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한 사랑 이야기가 특별할 수 있는 건, 단 하나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없다. 그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일 때. 나의 이야기가 된 사랑은 ‘심장이 뛴다’거나 ‘그 사람 얼굴에서 빛이 났다’는 둥, ‘떨려서 한숨도 제대로 못 잤다’ 등의 상투적인 표현을 유일하게 만들고, 이 감정을 조금이나마 설명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말이었음을 인정하게 만든다. 그렇게 사랑에 빠진 사람을 지켜본 적 있는가. 맹렬한 투명함으로 그 어떤 것에도 개의치 않고, 자신의 감정과 그 감정의 상대에만 집중하는 사람을. 만약 그 경험이 있다면, 정말로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있다면, 당신은 이제 사랑에 휘청거리는 이를 두고 유치하다거나, 어리석다는 말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부산 남포동의 카페 2층 창가 자리에 ‘최광훈’과 마주 앉았다. 그는 그날 거리의 어느 누구 보다 빛났다
만나게 돼 반갑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다. 아마도 내가 오랜만에 좋은 앨범을 들은 것에 관한 답례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실제로 마주 앉게 돼 정말 반갑다
나도 너무 반갑다. 내 음악에 나는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을 때 ‘드디어 누가 날 알아주는구나’ 하며 기분 좋았다. 난 거짓말 하는 거 안 좋아한다. 그래서 내 노래엔 내 이야기, 내 진심이 다 들어가 있는데, 그 진심을 누가 알아줬다는 마음이 들어 기분 좋았다. 친구가 생긴 느낌이었다
음악이 그런 것 같다. 어떤 음악을 듣고 그게 좋다고 느낄 땐, 정서가 통한다고 느끼기에 그런 경우가 많으니까. 날씨가 부쩍 추워졌다. 부산에 내려오기 전 옷을 챙기기 위해 날씨 정보를 봤더니 서울보다 10도 정도 높은 것으로 나와 안심했는데, 그래도 쌀쌀한 건 매한가지다. 앨범 나온 지 이제 다섯 달 정도 됐는데, 어떻게 지내고 있나
많지는 않지만, ‘김일두’ 형이 공연을 좀 해보라고 해서 작게나마 온라인 공연을 좀 했다. ‘기타고라스’라는 유튜브 채널에서도 공연했는데, 여기는 일두 형처럼 기타를 엄청 잘 치는 사람들만 나가는 곳이라 사실 나에게는 조금 무리가 있었다. 근데 내가 원래 좀 밀어붙이는 편이라,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했고, 그랬더니 진심이 또 뭐 전해졌는지 나름대로 공연이 재밌게 나왔다. 전자음악도 같이 하고 있어서 ‘바다 미술제’와도 작업했다. 물론 다음 앨범 작업도 하고 있고
현재는 다른 일도 병행하며 음악을 하고 있는 건가
맞다. 급하면 흔히 말하는 막일도 나가고 그런다. 디제이 했던 적이 있어서, 디제이 하러도 종종 나가고. 가리지 않는다. 누군가 날 보면 ‘쟨 예술가가 아니야. 너무 줏대 없이 이것저것 다 해’라고 할지 모르겠다. 근데 난 생존을 위해선 그렇게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노동과 작업을 같이 하는 게 좋다. 땀 흘리고 일하면서 노동의 대가나 가치에 관해서 고민한다. 작업도 농부처럼 부지런하게 해야 더 재밌고, 건강하고, 공감하게끔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일도 아침부터 삼광사에 가야 한다. 노동하러. 오는 일을 마다 안 한다
중요한 얘기다. 예술한다 하면 어느 날 영감이 탁 떠올라, 쫙 펼쳐지는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모든 일이 그렇듯, 성실하게 쌓아 온 것들이 있어야만 영글어지는 시기가 존재한다. 나도 글을 쓰는 동시에 회사도 다닌다. 간혹 글쓰기로만 돈을 버는 게 맞지 않냐 묻는 사람도 있는데, 나 역시도 지금처럼 병행하는 게 더 좋다. 이런 병행이 내 글을 지키기도 하고. 아무튼, 내 고향에 왔으니 부산에 관한 얘기부터 하고 싶다. ‘최광훈’은 부산에서 작업하고, 활동한다. 부산에서 쭉 산 건가
고향은 부산이다. 대학교 때는 제주도에서 잠깐 살았고, 제대 후엔 다른 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충남 신창에서 살았다
그럼 20대의 대부분을 부산 밖에서 보낸 건가. 난 평생의 대부분을 부산에서 보냈을 거라 생각했다
그게 그렇게 된다
뭐, 부산에 쭉 안 살았다 해서 전혀 문제 될 건 없다. 다만, 부산에서 쭉 살았을 거라 예상한 건, <최광훈 1집>을 들었을 때, 그야말로 부산의 음악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산 안에서의 이동 경로가 궁금해지기도 했고. 그 경로를 좇아보면 <최광훈 1집>이 더 잘 이해될 것 같았다
태어나긴 온천장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동네에서 병원을 하셨고, 좋은 기억이 많다. ‘과일 아줌마’, ‘돼지 아줌마’ 하고 불렀던 분들이 잘 챙겨주시기도 했고, 술래잡기나 BB탄 총알 주우러 다니며 놀았다. 또 다른 기억은, 세 발 자전거 탈 때쯤이었는데, 몇십 년 만에 부산에 눈이 엄청나게 내렸다. 그 눈을 본 것도 온천장이었고. 유치원 때부터 친했던 친구가 김해로 이사하면서 이별했던 동네기도 하고. 뭐 어머니가 병원을 하시긴 했지만, 사정이 그리 넉넉지만은 않아서 집도 좀 좁고, 쥐도 많이 보고 그랬는데, 그래도 그때의 복작거림이나 화목함 같은 것들이 좋게 남아있다. 생각하면 따뜻함이 느껴진다. <순풍 산부인과>처럼 동네나 집에서 재미난 일이 많았다. 심지어 집에 도둑이 든 적도 있다. 뭐 그렇게 온천장에 살다가, 사기를 좀 당하면서 여기저기 옮겨 다녔다. 교대 앞 쪽에도 살고, 사직동에도 좀 살고, 안락동까지 왔다. 가족들은 현재 안락동에 있다. 난 부전동에 있고
좋은 기억이 많은 동네가 온천장이라고 했을 때, 특별히 아끼는 동네도 있나. 나 같은 경우엔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남포동 그리고 이 근방인 중앙동, 대청동, 자갈치 쪽을 좋아한다. 물론 내 기억의 양은 자란 동네에 훨씬 많지만, 부산을 떠올릴 때면 여러 가지 의미로 이쪽의 풍경으로 정리된다
온천장의 ‘오시게 시장’부터 해서 고철 관련 상점, 대문 파는 곳 등을 볼 수 있는 거리가 있는데, 아무래도 나는 그쪽이 제일 애틋하다. 그리고 웃긴 게 요즘 일두 형을 자주 만나다 보니까 형이 계신 대청동에 자주 온다. 일두 형이 컴퓨터를 잘 못 하시니까 나에게 전화해서 ‘혁아 잘 모르겠다.. 올 수 있나?’ 한다. 그럼 그렇게 와서 밥도 먹고, 자갈치, 영도대교 주변 바다 끼고 한 바퀴 돈다. 혼자서는 요즘 부전동에 사니까 부전시장 근처로 해서 쭉 걷고. 부전시장에 가면 부산의 뭔가를 느낄 수 있다. 짜게 드시는 분도 많고, 사람들이 거칠고, 화도 많다. 인간의 원초적인 그런 것들을 보게 된다. ‘안 깎아주나?’ 하면서 화내고, ‘깎아줬어요’ 하면서 또 화내고, 그분들을 비하하는 건 아니고, 자신을 감추려는 마음이 전혀 없다는 얘기다. 다 드러낸다. 가면 없이 맨얼굴로 다니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만큼 유쾌하고 재밌고.
부산 사람에 관한 얘기를 조금 해줬는데, 다른 지역에 비해 유독 부산 사람은 어떤 고유명사처럼 쓰이지 않나. 부산 사람은 이래. 부산 사람은 저래 하면서. 부산 사람끼리 한번 얘기해보자. 부산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일반화하고 싶진 않고, 다 특징이 있을 테니. 방금 말했듯 화를 화끈하게 낼 수 있다는 건, 폭발력 있고 실행력 있다는 거 아닐까. 화라는 걸 진행해야 하는 거니까. 그리고 또 느린 걸 싫어한다. 지지부진한걸 싫어하고 확실한 걸 좋아한다. 사랑하면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으면 ‘안 한다’ 이런 걸 원하는 느낌이랄까. 부산 사람을 많이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무례하다 느낄 수도 있는데, 그 무례함 속에는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이 섞여 있다. 상대를 좋아하는데 부끄러운 거다. 나도 어릴 땐 이런 성향들이 강했고, 나이 들면서 점점 둥글어졌다.
나는 부산에 오면 양가적인 마음이 든다. 고등학교 때부터 기숙사에 들어가면서 10년을 넘게 부산을 떠나 있었다. 제일 많이 놀고, 돌아다니는 시기엔 정작 부산에 없었던 거다. 그러다 보니 부산이 분명 내 고향이고, 내가 너무나 아끼는 도시가 맞음에도 어떨 때는 굉장히 낯설다. 그 낯선 기분이 쓸쓸함과 슬픔이 돼 오기도 하고. 그래서 오히려 더 부산에 집착했다. 고향이 자연스레 체화될 시간을 가지지 못했으니, 사후적으로라도 알아 가보자 하며 책도 사서 읽고, 이 동네 저 동네 다니며 엄청 걷고 그랬다. 그런 과정 끝에 나에게 정리된 부산 사람은 다정한 사람이다. 부산은 역사적으로도 외부인의 출입이 굉장히 잦았던 곳인데, 그러다 보니 타인에게 열려 있으면서도, 그만큼 이별에 익숙하기도 하다. 그래서 그 축적된 이별이 타지 사람들이 부산 사람을 볼 때 거칠고 배타적이라 느끼는 그 면을 만든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근데 또 그렇게 만들어진 면은 정말 얇아서, 조금만 안으로 들어가면 부산 사람 특유의 어쩔 수 없는 다정함이 있다. 이별을 염두에 두고 있으면서도 결국 다정할 수밖에 없는 다정함이랄까. 그런 다정함이, <최광훈 1집> 곳곳에 묻어있다.
아무래도 나의 진심을 드러내다 보면 부산을 떼 놓을 순 없으니까. 나의 거짓 없는 진심을 보여주다 보니 온천장 시절의 감성이 나왔다고 본다. 부산을 떠나 살 때는 살기가 힘들어 그런지 감수성이 사라지는 느낌을 종종 받았는데, 부산에 오면 안 그렇다. <최광훈 1집>은 감수성이 충만한 음악이니 부산이 드러났을 거다
음악 얘기가 시작됐으니 물어보겠다. 10대 때의 ‘최광훈’은 어떤 음악을 좋아했나 상상해보려 해도 짐작이 잘 안 되더라. ‘아이리버’나 ‘옙’, ‘파나소닉’ 등에서 나온 MP3가 인기 있던 시절이었고, 대부분의 남자 MP3엔 ‘SG워너비’, ‘버즈’, ‘먼데이키즈’ 등의 노래가 들어있었다. 노래 좀 한다는 놈들은 노래방에 가면 꼭 ‘야다’, ‘얀’, ‘더크로스’ 등의 노래를 불렀고
‘얀’.. ‘야다’... 나도 안다. 그때의 나는 뭔가 유쾌한 노래를 좋아했다. ‘컨츄리 꼬꼬’, ‘룰라’ 이런 사람들. ‘플라워’도 좋아했고. 아니면 아예 ‘들국화’, ‘노찾사’, ‘김현식’처럼 옛날 음악.. 이해도 잘 못 하면서 어머니가 좋아하셨기 때문에 집에 늘 틀어져 있었다. 그리고 또 내가 어릴 때 피아노를 배웠다 보니 연주곡도 종종 들었다
‘김현식’ 얘기를 하니 말하는 건데, <최광훈 1집>을 들으며 ‘김현식’, ‘유재하’ 생각을 종종 했고, 또 내 주변에선 ‘산울림’ 같다는 얘기도 하더라. 누가 됐던 80년대의 한국 대중음악이 가지고 있는 분위기가 <최광훈 1집>에도 존재한다
그걸 좀 노리긴 했다. 내가 촌스럽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가사 쓰는 거나, 얘기하는 내용이나. 그래서 가끔은 ‘야 이건 너무 갔다’ 하는 반응을 주변에서 보이기도 한다. 근데 난 오히려 그 부분을 부각하는 게 재밌을 거라 생각했다. 방금 언급했던 사람들 말곤 ‘손무현’이나 ‘오태호’의 노래도 좋아한다. 그런 담백한 가사와 노래 스타일이 좋다. 그런 스타일로, 꾸며내지 않은 내 얘기를 하는 거
어릴 때 피아노를 배웠다고 했는데, 음악을 시작한 건 언젠가, 사실 이런 질문을 할 때마다 어딘가 좀 걸리긴 한다. 보통은 특별한 계기 없이 그냥 이렇게 저렇게 시작하니까
4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다. 어려서 그런지 흡수력이 좋아 집에서도 피아니스트를 시키려고 했다. 그래서 영재 교육하듯 체계적으로 피아노를 배웠다. 그 후로 11년 정도를 더 쳤는데, 아까 말했던 사기를 당하면서 집에 빨간딱지가 붙었고, 피아노도 더는 칠 수 없게 됐다. 피아노를 못 치게 되니까 음악에 관심을 아예 안 두게 되더라. 아까 10대 때 들었다고 한 노래들은 사실, 친구들이 다 MP3를 들으니까, 나도 귀에 뭔가 껴야 하니까 들은 음악에 가깝다. ‘들국화’나 클래식, 재즈는 그냥 어머니가 집에 틀어놓으시니까 듣는 거였다. 어쩌면 억지로 들었다. 그 당시 나에게 음악은 ‘못 하는 거, 앞으로 할 수 없는 거’였으니까. 음악이 스트레스였다
2019년에 'PUSLECOM'이란 이름으로 전자음악 앨범을 냈다. 대충 계산해 봐도 피아노를 못 치게 된 시기와 2019년 사이엔 많은 시간이 존재한다. 어떻게 다시 음악을 하게 된 건가
발매 순서로 얘기해보면 2015년에 ‘ROCBLACK’이란 이름으로 힙합 앨범이 먼저다. 음악을 한참 안 듣다가 대학생 때 ‘빅뱅’을 ‘거짓말’을 듣고 너무 멋있어서 랩을 시작했다. 그게 음악을 다시 한 계기였다. 랩을 하다 보니 당시 부산에서 활동하던 ‘사이먼 도미닉’ 이나, ‘G.L(Goblin Laboratory)', ’두 사람‘ 등등을 알게 돼 그들의 음악도 많이 들었고. 그 사이에 뭐 보컬 학원도 다니고, 보컬 학원 선생님을 통해 밴드 ’플라워‘와 같이 일도 하고... 그러면서 곡을 쓰기 시작했는데... 아무튼 'ROCBLACK'이 먼저고, 그 이후 2019년에 'PULSECOM' 앨범이 냈다.
그다음 드디어 ‘최광훈’이 등장한다. 사실 당신의 본명은 ‘최혁’이고, 이번 앨범의 활동명은 ‘최광훈’이다. 근데 또 SNS를 보면 <최광훈 1집>에서 노래하는 사람은 ‘최광식’이라고 주장하더라. 세계관이 너무 복잡해서 알아보고 싶지도 않을 정도인데.. 그래도.. 뭐 대화를 하는 이유가 다 그런 거 아니겠나. ‘최혁 유니버스’의 세계관을 좀 이해시켜줬으면 좋겠다. 제발
일단 나는 ‘최혁’이 맞고, 먼저 등장하는 건 ‘최광식’이다. ‘최광식’은 2008년 정도를 살고 있는 대학생인데, 대학교 선배들과 간 등산에서 굴러떨어지며 미래로 오게 됐다. 근데 이 미래로 왔다는 것은 ‘최광식’이 하는 착각이다. 산에서 바로 응급실로 실려 와 코마 상태에 빠졌을 때 하게 되는 착각. 아무튼 ‘최광식’은 갑자기 미래로 와 과거의 촌스러운 음악을 하게 된다. 노래도 못 부르는데 계속 부르고. 자, 이제 ‘최광훈’은 ‘최광식’과 평행세계에 사는 2080년의 사람이다. 마치 드라마 ‘시그널’처럼 ‘최광식’과 ‘최광훈’이 교신을 주고받는다. 교신을 통해 ‘최광훈’이 ‘최광식’에게 전자음악도 가르쳐 주고... 그런 식으로 진행되는 건데, 계속 더 짜보려 했지만, 잘 안됐다. 이런 스토리가 그렇게 참신한 것도 아니고.
..음.. ‘최광식’이 먼저인 거 같은데.. 애초에 그러니까 ‘최광식’을 왜 만든 건가
<최광훈 1집>에 실린 노래들의 주인공 같은 친구가 있다. 그 친구와 저런 이야기를 하다 ‘최광식’이란 이름에 관해 얘기했고, 그 친구와 잘 안됐지만, 우리가 나눈 대화에 책임지고 싶었다. 하지만 잘 이어지지 않아서 ‘내가 이 정도 노력했으면 됐다’ 하는 마음으로 ‘최광식’은 그만 쓰게 됐고. 지금은 ‘최광훈’만 남았다
정확하게 이해는 안 되지만.. 뭐 더 듣는다고 다 이해될 것 같지도 않으니 넘어가자. <최광훈 1집>은 ’두루미 흥업‘을 통해 발매됐다. ’두루미 흥업‘은 우리 대화 사이에도 계속 등장 중인 ’김일두‘와 관련 있어 보이는데, ’두루미 흥업‘에 관한 소개를 해 달라
‘두루미 흥업’은 ‘김일두’ 형님이 대표로 있다. 일두 형을 처음 알게 된 건, 일두 형의 ‘뜨거운 불’이란 노래를 같이 작업하면서다. ‘김창희’ 형이라고 나의 전자음악 스승님이 계신데, 창희 형이랑 일두 형이 친해서 나보고도 같이 할 수 있겠냐 물어보시더라. 그래서 내 작업실에 모이게 됐고, 처음부터 합이 너무 좋았다. 그 노래의 건반도 내가 쳤고. 그렇게 합이 너무 좋으니 일두 형이 ‘이거 안 되겠다. 뭐라도 회사를 만들자’ 하면서 ‘두루미 흥업’이 탄생했다. ‘두루미 흥업’의 이름은 ‘대아 흥업’의 정신을 한 번 이어 받아보자는 마음으로 일두 형이 지었다고 들었다. 계약 조건이 아티스트에게 굉장히 유리하기도 하고, 아티스트를 위한 레이블이다. 지금은 ‘김일두’, ‘최광훈’ 그리고 ‘유라시아’라는 창원 쪽 밴드가 속해있다
하이징크스 뮤직 매거진 https://www.highjinkxmm.com/playlist/kim-ildu-playlist
내가 <최광훈 1집>을 알게 된 건 ‘김일두’가 ‘하이징크스’를 통해 소개한 플레이리스트 목록을 봤을 때다. 사실 영어 가사의 노래를 잘 못 듣기 때문에, 플레이 리스트 중 유일한 한국 제목 노래를 들은 거다. 이름도 좀 촌스럽길래 옛날 가수 중에 내가 모르는 사람인가 보다 했다. 나 말고도 ‘김일두’의 리스트를 통해 ‘최광훈’을 접한 사람이 꽤 될 거 같다
흠.. 너무 조용했다. 거의 뭐 쥐죽은 듯했다. 주변 사람들이 나도 모르게 여기저기 소개하고 있는 거 같긴 한데.. 뭐 조용하다
정말 미안하지만 처음 들었을 때 느낌은 ‘장난하나?’였다. 어딘가 구식인 드럼 소스와 역시나 구식인 신디사이저 곡 위로, 힘 하나 안 들이고, 좋은 의미가 아니라 정말 글자 그대로 힘 하나 안들인 목소리가 나오는데, 이게 지금 진지한 건지, 아니면 일종의 코미디 컨셉 앨범인 건지 잘 모르겠더라. 게다가 그 앨범커버, 분명 그 앨범 커버 속 아이는 아주 귀엽다. 하지만 폰트를 포함한 모든 디자인은 조금 화가 나더라. 근데 또 계속 눈이 가는 걸 보면 더 화가 나고.. 그렇게 화내며 진지함과 컨셉 사이의 물음표에서 헤매다 보니, 어느새 한 달 가까이 출퇴근 시간 내내 <최광훈 1집>을 듣고 있었다
너무 당연한 반응이고, 어떻게 보면 의도한 대로 됐다. 난 사람 웃길 줄은 모른다. 매사에 진지한 편이고. 근데 주변 형들이 ‘너는 그 진지한 게 웃기다, 웃겨서 어떤 사람들은 이 앨범이 장난 같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근데 그걸 정말 진심으로 하면 분명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 거다’라고 말하더라. 그래서 나도 그런 마음으로 했다.
앨범 디자인은 본인의 의지였나, 디자이너의 제안이었나. 그리고 저 아이는 누군가
‘두루미 흥업’의 창희 형이 제안해주셔서 내가 받아들였다. 옛날 한국 음악 앨범들을 보면 얼굴만 딱 있고, 다른 건 아무것도 없길래 그렇게 하자고 했다. 초등학교 입학 직전 정도의 내 얼굴이고. 사진이 워낙 촌스러우니, 디자인할 때도 그 점을 최대한 살려달라고 부탁했다. 디자이너 누나가 또 그 느낌을 잘 아셔서 커버가 잘 나왔다.
<족구왕>이란 영화를 보면 안재홍이 연기한 ‘홍만섭’이 짝사랑하던 ‘안나’에게 허접한 영어로 고백하는 장면이 있다. 그 영어는 정말 간단하고, 아무런 멋도 없지만, 그 장면이 주는 뭉클함은 엄청나다. <최광훈 1집>은 내게 그런 앨범이 돼버렸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최혁 유니버스’에 빠져버린 걸까 두렵기도 하다
‘족구왕’ 주인공에게도 내가 이입을 많이 했었다. 잘되면 좋겠는데.. 안 되더라고.. 결국, 잘생긴 사람한테 가더라. 그리고 만섭이도 보면 뭔가 미래에서 온 거 같은 느낌이 있다. 나와 분명 연결되는 영화라 생각한다. 너무 잘생긴 사람은 공감도 안 되고, 부전시장 지나가다 본 형님 같은 느낌의 주인공에게 이입이 된다
농담처럼 감상을 쭉 말했지만, 사실 귀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특히 가사 때문에. 모든 가사가 다 좋았지만, 앨범 수록곡 중 가장 많이 반복해 들었던 건, ‘별이 된다 해도’, ‘알 수 없는 미소에게’, ‘여전히 그때처럼 지금도’다. 굉장히 쉬운 단어로 담담하게 적혀 있는 가사를 보며 ‘최광훈’이란 캐릭터가 가사 쓰는 장면을 상상해 봤다. 책이라곤 한 줄도 안 읽어봤고, 연애 역시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그런데 또 나쁜 마음 품는 건 못하는 남자가, 새벽에 책상 스탠드만 켜둔 채 가사를 쓰고 있는 장면을. 울었다, 웃었다, 창밖을 바라봤다 하면서 이 가사들을 쓰지 않았을까. ‘최광훈’이 내 친구였다면 뒤통수를 한 대 갈겼을 거 같은데, 아마 그랬다 해도 ‘최광훈’은 웃으며 ‘괜찮아ㅎㅎ’ 말하고는 다시 가사 쓰기에 집중할 거 같아서, 내 마음이 더 아파지는 그런 상황이 올 것 같기도 했다. 말이 길어졌는데, 가사를 어떻게 썼나 궁금했다
우선 이 앨범의 주인공은 한 명이다. 그 친구가 나에겐 보석처럼 빛났다. ‘별이 된다 해도’ 같은 경우엔, 내가 별처럼 빛나는 사람이 아니고, 뒤에서 서포트해주는 사람이니까, 혹시라도 내가 별처럼 빛날 수 있다면 이 친구를 붙잡을 수 있을까 생각하며 쓴 가사다. 근데 뭐 그 친구에게 친구 이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답을, 그 답을 서울에 잠깐 올라왔을 때 숙소로 썼던 방에서 들었다. 그 얘기를 나눌 때 틀어져 있던 티비에선 웃긴 게 나오고 있었는데, 그냥 멍하니 보고만 있게 되더라,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그러다가 ‘뭐.. 그래.. 어쩌겠냐’ 하는 마음에서 ‘여전히 그때처럼 지금도’ 가사를 썼다. 내가 마음을 줄 때, 잘 될 거란 희망을 품은 것도 아니고, 난 원래 혼자가 익숙하고 뭐 안 될 거 알았으니까.. 뭐 그런 가사다
<최광훈 1집에> 총 12곡이 수록돼 있는데, 단 하나도 맺어진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없다. 첫 곡인 <맑았던 어느 날 오후>에서 이별한 뒤로, 혼자 원망도 했다가, 혼자 후회하고, 혼자 멋있는 척도 했다가, 혼자 상념에 잠기기도 했다가, 혼자 다 안다는 듯 선언하기도 했다가, 다시 또 후회하고, 혼자 다시 이별하니, 이 정도면 뭐 끝까지 가본 거 같으니 성공한 사랑인가 싶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래도 상대와 맺어진 사랑은 없다. ‘최광훈’의 사랑을 맺어주고 싶은 욕망은 없었나
아 첫 번째 노래만 상대가 다르다. 그러니까 ‘맑았던 어느 날 오후’는 사랑 없는 연애를 했던 전 연애에 관한 이야기다. 사랑 없이 연애하면 어떻게 되는지에 관한 이야기고. 그 외에는 다 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사랑 없이 한 연애를 겪고, 그 사람을 만나게 되는 거다. ‘최광훈’의 사랑을 맺어줄 수 없는 이유는, 내가 제일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거짓말을 안 좋아한다. 그래서 진짜 사랑을 성공적으로 한 뒤에 그런 노래를 만들 거고, 요즘 성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살도 많이 뺐고
워낙 좋아하는 앨범이라 농담을 많이 섞었지만, 나는 <최광훈 1집>이 굉장히 잘 짜인 앨범이라고 생각한다. 중간중간 들어간 연주곡도 제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3막짜리 연극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곡 순서 배치나 앨범 전체적인 흐름을 짤 땐 어떤 걸 고려했나
‘두루미 흥업’의 핵심 멤버인 창희 형과 회의를 좀 했다. 처음부터 밝은 걸 넣기보다 ‘맑았던 어느 날 오후’를 제일 앞에 배치해서 슬픈 노래만 있을 것 같은 인상을 줘보자 얘기했다. 그게 재밌을 거 같았고. 시간의 흐름으로는 그 노래 이후로 상대가 한 명이 되니까 그것도 맞고. 뭐 책 보는 것처럼 혹은 편하게 얘기하듯이, 사랑하고, 고장도 나고, 잊고, 뭐 또 새로 시작해보자 하는 그런 걸 생각했다.
앨범 구성이 정교해서 뮤직비디오가 없는 게 유독 아쉽다. 좀 무례한 얘기지만, 돈을 별로 안 들이고 핸드폰으로 대충 찍어도 재밌는 게 나올 것 같은데.. 계획이 없나
돈이 없어 못 한 게 맞고.. 내가 할 줄 몰라서 누가 기술이 있으면 할 텐데.. 누군가 있으면 하고 싶다. 마음은 참 하고 싶다
피지컬 앨범도 나오길 바란다. 피지컬 앨범이 안 나오는 건, 안 팔려서가 물론 가장 큰 이유겠지만, 한편으론 CD라는 물체에 담을만한 음악, 그러니까 재생 버튼을 눌렀을 때,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 감상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 줄 아는 아티스트가 점점 줄어들기 때문이란 생각도 한다. 싱글을 냈을 땐 굉장히 좋았던 아티스트가, 정규 앨범은 정말 못 만드는 경우도 많고. 그런 의미에서 <최광훈 1집>은 피지컬 앨범이 너무 잘 어울리는 앨범이라 꼭 피지컬이 나왔으면 좋겠다
이 대화를 일두 형한테 보여주며 어깨를 한번 으쓱해보겠다. 힘을 한껏 실어서 앨범 좀 내주시면 좋겠습니다 얘기하겠다.
<최광훈 2집>이 나온다면 ‘최광훈’의 다음 3막을 볼 수 있을까
올해 내가.. 좀 승부를 보려 한다. 어떻게 최선을 다해가지고, 앨범을 내기 전에 연애에 성공해서 ‘최광훈’에게 행복을 좀 주고 싶다. 근데 또 사랑에 성공했다 해서 일상이 마냥 행복한 건 아니니까, 막일이나, 택배 상하차나, 여러 일을 병행하며 음악을 하는 마음, 그 과정의 이야기도 담고 싶다. ‘최광훈’의 시트콤 같은 일상, 예술에 관한 고민, 그런 거. 이 모든 이야기를 댄스 음악으로 풀어내려 한다
음악 관련해서 뭐 더 하고 싶은 얘기가 있나
요새 너무 멋 부린다거나,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로 자신을 치장하는 음악이 많아 보인다. 멋이 없으면 멋없는 대로,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하고, 또 그 이야기를 담백하게 풀어내는 음악이 많이 생기면 좋겠다. 난 그런 게 좋다
마지막 질문이다. 현재 사랑하는 중인가? 아니라면, 어떤 사랑을 꿈꾸고 있나
멋진 사랑을 해보려고 노력 중이다. 나와 상대 모두 서로를 존중하고, 이야기도 잘 나눌 수 있는, 그런 궁상맞지만, 행복한 사랑을 하고 싶다. 유쾌한 사랑.. 근데 뭐 삶과 사랑이 참 예상처럼은 안 된다
2021년 11월 12일의 대화
진부한 사랑 이야기가 특별할 수 있는 건, 단 하나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없다. 그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일 때. 나의 이야기가 된 사랑은 ‘심장이 뛴다’거나 ‘그 사람 얼굴에서 빛이 났다’는 둥, ‘떨려서 한숨도 제대로 못 잤다’ 등의 상투적인 표현을 유일하게 만들고, 이 감정을 조금이나마 설명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말이었음을 인정하게 만든다. 그렇게 사랑에 빠진 사람을 지켜본 적 있는가. 맹렬한 투명함으로 그 어떤 것에도 개의치 않고, 자신의 감정과 그 감정의 상대에만 집중하는 사람을. 만약 그 경험이 있다면, 정말로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있다면, 당신은 이제 사랑에 휘청거리는 이를 두고 유치하다거나, 어리석다는 말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부산 남포동의 카페 2층 창가 자리에 ‘최광훈’과 마주 앉았다. 그는 그날 거리의 어느 누구 보다 빛났다
만나게 돼 반갑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다. 아마도 내가 오랜만에 좋은 앨범을 들은 것에 관한 답례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실제로 마주 앉게 돼 정말 반갑다
나도 너무 반갑다. 내 음악에 나는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을 때 ‘드디어 누가 날 알아주는구나’ 하며 기분 좋았다. 난 거짓말 하는 거 안 좋아한다. 그래서 내 노래엔 내 이야기, 내 진심이 다 들어가 있는데, 그 진심을 누가 알아줬다는 마음이 들어 기분 좋았다. 친구가 생긴 느낌이었다
음악이 그런 것 같다. 어떤 음악을 듣고 그게 좋다고 느낄 땐, 정서가 통한다고 느끼기에 그런 경우가 많으니까. 날씨가 부쩍 추워졌다. 부산에 내려오기 전 옷을 챙기기 위해 날씨 정보를 봤더니 서울보다 10도 정도 높은 것으로 나와 안심했는데, 그래도 쌀쌀한 건 매한가지다. 앨범 나온 지 이제 다섯 달 정도 됐는데, 어떻게 지내고 있나
많지는 않지만, ‘김일두’ 형이 공연을 좀 해보라고 해서 작게나마 온라인 공연을 좀 했다. ‘기타고라스’라는 유튜브 채널에서도 공연했는데, 여기는 일두 형처럼 기타를 엄청 잘 치는 사람들만 나가는 곳이라 사실 나에게는 조금 무리가 있었다. 근데 내가 원래 좀 밀어붙이는 편이라,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했고, 그랬더니 진심이 또 뭐 전해졌는지 나름대로 공연이 재밌게 나왔다. 전자음악도 같이 하고 있어서 ‘바다 미술제’와도 작업했다. 물론 다음 앨범 작업도 하고 있고
현재는 다른 일도 병행하며 음악을 하고 있는 건가
맞다. 급하면 흔히 말하는 막일도 나가고 그런다. 디제이 했던 적이 있어서, 디제이 하러도 종종 나가고. 가리지 않는다. 누군가 날 보면 ‘쟨 예술가가 아니야. 너무 줏대 없이 이것저것 다 해’라고 할지 모르겠다. 근데 난 생존을 위해선 그렇게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노동과 작업을 같이 하는 게 좋다. 땀 흘리고 일하면서 노동의 대가나 가치에 관해서 고민한다. 작업도 농부처럼 부지런하게 해야 더 재밌고, 건강하고, 공감하게끔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일도 아침부터 삼광사에 가야 한다. 노동하러. 오는 일을 마다 안 한다
중요한 얘기다. 예술한다 하면 어느 날 영감이 탁 떠올라, 쫙 펼쳐지는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모든 일이 그렇듯, 성실하게 쌓아 온 것들이 있어야만 영글어지는 시기가 존재한다. 나도 글을 쓰는 동시에 회사도 다닌다. 간혹 글쓰기로만 돈을 버는 게 맞지 않냐 묻는 사람도 있는데, 나 역시도 지금처럼 병행하는 게 더 좋다. 이런 병행이 내 글을 지키기도 하고. 아무튼, 내 고향에 왔으니 부산에 관한 얘기부터 하고 싶다. ‘최광훈’은 부산에서 작업하고, 활동한다. 부산에서 쭉 산 건가
고향은 부산이다. 대학교 때는 제주도에서 잠깐 살았고, 제대 후엔 다른 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충남 신창에서 살았다
그럼 20대의 대부분을 부산 밖에서 보낸 건가. 난 평생의 대부분을 부산에서 보냈을 거라 생각했다
그게 그렇게 된다
뭐, 부산에 쭉 안 살았다 해서 전혀 문제 될 건 없다. 다만, 부산에서 쭉 살았을 거라 예상한 건, <최광훈 1집>을 들었을 때, 그야말로 부산의 음악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산 안에서의 이동 경로가 궁금해지기도 했고. 그 경로를 좇아보면 <최광훈 1집>이 더 잘 이해될 것 같았다
태어나긴 온천장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동네에서 병원을 하셨고, 좋은 기억이 많다. ‘과일 아줌마’, ‘돼지 아줌마’ 하고 불렀던 분들이 잘 챙겨주시기도 했고, 술래잡기나 BB탄 총알 주우러 다니며 놀았다. 또 다른 기억은, 세 발 자전거 탈 때쯤이었는데, 몇십 년 만에 부산에 눈이 엄청나게 내렸다. 그 눈을 본 것도 온천장이었고. 유치원 때부터 친했던 친구가 김해로 이사하면서 이별했던 동네기도 하고. 뭐 어머니가 병원을 하시긴 했지만, 사정이 그리 넉넉지만은 않아서 집도 좀 좁고, 쥐도 많이 보고 그랬는데, 그래도 그때의 복작거림이나 화목함 같은 것들이 좋게 남아있다. 생각하면 따뜻함이 느껴진다. <순풍 산부인과>처럼 동네나 집에서 재미난 일이 많았다. 심지어 집에 도둑이 든 적도 있다. 뭐 그렇게 온천장에 살다가, 사기를 좀 당하면서 여기저기 옮겨 다녔다. 교대 앞 쪽에도 살고, 사직동에도 좀 살고, 안락동까지 왔다. 가족들은 현재 안락동에 있다. 난 부전동에 있고
좋은 기억이 많은 동네가 온천장이라고 했을 때, 특별히 아끼는 동네도 있나. 나 같은 경우엔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남포동 그리고 이 근방인 중앙동, 대청동, 자갈치 쪽을 좋아한다. 물론 내 기억의 양은 자란 동네에 훨씬 많지만, 부산을 떠올릴 때면 여러 가지 의미로 이쪽의 풍경으로 정리된다
온천장의 ‘오시게 시장’부터 해서 고철 관련 상점, 대문 파는 곳 등을 볼 수 있는 거리가 있는데, 아무래도 나는 그쪽이 제일 애틋하다. 그리고 웃긴 게 요즘 일두 형을 자주 만나다 보니까 형이 계신 대청동에 자주 온다. 일두 형이 컴퓨터를 잘 못 하시니까 나에게 전화해서 ‘혁아 잘 모르겠다.. 올 수 있나?’ 한다. 그럼 그렇게 와서 밥도 먹고, 자갈치, 영도대교 주변 바다 끼고 한 바퀴 돈다. 혼자서는 요즘 부전동에 사니까 부전시장 근처로 해서 쭉 걷고. 부전시장에 가면 부산의 뭔가를 느낄 수 있다. 짜게 드시는 분도 많고, 사람들이 거칠고, 화도 많다. 인간의 원초적인 그런 것들을 보게 된다. ‘안 깎아주나?’ 하면서 화내고, ‘깎아줬어요’ 하면서 또 화내고, 그분들을 비하하는 건 아니고, 자신을 감추려는 마음이 전혀 없다는 얘기다. 다 드러낸다. 가면 없이 맨얼굴로 다니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만큼 유쾌하고 재밌고.
부산 사람에 관한 얘기를 조금 해줬는데, 다른 지역에 비해 유독 부산 사람은 어떤 고유명사처럼 쓰이지 않나. 부산 사람은 이래. 부산 사람은 저래 하면서. 부산 사람끼리 한번 얘기해보자. 부산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일반화하고 싶진 않고, 다 특징이 있을 테니. 방금 말했듯 화를 화끈하게 낼 수 있다는 건, 폭발력 있고 실행력 있다는 거 아닐까. 화라는 걸 진행해야 하는 거니까. 그리고 또 느린 걸 싫어한다. 지지부진한걸 싫어하고 확실한 걸 좋아한다. 사랑하면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으면 ‘안 한다’ 이런 걸 원하는 느낌이랄까. 부산 사람을 많이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무례하다 느낄 수도 있는데, 그 무례함 속에는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이 섞여 있다. 상대를 좋아하는데 부끄러운 거다. 나도 어릴 땐 이런 성향들이 강했고, 나이 들면서 점점 둥글어졌다.
나는 부산에 오면 양가적인 마음이 든다. 고등학교 때부터 기숙사에 들어가면서 10년을 넘게 부산을 떠나 있었다. 제일 많이 놀고, 돌아다니는 시기엔 정작 부산에 없었던 거다. 그러다 보니 부산이 분명 내 고향이고, 내가 너무나 아끼는 도시가 맞음에도 어떨 때는 굉장히 낯설다. 그 낯선 기분이 쓸쓸함과 슬픔이 돼 오기도 하고. 그래서 오히려 더 부산에 집착했다. 고향이 자연스레 체화될 시간을 가지지 못했으니, 사후적으로라도 알아 가보자 하며 책도 사서 읽고, 이 동네 저 동네 다니며 엄청 걷고 그랬다. 그런 과정 끝에 나에게 정리된 부산 사람은 다정한 사람이다. 부산은 역사적으로도 외부인의 출입이 굉장히 잦았던 곳인데, 그러다 보니 타인에게 열려 있으면서도, 그만큼 이별에 익숙하기도 하다. 그래서 그 축적된 이별이 타지 사람들이 부산 사람을 볼 때 거칠고 배타적이라 느끼는 그 면을 만든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근데 또 그렇게 만들어진 면은 정말 얇아서, 조금만 안으로 들어가면 부산 사람 특유의 어쩔 수 없는 다정함이 있다. 이별을 염두에 두고 있으면서도 결국 다정할 수밖에 없는 다정함이랄까. 그런 다정함이, <최광훈 1집> 곳곳에 묻어있다.
아무래도 나의 진심을 드러내다 보면 부산을 떼 놓을 순 없으니까. 나의 거짓 없는 진심을 보여주다 보니 온천장 시절의 감성이 나왔다고 본다. 부산을 떠나 살 때는 살기가 힘들어 그런지 감수성이 사라지는 느낌을 종종 받았는데, 부산에 오면 안 그렇다. <최광훈 1집>은 감수성이 충만한 음악이니 부산이 드러났을 거다
음악 얘기가 시작됐으니 물어보겠다. 10대 때의 ‘최광훈’은 어떤 음악을 좋아했나 상상해보려 해도 짐작이 잘 안 되더라. ‘아이리버’나 ‘옙’, ‘파나소닉’ 등에서 나온 MP3가 인기 있던 시절이었고, 대부분의 남자 MP3엔 ‘SG워너비’, ‘버즈’, ‘먼데이키즈’ 등의 노래가 들어있었다. 노래 좀 한다는 놈들은 노래방에 가면 꼭 ‘야다’, ‘얀’, ‘더크로스’ 등의 노래를 불렀고
‘얀’.. ‘야다’... 나도 안다. 그때의 나는 뭔가 유쾌한 노래를 좋아했다. ‘컨츄리 꼬꼬’, ‘룰라’ 이런 사람들. ‘플라워’도 좋아했고. 아니면 아예 ‘들국화’, ‘노찾사’, ‘김현식’처럼 옛날 음악.. 이해도 잘 못 하면서 어머니가 좋아하셨기 때문에 집에 늘 틀어져 있었다. 그리고 또 내가 어릴 때 피아노를 배웠다 보니 연주곡도 종종 들었다
‘김현식’ 얘기를 하니 말하는 건데, <최광훈 1집>을 들으며 ‘김현식’, ‘유재하’ 생각을 종종 했고, 또 내 주변에선 ‘산울림’ 같다는 얘기도 하더라. 누가 됐던 80년대의 한국 대중음악이 가지고 있는 분위기가 <최광훈 1집>에도 존재한다
그걸 좀 노리긴 했다. 내가 촌스럽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가사 쓰는 거나, 얘기하는 내용이나. 그래서 가끔은 ‘야 이건 너무 갔다’ 하는 반응을 주변에서 보이기도 한다. 근데 난 오히려 그 부분을 부각하는 게 재밌을 거라 생각했다. 방금 언급했던 사람들 말곤 ‘손무현’이나 ‘오태호’의 노래도 좋아한다. 그런 담백한 가사와 노래 스타일이 좋다. 그런 스타일로, 꾸며내지 않은 내 얘기를 하는 거
어릴 때 피아노를 배웠다고 했는데, 음악을 시작한 건 언젠가, 사실 이런 질문을 할 때마다 어딘가 좀 걸리긴 한다. 보통은 특별한 계기 없이 그냥 이렇게 저렇게 시작하니까
4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다. 어려서 그런지 흡수력이 좋아 집에서도 피아니스트를 시키려고 했다. 그래서 영재 교육하듯 체계적으로 피아노를 배웠다. 그 후로 11년 정도를 더 쳤는데, 아까 말했던 사기를 당하면서 집에 빨간딱지가 붙었고, 피아노도 더는 칠 수 없게 됐다. 피아노를 못 치게 되니까 음악에 관심을 아예 안 두게 되더라. 아까 10대 때 들었다고 한 노래들은 사실, 친구들이 다 MP3를 들으니까, 나도 귀에 뭔가 껴야 하니까 들은 음악에 가깝다. ‘들국화’나 클래식, 재즈는 그냥 어머니가 집에 틀어놓으시니까 듣는 거였다. 어쩌면 억지로 들었다. 그 당시 나에게 음악은 ‘못 하는 거, 앞으로 할 수 없는 거’였으니까. 음악이 스트레스였다
2019년에 'PUSLECOM'이란 이름으로 전자음악 앨범을 냈다. 대충 계산해 봐도 피아노를 못 치게 된 시기와 2019년 사이엔 많은 시간이 존재한다. 어떻게 다시 음악을 하게 된 건가
발매 순서로 얘기해보면 2015년에 ‘ROCBLACK’이란 이름으로 힙합 앨범이 먼저다. 음악을 한참 안 듣다가 대학생 때 ‘빅뱅’을 ‘거짓말’을 듣고 너무 멋있어서 랩을 시작했다. 그게 음악을 다시 한 계기였다. 랩을 하다 보니 당시 부산에서 활동하던 ‘사이먼 도미닉’ 이나, ‘G.L(Goblin Laboratory)', ’두 사람‘ 등등을 알게 돼 그들의 음악도 많이 들었고. 그 사이에 뭐 보컬 학원도 다니고, 보컬 학원 선생님을 통해 밴드 ’플라워‘와 같이 일도 하고... 그러면서 곡을 쓰기 시작했는데... 아무튼 'ROCBLACK'이 먼저고, 그 이후 2019년에 'PULSECOM' 앨범이 냈다.
그다음 드디어 ‘최광훈’이 등장한다. 사실 당신의 본명은 ‘최혁’이고, 이번 앨범의 활동명은 ‘최광훈’이다. 근데 또 SNS를 보면 <최광훈 1집>에서 노래하는 사람은 ‘최광식’이라고 주장하더라. 세계관이 너무 복잡해서 알아보고 싶지도 않을 정도인데.. 그래도.. 뭐 대화를 하는 이유가 다 그런 거 아니겠나. ‘최혁 유니버스’의 세계관을 좀 이해시켜줬으면 좋겠다. 제발
일단 나는 ‘최혁’이 맞고, 먼저 등장하는 건 ‘최광식’이다. ‘최광식’은 2008년 정도를 살고 있는 대학생인데, 대학교 선배들과 간 등산에서 굴러떨어지며 미래로 오게 됐다. 근데 이 미래로 왔다는 것은 ‘최광식’이 하는 착각이다. 산에서 바로 응급실로 실려 와 코마 상태에 빠졌을 때 하게 되는 착각. 아무튼 ‘최광식’은 갑자기 미래로 와 과거의 촌스러운 음악을 하게 된다. 노래도 못 부르는데 계속 부르고. 자, 이제 ‘최광훈’은 ‘최광식’과 평행세계에 사는 2080년의 사람이다. 마치 드라마 ‘시그널’처럼 ‘최광식’과 ‘최광훈’이 교신을 주고받는다. 교신을 통해 ‘최광훈’이 ‘최광식’에게 전자음악도 가르쳐 주고... 그런 식으로 진행되는 건데, 계속 더 짜보려 했지만, 잘 안됐다. 이런 스토리가 그렇게 참신한 것도 아니고.
..음.. ‘최광식’이 먼저인 거 같은데.. 애초에 그러니까 ‘최광식’을 왜 만든 건가
<최광훈 1집>에 실린 노래들의 주인공 같은 친구가 있다. 그 친구와 저런 이야기를 하다 ‘최광식’이란 이름에 관해 얘기했고, 그 친구와 잘 안됐지만, 우리가 나눈 대화에 책임지고 싶었다. 하지만 잘 이어지지 않아서 ‘내가 이 정도 노력했으면 됐다’ 하는 마음으로 ‘최광식’은 그만 쓰게 됐고. 지금은 ‘최광훈’만 남았다
정확하게 이해는 안 되지만.. 뭐 더 듣는다고 다 이해될 것 같지도 않으니 넘어가자. <최광훈 1집>은 ’두루미 흥업‘을 통해 발매됐다. ’두루미 흥업‘은 우리 대화 사이에도 계속 등장 중인 ’김일두‘와 관련 있어 보이는데, ’두루미 흥업‘에 관한 소개를 해 달라
‘두루미 흥업’은 ‘김일두’ 형님이 대표로 있다. 일두 형을 처음 알게 된 건, 일두 형의 ‘뜨거운 불’이란 노래를 같이 작업하면서다. ‘김창희’ 형이라고 나의 전자음악 스승님이 계신데, 창희 형이랑 일두 형이 친해서 나보고도 같이 할 수 있겠냐 물어보시더라. 그래서 내 작업실에 모이게 됐고, 처음부터 합이 너무 좋았다. 그 노래의 건반도 내가 쳤고. 그렇게 합이 너무 좋으니 일두 형이 ‘이거 안 되겠다. 뭐라도 회사를 만들자’ 하면서 ‘두루미 흥업’이 탄생했다. ‘두루미 흥업’의 이름은 ‘대아 흥업’의 정신을 한 번 이어 받아보자는 마음으로 일두 형이 지었다고 들었다. 계약 조건이 아티스트에게 굉장히 유리하기도 하고, 아티스트를 위한 레이블이다. 지금은 ‘김일두’, ‘최광훈’ 그리고 ‘유라시아’라는 창원 쪽 밴드가 속해있다
하이징크스 뮤직 매거진 https://www.highjinkxmm.com/playlist/kim-ildu-playlist
내가 <최광훈 1집>을 알게 된 건 ‘김일두’가 ‘하이징크스’를 통해 소개한 플레이리스트 목록을 봤을 때다. 사실 영어 가사의 노래를 잘 못 듣기 때문에, 플레이 리스트 중 유일한 한국 제목 노래를 들은 거다. 이름도 좀 촌스럽길래 옛날 가수 중에 내가 모르는 사람인가 보다 했다. 나 말고도 ‘김일두’의 리스트를 통해 ‘최광훈’을 접한 사람이 꽤 될 거 같다
흠.. 너무 조용했다. 거의 뭐 쥐죽은 듯했다. 주변 사람들이 나도 모르게 여기저기 소개하고 있는 거 같긴 한데.. 뭐 조용하다
정말 미안하지만 처음 들었을 때 느낌은 ‘장난하나?’였다. 어딘가 구식인 드럼 소스와 역시나 구식인 신디사이저 곡 위로, 힘 하나 안 들이고, 좋은 의미가 아니라 정말 글자 그대로 힘 하나 안들인 목소리가 나오는데, 이게 지금 진지한 건지, 아니면 일종의 코미디 컨셉 앨범인 건지 잘 모르겠더라. 게다가 그 앨범커버, 분명 그 앨범 커버 속 아이는 아주 귀엽다. 하지만 폰트를 포함한 모든 디자인은 조금 화가 나더라. 근데 또 계속 눈이 가는 걸 보면 더 화가 나고.. 그렇게 화내며 진지함과 컨셉 사이의 물음표에서 헤매다 보니, 어느새 한 달 가까이 출퇴근 시간 내내 <최광훈 1집>을 듣고 있었다
너무 당연한 반응이고, 어떻게 보면 의도한 대로 됐다. 난 사람 웃길 줄은 모른다. 매사에 진지한 편이고. 근데 주변 형들이 ‘너는 그 진지한 게 웃기다, 웃겨서 어떤 사람들은 이 앨범이 장난 같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근데 그걸 정말 진심으로 하면 분명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 거다’라고 말하더라. 그래서 나도 그런 마음으로 했다.
앨범 디자인은 본인의 의지였나, 디자이너의 제안이었나. 그리고 저 아이는 누군가
‘두루미 흥업’의 창희 형이 제안해주셔서 내가 받아들였다. 옛날 한국 음악 앨범들을 보면 얼굴만 딱 있고, 다른 건 아무것도 없길래 그렇게 하자고 했다. 초등학교 입학 직전 정도의 내 얼굴이고. 사진이 워낙 촌스러우니, 디자인할 때도 그 점을 최대한 살려달라고 부탁했다. 디자이너 누나가 또 그 느낌을 잘 아셔서 커버가 잘 나왔다.
<족구왕>이란 영화를 보면 안재홍이 연기한 ‘홍만섭’이 짝사랑하던 ‘안나’에게 허접한 영어로 고백하는 장면이 있다. 그 영어는 정말 간단하고, 아무런 멋도 없지만, 그 장면이 주는 뭉클함은 엄청나다. <최광훈 1집>은 내게 그런 앨범이 돼버렸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최혁 유니버스’에 빠져버린 걸까 두렵기도 하다
‘족구왕’ 주인공에게도 내가 이입을 많이 했었다. 잘되면 좋겠는데.. 안 되더라고.. 결국, 잘생긴 사람한테 가더라. 그리고 만섭이도 보면 뭔가 미래에서 온 거 같은 느낌이 있다. 나와 분명 연결되는 영화라 생각한다. 너무 잘생긴 사람은 공감도 안 되고, 부전시장 지나가다 본 형님 같은 느낌의 주인공에게 이입이 된다
농담처럼 감상을 쭉 말했지만, 사실 귀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특히 가사 때문에. 모든 가사가 다 좋았지만, 앨범 수록곡 중 가장 많이 반복해 들었던 건, ‘별이 된다 해도’, ‘알 수 없는 미소에게’, ‘여전히 그때처럼 지금도’다. 굉장히 쉬운 단어로 담담하게 적혀 있는 가사를 보며 ‘최광훈’이란 캐릭터가 가사 쓰는 장면을 상상해 봤다. 책이라곤 한 줄도 안 읽어봤고, 연애 역시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그런데 또 나쁜 마음 품는 건 못하는 남자가, 새벽에 책상 스탠드만 켜둔 채 가사를 쓰고 있는 장면을. 울었다, 웃었다, 창밖을 바라봤다 하면서 이 가사들을 쓰지 않았을까. ‘최광훈’이 내 친구였다면 뒤통수를 한 대 갈겼을 거 같은데, 아마 그랬다 해도 ‘최광훈’은 웃으며 ‘괜찮아ㅎㅎ’ 말하고는 다시 가사 쓰기에 집중할 거 같아서, 내 마음이 더 아파지는 그런 상황이 올 것 같기도 했다. 말이 길어졌는데, 가사를 어떻게 썼나 궁금했다
우선 이 앨범의 주인공은 한 명이다. 그 친구가 나에겐 보석처럼 빛났다. ‘별이 된다 해도’ 같은 경우엔, 내가 별처럼 빛나는 사람이 아니고, 뒤에서 서포트해주는 사람이니까, 혹시라도 내가 별처럼 빛날 수 있다면 이 친구를 붙잡을 수 있을까 생각하며 쓴 가사다. 근데 뭐 그 친구에게 친구 이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답을, 그 답을 서울에 잠깐 올라왔을 때 숙소로 썼던 방에서 들었다. 그 얘기를 나눌 때 틀어져 있던 티비에선 웃긴 게 나오고 있었는데, 그냥 멍하니 보고만 있게 되더라,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그러다가 ‘뭐.. 그래.. 어쩌겠냐’ 하는 마음에서 ‘여전히 그때처럼 지금도’ 가사를 썼다. 내가 마음을 줄 때, 잘 될 거란 희망을 품은 것도 아니고, 난 원래 혼자가 익숙하고 뭐 안 될 거 알았으니까.. 뭐 그런 가사다
<최광훈 1집에> 총 12곡이 수록돼 있는데, 단 하나도 맺어진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없다. 첫 곡인 <맑았던 어느 날 오후>에서 이별한 뒤로, 혼자 원망도 했다가, 혼자 후회하고, 혼자 멋있는 척도 했다가, 혼자 상념에 잠기기도 했다가, 혼자 다 안다는 듯 선언하기도 했다가, 다시 또 후회하고, 혼자 다시 이별하니, 이 정도면 뭐 끝까지 가본 거 같으니 성공한 사랑인가 싶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래도 상대와 맺어진 사랑은 없다. ‘최광훈’의 사랑을 맺어주고 싶은 욕망은 없었나
아 첫 번째 노래만 상대가 다르다. 그러니까 ‘맑았던 어느 날 오후’는 사랑 없는 연애를 했던 전 연애에 관한 이야기다. 사랑 없이 연애하면 어떻게 되는지에 관한 이야기고. 그 외에는 다 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사랑 없이 한 연애를 겪고, 그 사람을 만나게 되는 거다. ‘최광훈’의 사랑을 맺어줄 수 없는 이유는, 내가 제일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거짓말을 안 좋아한다. 그래서 진짜 사랑을 성공적으로 한 뒤에 그런 노래를 만들 거고, 요즘 성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살도 많이 뺐고
워낙 좋아하는 앨범이라 농담을 많이 섞었지만, 나는 <최광훈 1집>이 굉장히 잘 짜인 앨범이라고 생각한다. 중간중간 들어간 연주곡도 제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3막짜리 연극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곡 순서 배치나 앨범 전체적인 흐름을 짤 땐 어떤 걸 고려했나
‘두루미 흥업’의 핵심 멤버인 창희 형과 회의를 좀 했다. 처음부터 밝은 걸 넣기보다 ‘맑았던 어느 날 오후’를 제일 앞에 배치해서 슬픈 노래만 있을 것 같은 인상을 줘보자 얘기했다. 그게 재밌을 거 같았고. 시간의 흐름으로는 그 노래 이후로 상대가 한 명이 되니까 그것도 맞고. 뭐 책 보는 것처럼 혹은 편하게 얘기하듯이, 사랑하고, 고장도 나고, 잊고, 뭐 또 새로 시작해보자 하는 그런 걸 생각했다.
앨범 구성이 정교해서 뮤직비디오가 없는 게 유독 아쉽다. 좀 무례한 얘기지만, 돈을 별로 안 들이고 핸드폰으로 대충 찍어도 재밌는 게 나올 것 같은데.. 계획이 없나
돈이 없어 못 한 게 맞고.. 내가 할 줄 몰라서 누가 기술이 있으면 할 텐데.. 누군가 있으면 하고 싶다. 마음은 참 하고 싶다
피지컬 앨범도 나오길 바란다. 피지컬 앨범이 안 나오는 건, 안 팔려서가 물론 가장 큰 이유겠지만, 한편으론 CD라는 물체에 담을만한 음악, 그러니까 재생 버튼을 눌렀을 때,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 감상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 줄 아는 아티스트가 점점 줄어들기 때문이란 생각도 한다. 싱글을 냈을 땐 굉장히 좋았던 아티스트가, 정규 앨범은 정말 못 만드는 경우도 많고. 그런 의미에서 <최광훈 1집>은 피지컬 앨범이 너무 잘 어울리는 앨범이라 꼭 피지컬이 나왔으면 좋겠다
이 대화를 일두 형한테 보여주며 어깨를 한번 으쓱해보겠다. 힘을 한껏 실어서 앨범 좀 내주시면 좋겠습니다 얘기하겠다.
<최광훈 2집>이 나온다면 ‘최광훈’의 다음 3막을 볼 수 있을까
올해 내가.. 좀 승부를 보려 한다. 어떻게 최선을 다해가지고, 앨범을 내기 전에 연애에 성공해서 ‘최광훈’에게 행복을 좀 주고 싶다. 근데 또 사랑에 성공했다 해서 일상이 마냥 행복한 건 아니니까, 막일이나, 택배 상하차나, 여러 일을 병행하며 음악을 하는 마음, 그 과정의 이야기도 담고 싶다. ‘최광훈’의 시트콤 같은 일상, 예술에 관한 고민, 그런 거. 이 모든 이야기를 댄스 음악으로 풀어내려 한다
음악 관련해서 뭐 더 하고 싶은 얘기가 있나
요새 너무 멋 부린다거나,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로 자신을 치장하는 음악이 많아 보인다. 멋이 없으면 멋없는 대로,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하고, 또 그 이야기를 담백하게 풀어내는 음악이 많이 생기면 좋겠다. 난 그런 게 좋다
마지막 질문이다. 현재 사랑하는 중인가? 아니라면, 어떤 사랑을 꿈꾸고 있나
멋진 사랑을 해보려고 노력 중이다. 나와 상대 모두 서로를 존중하고, 이야기도 잘 나눌 수 있는, 그런 궁상맞지만, 행복한 사랑을 하고 싶다. 유쾌한 사랑.. 근데 뭐 삶과 사랑이 참 예상처럼은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