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13일의 대화
부산 교대앞 역의 출구를 나오면 작은 음반 가게가 하나 있었다. CD를 주로 취급한 아주 작은 가게였는데, 또래들과 다를 바 없이 한국 발라드에 심취해 있었던 초등학교 4학년은 그곳에서 'Tei'의 2집을 샀다. 내가 처음으로 가진 앨범이었다. 난 덩치가 작은 사장님이 건네준 까만 봉다리를 들고 집으로 가 포장 비닐을 벗겼고, CD를 꺼내 컴퓨터 CD-ROM에 넣었다. 1번 트랙이 재생되던 그 순간, 나는 굉장히 멋진 일을 하고 있다는 기분에 도취됐는데, 어쩌면 그때 자리 잡은 문화적 허영이 날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 음악, 문학, 그게 뭐가 됐든 문화라 얘기되는 것들에 빠져 시간과 돈을 쏟고 있는 사람들의 시작은 대부분 비슷하리라 짐작된다. 그 시작을 어디까지 밀고 나가느냐에 따라 누군가는 관객, 누군가는 매니아, 누군가는 생산자가 될 것이다. 그중 생산자가 된 이들은, 물론 똑바로 하고 있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지만, 어쨌든 그중 생산자가 된 이들은 어느 순간 사명감을 직면하게 된다. 더 이상 이것이 시작했던 그 순간 느꼈던 지극히 사적인 행복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으며, 더 이상 아무렇게나 할 수 없다는 사명감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최초의 시작은 이 지점에서 또 두 부류로 나뉘게 되는데, 한쪽은 그 사명감에 심취해 남루한 권력을 휘두르며 소멸하는 쪽이고, 다른 한쪽은 그 사명감 앞에 더욱 말을 줄이며 여태 해온 방식을 유지하는 쪽이다. 물론 후자일 경우에만 다음 단계로 진입할 수 있으며, 마침내 사명감으로부터 조금의 여유를 가지게 된다. 자신의 가게 바 안쪽에 서서, 공연을 지켜보며 행복한 미소를 띠고 있는 '황재원'을 보며 했던 생각이다.
이 대화는 2월 중순에 이루어졌다. 하지만 몇 가지 일로 이제서야 기록된다. 몇가지 일 중 일부는 어쩔 도리가 없었고, 몇 가지는 애를 쓰면 해결할 수 있었다. 애를 쓰면 해결되는다는 사실이 이 대화가 묻히지 않게 해줬다. 긴 시간을 기다려준 '황재원'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겨울의 대구를 찾은 건, 지난 1월 ‘김일두’의 <제임스 레코드> 공연이 처음이었고, 이번이 두 번째다. 부산 못지않게 따뜻하다 싶으면서도, 공기의 질감은 내륙의 것이라 그런지 또 다르게 느껴지는데, 겨울의 대구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나
영업 제한 때문에.. 힘들게.. 어떻게든 유지하려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대구가 원래 엄청 춥고, 엄청 덥고, 이랬는데, 지구가 전체적으로 변화하다 보니까, 요즘엔 따뜻한 것 같다. 부산이 더 따뜻하다 해서 갔는데 부산이 더 춥고.. 따뜻하다 해서 얇게 입고 갔는데.. 아무튼 그렇다. 근황이라 하면 영업 제한 때문에 돈 벌 수 있는 타임이 몇 시간 안 돼서, 최대한 유지하려고 노력 중이다. 그 와중에 ‘김일두’ 판이 나와서, 그걸 팔면서 다른 걸 시도할 수 있게 됐다. 공연도 계속 계획하고, 진행하고 있다. 음반 제작도 그렇고. 진짜 힘들 때 ‘김일두’ 판이 도착해서 참 다행이다
부산과 가까운 대구이지만, 이상하게도 여태 방문할 일이 딱히 없었다. 놀러 온 건 두 번 정도가 전부인데, 그때도 와서 먹기만 하고 돌아갔다. 대구가 어떤 도시인지 나는 잘 모른다. 당신은 대구 토박이니까, 대구는 어떤 동네인가
대구는 뭐 심심하고, 재미없는 데지. 그런데 이런 데가 더 살기 좋거든. 아 또 대구하면 그거지. 박정희, 박근혜의 도시, 빨간색의 도시. 근데 우리 세대부터 바뀌고 있어서, 지금은 많이 바뀌고 있는 거 같다. 앞으로 한 20년 뒤면 완전히 바뀌어 있지 않을까. 빨간색 딱지를 뗄 수 있지 않을까. 음.. 그리고 예전엔 대구가 음식도 맛이 없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맵고 짜다고. 나 역시도 다른 도시에 가면 뻘건데 안 맵고, 안 짜서 너무 좋았었다. 그런데 다른 지역에서 자극적인 게 많아지다 보니, 이제는 대구에 맛있는 집이 많다고 놀러들 온다. 뭐 다른 데 있는 사람들은 이게 새로울 수도 있겠다 한다. 먹자 투어로 어린 친구들이 많이 온다. 대구가 뜨고 있다
짜장면을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나. 간짜장, 유니짜장, 일반 짜장 뭘 더 즐기나. 그것 말고도 대구의 식당을 추천해줄 수 있겠나.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상주식당>의 추어탕이었다
내가 동성로에 있으니까, 동성로에 있는, 저번에 ‘김일두’씨 오셨을 때도 모셔갔던 <초가식당>을 추천하겠다. 오징어볶음, 낙지볶음, 돼지 두루치기 같은 거 판다. 돼지 두루치기는 평범한 맛이어서 별로 추천 안 하고, 손님들 오면 데리고 가서 항상 오징어볶음 소짜에 참치찌개 시켜서 먹는다. 세 명이 가든, 네 명이 가든, 항상 소 짜를 시킨다. 왜냐하면 거기가 소 짜나 중 짜나 별 차이가 없다. 소 짜를 시킨 다음에, 소 짜가 딱 나오면 낙지볶음 소 짜를 시킨다. 오징어볶음 먹고, 낙지볶음 먹고, 그러면 뭐 끝나지. 매운 거 못 먹는 사람 있으면 계란찜도 하나 시키고. 가면 또 소주를 한 잔 안 할 수가 없다. 다른 곳은 길 건너 있는 <부산안면옥> 부산에 있다가 대구로 오셔서 하는 식당인데, 거의 100년 됐다. 지금이 4대짼가 그렇다. 여기는 여름에만 장사한다. 그 평양냉면.. 최고다. 만두도 있고, 불고기도 있고, 여러 가지 있는데, 일단 우리 가게랑 가까워서 최고다. 짜장면은.. 내가 간짜장 판데, 시내에서는,. <유신학원> 옆에, <중화반점>이라고 거기 간짜장이 정말 맛있다. 일단 싸고. 현금가 4500원. 이게 가격이 오른 거다
야끼우동으로도 유명한 그 <중화반점>인가?
아니다. 다른 가게다. 근데 야끼우동이랑 중화비빔밥은 대구 어딜 가도 기본 이상을 한다. 다른 지역에서도 하면 다 할 수 있는 메뉴인데 왜 안 하는지는 모르겠다
대구에 오거나, 타지에서 대구 사람들을 봤을 때, 나는 대구 사람들이 여느 지역 사람보다 세련되고, 감각적이라고 느끼곤 했다. 부산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투박함 같은 것도 잘 느껴지지 않았고
옛날에 섬유공장이 많아서 그렇다는 얘기가 있는데.. 잘 모르겠다
알겠다. 구포역에서 무궁화호를 타고 대구역에 도착했는데, 낙동강을 따라, 밀양을 거쳐, 청도에 다다르자 창밖으론 새마을 운동과 관련된 조형물들이 보였고, 그걸 보며 당신이 말한 것처럼 ‘박정희’의 동네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스치는 걸 막을 길이 없더라. 그리고 그 생각이 사라지기도 전에 대구역에 도착했다. 괜히 근현대사의 심장에 진입했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도시 속 개인의 삶과 삶의 과정에서 변해가는 마음은 역사와 밀접하면서도 가끔은 무관하다. 우선 밀접한 부분에 대해 얘기해보자면, 그런 역사를 가진 도시 안에서 산다는 걸 체감할 때가 있나. 아까 잠깐 언급하긴 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자라오면서 주위의 어른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그런 이야기라는 건 ‘박정희’나 군사정권에 대해 옹호하는 이야기, 그런 걸 많이 겪었기 때문에, 그렇구나 하면서 컸는데, 크고 보니 그게 아닌 걸 알게 되는 거지. 중고등학교에서 역사를 배울 때 ‘이거 뭐지?’하는 혼란이 왔다. 성인이 되고, 투표권이 생기고 나서는 x같네 했고. 지금은 많이 바뀌었다. 요즘 젊은 세대는 우리 때와는 또 다르다.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상관없으니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마인드랄까. 대구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바뀌는 거 같다.
그렇다면 이번엔 비교적 무관한 부분에 대해 얘기해보자. 당신이 만들어 가고 있는 <제임스레코드>와 <꼬뮨>은 모두 동성로에 있다. 대구를 안 가본 사람이라 할지라도 대부분 동성로 정도는 들어봤을 텐데, 당신의 동성로 출입은 언제부터 시작됐나
고1 때? 노는 친구들 만나면서 커피숍도 가보고, 담배도 피고, 이러면서 친구들 따라 동성로에 나오게 됐다. 그 당시에는 고등학생인 거 다 알면서도 받아주는 술집이 많았다. 그런 데 가서 술 마시고, 당구 치고, 만화방 가고 그랬지. 나는 주로 음반 가게에 갔었는데, 돈 생기면 무조건 앨범만 샀다. 지금은 다 없어진 <대구음향사>나, <타워레코드>, 지금도 남아 있는 <팍스뮤직>. <팍스뮤직>은 중고 상품 가게로 시작해서 지금은 새 상품도 판다
동성로에 나와 음반 산 얘기는 조금 있다 더 해보자. 동성로는 굉장히 큰 번화가처럼 느껴지면서도, 한 편으론 구도심과 신도심이 혼재돼 있어 그런지, 노쇠함과 활기가 동시에 느껴지기도 하더라. 동성로 중에서도 당신이 지금보다 어릴 때 다녔던 구역과 요즘 자주 다니는 구역은 다른가? 동성로에서 특히 좋아하는 구역도 있을까
내가 나오기 시작했을 때부터 기점이 바뀌었는데, 원래는 교동이, 대구역에서 다리 건너 내려오면 있는 그쪽이 번화가였다. 짜가도 팔고, 불법 수입품도 파는, 자갈치시장처럼, 그런 교동시장과 동아백화점도 있는 교동이 중심부였지. 그런데 내가 17살 때 시내 나오기 시작할 때부터는 상권이 지금 있는 이쪽, 길 건너편으로 넘어왔다. 교동은 오히려 죽어버리고. 그런데 지금은 워낙 좁았던 시내가 점점 더 커져서 주택가였던 삼덕동까지 다 잡아먹었다. 남산동 쪽으로도 가고, 또다시 교동, 그리고 북성로 공구 골목까지. 점점점 넓혀지고 있다. 자영업자가 그만큼 많아졌단 뜻이기도 하지
상권이 넓어진 건 그만큼 활발해진 거니까 좋게도 볼 수 있지만, 방금 얘기한 공구골목이나 서울 을지로의 인쇄소 골목, 문래동의 철공소 골목 등, 현재 소위 힙플레이스라 불리는 곳에서 예전부터 터전을 잡고 살았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불편함이 확 끼어든다. 기존의 풍경이 없어지는 것도 문제지만, 그 풍경을 이용하고, 착취한다는 게 더 문제라는 생각이다. 손님으로 동성로를 찾은 시간도 길 테고, 동성로에서 장사한 것도 이제 꽤 되었는데, 이런 변화를 훑어보면 어떤가
과거에 봤던 풍경이 없어지니까, 그런 게 아쉽지. 새롭게 꾸려나가는 걸 보면 대단하기도 하다. 그런데 한편으론 준비를 잘해서, 오랫동안 할 수 있게 하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지, 요즘 생기는 가게들은 유행 타듯 슥슥 바뀐다. 잘 돼서 바꾸는 사람도 있고, 잘 안돼서 나가는 사람도 있는데, 뭐 둘 다 아쉽지. 어쨌든 돈 버는 거기 때문에, 유행 맞춰서 계속 바꾸는 사람들도 대단하긴 하지만, 그래도 좀 같은 얼굴을 오래, 익숙해지게 보면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한다. 지금 동성로는 너무 커져서, 동성로라 하기도 그렇고, 동성로가 아니라고 하기에도 그렇고, 애매하다. 뭐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쪽이라면 남산동, 서성로 위로. 현대백화점 옆쪽으로 가면 이상화 고택부터 해서 계산성당, 제일 교회.. 그쪽 길이 정말 예쁘다. 근데 제일교회 골목도 이제 다 재개발돼서.. 볼 날이..며칠 안 남았다. 그리고 수성교 옆에 삼덕동 골목을 정말 좋아했다. 거기는 좀 대구 아닌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거기도 이미 젠트리피케이션이 한번 일어났고, 많은 가게가 들어왔다가 나가고 했다. 그러면서 예전의 그 모습은 없어졌고
대구 아닌 거 같은 느낌? 그건 뭔가
그 길만의 특이한 분위기가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음침하다고 할 수도 있고. 고요하다. 어느 동네든 불 꺼지고 밤 되면 조용하겠지만, 음.. 평소에 알던 동네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리고 우리 가게가 있는 이 길도 내가 좋아하는 골목이었다. 원래는 이 골목 통로가 두세 사람이 지나갈 만큼 좁았다. 밤엔 컴컴하고, 낮에도 여기 길이 있나 할 정도로 좁았다. 근데 옆에 건물을 새로 올리면서 길이 점점 커졌고, 차가 지나다닐 정도로 넓어진 거지. 내가 가게를 차릴 때, 내가 좋아하는 장소에서 하고 싶어서 이쪽이나 삼덕동을 봤다. 동성로가 아니고는 대명동, 계대 쪽에.. 추억이 많다. 좋아하는 장소를 계속 얘기하다 보니까, 안 좋아하는 장소가 없는 것 같다.
아까 하려다 잠깐 미뤄둔 얘기를 해보자. 음악을 찾으러 동성로에 갈 때는 어디로 가곤 했나. 그리고 음악을 언제부터 좋아한 건가. 음악을 정말 엄청나게 좋아한다고 느껴지는데, 물론 한국 사람 아무나 붙잡고 음악 좋아하냐고 물으면 대부분이 그렇다고 답하겠지만, 당신은 정말 음악을 엄청나게 좋아한다는 냄새가 풀풀 풍긴다
그 당시 대구에서 제일 큰 곳은 <대구음향사>였다. 하지만 제일 먼저 파산했지. MP3가 등장하면서. 내가 군대 가기 전부터 위태로웠는데, <타워레코드>가 세련되게 자리 잡고, 도매업 소매업을 같이 하는 <TCR>이 가격으로 후려치고 하니까, 대구 중심부에 1층, 2층으로 넓게 매장을 운영하고 있던 <대구음향사>가 문을 닫았지. 고등학교 때 시내 오기 시작하면서 주로 <TCR>을 갔다. 돈이 없으니까. 중고를 팔던 <팍스뮤직>도 있었는데, 거기보다 더 작은 곳을 다녔다. 지하상가에도 있고 지금 클럽 골목에도 있었던. 그때는 레코드 가게가 정말 많았다. 교동 쪽에도 몇 개 있었고
음반이 정말 잘 팔리던 시기였나 보다. 누가 제일 많이 팔렸나
나 고등학교 때라 하면 ‘듀스’나 ‘DJ DOC’, ‘마이클 잭슨’, ‘머라이어 캐리’ 등등이 잘 팔렸지. 내가 군대 가기 전에 레코드 가게에서 일했다. 그때가 마지막 전성기였지. ‘이정현’, ‘조성모’가 잘 나갔고, ’동반신기‘가 데뷔할 때 내가 군대로 갔다. 주말 같을 땐 테이프, CD가 한 가수당 100장 200장은 그냥 나갈 때다. 한 장만 사는 사람도 있지만, 보통 여러 뮤지션 앨범을 다 같이 샀다. 나도 그랬었고. 레코드 가게에서 하루에 8~9 시간씩, 주 4 일인가 5 일인가 일했다. 월급이 많으면 30만 원 적으면 20만 원 그랬는데, 그럼 그걸로 다 CD 샀다. 한국 CD가 만 이천 원 팝이 만 육천 원 정도 할 때다. 월급이 엄청 짰지. 점장님은 안 깎아줬는데, 팀장이나 다른 직원들은 직원가로 계산해주고 했다. 30% 정도. 감안해서 사는 거지. 일할 때 목록을 다 뽑아 놓는다. 내가 살 건 좀 안 보이는데 놓아두고 그랬지. 아예 빼놓을 순 없으니까. 근데 레코드 가게에 일하는 사람들이라고 다 매니아가 아니더라. 기대랑 달라서 많이 실망했다. ’이것도 모르노‘ 하면서
음악을 좋아한 건 언제부턴가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부터 해서 라디오만 끼고 놀았다. 카세트 하나 들어가는 골드스타 라디오. 라디오에 좋은 노래 나오면 테이프에 녹음하고 하면서 들었지. 형누나들이 그렇게 했으니까 자연스럽게 따라 하게 됐다
앞서 말한 것처럼 당신은 음악을 정말 엄청나게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렇게 된 계기랄 게 있을까
어릴 때부터 라디오 끼고 놀았던 게, 아마 성향이 맞았던 것 같다. 그리고 원래 엄청나게 좋아하는 사람은 맞는데, 지금은 음악을 좋아한다기보단 음반에 집착하는 것 같다. CD 살 땐 CD란 매체에 집착했고, LP 사기 시작하면서 지금은 LP에 집착한다. 그런데 사놓고 많이 안 듣는 앨범이 많아지니까, 이렇게 사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다. 계속 사는 이유는 지금 안 사놓으면 나중에 LP로 못 들으니까. 이를테면 그런 거다. 예전에 많이 들었던 앨범이라도 LP 자켓 보이면 생각나서 사고, 새로 나온 음악이 궁금하면 그것도 사고. 그런 식이지. 나는 한 음반에 대해 들어봤다고 하려면 모든 트랙을 10번은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시간 있을 때 같은 음악을 계속 듣는다. 지금은 그렇게 못 들은 음반이 많아져서 자제하려고 한다
주어지는 음악을 듣다가 직접 찾아 나서 음악을 듣게 된 순간이 있나. 나에게 영화를 예로 들면 나는 ‘왕가위’의 영화를 보고 난 뒤부터 그랬던 거 같다
자연스럽게 됐다. 고정적으로 <김기덕의 두시의 데이트>를 많이 들으면서 팝이나 락을 넓게 듣기 시작했지. 서울에 사촌 집 놀러 가면 용돈을 주지 않나. 그럼 그걸 엄마가 뺏어가는데, 엄마가 뺏어가기 전에 서울역 레코드 샵에 가서 형누나 선물 줄 테이프 사자고 하며 내 것도 사고 그랬다. 내가 돈 주고 처음 산 앨범이 ‘윤상’ 2집이다. 아직도 기억난다. 항상 형누나가 가지고 있던 걸 듣다가 내 꺼가 생기니까. 잊을 수가 없지. 형누나들 꺼 몰래 듣다가 많이 혼났다. ‘돌려 듣지 말라 했제!’하면서.. 늘어난다고.. 그래도 난 좋은 노래 있으면 계속 돌려 듣고.. LP는 초등학생이 다루기 힘들어 만지지도 않았지
그 당시에는 어떻게 음악을 찾았나. 지금이야 음악을 소개하는 채널도 워낙 다양하고, SNS를 통해서 해외 아티스트의 소식을 접하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그 당시는 인터넷도 아주 원활하진 않았을 테니까
라디오밖에 없었지. 아침부터 새벽까지 좋은 곡 틀어주는 프로그램은 항상 존재했다. 세대도 바뀌고, 시대도 바뀌어서, 요즘 친구들은 정보가 정말 많다. 이런 음악 안 좋아할 거 같은데 이런 음악을 듣지? 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 우리 때는 한쪽으로 빠졌다. 요즘 보면 신기하지. 유튜브가 또 ‘너의 취향을 내가 알아서 찾아 주겠어!’ 하기도 하니까
이제 당신의 공간들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최근에 맡아서 운영하게 된 <꼬뮨>부터. 1995년부터 지금의 자리를 지켰다고 들었는데, 당신이 공연을 보러 다니고 할 때도 알고 있었던 곳인가, <꼬뮨>에 대한 소개를 부탁한다
내가 한창 공연 보러 다니고 할 때도 있긴 했지만, 당시엔 <꼬뮨>에서 공연을 본 적은 없다. <꼬뮨>이 1995년부터 있었지만, 리뉴얼을 한 번 거쳐서 지금의 시스템이 갖춰졌다. 내가 참여하면서 한 번 더 업그레이드했고. 지금은 기존 사장님이 조언만 해주시고, 운영은 전적으로 내가 하고 있다. 프로그램 짜는 거부터 술, 메뉴까지. 사장님도 그걸 편해하신다. 사장님은 원래 <꼬뮨>을 카페로 운영하셨는데, 망했다. 그 이후에 망하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걸 하자며 라이브 펍으로 바뀌었다. 그러다 2000년 초반에 어떤 일이 있었냐면, 우리나라에서 외국인 강사들이 엄청 늘기 시작했다. 대구도 큰 도시 아니겠나. 그 강사들이 놀 곳이 필요한 거지. 자기들이 좋아하는 음악 들으면서 놀. <꼬뮨>이 터져나갔다. 이건 뭐 당시 부산, 서울, 대구 다 똑같았다. 외국인들이 놀 곳이 없었다. 클럽이 있긴 했지만, 자기들이 좋아하는 락 음악, 팝 음악 들을 곳이 없었는데, <꼬뮨>에 갔더니 악기도 있고 그런 거다. 전국적으로 그런 가게들의 부흥기였다. 그 당시 <꼬뮨>에 가면 엄청난 인파로 인해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런 <꼬뮨>을 당신이 맡게 된 건 어떤 과정이었나
원래 <제임스레코드>의 일부를 공연장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공사를 하다 보니 민원도 들어올 거 같고, 여기선 안 되겠더라. 그래서 솔로 공연만 하고 그랬다. 답답한 마음에 <꼬뮨> 사장님과 술 마실 때마다 <꼬뮨>처럼 밴드공연도 하고 싶다고 찡찡댔지. 그러다 코로나 터지고, 사장님이 <꼬뮨> 문도 잘 안 열고, 또 95년부터 한자리에서 하셨으니 얼마나 지쳤겠나. 그때 나한테 얘기하더라. 해볼 생각 있냐고. 나는 생각해보고 말씀드리겠다 하면서도 속으로는 네!! 네!! 네!! 했지. 맡으면서도 코로나 때문에 걱정은 했다. 그런 걱정을 하면서도 라이브 클럽은 꼭 하고 싶었던 거니까, 내가 이거 안 하고 있다가 코로나 걸려서 죽으면 분명 후회할 걸 아니까, 그냥 한다고 그랬다. 시도했다는 자체가 좋다
공간이 정말 멋지다. 공연할 수 있는 무대는 내부 공간의 크기를 생각하면 굉장히 넓은 편이고, 동시에 객석의 위치도 무대에 집중할 수 있게 배치돼 있다. 전체적인 빨간 톤은 저항적인 느낌을 주는 동시에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하는데, 이런 인테리어는 기존 <꼬뮨>의 모습인가. 인테리어가 아니어도, 당신이 <꼬뮨>을 맡고 나서 특별히 신경 쓴 부분엔 어떤 게 있나
내가 바꾼 건 무대 위치 말고는 거의 없다. 화장실, 주방은 새로 고치고, 계단 내려오는 벽 페인트칠 정도 했다. 무대에 쏘는 조명을 좀 좋은 걸로 하고 싶었는데 너무 비싸길래 포기했다. 기존 인테리어는 <꼬뮨> 사장님이 웨스턴 영화를 좋아하셔서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에 나오는 바처럼 꾸미고 싶으셔서 이렇게 하셨다. 근데 돈이 너무 많이 드니까, 다 못해서 아쉬운 점이 많다고 하시더라
인테리어가 아니라면, 운영이나 방향성 등에 있어 신경 쓴 게 있나
바꾸고 싶은 건 다 바꿨다. 메뉴도 늘리고, 악기도 바꾸고. 시내에 라이브 할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어서 <꼬뮨>으로 라이브의 묘미를 알리고 싶다. 사장님은 계속 무료 공연을 해오셨다. 근데 난 유료 공연으로 바꿨다. 타지역이나 로컬 뮤지션들에게 조금이나마 개런티를 챙겨주고 싶은 거다.
<꼬뮨>은 대구에서 활동하는 뮤지션과 밴드의 연습 공간이기도 한 것 같더라. 그들에겐 아지트처럼 드나들 수 있는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게 분명 큰 힘이 될 거다. 연습하러 온 그들과 마주치기도 하고,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게 될 텐데, 주로 어떤 이야기들이 오가나
공연 때 빼고는 일하는 곳이 <제임스레코드>니 거기서 대화를 많이 한다. 뮤지션들과는 공연기획이나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공연을 많이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공연은 같이 만드는 거니까, 공연을 두고 기획하는 나와 뮤지션 간의 입장이 조금씩 다른 경우가 생긴다. 그런 걸 잘 맞춰 나가려고 하는 거지
그들은 더 많은 기회가 있는 서울로 갈 유혹에 거의 매일 시달릴 게 분명한데, 그들에게 대구에서 같이 해보자고 말하기도, 그렇다고 기회를 찾아 서울로 가라고 말하기도 어려울 거 같다. 그들을 보면 어떤 마음이 드나
서울로 간다는 게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라기보단, 더 많은 활동을 하기 위해서지 않나. 서울에서 웬만큼 유명한 뮤지션도 다 직장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고. 또 서울에 가서 서울 뮤지션들 이야기를 들어오면 그들 역시도 공연할 곳이 없다는 얘기를 한다. 그 많은 클럽이 있는데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면서. 그들에게 어떤 마음이 든다기보단, 내가 공연을 기획하고, 준비하는 입장이니, 공연을 잡으면 엄청 노력한다. 홍보를 많이 한다는 얘기다. 요즘 스타일로 광고한다기 보다는 일 대 일로. 손님들한테. 이번 주 공연 있는데, 한번 들어보라고 하면서. 라이브로 보면 더 죽인다 하면서. 강매, 애원, 뭐 다 한다. 나는 이런 걸 뮤지션도 함께 해주면 좋겠다. 함께 노력해야 씬이라는 게 생긴다
<제임스레코드> 얘기로 넘어가면서, <제임스레코드>에서도 공연은 진행하니까, 공연을 기획할 때 <제임스레코드>와 <꼬뮨> 중 어디서 할지 선택해야 할 텐데, 어떤 기준이 작용하나
우선 <제임스레코드>와 <꼬뮨> 공연은 완전히 별개다. <꼬뮨>은 밴드 공연 위주고, <제임스레코드>는 비교적 소규모 공연을 한다. 우리가 기획하는 공연은 입장료를 모두 뮤지션에게 지불한다. 그래서 티켓값을 최대한 저렴하게 해 많은 사람을 공연에 초대하려고 노력한다. 물론 누군가에겐 저렴한 가격이 아니겠지만
<제임스레코드>는 레코드샵인가? 펍인가? 공연장인가? 처음 이 공간을 구상할 때, 어떻게 시작된 건가. 대화를 준비하며 정보를 찾아보니 어떤 게시판에선 <제임스레코드>를 ‘인싸들 가는 LP바’라고 소개하던데, 어떤가. 대구의 인싸들이 찾는 공간, 맞나
뭐 뮤직 펍이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그런 평가는 아주 좋다. 사실 이런 대화를 하기 전에 우리 가게에 와 술도 한잔하고, 어떤 음악이 나오는 지도 듣고, 분위기가 어떻게 흐르는지, 그런 것들을 느껴보고 이런 이야기를 하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긴 하다. 나는 우리 가게가 대구 인싸들이 오는 가게가 되길 원했다. 인디 음악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고. 실제로 그렇게 됐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제임스레코드>가 어떻게 시작됐는지는 아직 얘기 안 해줬다
원래는 디자인, 홍보, 마케팅 이런 쪽에서 일했다. 근데 뭐 돈도 안 되고, 야근해도 제대로 안 챙겨주고, 사람대접을 안 해주니까, 다닌 회사 중에 괜찮다고 말 할 만한 곳이 한 두 군데밖에 없다. 언젠가는 그만두고 이 일을 시작할 거란 생각은 했다. 근데 이 일을 하기 싫어서 최대한 미뤘지. 그러다 서른여덟에 시작한 거다. 여기 묶이면 내 시간이 없는 걸 알았으니까. 최대한 미뤘다. 이 일은 내가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잘하는 일을 해야 입에 풀칠이라도 하지. 그래서 시작했다. 오픈하기 3~4년 전부터 인테리어나 스타일을 구상했고
<제임스레코드>를 이끌어온 지난 6년을 정리해보고, 처음 <제임스레코드>를 열었을 때를 생각해보면 어떤가. 잘하고 있나
잘 되고 있지. 중간중간에 고비도 있었고, 아쉬운 점도 있지만, 내가 완벽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완벽해지려고 하지도 않는다. 계속 노력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잘 해내 갈 수 있다는 확고한 마음은 있다. 처음부터 제일 중요했던 건 손님이 혼자 오더라도 맘 편히 앉아서 멍때릴 수 있는 공간이 되면 좋겠다는 거였다. 근데 지금은 손님이 너무 많아져서.. 그런 사람들이 자리가 없어 돌아가곤 하는데.. 그 손님들이 안 오니까 또 아쉽고.. 뭐 이러나저러나 100% 만족시킬 순 없으니까,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다 생각한다. 그분들에 대한 고마움은 항상 있지. 그분들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
신경 쓸 게 정말 많겠다. 음악도 잘 틀어야 하고, 음식과 술도 잘 내야하고, 당연히 매출도 신경 써야 한다
<제임스레코드>가 어떻게 하면 잘 될 수 있을지 매일 연구한다. 우리 가게에서 제일 중요한 건 친절과 청결이다. 음악은 좀 아쉬워도 된다. 근데 친절과 청결을 기본으로 해야 손님들이 온다. 각종 술집에서 많이 일해봤지만, 딱 정해져 있다. 이 공간이, 이 사람이 매력이 있는가는 나 혼자 만들어가는 게 아니라 같이 일하는 친구들과 손님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분위기를 찾기까지 3년 걸렸다. 계속 노력한다. <제임스레코드>하면서 이런 음악을 들어본 적 없고, 이런 공연을 본 적 없는 사람이 경험할 수 있게끔 하는 게 목표였기 때문에, 지금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같이 일하는 친구들한테도 계속 말한다. 장사는 다 똑같다. 깨끗하고, 친절하고, 손님 좀 없었다고 노력 안 하지 말고. 아무튼 뭐 계속 노력 중이다
대화의 막바지인데, ‘김일두’의 두 바이닐, <난 어쩔 수 없는 천재에요>와 <새 계 절>의 작업 과정도 듣고 싶다. 1월 공연 때 ‘김일두’가 언급하기론 부산으로 직접 찾아갔다고 하던데, 막상 해보면 간단한 일이지만, 또 마음을 내서 움직인다는 건 결코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분명히 누군가는 했을 법한 앨범들인데, 아무도 안 하니까 답답해서 한 거지. 만나기 전까진 그런 생각했다. 예술가들이란 자기 곤조가 있으니까, 거절당할까 봐 두려움은 있었다. 그래도 그전에 우리 가게에서 여러 번 공연했던 적이 있고, 그 공연을 김일두 씨가 다 마음에 들어 했다. 하지만 판 만드는 건 또 다른 이야기라 걱정이 들긴 하더라. 다행히 김일두 씨가 흔쾌히 동의해서 진행하게 됐다. 같이 가서 남포동 한번 둘러보고, 집에 가서 술 한 잔 하고. 기분 좋아하시더라고. 그렇게 만들게 됐지
‘김일두’ 외에도 LP로 발매하고 싶은 음악이 있나? 대구에서 작업하는 아티스트들의 음악도 LP로 소개하고 싶은 욕심이 있을 것만 같은데
지금 이미 제작 중인 LP가 많다. 대구 출신 뮤지션도 있고 타지역도 있다. 동네 뮤지션들이라 아직 유명하지는 않다.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밴드고, 뮤지션이면 제작하려 한다. 내 욕심이지. 근데 나는 LP를 많이 만들고 싶진 않다. 돈이 너무 많이 드니까.. 나도 돈 모으고 싶다. 근데 남들이 안 하니까 답답해서 한다. 지금 진행 중인 뮤지션만 해도 5~7장 되는데, 그런 욕심이 생기더라. 이게 유행처럼 되면 좋겠다는. 자기가 좋아하는 뮤지션 LP를 취미로 만드는 그런 유행. 그럼 내가 만들어야할 게 줄어들 테니까. LP 만드는 건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려고 한다. <제임스레코드>만 해도 신경 쓸 게 많은데, 난 내 능력을 알기 때문에, 지금도 이 많은 일을 동시에 하는 게 너무 힘들다.
<제임스레코드>부터 <꼬뮨>까지, 언뜻 보기에 당신은 조금씩 당신의 꿈을 완성해내고, 또 새로운 꿈을 꾸는 것처럼 느껴진다. 내가 당신에게 우리가 무슨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 당신에게 물었을 때 당신은 ‘꿈, 행복, 의무’를 얘기했고, 이 세 가지를 읽는데 각각 읽히는 게 아니라 한 번에 연결돼 읽히더라. 이 세 개의 단어를 던진 건 어떤 맥락이었나
꿈을 이룬다고 해서 무조건 행복한 건 아니지만, 꿈에 다가설 때마다 행복이 스쳐 지나가는 거 같긴 하다. 그리고 이루는 꿈들은 남들을 위한 의무이기도 한듯하다. 의도는 아니었지만, 내가 그냥 좋아서 한 일이, 내가 했던 행위들이, 많은 사람에게 뒷받침되고 있다고 하더라. 내가 하는 일을 좀 더 진지하고 책임감 있게 임하는 게 의무기도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무엇보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나 혼자가 아니고, 마음 맞는 친구들이 함께해서, 할 수 있었던 거다
당신을 잘 모르지만, 분명한 건, 지난 ‘김일두’ 공연 때, 바 안쪽에 자리 잡고 서 공연을 지켜보는 당신은 행복해 보였다. 당신의 꿈으로 만든 공간에서, 당신이 사랑하는 음악이 울릴 때, 당신은 행복했고, 동시에 아마 다음 꿈을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다음 꿈은 어떤 풍경인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정착시키는 거, 정착시킨다는 건 뮤지션과 관객이 꾸준히 있을 수 있도록 만들어 낸다는 거다. 그게 돼야 내가 꿈을 이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거다.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지만, 공을 들여서 운영하면 뮤지션도 연락해 오고, 관객도 많이 찾아 주시겠지. 그렇게 정착하면 자연스럽게 흘러가겠지
2022년 2월 13일의 대화
부산 교대앞 역의 출구를 나오면 작은 음반 가게가 하나 있었다. CD를 주로 취급한 아주 작은 가게였는데, 또래들과 다를 바 없이 한국 발라드에 심취해 있었던 초등학교 4학년은 그곳에서 'Tei'의 2집을 샀다. 내가 처음으로 가진 앨범이었다. 난 덩치가 작은 사장님이 건네준 까만 봉다리를 들고 집으로 가 포장 비닐을 벗겼고, CD를 꺼내 컴퓨터 CD-ROM에 넣었다. 1번 트랙이 재생되던 그 순간, 나는 굉장히 멋진 일을 하고 있다는 기분에 도취됐는데, 어쩌면 그때 자리 잡은 문화적 허영이 날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 음악, 문학, 그게 뭐가 됐든 문화라 얘기되는 것들에 빠져 시간과 돈을 쏟고 있는 사람들의 시작은 대부분 비슷하리라 짐작된다. 그 시작을 어디까지 밀고 나가느냐에 따라 누군가는 관객, 누군가는 매니아, 누군가는 생산자가 될 것이다. 그중 생산자가 된 이들은, 물론 똑바로 하고 있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지만, 어쨌든 그중 생산자가 된 이들은 어느 순간 사명감을 직면하게 된다. 더 이상 이것이 시작했던 그 순간 느꼈던 지극히 사적인 행복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으며, 더 이상 아무렇게나 할 수 없다는 사명감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최초의 시작은 이 지점에서 또 두 부류로 나뉘게 되는데, 한쪽은 그 사명감에 심취해 남루한 권력을 휘두르며 소멸하는 쪽이고, 다른 한쪽은 그 사명감 앞에 더욱 말을 줄이며 여태 해온 방식을 유지하는 쪽이다. 물론 후자일 경우에만 다음 단계로 진입할 수 있으며, 마침내 사명감으로부터 조금의 여유를 가지게 된다. 자신의 가게 바 안쪽에 서서, 공연을 지켜보며 행복한 미소를 띠고 있는 '황재원'을 보며 했던 생각이다.
이 대화는 2월 중순에 이루어졌다. 하지만 몇 가지 일로 이제서야 기록된다. 몇가지 일 중 일부는 어쩔 도리가 없었고, 몇 가지는 애를 쓰면 해결할 수 있었다. 애를 쓰면 해결되는다는 사실이 이 대화가 묻히지 않게 해줬다. 긴 시간을 기다려준 '황재원'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겨울의 대구를 찾은 건, 지난 1월 ‘김일두’의 <제임스 레코드> 공연이 처음이었고, 이번이 두 번째다. 부산 못지않게 따뜻하다 싶으면서도, 공기의 질감은 내륙의 것이라 그런지 또 다르게 느껴지는데, 겨울의 대구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나
영업 제한 때문에.. 힘들게.. 어떻게든 유지하려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대구가 원래 엄청 춥고, 엄청 덥고, 이랬는데, 지구가 전체적으로 변화하다 보니까, 요즘엔 따뜻한 것 같다. 부산이 더 따뜻하다 해서 갔는데 부산이 더 춥고.. 따뜻하다 해서 얇게 입고 갔는데.. 아무튼 그렇다. 근황이라 하면 영업 제한 때문에 돈 벌 수 있는 타임이 몇 시간 안 돼서, 최대한 유지하려고 노력 중이다. 그 와중에 ‘김일두’ 판이 나와서, 그걸 팔면서 다른 걸 시도할 수 있게 됐다. 공연도 계속 계획하고, 진행하고 있다. 음반 제작도 그렇고. 진짜 힘들 때 ‘김일두’ 판이 도착해서 참 다행이다
부산과 가까운 대구이지만, 이상하게도 여태 방문할 일이 딱히 없었다. 놀러 온 건 두 번 정도가 전부인데, 그때도 와서 먹기만 하고 돌아갔다. 대구가 어떤 도시인지 나는 잘 모른다. 당신은 대구 토박이니까, 대구는 어떤 동네인가
대구는 뭐 심심하고, 재미없는 데지. 그런데 이런 데가 더 살기 좋거든. 아 또 대구하면 그거지. 박정희, 박근혜의 도시, 빨간색의 도시. 근데 우리 세대부터 바뀌고 있어서, 지금은 많이 바뀌고 있는 거 같다. 앞으로 한 20년 뒤면 완전히 바뀌어 있지 않을까. 빨간색 딱지를 뗄 수 있지 않을까. 음.. 그리고 예전엔 대구가 음식도 맛이 없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맵고 짜다고. 나 역시도 다른 도시에 가면 뻘건데 안 맵고, 안 짜서 너무 좋았었다. 그런데 다른 지역에서 자극적인 게 많아지다 보니, 이제는 대구에 맛있는 집이 많다고 놀러들 온다. 뭐 다른 데 있는 사람들은 이게 새로울 수도 있겠다 한다. 먹자 투어로 어린 친구들이 많이 온다. 대구가 뜨고 있다
짜장면을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나. 간짜장, 유니짜장, 일반 짜장 뭘 더 즐기나. 그것 말고도 대구의 식당을 추천해줄 수 있겠나.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상주식당>의 추어탕이었다
내가 동성로에 있으니까, 동성로에 있는, 저번에 ‘김일두’씨 오셨을 때도 모셔갔던 <초가식당>을 추천하겠다. 오징어볶음, 낙지볶음, 돼지 두루치기 같은 거 판다. 돼지 두루치기는 평범한 맛이어서 별로 추천 안 하고, 손님들 오면 데리고 가서 항상 오징어볶음 소짜에 참치찌개 시켜서 먹는다. 세 명이 가든, 네 명이 가든, 항상 소 짜를 시킨다. 왜냐하면 거기가 소 짜나 중 짜나 별 차이가 없다. 소 짜를 시킨 다음에, 소 짜가 딱 나오면 낙지볶음 소 짜를 시킨다. 오징어볶음 먹고, 낙지볶음 먹고, 그러면 뭐 끝나지. 매운 거 못 먹는 사람 있으면 계란찜도 하나 시키고. 가면 또 소주를 한 잔 안 할 수가 없다. 다른 곳은 길 건너 있는 <부산안면옥> 부산에 있다가 대구로 오셔서 하는 식당인데, 거의 100년 됐다. 지금이 4대짼가 그렇다. 여기는 여름에만 장사한다. 그 평양냉면.. 최고다. 만두도 있고, 불고기도 있고, 여러 가지 있는데, 일단 우리 가게랑 가까워서 최고다. 짜장면은.. 내가 간짜장 판데, 시내에서는,. <유신학원> 옆에, <중화반점>이라고 거기 간짜장이 정말 맛있다. 일단 싸고. 현금가 4500원. 이게 가격이 오른 거다
야끼우동으로도 유명한 그 <중화반점>인가?
아니다. 다른 가게다. 근데 야끼우동이랑 중화비빔밥은 대구 어딜 가도 기본 이상을 한다. 다른 지역에서도 하면 다 할 수 있는 메뉴인데 왜 안 하는지는 모르겠다
대구에 오거나, 타지에서 대구 사람들을 봤을 때, 나는 대구 사람들이 여느 지역 사람보다 세련되고, 감각적이라고 느끼곤 했다. 부산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투박함 같은 것도 잘 느껴지지 않았고
옛날에 섬유공장이 많아서 그렇다는 얘기가 있는데.. 잘 모르겠다
알겠다. 구포역에서 무궁화호를 타고 대구역에 도착했는데, 낙동강을 따라, 밀양을 거쳐, 청도에 다다르자 창밖으론 새마을 운동과 관련된 조형물들이 보였고, 그걸 보며 당신이 말한 것처럼 ‘박정희’의 동네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스치는 걸 막을 길이 없더라. 그리고 그 생각이 사라지기도 전에 대구역에 도착했다. 괜히 근현대사의 심장에 진입했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도시 속 개인의 삶과 삶의 과정에서 변해가는 마음은 역사와 밀접하면서도 가끔은 무관하다. 우선 밀접한 부분에 대해 얘기해보자면, 그런 역사를 가진 도시 안에서 산다는 걸 체감할 때가 있나. 아까 잠깐 언급하긴 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자라오면서 주위의 어른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그런 이야기라는 건 ‘박정희’나 군사정권에 대해 옹호하는 이야기, 그런 걸 많이 겪었기 때문에, 그렇구나 하면서 컸는데, 크고 보니 그게 아닌 걸 알게 되는 거지. 중고등학교에서 역사를 배울 때 ‘이거 뭐지?’하는 혼란이 왔다. 성인이 되고, 투표권이 생기고 나서는 x같네 했고. 지금은 많이 바뀌었다. 요즘 젊은 세대는 우리 때와는 또 다르다.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상관없으니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마인드랄까. 대구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바뀌는 거 같다.
그렇다면 이번엔 비교적 무관한 부분에 대해 얘기해보자. 당신이 만들어 가고 있는 <제임스레코드>와 <꼬뮨>은 모두 동성로에 있다. 대구를 안 가본 사람이라 할지라도 대부분 동성로 정도는 들어봤을 텐데, 당신의 동성로 출입은 언제부터 시작됐나
고1 때? 노는 친구들 만나면서 커피숍도 가보고, 담배도 피고, 이러면서 친구들 따라 동성로에 나오게 됐다. 그 당시에는 고등학생인 거 다 알면서도 받아주는 술집이 많았다. 그런 데 가서 술 마시고, 당구 치고, 만화방 가고 그랬지. 나는 주로 음반 가게에 갔었는데, 돈 생기면 무조건 앨범만 샀다. 지금은 다 없어진 <대구음향사>나, <타워레코드>, 지금도 남아 있는 <팍스뮤직>. <팍스뮤직>은 중고 상품 가게로 시작해서 지금은 새 상품도 판다
동성로에 나와 음반 산 얘기는 조금 있다 더 해보자. 동성로는 굉장히 큰 번화가처럼 느껴지면서도, 한 편으론 구도심과 신도심이 혼재돼 있어 그런지, 노쇠함과 활기가 동시에 느껴지기도 하더라. 동성로 중에서도 당신이 지금보다 어릴 때 다녔던 구역과 요즘 자주 다니는 구역은 다른가? 동성로에서 특히 좋아하는 구역도 있을까
내가 나오기 시작했을 때부터 기점이 바뀌었는데, 원래는 교동이, 대구역에서 다리 건너 내려오면 있는 그쪽이 번화가였다. 짜가도 팔고, 불법 수입품도 파는, 자갈치시장처럼, 그런 교동시장과 동아백화점도 있는 교동이 중심부였지. 그런데 내가 17살 때 시내 나오기 시작할 때부터는 상권이 지금 있는 이쪽, 길 건너편으로 넘어왔다. 교동은 오히려 죽어버리고. 그런데 지금은 워낙 좁았던 시내가 점점 더 커져서 주택가였던 삼덕동까지 다 잡아먹었다. 남산동 쪽으로도 가고, 또다시 교동, 그리고 북성로 공구 골목까지. 점점점 넓혀지고 있다. 자영업자가 그만큼 많아졌단 뜻이기도 하지
상권이 넓어진 건 그만큼 활발해진 거니까 좋게도 볼 수 있지만, 방금 얘기한 공구골목이나 서울 을지로의 인쇄소 골목, 문래동의 철공소 골목 등, 현재 소위 힙플레이스라 불리는 곳에서 예전부터 터전을 잡고 살았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불편함이 확 끼어든다. 기존의 풍경이 없어지는 것도 문제지만, 그 풍경을 이용하고, 착취한다는 게 더 문제라는 생각이다. 손님으로 동성로를 찾은 시간도 길 테고, 동성로에서 장사한 것도 이제 꽤 되었는데, 이런 변화를 훑어보면 어떤가
과거에 봤던 풍경이 없어지니까, 그런 게 아쉽지. 새롭게 꾸려나가는 걸 보면 대단하기도 하다. 그런데 한편으론 준비를 잘해서, 오랫동안 할 수 있게 하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지, 요즘 생기는 가게들은 유행 타듯 슥슥 바뀐다. 잘 돼서 바꾸는 사람도 있고, 잘 안돼서 나가는 사람도 있는데, 뭐 둘 다 아쉽지. 어쨌든 돈 버는 거기 때문에, 유행 맞춰서 계속 바꾸는 사람들도 대단하긴 하지만, 그래도 좀 같은 얼굴을 오래, 익숙해지게 보면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한다. 지금 동성로는 너무 커져서, 동성로라 하기도 그렇고, 동성로가 아니라고 하기에도 그렇고, 애매하다. 뭐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쪽이라면 남산동, 서성로 위로. 현대백화점 옆쪽으로 가면 이상화 고택부터 해서 계산성당, 제일 교회.. 그쪽 길이 정말 예쁘다. 근데 제일교회 골목도 이제 다 재개발돼서.. 볼 날이..며칠 안 남았다. 그리고 수성교 옆에 삼덕동 골목을 정말 좋아했다. 거기는 좀 대구 아닌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거기도 이미 젠트리피케이션이 한번 일어났고, 많은 가게가 들어왔다가 나가고 했다. 그러면서 예전의 그 모습은 없어졌고
대구 아닌 거 같은 느낌? 그건 뭔가
그 길만의 특이한 분위기가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음침하다고 할 수도 있고. 고요하다. 어느 동네든 불 꺼지고 밤 되면 조용하겠지만, 음.. 평소에 알던 동네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리고 우리 가게가 있는 이 길도 내가 좋아하는 골목이었다. 원래는 이 골목 통로가 두세 사람이 지나갈 만큼 좁았다. 밤엔 컴컴하고, 낮에도 여기 길이 있나 할 정도로 좁았다. 근데 옆에 건물을 새로 올리면서 길이 점점 커졌고, 차가 지나다닐 정도로 넓어진 거지. 내가 가게를 차릴 때, 내가 좋아하는 장소에서 하고 싶어서 이쪽이나 삼덕동을 봤다. 동성로가 아니고는 대명동, 계대 쪽에.. 추억이 많다. 좋아하는 장소를 계속 얘기하다 보니까, 안 좋아하는 장소가 없는 것 같다.
아까 하려다 잠깐 미뤄둔 얘기를 해보자. 음악을 찾으러 동성로에 갈 때는 어디로 가곤 했나. 그리고 음악을 언제부터 좋아한 건가. 음악을 정말 엄청나게 좋아한다고 느껴지는데, 물론 한국 사람 아무나 붙잡고 음악 좋아하냐고 물으면 대부분이 그렇다고 답하겠지만, 당신은 정말 음악을 엄청나게 좋아한다는 냄새가 풀풀 풍긴다
그 당시 대구에서 제일 큰 곳은 <대구음향사>였다. 하지만 제일 먼저 파산했지. MP3가 등장하면서. 내가 군대 가기 전부터 위태로웠는데, <타워레코드>가 세련되게 자리 잡고, 도매업 소매업을 같이 하는 <TCR>이 가격으로 후려치고 하니까, 대구 중심부에 1층, 2층으로 넓게 매장을 운영하고 있던 <대구음향사>가 문을 닫았지. 고등학교 때 시내 오기 시작하면서 주로 <TCR>을 갔다. 돈이 없으니까. 중고를 팔던 <팍스뮤직>도 있었는데, 거기보다 더 작은 곳을 다녔다. 지하상가에도 있고 지금 클럽 골목에도 있었던. 그때는 레코드 가게가 정말 많았다. 교동 쪽에도 몇 개 있었고
음반이 정말 잘 팔리던 시기였나 보다. 누가 제일 많이 팔렸나
나 고등학교 때라 하면 ‘듀스’나 ‘DJ DOC’, ‘마이클 잭슨’, ‘머라이어 캐리’ 등등이 잘 팔렸지. 내가 군대 가기 전에 레코드 가게에서 일했다. 그때가 마지막 전성기였지. ‘이정현’, ‘조성모’가 잘 나갔고, ’동반신기‘가 데뷔할 때 내가 군대로 갔다. 주말 같을 땐 테이프, CD가 한 가수당 100장 200장은 그냥 나갈 때다. 한 장만 사는 사람도 있지만, 보통 여러 뮤지션 앨범을 다 같이 샀다. 나도 그랬었고. 레코드 가게에서 하루에 8~9 시간씩, 주 4 일인가 5 일인가 일했다. 월급이 많으면 30만 원 적으면 20만 원 그랬는데, 그럼 그걸로 다 CD 샀다. 한국 CD가 만 이천 원 팝이 만 육천 원 정도 할 때다. 월급이 엄청 짰지. 점장님은 안 깎아줬는데, 팀장이나 다른 직원들은 직원가로 계산해주고 했다. 30% 정도. 감안해서 사는 거지. 일할 때 목록을 다 뽑아 놓는다. 내가 살 건 좀 안 보이는데 놓아두고 그랬지. 아예 빼놓을 순 없으니까. 근데 레코드 가게에 일하는 사람들이라고 다 매니아가 아니더라. 기대랑 달라서 많이 실망했다. ’이것도 모르노‘ 하면서
음악을 좋아한 건 언제부턴가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부터 해서 라디오만 끼고 놀았다. 카세트 하나 들어가는 골드스타 라디오. 라디오에 좋은 노래 나오면 테이프에 녹음하고 하면서 들었지. 형누나들이 그렇게 했으니까 자연스럽게 따라 하게 됐다
앞서 말한 것처럼 당신은 음악을 정말 엄청나게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렇게 된 계기랄 게 있을까
어릴 때부터 라디오 끼고 놀았던 게, 아마 성향이 맞았던 것 같다. 그리고 원래 엄청나게 좋아하는 사람은 맞는데, 지금은 음악을 좋아한다기보단 음반에 집착하는 것 같다. CD 살 땐 CD란 매체에 집착했고, LP 사기 시작하면서 지금은 LP에 집착한다. 그런데 사놓고 많이 안 듣는 앨범이 많아지니까, 이렇게 사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다. 계속 사는 이유는 지금 안 사놓으면 나중에 LP로 못 들으니까. 이를테면 그런 거다. 예전에 많이 들었던 앨범이라도 LP 자켓 보이면 생각나서 사고, 새로 나온 음악이 궁금하면 그것도 사고. 그런 식이지. 나는 한 음반에 대해 들어봤다고 하려면 모든 트랙을 10번은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시간 있을 때 같은 음악을 계속 듣는다. 지금은 그렇게 못 들은 음반이 많아져서 자제하려고 한다
주어지는 음악을 듣다가 직접 찾아 나서 음악을 듣게 된 순간이 있나. 나에게 영화를 예로 들면 나는 ‘왕가위’의 영화를 보고 난 뒤부터 그랬던 거 같다
자연스럽게 됐다. 고정적으로 <김기덕의 두시의 데이트>를 많이 들으면서 팝이나 락을 넓게 듣기 시작했지. 서울에 사촌 집 놀러 가면 용돈을 주지 않나. 그럼 그걸 엄마가 뺏어가는데, 엄마가 뺏어가기 전에 서울역 레코드 샵에 가서 형누나 선물 줄 테이프 사자고 하며 내 것도 사고 그랬다. 내가 돈 주고 처음 산 앨범이 ‘윤상’ 2집이다. 아직도 기억난다. 항상 형누나가 가지고 있던 걸 듣다가 내 꺼가 생기니까. 잊을 수가 없지. 형누나들 꺼 몰래 듣다가 많이 혼났다. ‘돌려 듣지 말라 했제!’하면서.. 늘어난다고.. 그래도 난 좋은 노래 있으면 계속 돌려 듣고.. LP는 초등학생이 다루기 힘들어 만지지도 않았지
그 당시에는 어떻게 음악을 찾았나. 지금이야 음악을 소개하는 채널도 워낙 다양하고, SNS를 통해서 해외 아티스트의 소식을 접하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그 당시는 인터넷도 아주 원활하진 않았을 테니까
라디오밖에 없었지. 아침부터 새벽까지 좋은 곡 틀어주는 프로그램은 항상 존재했다. 세대도 바뀌고, 시대도 바뀌어서, 요즘 친구들은 정보가 정말 많다. 이런 음악 안 좋아할 거 같은데 이런 음악을 듣지? 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 우리 때는 한쪽으로 빠졌다. 요즘 보면 신기하지. 유튜브가 또 ‘너의 취향을 내가 알아서 찾아 주겠어!’ 하기도 하니까
이제 당신의 공간들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최근에 맡아서 운영하게 된 <꼬뮨>부터. 1995년부터 지금의 자리를 지켰다고 들었는데, 당신이 공연을 보러 다니고 할 때도 알고 있었던 곳인가, <꼬뮨>에 대한 소개를 부탁한다
내가 한창 공연 보러 다니고 할 때도 있긴 했지만, 당시엔 <꼬뮨>에서 공연을 본 적은 없다. <꼬뮨>이 1995년부터 있었지만, 리뉴얼을 한 번 거쳐서 지금의 시스템이 갖춰졌다. 내가 참여하면서 한 번 더 업그레이드했고. 지금은 기존 사장님이 조언만 해주시고, 운영은 전적으로 내가 하고 있다. 프로그램 짜는 거부터 술, 메뉴까지. 사장님도 그걸 편해하신다. 사장님은 원래 <꼬뮨>을 카페로 운영하셨는데, 망했다. 그 이후에 망하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걸 하자며 라이브 펍으로 바뀌었다. 그러다 2000년 초반에 어떤 일이 있었냐면, 우리나라에서 외국인 강사들이 엄청 늘기 시작했다. 대구도 큰 도시 아니겠나. 그 강사들이 놀 곳이 필요한 거지. 자기들이 좋아하는 음악 들으면서 놀. <꼬뮨>이 터져나갔다. 이건 뭐 당시 부산, 서울, 대구 다 똑같았다. 외국인들이 놀 곳이 없었다. 클럽이 있긴 했지만, 자기들이 좋아하는 락 음악, 팝 음악 들을 곳이 없었는데, <꼬뮨>에 갔더니 악기도 있고 그런 거다. 전국적으로 그런 가게들의 부흥기였다. 그 당시 <꼬뮨>에 가면 엄청난 인파로 인해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런 <꼬뮨>을 당신이 맡게 된 건 어떤 과정이었나
원래 <제임스레코드>의 일부를 공연장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공사를 하다 보니 민원도 들어올 거 같고, 여기선 안 되겠더라. 그래서 솔로 공연만 하고 그랬다. 답답한 마음에 <꼬뮨> 사장님과 술 마실 때마다 <꼬뮨>처럼 밴드공연도 하고 싶다고 찡찡댔지. 그러다 코로나 터지고, 사장님이 <꼬뮨> 문도 잘 안 열고, 또 95년부터 한자리에서 하셨으니 얼마나 지쳤겠나. 그때 나한테 얘기하더라. 해볼 생각 있냐고. 나는 생각해보고 말씀드리겠다 하면서도 속으로는 네!! 네!! 네!! 했지. 맡으면서도 코로나 때문에 걱정은 했다. 그런 걱정을 하면서도 라이브 클럽은 꼭 하고 싶었던 거니까, 내가 이거 안 하고 있다가 코로나 걸려서 죽으면 분명 후회할 걸 아니까, 그냥 한다고 그랬다. 시도했다는 자체가 좋다
공간이 정말 멋지다. 공연할 수 있는 무대는 내부 공간의 크기를 생각하면 굉장히 넓은 편이고, 동시에 객석의 위치도 무대에 집중할 수 있게 배치돼 있다. 전체적인 빨간 톤은 저항적인 느낌을 주는 동시에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하는데, 이런 인테리어는 기존 <꼬뮨>의 모습인가. 인테리어가 아니어도, 당신이 <꼬뮨>을 맡고 나서 특별히 신경 쓴 부분엔 어떤 게 있나
내가 바꾼 건 무대 위치 말고는 거의 없다. 화장실, 주방은 새로 고치고, 계단 내려오는 벽 페인트칠 정도 했다. 무대에 쏘는 조명을 좀 좋은 걸로 하고 싶었는데 너무 비싸길래 포기했다. 기존 인테리어는 <꼬뮨> 사장님이 웨스턴 영화를 좋아하셔서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에 나오는 바처럼 꾸미고 싶으셔서 이렇게 하셨다. 근데 돈이 너무 많이 드니까, 다 못해서 아쉬운 점이 많다고 하시더라
인테리어가 아니라면, 운영이나 방향성 등에 있어 신경 쓴 게 있나
바꾸고 싶은 건 다 바꿨다. 메뉴도 늘리고, 악기도 바꾸고. 시내에 라이브 할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어서 <꼬뮨>으로 라이브의 묘미를 알리고 싶다. 사장님은 계속 무료 공연을 해오셨다. 근데 난 유료 공연으로 바꿨다. 타지역이나 로컬 뮤지션들에게 조금이나마 개런티를 챙겨주고 싶은 거다.
<꼬뮨>은 대구에서 활동하는 뮤지션과 밴드의 연습 공간이기도 한 것 같더라. 그들에겐 아지트처럼 드나들 수 있는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게 분명 큰 힘이 될 거다. 연습하러 온 그들과 마주치기도 하고,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게 될 텐데, 주로 어떤 이야기들이 오가나
공연 때 빼고는 일하는 곳이 <제임스레코드>니 거기서 대화를 많이 한다. 뮤지션들과는 공연기획이나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공연을 많이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공연은 같이 만드는 거니까, 공연을 두고 기획하는 나와 뮤지션 간의 입장이 조금씩 다른 경우가 생긴다. 그런 걸 잘 맞춰 나가려고 하는 거지
그들은 더 많은 기회가 있는 서울로 갈 유혹에 거의 매일 시달릴 게 분명한데, 그들에게 대구에서 같이 해보자고 말하기도, 그렇다고 기회를 찾아 서울로 가라고 말하기도 어려울 거 같다. 그들을 보면 어떤 마음이 드나
서울로 간다는 게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라기보단, 더 많은 활동을 하기 위해서지 않나. 서울에서 웬만큼 유명한 뮤지션도 다 직장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고. 또 서울에 가서 서울 뮤지션들 이야기를 들어오면 그들 역시도 공연할 곳이 없다는 얘기를 한다. 그 많은 클럽이 있는데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면서. 그들에게 어떤 마음이 든다기보단, 내가 공연을 기획하고, 준비하는 입장이니, 공연을 잡으면 엄청 노력한다. 홍보를 많이 한다는 얘기다. 요즘 스타일로 광고한다기 보다는 일 대 일로. 손님들한테. 이번 주 공연 있는데, 한번 들어보라고 하면서. 라이브로 보면 더 죽인다 하면서. 강매, 애원, 뭐 다 한다. 나는 이런 걸 뮤지션도 함께 해주면 좋겠다. 함께 노력해야 씬이라는 게 생긴다
<제임스레코드> 얘기로 넘어가면서, <제임스레코드>에서도 공연은 진행하니까, 공연을 기획할 때 <제임스레코드>와 <꼬뮨> 중 어디서 할지 선택해야 할 텐데, 어떤 기준이 작용하나
우선 <제임스레코드>와 <꼬뮨> 공연은 완전히 별개다. <꼬뮨>은 밴드 공연 위주고, <제임스레코드>는 비교적 소규모 공연을 한다. 우리가 기획하는 공연은 입장료를 모두 뮤지션에게 지불한다. 그래서 티켓값을 최대한 저렴하게 해 많은 사람을 공연에 초대하려고 노력한다. 물론 누군가에겐 저렴한 가격이 아니겠지만
<제임스레코드>는 레코드샵인가? 펍인가? 공연장인가? 처음 이 공간을 구상할 때, 어떻게 시작된 건가. 대화를 준비하며 정보를 찾아보니 어떤 게시판에선 <제임스레코드>를 ‘인싸들 가는 LP바’라고 소개하던데, 어떤가. 대구의 인싸들이 찾는 공간, 맞나
뭐 뮤직 펍이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그런 평가는 아주 좋다. 사실 이런 대화를 하기 전에 우리 가게에 와 술도 한잔하고, 어떤 음악이 나오는 지도 듣고, 분위기가 어떻게 흐르는지, 그런 것들을 느껴보고 이런 이야기를 하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긴 하다. 나는 우리 가게가 대구 인싸들이 오는 가게가 되길 원했다. 인디 음악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고. 실제로 그렇게 됐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제임스레코드>가 어떻게 시작됐는지는 아직 얘기 안 해줬다
원래는 디자인, 홍보, 마케팅 이런 쪽에서 일했다. 근데 뭐 돈도 안 되고, 야근해도 제대로 안 챙겨주고, 사람대접을 안 해주니까, 다닌 회사 중에 괜찮다고 말 할 만한 곳이 한 두 군데밖에 없다. 언젠가는 그만두고 이 일을 시작할 거란 생각은 했다. 근데 이 일을 하기 싫어서 최대한 미뤘지. 그러다 서른여덟에 시작한 거다. 여기 묶이면 내 시간이 없는 걸 알았으니까. 최대한 미뤘다. 이 일은 내가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잘하는 일을 해야 입에 풀칠이라도 하지. 그래서 시작했다. 오픈하기 3~4년 전부터 인테리어나 스타일을 구상했고
<제임스레코드>를 이끌어온 지난 6년을 정리해보고, 처음 <제임스레코드>를 열었을 때를 생각해보면 어떤가. 잘하고 있나
잘 되고 있지. 중간중간에 고비도 있었고, 아쉬운 점도 있지만, 내가 완벽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완벽해지려고 하지도 않는다. 계속 노력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잘 해내 갈 수 있다는 확고한 마음은 있다. 처음부터 제일 중요했던 건 손님이 혼자 오더라도 맘 편히 앉아서 멍때릴 수 있는 공간이 되면 좋겠다는 거였다. 근데 지금은 손님이 너무 많아져서.. 그런 사람들이 자리가 없어 돌아가곤 하는데.. 그 손님들이 안 오니까 또 아쉽고.. 뭐 이러나저러나 100% 만족시킬 순 없으니까,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다 생각한다. 그분들에 대한 고마움은 항상 있지. 그분들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
신경 쓸 게 정말 많겠다. 음악도 잘 틀어야 하고, 음식과 술도 잘 내야하고, 당연히 매출도 신경 써야 한다
<제임스레코드>가 어떻게 하면 잘 될 수 있을지 매일 연구한다. 우리 가게에서 제일 중요한 건 친절과 청결이다. 음악은 좀 아쉬워도 된다. 근데 친절과 청결을 기본으로 해야 손님들이 온다. 각종 술집에서 많이 일해봤지만, 딱 정해져 있다. 이 공간이, 이 사람이 매력이 있는가는 나 혼자 만들어가는 게 아니라 같이 일하는 친구들과 손님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분위기를 찾기까지 3년 걸렸다. 계속 노력한다. <제임스레코드>하면서 이런 음악을 들어본 적 없고, 이런 공연을 본 적 없는 사람이 경험할 수 있게끔 하는 게 목표였기 때문에, 지금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같이 일하는 친구들한테도 계속 말한다. 장사는 다 똑같다. 깨끗하고, 친절하고, 손님 좀 없었다고 노력 안 하지 말고. 아무튼 뭐 계속 노력 중이다
대화의 막바지인데, ‘김일두’의 두 바이닐, <난 어쩔 수 없는 천재에요>와 <새 계 절>의 작업 과정도 듣고 싶다. 1월 공연 때 ‘김일두’가 언급하기론 부산으로 직접 찾아갔다고 하던데, 막상 해보면 간단한 일이지만, 또 마음을 내서 움직인다는 건 결코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분명히 누군가는 했을 법한 앨범들인데, 아무도 안 하니까 답답해서 한 거지. 만나기 전까진 그런 생각했다. 예술가들이란 자기 곤조가 있으니까, 거절당할까 봐 두려움은 있었다. 그래도 그전에 우리 가게에서 여러 번 공연했던 적이 있고, 그 공연을 김일두 씨가 다 마음에 들어 했다. 하지만 판 만드는 건 또 다른 이야기라 걱정이 들긴 하더라. 다행히 김일두 씨가 흔쾌히 동의해서 진행하게 됐다. 같이 가서 남포동 한번 둘러보고, 집에 가서 술 한 잔 하고. 기분 좋아하시더라고. 그렇게 만들게 됐지
‘김일두’ 외에도 LP로 발매하고 싶은 음악이 있나? 대구에서 작업하는 아티스트들의 음악도 LP로 소개하고 싶은 욕심이 있을 것만 같은데
지금 이미 제작 중인 LP가 많다. 대구 출신 뮤지션도 있고 타지역도 있다. 동네 뮤지션들이라 아직 유명하지는 않다.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밴드고, 뮤지션이면 제작하려 한다. 내 욕심이지. 근데 나는 LP를 많이 만들고 싶진 않다. 돈이 너무 많이 드니까.. 나도 돈 모으고 싶다. 근데 남들이 안 하니까 답답해서 한다. 지금 진행 중인 뮤지션만 해도 5~7장 되는데, 그런 욕심이 생기더라. 이게 유행처럼 되면 좋겠다는. 자기가 좋아하는 뮤지션 LP를 취미로 만드는 그런 유행. 그럼 내가 만들어야할 게 줄어들 테니까. LP 만드는 건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려고 한다. <제임스레코드>만 해도 신경 쓸 게 많은데, 난 내 능력을 알기 때문에, 지금도 이 많은 일을 동시에 하는 게 너무 힘들다.
<제임스레코드>부터 <꼬뮨>까지, 언뜻 보기에 당신은 조금씩 당신의 꿈을 완성해내고, 또 새로운 꿈을 꾸는 것처럼 느껴진다. 내가 당신에게 우리가 무슨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 당신에게 물었을 때 당신은 ‘꿈, 행복, 의무’를 얘기했고, 이 세 가지를 읽는데 각각 읽히는 게 아니라 한 번에 연결돼 읽히더라. 이 세 개의 단어를 던진 건 어떤 맥락이었나
꿈을 이룬다고 해서 무조건 행복한 건 아니지만, 꿈에 다가설 때마다 행복이 스쳐 지나가는 거 같긴 하다. 그리고 이루는 꿈들은 남들을 위한 의무이기도 한듯하다. 의도는 아니었지만, 내가 그냥 좋아서 한 일이, 내가 했던 행위들이, 많은 사람에게 뒷받침되고 있다고 하더라. 내가 하는 일을 좀 더 진지하고 책임감 있게 임하는 게 의무기도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무엇보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나 혼자가 아니고, 마음 맞는 친구들이 함께해서, 할 수 있었던 거다
당신을 잘 모르지만, 분명한 건, 지난 ‘김일두’ 공연 때, 바 안쪽에 자리 잡고 서 공연을 지켜보는 당신은 행복해 보였다. 당신의 꿈으로 만든 공간에서, 당신이 사랑하는 음악이 울릴 때, 당신은 행복했고, 동시에 아마 다음 꿈을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다음 꿈은 어떤 풍경인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정착시키는 거, 정착시킨다는 건 뮤지션과 관객이 꾸준히 있을 수 있도록 만들어 낸다는 거다. 그게 돼야 내가 꿈을 이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거다.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지만, 공을 들여서 운영하면 뮤지션도 연락해 오고, 관객도 많이 찾아 주시겠지. 그렇게 정착하면 자연스럽게 흘러가겠지