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29일의 대화
성냥을 모으자 마음먹은 건 5년 전쯤이었다. 성냥을 모으겠단 마음보단, 앞으로의 시간 동안 뭐라도 모아보자는 마음이 더 컸다. 그리고 이 마음은 알고 보면 아주 오랜 세월 축적된 것이었는데, 아마 초등학교 저학년 때가 그 시작이 아닐까 싶다. 당시 난 '로알드 달',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에리히 캐스트너' 등 어린이 소설을 대표하는 서양 작가의 이야기를 좋아했고, 그들의 이야기엔 꽤 자주 우표 수집하는 학생이 등장하곤 했다. 사실 그때는 '저게 뭔 쓸데없는 짓인가, 우표를 왜 모아' 했지만, 20대 중반이 되자 그들의 이야기 속 우표 수집가의 욕망이 이해됐고,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 욕망에 거창한 건 없다. 그냥 조금 유별나 보이고 싶은, 귀엽고 소박한 마음 정도가 전부다. 그런데 때론, 이 작은 마음은 갑자기 전면에 등장해 '저건 꼭 가지고 싶어!'라며 떼쓰기 시작하고, 그럼 그 마음의 주인은 어쩔 도리 없이 발을 움직여야만 한다. 그런 마음으로, 난생처음 횡성으로 향했다.
서울역에서 횡성 행 기차를 탔다. 강원도로 가는 기차는 처음이었는데, 창밖을 보니 가을이 완전히 도착해 있었다. 문득 궁금해져 지도 앱으로 현재 위치를 확인했더니 경기도 양평을 지나는 중이었고, 강원도 원주가 코앞이었다. 경기도와 강원도의 경계를 지날 때 신경 써 창밖을 살폈지만, 드라마 같은 변화는 없었다. 그래도 산세가 깊어지고 있다는 건 눈에 띄었고, 양평과 비교해 한층 더 짙은 단풍을 보니 강원도에 왔다는 실감이 났다. 그리고 횡성이 생각보다 서울 가까이에 있다는 점도 계속 곱씹게 됐고. 횡성은 어떤 곳인가
횡성은 나에게 강원도의 첫 도시다. 2014년도 즈음, 원주의 지역 언론사 대표로 일했던 적이 있는데, 그때 부모님이 횡성에 마련해놓으셨던 거처에서 출퇴근했다. 그렇게 첫 강원도살이가 시작된 거다. 횡성.. 횡성은 활기가 없는 도시다. 활기는 없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일도 이 도시에 활기를 불어넣는 거다. 활기라는 게 단순히 젊은 사람이 많고, 왁자지껄하다고 만들어 지는 게 아니다. 지금 당장의 횡성은 자연경관이나 거리의 풍경마저도 활기가 없다고 느껴진다. 분명 기후의 영향도 있을 거다. 이쪽이 영서 지역이다 보니 여름엔 바람도 없고, 온도가 굉장히 높다. 해가 제주도 보다 더 따가울 정도로. 해안지역이면 바다라도 있어 볼 풍경이 있겠지만, 여긴 철저히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무기력해진다. 겨울에는 또 찬 공기에 갇혀있다. 작년에 온도계로 쟀을 때 가장 낮았던 게 영하 28도다. 체감온도로는 영하 35도 정도. 한국에서 그런 기온을 느낄 수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 그래서 겨울엔 모든 게 멈춘다. 쓸쓸하고 철저하게 죽어있는 도시가 된다. 물론 봄⦁가을엔 찰나의 여유로움과 온화함이 있지만, 아무래도 여름과 겨울이 일 년의 대부분이다 보니 활기가 많이 떨어진다.
횡성의 사계절에 대해 말해줬는데, 내가 좀 찾아봤더니 횡성은 산들의 사이에 위치해 있고, 동해안의 영향을 받지 않아 일교차가 큰 편이라고 하더라. 실제로 그런가? 그렇다면 아침과 밤의 횡성은 전혀 다르게 느껴질 것 같다
요즘 날씨가 서늘해지면서 별들이 잘 보인다. 작년엔 부모님이 횡성에 따로 지어놓으신 농막에서 생활했는데, 화장실이 동파된 거다. 불가피하게 밖에 나와서 볼일을 볼 수밖에 없었고, 볼일을 보러 가는 길엔 자연스레 밤하늘을 보게 됐다. 그러면 ‘지구 밖 우주에 내가 혼자 나가 있으면 이런 기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 진공 상태에 있는 기분이랄까. 사방은 캄캄한데 별은 너무 잘 보이는, 벌판에 그렇게 혼자 서 있으면 뭔가 고(高)하는 게 있다. 그럴 때 날 감싸는 엄청난 추위가 공간감을 느끼게 한다. 낮에 해가 뜨는 걸 볼 때는 날 살게 하기 위해 이런 찰나의 순간을 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뭐 딱 그 정도다.
난 음식에 관심이 많으니, 다소 철없는 질문도 하고 싶다. 횡성 하면 안흥찐빵과 한우가 가장 유명하다. 실제로 맛이 굉장한가
한우 좀 맛있다는 곳은 내가 일부러 전국을 돌아가며 다 먹어봤다. 전남 장흥, 전북 장수, 경북 안동, 울산의 언양, 경기 안성 이런 곳들. 투쁠 이하로는 비슷하다. 그런데 최고급 이상으로 먹었을 땐 횡성 한우가 차이를 확 낸다. 횡성 한우가 압도적으로 부드럽고, 육질이 그야말로 녹는다.
듣고 있으니 침이 고인다.. 아무튼.. 2015년 전주에서 성냥 가게 <당각>을 열며 성냥을 팔기 시작했고, 그 이후 전국을 떠돌다 횡성에 자리 잡은 게 작년 즈음이다. 왜 횡성이었나
현실적인 얘기로는 횡성에 땅을 좀 가지고 있었다. 평창 동계올림픽의 특수를 바라며 횡성에 땅을 산 것이 좀 있었는데, 실제로는 뭐 유의미하게 오르진 않았다. 그렇다고 처분을 하자니, 처분 과정에서 내는 세금 때문에 마이너스가 되는 상황이었고. 그래서 이 땅을 어떻게 이용할까 생각하게 됐다. 횡성에 오기 직전엔 세종시에 있었는데, 사실 비즈니스 하기엔 세종이 가장 좋다. 세종에서는 전국 어디를 가도 세시간이면 되니까. 근데 지금처럼 한쪽 지역으로 편중하게 되면 거래처로 가기가 어려워진다. 일로는 이쪽에 오면 마이너스가 된다는 걸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사 놓은 땅을 활용해보고 싶기도 했고, 좁은 곳에서 계속 사는 반복된 생활이 지겹기도 했다. 서울에서는 작은 평수의 공간 밖에 얻을 수 없는 자본으로 이곳에 오면 아주 넓게 내 공간을 흩뿌려 놓을 수 있다. 그런 부분에 메리트를 가지며 횡성에서 활동해보자고 마음먹었다. 전국적인 네트워크는 이미 가지고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내 몸이 여기 있어도 사업 유지에는 문제가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부산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주로 자란 뒤, 전국을 밟으며 일했다. 이전에 다른 매체에서 진행한 인터뷰를 보니 여행도 많이 다닌 거 같더라. 자꾸만 지역을 옮겨 다니는 건, 한 지역에 오래 머무는 것이 지루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새로운 곳에 대한 호기심인가
가장 큰 건 일과 관련된 부분이었다. 과거 원주에서 제주로 떠날 때, 투자자와의 트러블이 조금 있었다. 그때 우리나라를 떠야겠단 생각도 했지만, 나이가 좀 있을 때라 워킹홀리데이 같은 건 무리인 부분이 있더라. 그래서 최소한 비행기를 타고 어딘가로 가자 생각했고, 그렇게 제주도로 향한 거다. 제주도에서는 리조트에 취직해 일했는데, 그것도 나와 딱 맞지는 않았다. 제주도엔 제주도만의 문화가 있다. 흔히 ‘괸당’문화라고 하는. 그런 부분이 나는 좀 어색했다. 여기가 아니면 안 된다는 마음이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이 지역을 떠나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기에 떠나야겠단 생각을 쉽게 할 수 있었다. 머물던 지역이 지루해서 떠난다는 건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전주에 살 땐 전주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 전라남북도를 다 돌아다녔고, 대전으로 갔을 땐 충청남북도를 다 돌아다녀서 지루할 틈은 없었다. 내가 자리를 잡는 곳은 일종의 베이스캠프 기능을 할 뿐이다.
기차를 타고 횡성으로 오면서 다짐했다. <문화 성냥>뿐만 아니라 워낙 많은 일을 동시에 진행하는 중이니 이야깃거리가 너무 많겠지만, 그래도 오늘은 질릴 때까지 성냥 얘기만 한번 해보자 하는. 성냥에 관한 첫 기억부터 시작해보고 싶은데, 나의 첫 성냥은 아마 유치원 때 생일케이크에 달린 성냥을 만졌던 게 아닐까 싶더라
나도 물론 케이크에 성냥불을 수십 번 붙여 봤지만 그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성냥을 그었던 기억이 실질적인 경험으로 남아 있는 건 원주에 있을 때다. 아까 말했듯 횡성에서 출퇴근했고, 횡성 집엔 아궁이가 있었다. 그 아궁이로 온돌을 때는 집이었기 때문에 나는 매일 UN성냥으로 아궁이에 불을 붙여야 했고. 성냥 대가 짧지 않나, 그래서 아궁이에 불을 붙이려면 한참 걸린다. 우선 성냥을 그어 구겨놓은 종이에 불을 붙이고, 종이에 붙은 불을 나무로 옮기고, 그러다 꺼지면 또 성냥을 긋고. 그렇게 반복하며 성냥 통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성냥에 대해 처음 인지하게 됐다.
아궁이에 불을 붙일 때 말이다. 라이터도 있고, 흔히 식당에서 많이 쓰는 토치 라이터도 있는데 왜 성냥을 쓴 건가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캠핑을 아주 좋아해서 차엔 캠핑 장비가 가득했다. 거기엔 물론 토치도 있었고. 분명 좋은 장비들이 충분히 있었는데 그걸 왜 안 썼는지는 나도 이해가 안 된다. 왜 굳이 성냥을 사서 그렇게 불을 붙였는지. 어쩌면 아궁이란 존재 때문에 성냥을 써야 한다는 막연한 의무감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9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냈으니 성냥이 익숙한 세대라고 말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예상보다 성냥과의 만남이 더 늦다. 청소년 시기나 20대에는 성냥에 관한 관심이 없었나
전혀 없었다
만약 20대 때부터 성냥을 좋아하고, 모으기 시작했다면 엄청난 기록이 됐을 것 같다. 옛날엔 식당이나 다방, 여관 같은 곳에도 다 성냥이 있었으니까. 지금 다시 볼 순 없지만 기억에 남는 성냥이 있나
모아 놓은 게 있긴 하다. 어떤 목적 때문에 모은 건 아니었고, 그냥 생각 없이 모인 것들. 내가 고목(枯木) 사는 걸 좋아하다 보니 전주에서 고재상 하시는 분과 인연이 좀 생겼었다. 내가 이것저것 수집하는 걸 그분이 보시고는 ‘이런 것도 모으나?’ 하면서 모아두셨던 성냥을 내주신 적은 있는데, 따로 의식하고 성냥을 모은 적은 없고, 기억에 남는 것도 딱히 없다.
최근 성냥과 관련된 재밌었던 얘기라면 김정은의 일화일 거다. 2019년 북미 정상회담을 하러 가기 위해 하노이라 가던 김정은은 중국의 난닝역에 잠시 정차해 휴식을 취한다. 그때 김정은이 담배를 태우는데, 성냥을 몸쪽으로 아주 민첩하게 당겨 긋고서 담배에 불을 붙이더라. 성냥을 긋는 방식을 보며 소련식이라며 평하는 기사까지도 나오곤 했었다. 당신도 혹시 소련식인가
나는 주로 바깥쪽으로 긋는다. 굉장히 조심하면서. 성냥 긋는 모습을 봤던 기억 중 떠오르는 건, 조마조마하게 지켜봐야 했던 한 분의 어르신이다. 불이 붙는 두약 쪽에 손을 바투 대고 성냥을 그으셨는데, 왜 그렇게 바투 대고 그으시나 여쭤봤더니 성냥이 부러질까 그런다고 하시더라. 그러면 손이 데이거나 위험하지 않냐 물었더니 뭐 손 이까짓 거 하면서 손을 보여주셨다. 두툼한 어른의 손이었다. 뜨거움이나 두려움이 없는 손. 그게 내겐 인상 깊게 남아있다
성냥은 몸쪽으로 당겨도 불이 붙고, 바깥쪽으로 밀어도 불이 붙는다. 당기면 그 불이 나에게 붙을 것만 같아 긴장되고, 밀 때는 금방 불이 꺼질 것만 같아 불안하다. 찰나의 순간에 불이 가진 위험과 소중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는 점이 성냥의 매력이란 생각도 든다
음... 한때 내가 물고기 키우는 걸 아주 좋아했다. 민물고기, 해수고기 다 키워봤는데 난 이걸 어떻게든 살려야 되는 입장이고, 치어에서 성어가 되는 과정을 다 지켜보게 되니 횟집에 갔을 때 한순간에 물고기가 죽는 걸 보는 게 힘들더라. 그런데 횟집 사장님들 입장에선 물고기는 먹는 거고, 생업이니 그게 또 당연하지 않나. 그런 연장 선상에서 성냥도 내게 그냥 생업이다. 성냥으로 매체에 노출도 되고, 이름도 알려지긴 했지만, 성냥이란 도구 자체에 대한 의미를 가진다거나, 심각한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다만 성냥을 만들 때 거기 쏟는 에너지나 비용을 아끼지 않으며 최고의 품질을 만든다는 자부심은 있다. 하지만 그건 성냥이 아닌 다른 것이었어도 그렇게 했을 거다. 일하는 나의 자세에 관한 문제지, 성냥 자체에 대한 어떤 마음은 없다. 그래도 성냥에 관해 뭔가 다른 마음을 느꼈던 건, 일본 고베의 성냥 기업 ‘나카무라 매치’를 찾아갔을 때다. 성냥의 그 작은 두약 부분에 그림을 그려 넣는 것도 봤고, 또 그 두약의 만듦새 또한 국산과 일본산이 너무 차이가 컸다. 누구나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만듦새나 정성에서 차이가 났다. 그걸 보며 나도 어떤 마음으로 성냥을 만들어야 할지 고민했다. 사소하고, 작고, 누군가에게는 하찮을 수도 있는 성냥을 만들지만, 최선을 다해야겠다 하는
성냥으로 사업을 한 건 2015년 전주에 <당각>을 열면서 부터인데, 성냥으로 사업을 해야겠다 마음먹은 계기는 뭔가
여러 도시에서 여러 일을 했지만, 그 중심엔 언제나 디자인이 있었다. 그런데 디자인 일을 계속하면서 느낀 건 디자인이라는 것이 일회적이고 소모적이라는 거다. 남의 일을 해주는 경우가 많으니까. 난 뭔가 남길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고, 그렇게 시작한 고민이 자연스레 자체 생산, 유통 쪽으로까지 확장됐다. 아이템 선정을 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전주에 있는 <삼양 다방>이란 곳을 가게 됐다. <삼양 다방>에 갔더니 옛날 성냥으로 장식이 쫙 돼 있더라. 근데 그 다방이 그 당시 전주에서 매출 1위였기 때문에 ‘이런 게 먹혀?’ 하는 생각을 하게 됐고, ‘성냥을 그럼 아예 한번 팔아봐?’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 추억으로 남는 물건이 되겠단 생각으로 성냥을 팔았는데 그게 잘 먹혀들었다.
<당각>은 쉽게 말해 성냥 가게였으니 성냥을 사러 오는 개인 손님을 직접 대면하는 공간이었다. 잘 쓰이지 않는 성냥을 사러 오는 사람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었나
담배를 피우시는 분 중에 성냥을 여러 개 구매해가시는 분이 더러 있었다. 애연가들은 성냥으로 불을 붙여야 담배 맛이 더 난다고 하더라. 또 어떤 사람은 야한 그림이 그려진 성냥만 모으기도 하더라. 가게를 하는 모든 분은 그런 마음이 있을 텐데, 손님이 와서 좋은 말씀도 해주시고, 옛날의 추억을 꺼내놔 주시면 감사하다. 사업적으로 접근해 시작한 <당각>이었지만, 성냥을 통해 만난 사람들 덕분에 성냥에 관한 의미가 내게도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문화 성냥>의 대표로 100개가 훌쩍 넘는 성냥 시리즈를 이어가고 있지만, 성냥을 직접 만들지는 않는다. 영화로 따지면 제작자에 가까운데, 혹시 성냥을 직접 만들어 본 경험도 있나
없다. 만드는 과정을 보려고 몇 번 시도한 적은 있었는데 시간이 맞지 않아 이루어지지 못했다. ‘UN 성냥’을 만든 충남 아산의 <UN 상사>랑 주로 일을 하는데, 예전엔 목대는 베트남에서 수입해오고, 두약만 찍는 작업이라도 직접 하셨다. 그런데 이제는 수요가 신통치 않으니 아예 찍는 작업조차 안 한다고 하시더라. 성냥이 완성되는 처음부터 끝까지의 과정을 보기는 이제 힘들어졌다
<문화 성냥>이나 성냥을 만드는 기타 브랜드 몇 곳 덕분에 국내의 성냥 공장도 조금은 바빠지지 않을까 하는 속 편한 예상을 했었는데 내가 완전히 틀렸다
내가 처음 성냥 일을 시작했을 때 국내엔 세 곳의 성냥 공장이 남아 있었다. 경북 의성의 <성광 성냥>, 경남 김해의 <기린 성냥> 그리고 <UN 상사>. 그리고 2년 뒤 <성광 성냥>과 <기린 성냥>이 문을 닫았다. 지금 국내에서 성냥을 주로 다루는 곳은 우리를 포함해 두 곳 정도다. <UN 상사>도 기계 설비를 갖추고 사업을 하는 곳인데, 두 곳의 수요만으로 공장을 가동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 때문에 내 입장에선 <UN 상사>가 문을 닫는 시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내 이름으로 성냥 공장을 내는 것도 생각해봤는데, 불을 다루는 일이기 때문에 자격증이 꽤 필요하더라. 그래서 해외 쪽으로 눈을 돌렸고, 스웨덴 스톡홀롬의 세계 최대 성냥 기업인 <스웨디시 매치(Swedish Match)>의 문을 두드린 적도 있다. 물론 거긴 규모가 너무 커서 나를 상대해 주진 않았지만. 지금은 독일의 뮌헨 옆 소도시에 위치한 개인이 하는 성냥 생산 공장을 찾은 상태다. 하지만 여전히 어려움이 많다
<UN 상사>를 처음 찾아갔을 때 그곳의 반응은 어땠나. 젊은 사람이 불쑥 찾아와 성냥을 만들자고 하니 놀랐을 거 같은데
앞서 말했듯 국내엔 세 곳의 성냥 공장이 있었고, 자체 성냥을 만들 때 세 곳 모두에게 연락했다. <기린 성냥>은 할머니가 사장님이셨는데, 사업을 접어야 할 것 같다며 거절하셨다. <성광 성냥>의 사장님도 물론 거절하셨고, 거절하시면서 <UN 상사>를 소개해 주셨다. 내가 갔을 땐 이미 다른 브랜드가 몇 개월 앞서 <UN 상사>와 일을 진행했던 상태라 놀라시진 않았다
대화를 쭉 나누며 느끼는 건, 성냥에 대한 어떤 의미나 사적인 스토리가 있다기보단, 처음부터 명백하게 사업적으로 접근했고, 그렇게 시작한 사업을 성공시키기 위해 한 노력이 지금의 <문화 성냥>을 있게 했다는 거다
맞다. 성냥은 내게 온전히 사업이다
나는 <문화 성냥>을 <프로파간다>와 진행한 ‘시네마 프로젝트(영화와 관련된 성냥을 만들었던 프로젝트)’를 통해 처음 접했다. 누가 먼저 제안했나
내가 먼저 제안했다. <프로파간다>를 알게 된 것도 우연이었다. 취미를 좀 가져볼까 하다 영화를 보기 시작했고, <CGV>에 갔다가 <프로파간다>가 만든 굿즈를 보게 됐다. <프로파간다>가 만든 굿즈에 관심이 생겨 찾다 보니 <프로파간다>가 매달 여는 ‘프로파간다 시네마스토어’를 알게 됐고, 찾아갔다. 굉장히 재밌더라. ‘영화와 관련된 또 다른 영화 콘텐츠 사업이 있구나.’ 했다. ‘나도 한번 여기에 편승해볼까?’ 생각했고. 성냥을 새로운 비즈니스 분야에 접목할 때는 항상 명분이 필요하다. 나야 그냥 어떻게든 이해하면 되지만, 상대는 납득을 시켜줘야 하니까. 그래서 성냥과 영화를 어떻게 엮을까 생각하다 얼핏 생각난 게 ‘영웅본색’에서 주윤발이 성냥 씹던 장면이었다. 그 장면에서 착안해 디자인한 성냥을 만든 뒤, <프로파간다>와 미팅하러 갔는데 거기서도 <문화 성냥>을 이미 알고 계셨다. 그래서 일이 쉽게 풀렸다. 시작은 쉽게 했는데, <영웅본색> 이후 영화와 성냥의 접점을 찾기 힘들다 보니 판매량도 많이 떨어지고, 어려운 점이 많더라. 그래서 이후엔 ‘프로파간다 스토어’에 맞는 몇 번의 제품만 더 만들었고, 지금은 자연스럽게 멈춰 있는 상태다.
사무실에도 영화 비디오테이프가 많다. 영화 장면 속 기억에 남는 성냥이 있나? 자랑 좀 해보자면 난 ‘히치콕’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에 나오는 성냥과 ‘타란티노’의 ‘펄프픽션’ 속 성냥, 그리고 ‘이소룡’이 인쇄된 오래된 성냥을 보유하고 있다
<영웅본색> 말고는 기억에 남는 게 잘 없다
좋아하는 영화는 어떤 것인가
영화를 정말 많이 본다. 요즘에도 한 달에 서너 번씩 극장에 갈 정도로. 내가 20대 초중반일 때, 나에게 영향을 많이 끼친 친구가 있다. 그 친구가 지금은 작가가 됐는데, 아무튼 이 친구를 통해 알게 된 ‘밀리언 달러 호텔’이란 영화가 있다. 영화가 되게 어둡다. 보고 울만 한 영화도 아니고. 근데 이걸 보고 녹아들면서 눈물을 흘렸다. 어둠을 감각적으로 표현해내는 방법도 좋았고.
<문화 성냥>이 성공한 것엔 인장이 확실한 디자인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한다. 디자인할 때 가장 신경 쓰는 건 뭔가
스토리. 대구에 <카라영>이란 향초 브랜드가 있다. 동의보감에 나오는 왕실의 향 ‘부용향’을 부활시키며 스토리를 가져온 성공한 브랜드다. 그 성공은 일단 스토리로 먹고 들어간 부분이 크다고 생각한다. 왕실의 향이란 소문이 도니 제사가 많은 시즌에 많이 팔리기도 하고. 이런 스토리가 가장 중요하다. <테라로사>와 함께한 성냥 같은 경우에도 ‘테라로사’란 말이 포르투갈어이기 때문에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패턴을 찾다가, 포르투갈의 파란 도자기를 발견하게 됐고, 거기서 힌트를 얻어 디자인했다. 우리 디자인은 딱딱하고 어떤 면에선 답답하기까지 한 편이다. 나도 그걸 느낀다. 근데 또 이런 스타일을 좋아하는 분들이 있다. 디자인 스타일이라는 건 사람 성격과 같은 거다. 성격 고치기가 어렵지 않나. 디자인을 바꿔보려 노력해도 다른 사람들이 보면 결국 비슷하다고 하더라. 그래서 그냥 나의 스타일을 좋아해 주시는 분들을 공략하자고 생각하며 작업한다.
성냥은 이제 꽤 인기 있는 굿즈 중 하나로 자리 잡았지만, 그렇다해도 성냥은 현재 사용되기보단 구경하기 위한 것에 가깝다. 물론 그것으로도 멋진 일이지만 성냥이 다시 생필품이 된다면 그것도 재밌는 장면이 될 거란 생각이다. 성냥과 함께 꾸는 꿈 같은 것도 있나? 성냥의 꿈이랄까...
처음에 성냥을 상품으로 접근할 때 지역 기념 성냥으로 시작했던 이유는 기념품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다. 한국의 관광객 수는 어마어마한 편인데 지역을 대표할만한 관광 기념품이 없다는 건 정말 아쉬운 일이다. 그건 제주, 전주 다 마찬가지다. 그래서 품게 된 꿈이 글로벌 기념품 사업이다. 그 꿈의 시작이 성냥인 거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성냥에 적대적인 사람은 없다. 대부분 호의적이고, 기억이라는 게 다들 있기 때문에 성냥으로 글로벌 기념품 사업에 진입하려 한다.
동인천에 위치한 성냥 박물관에 간 적이 있다. 성냥곽을 접는 작업이 그 당시 여성들의 대표적인 일거리 중 하나였다는 설명을 읽으며 성냥곽 박스를 차로 옮겨 다니며 호텔에서도 성냥갑 접는 작업을 한다는 대표님 생각이 났다. 성냥곽을 접을 때 어떤 생각을 하나
하루에 재미 삼아 한두 개 하면 재밌겠지만, 나는 이걸 하루에 최대 200갑 정도까지 해야 한다. 하는 동안 어차피 다른 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생각이 없어지는 건 좋다. 하지만 하고 나서 찾아오는 공허함이 있다. ‘내가 뭘 한 거지?’ 하는. 언제까지 내가 이걸 해야 할까 하는 생각도 들고. 성냥갑 조립을 할 인력을 찾아본 적도 있는데, 이것도 신경 써서 해야 하는 포인트가 있어서 여간 손재주가 좋지 않고는 힘들더라. 예를 들어 속 상자는 잘 접는데, 겉 상자 옆의 성냥 긋는 부분을 붙이는 건 아쉬운 사람이 있고, 반대의 경우도 있고 그랬다. 바깥으로 비즈니스 하며 돌아다니기 바쁜데 돌아와 성냥갑도 접어야 하니 한계도 좀 있고.. 애증의 관계다.
2021년 10월 29일의 대화
성냥을 모으자 마음먹은 건 5년 전쯤이었다. 성냥을 모으겠단 마음보단, 앞으로의 시간 동안 뭐라도 모아보자는 마음이 더 컸다. 그리고 이 마음은 알고 보면 아주 오랜 세월 축적된 것이었는데, 아마 초등학교 저학년 때가 그 시작이 아닐까 싶다. 당시 난 '로알드 달',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에리히 캐스트너' 등 어린이 소설을 대표하는 서양 작가의 이야기를 좋아했고, 그들의 이야기엔 꽤 자주 우표 수집하는 학생이 등장하곤 했다. 사실 그때는 '저게 뭔 쓸데없는 짓인가, 우표를 왜 모아' 했지만, 20대 중반이 되자 그들의 이야기 속 우표 수집가의 욕망이 이해됐고,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 욕망에 거창한 건 없다. 그냥 조금 유별나 보이고 싶은, 귀엽고 소박한 마음 정도가 전부다. 그런데 때론, 이 작은 마음은 갑자기 전면에 등장해 '저건 꼭 가지고 싶어!'라며 떼쓰기 시작하고, 그럼 그 마음의 주인은 어쩔 도리 없이 발을 움직여야만 한다. 그런 마음으로, 난생처음 횡성으로 향했다.
서울역에서 횡성 행 기차를 탔다. 강원도로 가는 기차는 처음이었는데, 창밖을 보니 가을이 완전히 도착해 있었다. 문득 궁금해져 지도 앱으로 현재 위치를 확인했더니 경기도 양평을 지나는 중이었고, 강원도 원주가 코앞이었다. 경기도와 강원도의 경계를 지날 때 신경 써 창밖을 살폈지만, 드라마 같은 변화는 없었다. 그래도 산세가 깊어지고 있다는 건 눈에 띄었고, 양평과 비교해 한층 더 짙은 단풍을 보니 강원도에 왔다는 실감이 났다. 그리고 횡성이 생각보다 서울 가까이에 있다는 점도 계속 곱씹게 됐고. 횡성은 어떤 곳인가
횡성은 나에게 강원도의 첫 도시다. 2014년도 즈음, 원주의 지역 언론사 대표로 일했던 적이 있는데, 그때 부모님이 횡성에 마련해놓으셨던 거처에서 출퇴근했다. 그렇게 첫 강원도살이가 시작된 거다. 횡성.. 횡성은 활기가 없는 도시다. 활기는 없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일도 이 도시에 활기를 불어넣는 거다. 활기라는 게 단순히 젊은 사람이 많고, 왁자지껄하다고 만들어 지는 게 아니다. 지금 당장의 횡성은 자연경관이나 거리의 풍경마저도 활기가 없다고 느껴진다. 분명 기후의 영향도 있을 거다. 이쪽이 영서 지역이다 보니 여름엔 바람도 없고, 온도가 굉장히 높다. 해가 제주도 보다 더 따가울 정도로. 해안지역이면 바다라도 있어 볼 풍경이 있겠지만, 여긴 철저히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무기력해진다. 겨울에는 또 찬 공기에 갇혀있다. 작년에 온도계로 쟀을 때 가장 낮았던 게 영하 28도다. 체감온도로는 영하 35도 정도. 한국에서 그런 기온을 느낄 수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 그래서 겨울엔 모든 게 멈춘다. 쓸쓸하고 철저하게 죽어있는 도시가 된다. 물론 봄⦁가을엔 찰나의 여유로움과 온화함이 있지만, 아무래도 여름과 겨울이 일 년의 대부분이다 보니 활기가 많이 떨어진다.
횡성의 사계절에 대해 말해줬는데, 내가 좀 찾아봤더니 횡성은 산들의 사이에 위치해 있고, 동해안의 영향을 받지 않아 일교차가 큰 편이라고 하더라. 실제로 그런가? 그렇다면 아침과 밤의 횡성은 전혀 다르게 느껴질 것 같다
요즘 날씨가 서늘해지면서 별들이 잘 보인다. 작년엔 부모님이 횡성에 따로 지어놓으신 농막에서 생활했는데, 화장실이 동파된 거다. 불가피하게 밖에 나와서 볼일을 볼 수밖에 없었고, 볼일을 보러 가는 길엔 자연스레 밤하늘을 보게 됐다. 그러면 ‘지구 밖 우주에 내가 혼자 나가 있으면 이런 기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 진공 상태에 있는 기분이랄까. 사방은 캄캄한데 별은 너무 잘 보이는, 벌판에 그렇게 혼자 서 있으면 뭔가 고(高)하는 게 있다. 그럴 때 날 감싸는 엄청난 추위가 공간감을 느끼게 한다. 낮에 해가 뜨는 걸 볼 때는 날 살게 하기 위해 이런 찰나의 순간을 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뭐 딱 그 정도다.
난 음식에 관심이 많으니, 다소 철없는 질문도 하고 싶다. 횡성 하면 안흥찐빵과 한우가 가장 유명하다. 실제로 맛이 굉장한가
한우 좀 맛있다는 곳은 내가 일부러 전국을 돌아가며 다 먹어봤다. 전남 장흥, 전북 장수, 경북 안동, 울산의 언양, 경기 안성 이런 곳들. 투쁠 이하로는 비슷하다. 그런데 최고급 이상으로 먹었을 땐 횡성 한우가 차이를 확 낸다. 횡성 한우가 압도적으로 부드럽고, 육질이 그야말로 녹는다.
듣고 있으니 침이 고인다.. 아무튼.. 2015년 전주에서 성냥 가게 <당각>을 열며 성냥을 팔기 시작했고, 그 이후 전국을 떠돌다 횡성에 자리 잡은 게 작년 즈음이다. 왜 횡성이었나
현실적인 얘기로는 횡성에 땅을 좀 가지고 있었다. 평창 동계올림픽의 특수를 바라며 횡성에 땅을 산 것이 좀 있었는데, 실제로는 뭐 유의미하게 오르진 않았다. 그렇다고 처분을 하자니, 처분 과정에서 내는 세금 때문에 마이너스가 되는 상황이었고. 그래서 이 땅을 어떻게 이용할까 생각하게 됐다. 횡성에 오기 직전엔 세종시에 있었는데, 사실 비즈니스 하기엔 세종이 가장 좋다. 세종에서는 전국 어디를 가도 세시간이면 되니까. 근데 지금처럼 한쪽 지역으로 편중하게 되면 거래처로 가기가 어려워진다. 일로는 이쪽에 오면 마이너스가 된다는 걸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사 놓은 땅을 활용해보고 싶기도 했고, 좁은 곳에서 계속 사는 반복된 생활이 지겹기도 했다. 서울에서는 작은 평수의 공간 밖에 얻을 수 없는 자본으로 이곳에 오면 아주 넓게 내 공간을 흩뿌려 놓을 수 있다. 그런 부분에 메리트를 가지며 횡성에서 활동해보자고 마음먹었다. 전국적인 네트워크는 이미 가지고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내 몸이 여기 있어도 사업 유지에는 문제가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부산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주로 자란 뒤, 전국을 밟으며 일했다. 이전에 다른 매체에서 진행한 인터뷰를 보니 여행도 많이 다닌 거 같더라. 자꾸만 지역을 옮겨 다니는 건, 한 지역에 오래 머무는 것이 지루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새로운 곳에 대한 호기심인가
가장 큰 건 일과 관련된 부분이었다. 과거 원주에서 제주로 떠날 때, 투자자와의 트러블이 조금 있었다. 그때 우리나라를 떠야겠단 생각도 했지만, 나이가 좀 있을 때라 워킹홀리데이 같은 건 무리인 부분이 있더라. 그래서 최소한 비행기를 타고 어딘가로 가자 생각했고, 그렇게 제주도로 향한 거다. 제주도에서는 리조트에 취직해 일했는데, 그것도 나와 딱 맞지는 않았다. 제주도엔 제주도만의 문화가 있다. 흔히 ‘괸당’문화라고 하는. 그런 부분이 나는 좀 어색했다. 여기가 아니면 안 된다는 마음이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이 지역을 떠나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기에 떠나야겠단 생각을 쉽게 할 수 있었다. 머물던 지역이 지루해서 떠난다는 건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전주에 살 땐 전주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 전라남북도를 다 돌아다녔고, 대전으로 갔을 땐 충청남북도를 다 돌아다녀서 지루할 틈은 없었다. 내가 자리를 잡는 곳은 일종의 베이스캠프 기능을 할 뿐이다.
기차를 타고 횡성으로 오면서 다짐했다. <문화 성냥>뿐만 아니라 워낙 많은 일을 동시에 진행하는 중이니 이야깃거리가 너무 많겠지만, 그래도 오늘은 질릴 때까지 성냥 얘기만 한번 해보자 하는. 성냥에 관한 첫 기억부터 시작해보고 싶은데, 나의 첫 성냥은 아마 유치원 때 생일케이크에 달린 성냥을 만졌던 게 아닐까 싶더라
나도 물론 케이크에 성냥불을 수십 번 붙여 봤지만 그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성냥을 그었던 기억이 실질적인 경험으로 남아 있는 건 원주에 있을 때다. 아까 말했듯 횡성에서 출퇴근했고, 횡성 집엔 아궁이가 있었다. 그 아궁이로 온돌을 때는 집이었기 때문에 나는 매일 UN성냥으로 아궁이에 불을 붙여야 했고. 성냥 대가 짧지 않나, 그래서 아궁이에 불을 붙이려면 한참 걸린다. 우선 성냥을 그어 구겨놓은 종이에 불을 붙이고, 종이에 붙은 불을 나무로 옮기고, 그러다 꺼지면 또 성냥을 긋고. 그렇게 반복하며 성냥 통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성냥에 대해 처음 인지하게 됐다.
아궁이에 불을 붙일 때 말이다. 라이터도 있고, 흔히 식당에서 많이 쓰는 토치 라이터도 있는데 왜 성냥을 쓴 건가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캠핑을 아주 좋아해서 차엔 캠핑 장비가 가득했다. 거기엔 물론 토치도 있었고. 분명 좋은 장비들이 충분히 있었는데 그걸 왜 안 썼는지는 나도 이해가 안 된다. 왜 굳이 성냥을 사서 그렇게 불을 붙였는지. 어쩌면 아궁이란 존재 때문에 성냥을 써야 한다는 막연한 의무감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9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냈으니 성냥이 익숙한 세대라고 말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예상보다 성냥과의 만남이 더 늦다. 청소년 시기나 20대에는 성냥에 관한 관심이 없었나
전혀 없었다
만약 20대 때부터 성냥을 좋아하고, 모으기 시작했다면 엄청난 기록이 됐을 것 같다. 옛날엔 식당이나 다방, 여관 같은 곳에도 다 성냥이 있었으니까. 지금 다시 볼 순 없지만 기억에 남는 성냥이 있나
모아 놓은 게 있긴 하다. 어떤 목적 때문에 모은 건 아니었고, 그냥 생각 없이 모인 것들. 내가 고목(枯木) 사는 걸 좋아하다 보니 전주에서 고재상 하시는 분과 인연이 좀 생겼었다. 내가 이것저것 수집하는 걸 그분이 보시고는 ‘이런 것도 모으나?’ 하면서 모아두셨던 성냥을 내주신 적은 있는데, 따로 의식하고 성냥을 모은 적은 없고, 기억에 남는 것도 딱히 없다.
최근 성냥과 관련된 재밌었던 얘기라면 김정은의 일화일 거다. 2019년 북미 정상회담을 하러 가기 위해 하노이라 가던 김정은은 중국의 난닝역에 잠시 정차해 휴식을 취한다. 그때 김정은이 담배를 태우는데, 성냥을 몸쪽으로 아주 민첩하게 당겨 긋고서 담배에 불을 붙이더라. 성냥을 긋는 방식을 보며 소련식이라며 평하는 기사까지도 나오곤 했었다. 당신도 혹시 소련식인가
나는 주로 바깥쪽으로 긋는다. 굉장히 조심하면서. 성냥 긋는 모습을 봤던 기억 중 떠오르는 건, 조마조마하게 지켜봐야 했던 한 분의 어르신이다. 불이 붙는 두약 쪽에 손을 바투 대고 성냥을 그으셨는데, 왜 그렇게 바투 대고 그으시나 여쭤봤더니 성냥이 부러질까 그런다고 하시더라. 그러면 손이 데이거나 위험하지 않냐 물었더니 뭐 손 이까짓 거 하면서 손을 보여주셨다. 두툼한 어른의 손이었다. 뜨거움이나 두려움이 없는 손. 그게 내겐 인상 깊게 남아있다
성냥은 몸쪽으로 당겨도 불이 붙고, 바깥쪽으로 밀어도 불이 붙는다. 당기면 그 불이 나에게 붙을 것만 같아 긴장되고, 밀 때는 금방 불이 꺼질 것만 같아 불안하다. 찰나의 순간에 불이 가진 위험과 소중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는 점이 성냥의 매력이란 생각도 든다
음... 한때 내가 물고기 키우는 걸 아주 좋아했다. 민물고기, 해수고기 다 키워봤는데 난 이걸 어떻게든 살려야 되는 입장이고, 치어에서 성어가 되는 과정을 다 지켜보게 되니 횟집에 갔을 때 한순간에 물고기가 죽는 걸 보는 게 힘들더라. 그런데 횟집 사장님들 입장에선 물고기는 먹는 거고, 생업이니 그게 또 당연하지 않나. 그런 연장 선상에서 성냥도 내게 그냥 생업이다. 성냥으로 매체에 노출도 되고, 이름도 알려지긴 했지만, 성냥이란 도구 자체에 대한 의미를 가진다거나, 심각한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다만 성냥을 만들 때 거기 쏟는 에너지나 비용을 아끼지 않으며 최고의 품질을 만든다는 자부심은 있다. 하지만 그건 성냥이 아닌 다른 것이었어도 그렇게 했을 거다. 일하는 나의 자세에 관한 문제지, 성냥 자체에 대한 어떤 마음은 없다. 그래도 성냥에 관해 뭔가 다른 마음을 느꼈던 건, 일본 고베의 성냥 기업 ‘나카무라 매치’를 찾아갔을 때다. 성냥의 그 작은 두약 부분에 그림을 그려 넣는 것도 봤고, 또 그 두약의 만듦새 또한 국산과 일본산이 너무 차이가 컸다. 누구나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만듦새나 정성에서 차이가 났다. 그걸 보며 나도 어떤 마음으로 성냥을 만들어야 할지 고민했다. 사소하고, 작고, 누군가에게는 하찮을 수도 있는 성냥을 만들지만, 최선을 다해야겠다 하는
성냥으로 사업을 한 건 2015년 전주에 <당각>을 열면서 부터인데, 성냥으로 사업을 해야겠다 마음먹은 계기는 뭔가
여러 도시에서 여러 일을 했지만, 그 중심엔 언제나 디자인이 있었다. 그런데 디자인 일을 계속하면서 느낀 건 디자인이라는 것이 일회적이고 소모적이라는 거다. 남의 일을 해주는 경우가 많으니까. 난 뭔가 남길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고, 그렇게 시작한 고민이 자연스레 자체 생산, 유통 쪽으로까지 확장됐다. 아이템 선정을 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전주에 있는 <삼양 다방>이란 곳을 가게 됐다. <삼양 다방>에 갔더니 옛날 성냥으로 장식이 쫙 돼 있더라. 근데 그 다방이 그 당시 전주에서 매출 1위였기 때문에 ‘이런 게 먹혀?’ 하는 생각을 하게 됐고, ‘성냥을 그럼 아예 한번 팔아봐?’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 추억으로 남는 물건이 되겠단 생각으로 성냥을 팔았는데 그게 잘 먹혀들었다.
<당각>은 쉽게 말해 성냥 가게였으니 성냥을 사러 오는 개인 손님을 직접 대면하는 공간이었다. 잘 쓰이지 않는 성냥을 사러 오는 사람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었나
담배를 피우시는 분 중에 성냥을 여러 개 구매해가시는 분이 더러 있었다. 애연가들은 성냥으로 불을 붙여야 담배 맛이 더 난다고 하더라. 또 어떤 사람은 야한 그림이 그려진 성냥만 모으기도 하더라. 가게를 하는 모든 분은 그런 마음이 있을 텐데, 손님이 와서 좋은 말씀도 해주시고, 옛날의 추억을 꺼내놔 주시면 감사하다. 사업적으로 접근해 시작한 <당각>이었지만, 성냥을 통해 만난 사람들 덕분에 성냥에 관한 의미가 내게도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문화 성냥>의 대표로 100개가 훌쩍 넘는 성냥 시리즈를 이어가고 있지만, 성냥을 직접 만들지는 않는다. 영화로 따지면 제작자에 가까운데, 혹시 성냥을 직접 만들어 본 경험도 있나
없다. 만드는 과정을 보려고 몇 번 시도한 적은 있었는데 시간이 맞지 않아 이루어지지 못했다. ‘UN 성냥’을 만든 충남 아산의 <UN 상사>랑 주로 일을 하는데, 예전엔 목대는 베트남에서 수입해오고, 두약만 찍는 작업이라도 직접 하셨다. 그런데 이제는 수요가 신통치 않으니 아예 찍는 작업조차 안 한다고 하시더라. 성냥이 완성되는 처음부터 끝까지의 과정을 보기는 이제 힘들어졌다
<문화 성냥>이나 성냥을 만드는 기타 브랜드 몇 곳 덕분에 국내의 성냥 공장도 조금은 바빠지지 않을까 하는 속 편한 예상을 했었는데 내가 완전히 틀렸다
내가 처음 성냥 일을 시작했을 때 국내엔 세 곳의 성냥 공장이 남아 있었다. 경북 의성의 <성광 성냥>, 경남 김해의 <기린 성냥> 그리고 <UN 상사>. 그리고 2년 뒤 <성광 성냥>과 <기린 성냥>이 문을 닫았다. 지금 국내에서 성냥을 주로 다루는 곳은 우리를 포함해 두 곳 정도다. <UN 상사>도 기계 설비를 갖추고 사업을 하는 곳인데, 두 곳의 수요만으로 공장을 가동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 때문에 내 입장에선 <UN 상사>가 문을 닫는 시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내 이름으로 성냥 공장을 내는 것도 생각해봤는데, 불을 다루는 일이기 때문에 자격증이 꽤 필요하더라. 그래서 해외 쪽으로 눈을 돌렸고, 스웨덴 스톡홀롬의 세계 최대 성냥 기업인 <스웨디시 매치(Swedish Match)>의 문을 두드린 적도 있다. 물론 거긴 규모가 너무 커서 나를 상대해 주진 않았지만. 지금은 독일의 뮌헨 옆 소도시에 위치한 개인이 하는 성냥 생산 공장을 찾은 상태다. 하지만 여전히 어려움이 많다
<UN 상사>를 처음 찾아갔을 때 그곳의 반응은 어땠나. 젊은 사람이 불쑥 찾아와 성냥을 만들자고 하니 놀랐을 거 같은데
앞서 말했듯 국내엔 세 곳의 성냥 공장이 있었고, 자체 성냥을 만들 때 세 곳 모두에게 연락했다. <기린 성냥>은 할머니가 사장님이셨는데, 사업을 접어야 할 것 같다며 거절하셨다. <성광 성냥>의 사장님도 물론 거절하셨고, 거절하시면서 <UN 상사>를 소개해 주셨다. 내가 갔을 땐 이미 다른 브랜드가 몇 개월 앞서 <UN 상사>와 일을 진행했던 상태라 놀라시진 않았다
대화를 쭉 나누며 느끼는 건, 성냥에 대한 어떤 의미나 사적인 스토리가 있다기보단, 처음부터 명백하게 사업적으로 접근했고, 그렇게 시작한 사업을 성공시키기 위해 한 노력이 지금의 <문화 성냥>을 있게 했다는 거다
맞다. 성냥은 내게 온전히 사업이다
나는 <문화 성냥>을 <프로파간다>와 진행한 ‘시네마 프로젝트(영화와 관련된 성냥을 만들었던 프로젝트)’를 통해 처음 접했다. 누가 먼저 제안했나
내가 먼저 제안했다. <프로파간다>를 알게 된 것도 우연이었다. 취미를 좀 가져볼까 하다 영화를 보기 시작했고, <CGV>에 갔다가 <프로파간다>가 만든 굿즈를 보게 됐다. <프로파간다>가 만든 굿즈에 관심이 생겨 찾다 보니 <프로파간다>가 매달 여는 ‘프로파간다 시네마스토어’를 알게 됐고, 찾아갔다. 굉장히 재밌더라. ‘영화와 관련된 또 다른 영화 콘텐츠 사업이 있구나.’ 했다. ‘나도 한번 여기에 편승해볼까?’ 생각했고. 성냥을 새로운 비즈니스 분야에 접목할 때는 항상 명분이 필요하다. 나야 그냥 어떻게든 이해하면 되지만, 상대는 납득을 시켜줘야 하니까. 그래서 성냥과 영화를 어떻게 엮을까 생각하다 얼핏 생각난 게 ‘영웅본색’에서 주윤발이 성냥 씹던 장면이었다. 그 장면에서 착안해 디자인한 성냥을 만든 뒤, <프로파간다>와 미팅하러 갔는데 거기서도 <문화 성냥>을 이미 알고 계셨다. 그래서 일이 쉽게 풀렸다. 시작은 쉽게 했는데, <영웅본색> 이후 영화와 성냥의 접점을 찾기 힘들다 보니 판매량도 많이 떨어지고, 어려운 점이 많더라. 그래서 이후엔 ‘프로파간다 스토어’에 맞는 몇 번의 제품만 더 만들었고, 지금은 자연스럽게 멈춰 있는 상태다.
사무실에도 영화 비디오테이프가 많다. 영화 장면 속 기억에 남는 성냥이 있나? 자랑 좀 해보자면 난 ‘히치콕’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에 나오는 성냥과 ‘타란티노’의 ‘펄프픽션’ 속 성냥, 그리고 ‘이소룡’이 인쇄된 오래된 성냥을 보유하고 있다
<영웅본색> 말고는 기억에 남는 게 잘 없다
좋아하는 영화는 어떤 것인가
영화를 정말 많이 본다. 요즘에도 한 달에 서너 번씩 극장에 갈 정도로. 내가 20대 초중반일 때, 나에게 영향을 많이 끼친 친구가 있다. 그 친구가 지금은 작가가 됐는데, 아무튼 이 친구를 통해 알게 된 ‘밀리언 달러 호텔’이란 영화가 있다. 영화가 되게 어둡다. 보고 울만 한 영화도 아니고. 근데 이걸 보고 녹아들면서 눈물을 흘렸다. 어둠을 감각적으로 표현해내는 방법도 좋았고.
<문화 성냥>이 성공한 것엔 인장이 확실한 디자인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한다. 디자인할 때 가장 신경 쓰는 건 뭔가
스토리. 대구에 <카라영>이란 향초 브랜드가 있다. 동의보감에 나오는 왕실의 향 ‘부용향’을 부활시키며 스토리를 가져온 성공한 브랜드다. 그 성공은 일단 스토리로 먹고 들어간 부분이 크다고 생각한다. 왕실의 향이란 소문이 도니 제사가 많은 시즌에 많이 팔리기도 하고. 이런 스토리가 가장 중요하다. <테라로사>와 함께한 성냥 같은 경우에도 ‘테라로사’란 말이 포르투갈어이기 때문에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패턴을 찾다가, 포르투갈의 파란 도자기를 발견하게 됐고, 거기서 힌트를 얻어 디자인했다. 우리 디자인은 딱딱하고 어떤 면에선 답답하기까지 한 편이다. 나도 그걸 느낀다. 근데 또 이런 스타일을 좋아하는 분들이 있다. 디자인 스타일이라는 건 사람 성격과 같은 거다. 성격 고치기가 어렵지 않나. 디자인을 바꿔보려 노력해도 다른 사람들이 보면 결국 비슷하다고 하더라. 그래서 그냥 나의 스타일을 좋아해 주시는 분들을 공략하자고 생각하며 작업한다.
성냥은 이제 꽤 인기 있는 굿즈 중 하나로 자리 잡았지만, 그렇다해도 성냥은 현재 사용되기보단 구경하기 위한 것에 가깝다. 물론 그것으로도 멋진 일이지만 성냥이 다시 생필품이 된다면 그것도 재밌는 장면이 될 거란 생각이다. 성냥과 함께 꾸는 꿈 같은 것도 있나? 성냥의 꿈이랄까...
처음에 성냥을 상품으로 접근할 때 지역 기념 성냥으로 시작했던 이유는 기념품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다. 한국의 관광객 수는 어마어마한 편인데 지역을 대표할만한 관광 기념품이 없다는 건 정말 아쉬운 일이다. 그건 제주, 전주 다 마찬가지다. 그래서 품게 된 꿈이 글로벌 기념품 사업이다. 그 꿈의 시작이 성냥인 거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성냥에 적대적인 사람은 없다. 대부분 호의적이고, 기억이라는 게 다들 있기 때문에 성냥으로 글로벌 기념품 사업에 진입하려 한다.
동인천에 위치한 성냥 박물관에 간 적이 있다. 성냥곽을 접는 작업이 그 당시 여성들의 대표적인 일거리 중 하나였다는 설명을 읽으며 성냥곽 박스를 차로 옮겨 다니며 호텔에서도 성냥갑 접는 작업을 한다는 대표님 생각이 났다. 성냥곽을 접을 때 어떤 생각을 하나
하루에 재미 삼아 한두 개 하면 재밌겠지만, 나는 이걸 하루에 최대 200갑 정도까지 해야 한다. 하는 동안 어차피 다른 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생각이 없어지는 건 좋다. 하지만 하고 나서 찾아오는 공허함이 있다. ‘내가 뭘 한 거지?’ 하는. 언제까지 내가 이걸 해야 할까 하는 생각도 들고. 성냥갑 조립을 할 인력을 찾아본 적도 있는데, 이것도 신경 써서 해야 하는 포인트가 있어서 여간 손재주가 좋지 않고는 힘들더라. 예를 들어 속 상자는 잘 접는데, 겉 상자 옆의 성냥 긋는 부분을 붙이는 건 아쉬운 사람이 있고, 반대의 경우도 있고 그랬다. 바깥으로 비즈니스 하며 돌아다니기 바쁜데 돌아와 성냥갑도 접어야 하니 한계도 좀 있고.. 애증의 관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