극장들을 다니게 된 것의 계기가 <서울아트시네마>다

뭘 볼 건진 얘가 정하니까, 그게 대부분은 신작이 아니었다. 재개봉하는 걸 자주 봤다. 쟤가 재밌어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많았다. 그리고 나도 다시 봤을 때 재밌어야 할 텐데? 그래서 얘랑 대화할 게 있어야 할 텐데? 그런 기대를 하면서 극장으로 갔다. 역시나 좋았던 게 많고. 극장에 가서 벽에 붙어 있는 포스터를 보면 다 보고 싶어진다. 그래서 극장이 집 앞에 있으면 좋겠다 생각하게 되고. 왜 이런 좋은 극장이 서울에만 있는지, 집 근처에도 좀 있고 하면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한다. 큰 영화관에도 한두 관 정도는 이런 영화들을 좀 틀면 좋겠다. 그리고 남편이 있으니까, 맨날 남편 혼자 집에 두고 영화를 보러 가게 되는데, 근데 또 같이 가자고 하면 자기는 영화 취향이 달라서 안 가니까.. 그런 건 아무래도 좀 미안하고 불편한 마음이 있다. 얘랑 같이 셋이 갈 수 있으면 가장 좋겠다

 


그렇게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봤던 영화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뭔가

 

음... <세 가지 색 : 레드>? <세 가지 색 : 블루>도 괜찮았는데.. 나는 블루 할래, 너는 레드 해, 네가 레드 좋아했던 거 같아

레드도 좋았는데, <퐁네프의 연인들>이 좀 더 인상적이었던 거 같은데? 아니다. 그건 <서울극장>에서 본 영화 같다. 그럼 난 레드로 하겠다. 블루가 제일 유명하고, 좋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는 레드가 더 좋았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에서도 나온 그 주인공 배우가 너무 매력적이었다. 또 영화 초반, 카메라가 대상에 밀착해서 상황을 알 수 없게 촬영을 이어가는 장면이 있는데, 그 부분도 너무 매혹적이었다. 그 할아버지도 처음엔 ‘저 할아버지 뭐야’ 하며 조마조마했는데 멋진 인물로 끝나며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했다

난 영화를 스토리도 중요하지만, 연기에 더 집중해서 보는 것 같다. ‘줄리엣 비노쉬’가 워낙 연기를 잘하니까. 그냥 딱 그 여자다. 그래서 블루가 좋았다. 내용은 잊을 수도 있는데, 캐릭터와 배우는 잊히지 않는다

 

종로 3가의 <서울아트시네마>는 이제 끝이다. 어떤 건물도 그저 건물로써만 존재하진 않는다. 건물은 건물이 서 있는 거리의 일부가 되고, 그 거리를 담은 풍경의 오브제가 된다. 훗날 종로3가의 <서울아트시네마>를 생각하면 어떤 풍경이 떠오를 것 같나

 

포장마차? 사진을 막 찍었다. 포장마차를 못 본 지 꽤 오래됐는데, 이게 아직 있네 하면서. 옛날엔 종로에 영화를 보러 오면 거기가 다 포장마차였다. 떡튀순 부터 오징어, 쥐포, 문어 다리 뭐가 엄청 많았다. 그걸 다 사 들고 가서 영화를 보고 그랬는데.. 지금은 없을뿐더러, 있어도 코로나 때문에 잘 안 사 먹게 되니까. 나에겐 극장 근처의 모든 게 추억과 겹쳐지는 거 같다. 밤에 포장마차 불빛이 켜져 있으면 더욱더 아련해진다

난 종로3가역 출구 나와서부터 극장까지 가는 풍경. 아니면 거기 보석 파는 가게가 엄청 많으니까, 그런 것도 생각날 거 같다. 한 번밖에 안 먹었지만, 그 라면집도 인상 깊었고. 오징어, 맛밤 파는 포차도 생각날 거다. 무엇보다 영화 시작 전 트레일러가 많이 생각날 거 같다

 

훗날 누군가에게, 종로3가 <서울아트시네마>에 관한 얘기를 해줄 일이 있다면. 뭐라고 말할 것 같나

 

얘가 만약 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이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할머니가 스무 살 때 갔던 곳인데, 너희 엄마 스물네 살 때, 할머니가 오십일 때 같이 갔던 곳이기도 하고, 네가 볼 수 있는 영화가 곧 생긴다면 너네 엄마랑 할머니랑 너랑 같이 가고 싶은, 그렇게 좋은 극장이라고

난 일본의 학교에서 만나게 될 친구가 물어본다 가정해보겠다. 내가 아무것도 관여한 게 없지만, 자랑스럽게 말할 것 같다. 한국에 이렇게 멋있는 극장이 있었다고. 내가 영화를 더 좋아하게 된 계기이고, 엄마랑 같이 갔던 추억도 있고, 20대 초반에 힘들거나 방황할 때도 자주 갔던 곳이라, 나에겐 마음의 안식처였다고 말할 거 같다

 


마지막이다. 그동안 종로3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본 영화로 <서울아트시네마>의 상영 시간표를 짜 달라. <서울아트시네마>는 하루에 3회 상영하니까, 오후 2시와 4시 그리고 8시에 틀 영화를 말해주면 된다. 공동 프로그래머가 됐다 생각하고 말해 달라

 

우리가 처음 본 게 <아사코>니까 <아사코>를 넣자

<아사코>는 심야에 봤을 때 더 좋았는데

그럼 저녁에 넣어야겠네

아니야, 오히려 두 시가 나을 수도 있어. 애매한 시간에. <아사코>를 처음에 하고.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그건 몇 시에.. 볼까?

또 하나를 뭐 할 건데?

블루? 레드? 그럼 블루랑 레드 중에 하나 골라

근데 블루랑 레드랑 같이 하면 재미없잖아. 블루로 하자.

그래 뭐 블루. 블루를 저녁에 해?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을 중간에 끼우자

이유가 있어야 할 거 아냐

아냐, 그냥 딱 이렇게. <아사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블루>

 

좋다. 뭐 덧붙이고 싶은 말 있나?


보고 싶었는데 못 봤던 게 너무 많아서, 놓쳤던 사람들을 위해 꼭 다시 해줬으면 좋겠다. 이전한다면 강남 이런 곳은 가지 말고.. 좀 가까운 데 있었으면 좋겠다

종로 쪽에 있었으면.. 아무튼, 아트가 들어간 극장에서 하는 영화가 재밌다


<서울아트시네마> - 관객 김은정과 신채린

2021년 12월 10일의 대화



추신.

다소 긴 대화를 읽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조금 줄여볼까, 그게 아니면 2부로 나누어서 발행할까 고민하기도 했지만, 소중한 기억이 담긴 이 대화가, 한자리에 모여야만 한다는 욕심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렇게 불편하다 느끼실 수도 있는 형태로 발행하고야 말았습니다. 불편이란 건, 함께하기 위해선 감수해야만 할 것들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합니다. 조금 불편했지만, 그 불편을 금세 잊게 했던 좋은 영화와 소중한 기억을 만들어준 종로3가와 종로3가의 극장들에 고마움을 전하며, 자꾸만 이어가고 싶은 이 대화를 마치려 합니다. 고맙습니다.


zcott.camus@gmail.com

대화의 기억과 내용에 대한 권한은 

대화를 나눈 이들과 '대화록' 페이지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